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11화 (211/354)

211. BMW 챔피언십

-거의 300야드에 가까운 거리인데, 2온은 무리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그린 주변에서의 런을 감안하더라도 평소 그의 비거리를 고려할 때 무리수를 둔다는 건데,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3번째 샷을 잘 붙여 버디를 노리는 것이 더 낫죠.

-그렇습니다. 미스터 퍼펙트가 아이언으로도 온 그린을 할 수 있는 거리를 남겼고 오늘 이 홀에서 이글을 잡기는 했지만 매번 이글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사이 디샘보의 우드 샷이 터졌다.

그런데 모두 속았다.

3번 우드를 잡은 그가 2온을 노릴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결코 무리하지 않고 안정되게 250야드만 공략했던 것이다.

“어? 그냥 그린에 최대한 가깝게 붙이려고 했나 봐요!”

“하하하. 참 침착한 친구네.”

필상도 터지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290야드를 단번에 가지 못할 바에는 보다 안전한 아이언 공략을 하리라고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그는 3번 우드로 정확한 방향을 공략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괜히 흥분한 자신이 그저 쑥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은근히 괘심했다.

2온을 포기했다면 그것은 곧 필상이 246야드의 세컨샷을 그린에 올리지 못하거나 올려도 핀에 붙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좋아! 5번 아이언.”

“5번이요?”

미사키는 4번 아이언이나 22도 유틸리티를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던지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필상은 런이 없는 깔끔한 샷을 보여 주기로 작정한 것이다.

“응. 띄워서 세우려고.”

“5번 아이언으로요?”

“눈 감고 기도해 줘.”

“네.”

농담이었지만 필상이 티 그라운드로 올라가자 미사키는 정말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뭔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필상이 알기로 기독교인은 아닌데, 나름의 신앙이 있는 듯.

쉬이익!

갤러리들은 필상이 몇 번 아이언을 잡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중계진에게는 그 정보가 전해졌다.

필상이 내로라하는 장타자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5번 아이언은 너무하다는 생각에 조심스러운 염려의 말을 더했다.

그러나 필상은 곧장 스윙 루틴을 밟아 어드레스에 들어섰고 보기 드문 강력한 아이언 샷을 작렬시켰다.

-우후! 엄청난 임팩트입니다. 거의 풀스윙으로 보이죠?

-평상시 아이언 샷이 늘 컨트롤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더 강력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저 스윙도 100%의 힘을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렇게 총알처럼 날아가는데요?

사실이다.

평상시 70% 이하의 힘을 써온 필상은 지금도 85% 정도의 힘을 쓴다는 느낌으로 샷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마치 숏 아이언으로 때린 것처럼 엄청나게 높은 탄도를 보이며 까마득하게 치솟은 타구를 바라보는 팬들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찼다.

일단 방향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핀 하이였기 때문이다.

“온 더 그린!”

“확 들어가!”

응원의 함성중에 한국말도 섞여 있었다. 다들 타구를 쳐다봤지만 필상의 시선은 가던 길을 멈추고 타구에 눈을 떼지 못하는 디샘보에게 닿아있었다.

‘와아아아!’

팬들의 소리만 들어도 결과는 짐작할 수 있었다.

타구는 핀을 훌쩍 넘어섰으나 거의 수직으로 떨어진 그 자리에서 한 번 크게 튀더니 거의 제자리에 멈췄다.

중요한 것은 그 지점이 좌우 경사가 전혀 없는 가장 쉬운 오르막 5야드라는 사실이다. 긴 한숨을 내쉬며 필상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이 마주친 필상은 씩 웃어 보였다.

결코 비웃거나 조롱하는 의미는 아니었으나 다시 고개를 홱 돌린 그가 서둘러 서드 샷 지점으로 이동하는 뒷모습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자식! 친해질 기회를 놓치는군!”

“그러니까요. 친해져서 손해날 게 전혀 없는데.”

