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12화 (212/354)

212. 72홀 최저타 기록

“인 더 홀!”

“콱 들어가 부러!”

타구는 호수에 빠질 듯 좌측을 향해 날았지만 최고점에 이르는 순간부터 서서히 우측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마치 조종당하는 드론처럼 유연한 곡선을 그린 타구가 정확히 파란 선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에 필상은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과묵하게 꾹 다문 입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헤벌쭉 벌어진 것도 미처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짜릿함을 느꼈다.

-정말 들어가나요?

-하하하. 홀인원의 확률이 얼마인데요.

허 위원도 기가 막힌 궤적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실제 홀인원이 나올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건 단지 정확함만으로 이룰 수 없는, 신의 도움이 필요한 기적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홀컵 3야드 앞에 떨어진 타구가 크게 한 번 바운드가 된 뒤, 스르르 홀컵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2번 홀 근처에는 천둥벼락이 휘몰아쳤다. 팬들의 비명과 함성이 지축을 울렸던 것이다.

“하! 이거 정말 미치겠네.”

“그게 혹시 축하 인사말입니까?”

“그래! 축하한다고, 축하해!”

어느새 다가온 미켈슨은 마지못해 하이파이브를 했다. 일찌감치 우승에 대한 욕심은 버렸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어제까지 -25를 기록한 필상은 이미 이 대회 최저타 기록을 갱신했으며 첫 두 홀에서 3타를 줄이며 졸지에 -28까지 치솟았다.

-챔블리. 혹시 28언더면 72홀 최저타 기록 아닌가요?

-아닙니다. 계산 방식이 좀 복잡한데, 파 72코스에서 72홀 최저타 기록은 2001년 어니 엘스가 메르세데스 챔피언십에서 작성한 -31입니다.

프랭크가 착각한 기록은 2017년 저스틴 토마스가 소니오픈에서 작성한 72홀 최저타 기록, 253타였다.

당시 대회가 개최된 하와이의 와이알레이 CC가 파 70코스였기 때문에 -27을 기록하고도 253타라는 숫자 때문에 깊이 각인이 되었던 것이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31면 3타만 더 줄이면 되는군요.

-물론입니다. 지금 기세로 보면 충분히 달성될 수 있을 것 같고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미스터 퍼펙트가 이미 타 투어에서 -33을 작성한 적도 있다는 겁니다.

-아! 태국에서 열렸던 대회였었죠? 그렇다면 우승 경쟁이 시들해 흥이 나지 않던 팬들에게 좋은 응원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로군요. 하하하.

-31을 깨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이 대회는 가끔 타수가 전체적으로 잘 나오는 그런 평범한 대회가 아니다. 페덱스 컵 2번째 시리즈로 최고의 선수 70명만 출전한 별들의 전쟁이기 때문에 이런 최고의 대회에서 신기록을 작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3일간 -25를 기록하며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발산한 필상이 전체 선수들의 성적을 상향시킨 느낌이 강했다. 경쟁이 가중되면서 모든 선수들이 우승을 향한 강한 집중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그런데 결국 72홀 최저타 기록 갱신의 가능성이 높아지자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은 물론 PGA 관계자들도 긴장했다.

필상의 등장으로 인해 현대 골프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는 느낌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LPGA기록도 한국 선수가 세우지 않았나요?”

“무슨 기록?”

“72홀 최저타 기록이요.”

“아!”

필상은 미처 그것까지는 의식하지 못했었다.

자신이 세운 기록은 -33이었고 전체 성적이 너무 좋아 마지막 날 코스 세팅이 까다로울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작과 함께 3타를 줄이자 그와 관련된 내용들이 떠올랐고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에 의욕이 불타올랐다.

미사키의 언급은 정확했다.

“김세영이 재작년에 손베리 크리크 클래식에서 31언더파로 우승하며 LPGA 72홀 역대 최저타 기록을 새로 썼지.”

“작고 다부진 귀여운 인상의 한국 선수, 그 선수 이름이 김세영이었군요.”

“나도 목표를 잡아야겠네.”

“3타만 더 줄이면 타이가 되요.”

“3타? 아니지. 난 내가 로열 컵에서 세운 기록을 깰 거야.”

“-34를 치신다고요?”

“그래야지. -31은 너무 싱겁잖아.”

“크크크. 좋아요.”

미사키의 웃음소리가 누군가를 닮아 가고 있었다.

늘 다소곳하고 여성스럽던 그녀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좀 묘하기는 했다.

하지만 새로운 목표를 설정한 필상은 집중 모드로 돌입했다. 자신이 태국에서 세운 -33을 인정하지 않았던 PGA전문가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중하는데도 타수를 줄이는 것이 좀처럼 여의치 않았다. 코스 세팅을 어렵게 한다더니 하필 핀 위치를 난해한 곳에 꽂아 그린에 잘 올리고도 버디를 낚기가 매우 어려웠다.

