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14화 (214/354)

214. 당신이 꼭 필요해요

“나이스 샷!”

이 코스는 1번 홀부터 파 5홀로 시작된다.

롱 홀이지만 516야드라서 필상의 장타를 기대하는 팬들의 격려가 뜨거웠다. 그러나 아너로 나선 필상은 3번 우드로 아주 가볍고 깔끔한 스윙을 구사했다.

아쉽지만 첫 티샷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데 공감했고 328야드, 페어웨이 정중앙에 떨어진 타구에 찬사를 보냈다.

흥미로운 것은 맞대결을 펼치는 마쓰야마의 티샷이었다. 과감한 스윙을 구사하는 그의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는 308야드를 기록해 이 부문 25위에 랭크되어 있다.

고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330야드 이상을 가볍게 보낼 수 있기에 드라이브를 들고 당당히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가는 그에게 모두의 시선이 확 쏠렸다.

“페어웨이 적중률이 61.86%로 그 부문 96위에요.”

“어허! 정확히도 파악하고 있네.”

“맞대결을 펼친다기에 어제 살펴봤는데, 특이한 게 하나 더 있더라고요.”

“뭔데?”

“보통 마쓰야마는 과감한 공략을 한다고 알려져 있잖아요. 그런데, 이글이 거의 없더라고요. 이번 시즌에 겨우 4개로 그 부문 가장 밑바닥인 189위더라고요.”

“워낙 자세가 진지하기 때문에 도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굉장히 안전한 공략만 고집한다는 거로군!”

“네. 그래서 그가 지금 어떤 샷을 할지 짐작이 돼요.”

“안전 모드겠군!”

아니나 다를까 마쓰야먀는 정말 안전한 티샷을 구사했다. 거의 공만 정확히 맞춰 페어웨이를 지키면 그만이라는 느낌이 오는 스리쿼터 스윙에 할 말이 없었다.

비거리는 298야드, 물론 남은 거리는 240야드 정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2온이 가능했다. 그런데 롱 아이언을 잡은 그는 이번에도 안전한 선택을 했다.

우측으로 15도가량 휜 홀의 굴곡을 따라 페이드 샷을 구사한 것까지는 아주 좋았는데, 그린에 못 미친 페어웨이 끝자락까지만 타구를 보냈다.

“7번 아이언이었나?”

“그런가 봐요. 6번인 것 같았는데…….”

동반자의 클럽이 뭔지 확인하는 것은 비매너다.

하지만 프로들은 대충 길이만 봐도 알 수 있다. 3, 4번 아이언이 아니었기에 굉장히 강한 임팩트를 만들 것이라고 예측했으나 결국 컨트롤 샷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린 앞 좌우에 도사리고 있는 자그마한 가드 벙커에 자주 빠지기 때문에 사전에 아예 그걸 방지하고 3온 1퍼팅 작전을 구사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다수 선수들이 2온에 도전하는 첫 홀에서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것이 과연 옳은지는 결과가 말해 줄 뿐이다.

“직선거리는 181야드밖에 되지 않아요.”

“나무를 넘기라는 건가?”

“어차피 그럴 거면서. 이거면 되죠?”

미사키는 8번 아이언을 내밀었다.

그녀의 말처럼 필상은 높은 탄도의 샷을 구사할 생각이었다. 다만 너무도 당연하게 말해 한 번 튕겨 본 것 뿐.

하지만 보통 선수들은 나무를 넘기는 것보다는 페이드 샷을 선호한다. 의외로 이런 상황에서 나무가 잘 맞기 때문이다.

필상이 나무를 가로지르는 에이밍을 가리키자 다시 팬들의 흥분이 고조되었다.

-와우! 고 탄도의 샷을 구사 하려는 것 같습니다.

-미스터 퍼펙트의 기량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죠.

-아! 그렇게 보시는군요. 터너.

그렇게 언급한 프랭크의 시선은 조용히 입을 닫고 있는 챔블리에게로 향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눈빛이다.

이번 대회에 특별 초청된 해설자 터너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괜히 반발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었다. 그동안 프랭크와 환상의 호흡을 맞춰 왔지만 최근 필상과 관련해 타 언론과 인터뷰를 한 것이 적절치 않았다는 내부 분석이 나왔다.

또한 지나치게 편파적이며 고압적이라는 팬들의 의견도 적지 않아 해설자 교체까지 언급되는 상황이 심란케 했다.

일단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해 3인 중계 체제로 가는 중재안이 나왔지만 기꺼울 리 없다. 그렇다고 박차고 나가기에는 누구나 탐내는 좋은 자리라는 게 마음에 걸릴 뿐.

-8번보다는 9번 아이언이 더 좋지 않나 싶습니다. 워낙 거리 조절에 탁월하기 때문에 나뭇가지라도 확실히 피하려면 좀 더 로프트가 큰 아이언이 좋겠지요.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미스터 퍼펙트는 분명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탄도를 만들어 낼 겁니다. 그래서 거리를 좀 더 보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저는 환상적인 수직 낙하 타구를 기대해 봅니다.