“그냥 지금 이 순간은 원수처럼 느껴지는 거겠지.”

그렇더라도 샷에 영향을 받으면 안 되는데 그는 40야드 칩샷을 핀에 바짝 붙이지 못하며 필상과 거의 비슷한 거리를 남겼다.

라이도 좋지 못한 상황인데 이번에도 먼저 퍼팅을 하겠다고 나서더니 결국 버디도 놓치고 파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고도 필상의 이글 퍼팅을 잡아먹을 것 같은 이글이글 빛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이 애처로웠다.

-나이스 터치!

-기어코 해내는군요. 정말 노던 트러스트 우승컵을 거머쥐고야 말았습니다. 장담한 대로!

-오늘 저녁 쏘시기로 한 거 잊지 않으셨죠?

-물론입니다.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미스터 퍼펙트는 새 기록을 하나 더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기록이라니요? 아직도 그가 깨지 못한 기록이 있습니까?

-수십 년간 깨지지 않은 루키 한 시즌 최다승 기록입니다. 이번 우승으로 시즌 6승을 달성하며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는데, 이 기록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그가 코리안 투어와 JGTO에서 우승한 것까지 포함하면 더 화려하죠. 게다가 그는 2월 말부터 지금까지 단 6개월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이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습니다.

필상의 노던 트러스트 우승은 여러 의미가 부여되었다.

장담한 싹쓸이는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이미 부정적인 의견은 자취를 감추었다. 누가 봐도 좋지 못한 컨디션이었음에도 불굴의 의지로 일궈 낸 역전 우승이 너무 극적이었다.

게다가 우승 후에 아내, 그리고 자신을 도와준 스텝들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는 장면은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스스로 정말 힘든 대회였음을 밝혔고 심신이 모두 지쳐 정말 포기할 마음까지 먹었는데, 아내와 스텝들이 한마음으로 도와준 덕분이라고 말하는 모습이 굉장히 훈훈했기 때문이다.

* * *

[BMW 챔피언십 1라운드 -8, 2타 차 단독 선두.]

[BMW 챔피언십 2라운드 -8, 5타 차 단독 선두.]

[BMW 챔피언십 3라운드 -9, 10타 차 단독 선두.]

일리노이 메디나 CC로 자리를 옮겨 페덱스 컵 두 번째 대회에 출전한 필상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첫날부터 -8로 단독 선두에 오르더니, 3일 내내 데일리 베스트를 독식하며 2위와의 격차를 점점 더 벌렸다.

그의 우승에 대해 의심하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을 만큼 완벽한 경기력에 토요일 저녁 식사 분위기는 이미 축하연이었다.

“살살 좀 해. 같은 프로 맞느냐는 질문을 받을 것 같아.”

“하하. 2위로는 만족스럽지 않으신가 봅니다.”

“당연하지. 상금 액수가 한두 푼이어야 말이지. 하하하.”

미켈슨이 단독 2위였다.

그에 반해 노던 트러스트에서 함께 톱 10에 들었던 타이거는 이번 대회 샷 감이 급격히 떨어져 고전 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인상을 구기고 있을 그는 아니다. 그는 이 대표와 TPK 사업 현황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특히나 태국에서 진행되는 사업의 진척이 굉장히 빨라서 시리즈를 마치는 대로 직접 건너가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전 내일 한국 들어가요.”

식사를 마치고 이 대표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흩어졌고 중요한 이야기들이 끝날 무렵, 그녀는 출국 사실을 알려 왔다.

“아! 일이 많이 쌓였겠어요.”

“네. 일도 일이지만 모모코가 왔으니 이제 제가 딱히 할 일도 없잖아요. 한 일도 별로 없지만.”

그 말을 던지는 이 대표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그녀의 자신을 향한 각별한 마음을 모른다면 바보다.

형식적으로는 일로 얽혀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누나처럼 느껴지지만 누나라고 여기기에는 묘한 감정이 섞여 있다.