분명 연속적으로 멋진 샷을 터트리면서도 타수를 줄이지 못하자 처음에는 안타까워하던 팬들이 속 내용을 알고는 주최 측에 대한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어허! 홀컵의 위치를 정하는 규정이 있지 않나요?

-코스 설계자의 의도, 기상 상태, 그린의 잔디 상태 등을 고려해 원하는 샷을 할 수 있는 위치에 홀컵을 설치해야 하죠.

-보다 자세한 규정은 없나요? 구체적인 위치에 대한 기준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네요.

-미국골프협회 USGA가 권장하는 가이드라인은 대략 7가지인데, 기본적인 것을 빼면 눈에 띄는 것이 2가지가 있죠. 그린 엣지에서 최소한 네 걸음 안쪽에 설치해야 하고 그린 주변 반경 3-4피트는 평탄한 지역이어야 합니다.

-그렇죠? 그런데 오늘 핀 위치는 에이프런에서 2야드에 붙은 곳도 있습니다. 게다가 경사도 심하고요.

-아쉽지만 제가 말씀드린 내용은 강제 규정이 아니라 권장 사항입니다. 대부분의 대회는 잘 지키고 있지만 오늘처럼 필요한 경우에는 예외를 두기도 합니다.

-예외요? 필요한 경우라는 것이 혹시 기록 갱신을 방해하는 거라면 그건 문제가 좀 심각한 것 아닙니까!

프랭크의 지적은 적절했다.

가끔 이런 규정조차 의식하지 않고 가파른 경사지의 중간에 홀컵을 만든 경우를 보게 된다. 정확한 홀인이 되지 않으면 4, 5번의 퍼팅을 하게 되는 골프는 즐거울 수가 없다.

오랜만에 필드에 나와 갈고닦은 기량을 확인하고 동반자들과 어울려 기쁨을 나누고자 했던 운동이 짜증스러운 상황으로 변한다면 그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지금 같은 경우에도 챔블리는 나름 주최 측의 고심을 대변했지만 그 명분이라는 것이 너무 초라하고 어이가 없었다.

선수들의 성적이 좋게 나오는 것이 왜 문제란 말인가!

“핀 위치가 좀 너무한 것 같아요.”

“적응해야지. 아니, 적응될 거야.”

필상은 주어진 상황에 불만을 표하는 것이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판단했고 적응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미 정해진 홀컵 위치를 불만을 표한다고 바꿔 줄 것도 아니기 때문에 보다 정교한 퍼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곁에 있던 미켈슨은 분노를 여과 없이 터트렸다. 샷 감이 아주 좋았음에도 전반에 3퍼팅을 2개나 기록하면서 공동 3위로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골프가 장난이냐고! 최소한 선수가 의도한 대로 샷을 하면 그건 지켜져야 할 거 아냐!”

“…….”

필상은 대꾸하지 않았다.

분노를 속으로 삭이지 않고 드러내서 평온을 찾는 선수도 있다지만 골프는 그래서는 안 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캐디로 일할 때, 수없이 봤다.

특히나 내기가 걸린 골퍼들의 결과를 보면 언제나 조용히 자신을 통제하고 참는 선수들이 이긴다. 불평불만을 터트리고 되지도 않을 억지를 부리는 골퍼는 자신이 터트린 분노에 비례해 타수가 나오게 마련이다.

작은 행동 하나, 허튼 생각 한 줌에도 스윙의 템포나 궤적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런 상황일수록 더더욱 자신을 관조하고 면밀히 살펴야만 하는 것이다.

-우후! 정말 환상적이네요.

-하하하. 거의 80도 가량 꺾이는 라이였습니다. 조금만 힘이 넘치면 그냥 에이프런까지 굴러갈 퍼팅인데, 그걸 저렇게 정확히 터치하네요.

-그냥 살며시 퍼터 페이스를 댄 것 같았습니다. 하하하!

567야드 파 5, 10번 홀에서 2온에 성공한 필상이 침착하게 버디를 하나 잡아내면서 다시 기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11번 홀의 핀 위치는 너무도 좌측의 벙커에 바짝 붙어 있었고 벙커 방향으로 내리막이라 도무지 핀을 바로 노릴 수는 없었다.

그나마 핀 좌측 중앙을 보고 잘 보냈음에도 필상의 공은 좌측으로 심하게 꺾이는 3야드 거리의 난해한 내리막 라이였다.

그런데 정확한 힘 조절로 완벽한 버디 퍼팅을 만들어 내자 뜨거운 박수는 물론 중계하는 전문가들도 그게 바로 오늘의 베스트 샷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홀인원도 했건만 그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한 이유는 역시 최저타 신기록 작성에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하나 넣었어!”