터너는 뜻밖에도 그마저도 반박하는 해설을 보탰다.

작정한 게 아닌가 싶은데, 여론에 불리한 챔블리를 대신해 NBC 골프 중계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싶은 욕망이 반영된 듯 보였다.

그런데 프랭크가 적극 호응하면서 챔블리는 의문의 1패를 당하는 상황으로 몰렸다.

-아! 백스핀을 먹일 수도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가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보여 준 그의 환상적인 아이언 샷을 우리 모두 감상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돌아온 것입니다. 하하하!

의욕도 넘쳤지만 말도 번지르르하게 잘했다.

게다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필상을 굉장히 옹호하는 발언을 이어 갔는데, 그게 대세라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쉬익!

터너의 바람잡이에 시청자들은 주목했다.

그리고 필상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아주 멋진 샷으로 보답했다. 까마득하게 솟아오른 타구는 애당초 나뭇가지와는 상관도 없는 궤적을 따라 이번에도 핀을 지나쳤다.

그러나 그린 후면에 떨어진 타구는 또다시 개 끌리듯 쭉 빨려 와 홀컵에 더 바싹 붙었다.

-하하하.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정말 붙었죠?

-2.4야드라면 첫 홀부터 이글을 잡는 건가요?

-자신이 우승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만방에 알리는 적극적인 홍보가 아닌가 싶습니다.

-터너. 이제 겨우 1번 홀을 플레이하고 있는데, 너무 멀리 나가는 거 아닙니까?

-물론 그렇죠, 챔블리. 하지만 제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팬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팬들을 즐겁게 하는 멘트라는 걸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하하하!

챔블리의 정확한 지적이었으나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잘 빠져나가는 터너의 대응에 그는 그저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이런 사달이 벌어진 배경은 단 하나였다. 필상에 대한 입장, 프랭크와 반대편에 선 자신의 패배가 확정지어진다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기가 막힌 그 타이밍에 프랭크가 다시 불을 지폈다.

-저도 이런 분위기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어디 터너 위원의 생각뿐인가요? 세계적인 도박사들도 미스터 퍼펙트를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 대회가 끝나면 누가 진정한 골프 황제인지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은 더 이상 종지부를 찍을 것 같습니다. 설사 미스터 퍼펙트가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그가 이룬 눈부신 위업은 모두의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거의 못을 박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빙긋이 웃는 프랭크와는 달리 안면이 굳어진 챔블리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분명 과도하지만 거기에 태클을 걸면 옐로카드가 아닌 레드카드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디 좀 볼까?”

“짓궂게 왜 그러세요.”

“얼마나 강한 정신력을 지녔는지 나타날 테니까.”

충분히 흔들릴 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마쓰야마는 굿 샷을 부르기에도, 실수를 했다고 치부하기에도 애매한 거리에 올려놨다.

4야드. 그가 45야드 칩샷을 했다는 것과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30인에 포함된 것을 고려하면 절대 좋은 결과라고는 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극렬한 반응을 보이는 일부 팬, 어김없이 일본인이거나 관련된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뽀디! 뽀디!”

필상이 보기에 마쓰야마의 퍼팅 스트로크는 좋지 못했다.

하지만 공이 떠나는 순간 터진 일본 팬들의 응원 소리는 타인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보통 일본인들이 영어에 약하다는 것은 기지의 사실이지만 갤러리로 찾을 만큼 강한 열성을 지녔다면 이런 상황에서 통상 ‘인 더 홀’이나 ‘홀 인’을 외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영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발음하는 습관이 미국 본토에서 터져 나오자 그 또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명장면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끝은 탄식으로 맺어졌다.

“우우우우!”

공이 라이를 먹지 않고 홀컵 옆을 그냥 지나갔다.

마쓰야마나 그의 팬들은 경사가 먹지 않은 것에 아쉬움을 토로하지만 필상은 애당초 라이를 잘못 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자리를 타고 들어갈 수도 있었으나 클럽페이스가 열려 들어가면 더 이상한 퍼팅이라고 판단했다.

3온으로 잘라 가고도 버디를 놓친다면 그에게 닥칠 오늘 하루는 그다지 화창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라이를 확정한 필상은 침착하게 이글을 완성했다. 팬들은 난리가 아니었지만 필상은 미사키와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것으로 들뜬 감정을 모두 추슬렀다.

-정말 대단한 선수입니다. 전 지금도 가끔 그의 지난 경기 영상을 다시 돌려보곤 하는데, 그는 인간이 아닙니다.

-하하하. 외계인이라도 된다는 건가요?

-그만큼 출중하고 완벽하다는 겁니다. 도대체 부족한 부분이 없어요. 티샷, 아이언, 어프로치, 퍼팅, 대체 그의 약점은 뭔가요?