“봤습니다. 아주 섬세한 터치가 일품이었습니다.”

“하하하. 일품? 좋아 좋아!”

잔뜩 성질만 내던 미켈슨이 필상이 말도 없이 집중하자 처음에는 굉장히 서운한 눈치였다.

하지만 굉장한 집중력을 발휘하며 까다로운 퍼팅을 연이어 성공하며 급기야 -31까지 올라서자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더니 성급한 퍼팅 자세를 버리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버디가 아니라 3퍼팅을 하지 않는 것이다.

차마 표현할 수 없었는데 스스로 극복한 모습에 필상도 덩달아 힘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주춤하던 필상이 562야드 파 5인 14번 홀에서 1타를 줄이며 급기야 -31에 이르는 과정은 그야말로 드라마였다.

대다수의 선수들이 퍼팅 때문에 애를 먹는 와중에도 단 하나의 보기도 기록하지 않는 것도 대단했지만 끝내 최저타 기록에 다가섰기 때문이다.

-남은 홀이 이제 4개로군요. 적어도 1타는 더 줄일 수 있겠지요?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하지만 기록을 의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 기록도 충분히 좋을뿐더러 지나치게 의식하면 좋은 샷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미스터 퍼펙트의 기질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가 오늘 내내 그 기록을 염두에 두고도 이런 성적을 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위대하다는 거죠!

위대하다는 표현은 좀처럼 뱉기 힘들다.

적어도 과거형인 경우가 많은데, 프랭크는 물론 경기를 직관하고 있는 수많은 팬들은 열렬히 동의했다.

전성기의 타이거도 이런 찬사를 받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저타 기록 타이를 이뤘을 뿐만 아니라 2위와의 격차가 어느새 16타까지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또한 새로운 기록이다. 아마추어 대회도 아니고 선별된 초인들의 무대에서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게다가 수많은 비난을 불러왔던 3연승 장담에 거의 근접하게 된 결과는 처음부터 악평을 늘어놓았던 이들이 오히려 오만하다는 의견까지 이끌어 냈다.

“4번 아이언.”

“332야드인데요?”

“그러니까!”

15번 홀은 보기 드물게 짧은 파 4홀이다.

필상이라면 3번 우드가 아닌 유틸리티를 잡아도 1온을 할 수 있는 홀인데, 느닷없이 아이언을 달라니.

미사키는 사실인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필상은 확고했다.

1온을 노리지 않은 이유는 220야드 지점부터 우측으로 이어진 호수가 그린까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린 앞에서 삐죽 튀어나와 있어서 우측에 붙어 있는 핀을 노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280야드까지는 무난히 보내면 좋으련만 필상은 4번 아이언을 잡고도 강하게 때리지 않았다.

“235야드 날아간 것 같아요.”

“응. 99야드 남았어. 100야드를 남기려 했는데 오차가 1야드나 나온 셈이네.”

“치!”

그 먼 거리를 보내며 1야드를 오차라고 말하는 필상이 얄미운 것 같았다. 신에 가까운 능력을 지녔지만 인간이 그렇게까지 정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사키가 다소 애교 섞인 반응을 보였음에도 필상은 담담한 기색을 유지한 채로 세컨샷 지점을 향했다.

농담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이 사태를 어찌 봉합해야 할지 막막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캐디인 자신은 무조건 믿어 줬어야 할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로 칠까?”

“죄송해요.”

“뭐가?”

“콧방귀 껴서요. 그런데 정말 샷을 할 때 1야드 단위까지 조절하세요?”

“생각은 하지. 바람도 없고, 우드라면 모를까 아이언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까지 염두에 두고 샷을 해야지.”

“탄도에 따라 런도 다른데 그걸 다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지 않나요?”

“일단 샷부터 하고.”

“아! 네.”

“뭐로 칠까?”

“음……. 이거요.”

미사키는 의외로 갭 웨지를 건넸다.

남은 거리는 60도 웨지나 샌드웨지를 잡아도 상관이 없다. 오히려 150야드까지 보낼 수 있는 52도 갭 웨지는 너무 긴 클럽이다.

하지만 씩 웃으며 갭 웨지를 받아 든 필상은 그녀의 제안에 동의했다. 지금은 컨트롤 샷이 최상의 선택이라고 본인도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시 말문이 턱 막힐 환상적인 샷이 터졌다.

핀을 훌쩍 오버했던 공이 홀컵을 향해 쭉 빨려 와 깃대를 확 맞춰 버렸기 때문이다.

들어가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스핀의 방향도 정확했지만 깃대를 맞은 공이 퉁 튀어 20cm에 멈췄고 필상은 PGA 역사에 남을 -32 작성에 성공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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