-가끔 보이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컨디션 난조 아닐까요?

-아! 그것도 약점이라면 약점일 수 있겠군요. 하지만 가만히 따져 보면 그가 경기를 포기했던 경우는 단 한 번밖에 없습니다. 당시 상황이 워낙 강렬해서 그렇지, 다른 선수들도 그 정도 기권은 하거든요.

-특히나 최정상급 선수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죠?

-그렇습니다. 자신의 위상을 구길 상황이 되면 깨끗하게 포기합니다. 타이거나 미켈슨, 매킬로이 같은 최고의 선수들이 오히려 더 자주 그러죠. 그런데 유독 미스터 퍼펙트만 그걸 부각시키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터너는 한술 더 떴다.

단지 필상을 최고의 선수라고 추켜세우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항간에 떠도는 편파적인 견해에 대해 반박했다.

다소 과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모든 것은 결과가 증명했다. 동기간, 아니 현대 골프 역사를 통틀어 그 누구도 필상이 이룬 위업에 견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찬사가 쏟아지는 가운데 필상은 착실히 타수를 줄여 나갔다. 크게 무리하지 않는데도 전반에 5타를 줄였고 후반에도 3타를 줄이며 다시 -8 단독 선두에 올라섰다.

파 70 코스였기 때문에 62타라는 숫자가 더욱 돋보였다.

“수고했어요. 오빠.”

“응. 다 좋은데 일단 호텔로 가자.”

“샤워도 안 하고요?”

“가서 하면 되지.”

모든 것이 순조롭게 보였으나 실은 컨디션이 급속히 떨어지는 중이었다. 때문에 만사를 제켜 두고 모모코의 도움이 필요했다.

호텔로 직행한 필상은 즉시 모모코의 도움을 받으며 토납에 정진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위험한 고비는 다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던 것이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질질 끌려 다녀야 하지?’

겉으로 보기엔 더없이 좋았으나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부작용은 그 주기가 점점 더 짧아지고 있었다.

또한 증상도 훨씬 강력해 그날 필상은 거의 사투를 벌여야 했다. 곁을 지키는 모모코도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새벽을 맞이했다.

불안한 눈빛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필상이 토납 내내 진땀을 계속 흘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역한 냄새를 풍기는 그 땀을 닦아 주느라 그녀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잠시 토납을 멈추고 시간을 확인한 필상은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가 왔음을 직감했다.

“모모코. 애를 썼지만 난 지금 정상 컨디션이 아니야.”

“그럼 여기에서 그만 접어요.”

“그래도 될까?”

“물론이죠. 이 대회도 중요하지만 저와 우리 가족에게는 당신이 꼭 필요해요.”

“흐음…….”

포기하기 싫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최소한의 여력을 만들고자 노력했으나 이번만큼은 그마저도 되지 않았다.

물론 무리해서 출전을 강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필드에 나서면 도중에 포기할 수는 없다.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심각한 문제는 이번에 쓰러지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는 것이었다.

“일단 시간이 조금 더 있으니까 노력해 볼게.”

필상은 남은 시간을 통해 마지막 시도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품을 파고든 모모코는 고개를 저었다. 습기가 가득 찬 그녀의 음성이 떨려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렸다.

“그만해요. 당신은 충분히 최선을 다했잖아요. 제발 저와 수미를 위해 이젠 그만 편히 쉬세요.”

너무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이다.

측근들은 어제 필상이 경기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에 은근히 걱정하기는 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아침이 되면 활짝 웃으며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들렸다.

“프로님이 경기를 포기하셨다는데, 맞아요?”

“네. 대표님이 주최 측에 의사 전달을 했고 미안하지만 우리 먼저 귀국하라는 말도 전하셨어요.”

“언제요?”

“방금 전에 형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흐으응……. 대체 얼마나 아프신 건데요!”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포기했다는 말에 미사키는 울음보부터 터졌다. 웬만해서는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성호도 착잡하기는 매일반이었으나 울먹이는 미사키를 다독이며 아쉬운 감정을 추슬러야만 했다.

함께 귀국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었다.

* * *

[미스터 퍼펙트 건강상의 이유로 기권! 의문 증폭.]

[맥 빠진 투어챔피언십, 우승 향방 오리무중.]

[대체 얼마나 좋지 않기에 다 잡은 고기를 놔주는가? 갖은 루머가 PGA시즌 종료의 핫 이슈로 등장.]

아직 3라운드가 남았으니 1라운드에서 단독 선두에 나섰어도 다 잡은 고기라는 표현은 과도했다.

하지만 자신이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켜 왔던 필상이고 샷 감이 절정에 이르렀기에 돈벼락을 맞을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아예 나타나지도 않고 기권했다는 소식에 전 세계 골프계가 발칵 뒤집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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