물론 서로가 선을 넘을 수도, 넘을 생각도 없지만 필상을 위해서라면 뭐든 내줄 그녀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일어서기 전에 필상은 그녀를 따스하게 안아 줬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도 고마워요. 내일 새벽에 못 볼 것 같아서 말인데, 아직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무리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는 필상이 가진 비밀과 무관지 않다. 모모코가 왔지만 아직 완벽하지 않은 상태라면 몸을 상하면서까지 우승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이제 겨우 2년도 지나지 않았고 남은 날들이 훨씬 길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그녀의 말이 백번 옳다. 당장의 승부에 집작하다가 결정적인 부작용이 생기면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으니 늘 조심하라는 조언이었다.

-드디어 우승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BMW 챔피언십 최종 라운드가 열리는 이곳 메디나 CC는 지금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많은 팬들이 몰려왔습니다.

-우리 한국 골프팬들도 잠을 설치며 TV 앞에 앉아 있다고 합니다. 현지 생중계를 하게 된 저희로서는 좀 죄송하군요.

급기야 이번 대회부터 현지 생중계 방송이 결정되었다. 필상이 출전하는 PGA대회가 새벽 시간에 중계되는데도 경이적인 시청률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미국에 머물게 된 중계진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 대회에 이어 다음 주까지 대회가 쭉 이어지기 때문에 2주 이상 최고의 무대를 가까이에서 접하게 된 셈이니까.

-요즘 한국 골프팬들은 우리 공 프로 때문에 직장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고들 합니다.

-아! 대회가 밤에 중계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잠은 설쳐도 힘은 펄펄 날 것 같습니다. 공 프로가 최고의 컨디션으로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까요. 하하하.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현지 기자들도 저희가 한국에서 왔다는 걸 아는 순간, 바로 호의적으로 바뀌더군요. 그게 다 공 프로가 올려놓은 한국 골프의 위상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 아침에 한 유명 방송사와 인터뷰도 했습니다. 공 프로의 성장 환경과 데뷔 전의 직업, 가정사 등등 정말 많은 것에 관심을 가지더군요.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한국 기사를 참조하라고 했지요. 그리고 저희 방송사 홈페이지도 알려 줬습니다. 하하하.

13시 30분, 필상은 필 미켈슨과 함께 1번 홀을 출발했다.

워낙 두 선수의 타수 차가 커 관심은 우승이 아니라 필상의 멋진 샷을 감상하고 카메라에 담는 것이었다.

덕분에 스윙에 방해가 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왔지만 필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안정된 플레이를 이어 나갔다.

383야드 파 4홀에서 3번 우드를 잡아 315야드를 보낸 필상이 여지없이 세컨샷을 핀에 바짝 붙여 버디를 잡아내고 2번 홀에 들어서자 홀인원을 외치는 이들의 함성이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172야드의 파 3홀이었기 때문이다.

티샷은 거대한 호수를 가로질러야 하고 호수의 반대편에는 깊은 벙커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지만 그런 건 소용이 없었다.

“한 방 날려 줘야겠네.”

“왜 이러세요! 홀인원이 어디 마음먹는다고 되는 겁니까?”

“자네가 마음만 먹으면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아.”

“에이, 진짜!”

아무리 경쟁에서 멀어졌다고 하더라도, 평소 끈끈한 친분이 있어도 경기 중인 동반자가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켈슨은 너무도 태연자약하게 요구했다.

물론 아너인 필상의 정확한 샷을 보면 본인의 샷에 도움이 되리라는 계산도 깔려 있다는 걸 알지만 팬들이 원하는 대로 9번 아이언을 잡은 필상은 모처럼 모든 감각을 끌어올렸다.

‘슬라이스 바람! 탄도를 띄우면 그린 좌측 끝에서 왼쪽으로 두 클럽!’

그린 앞과 좌측은 호수에 면해 있다.

때문에 극히 위험한 방향으로 샷을 감행해야만 한다.

만약 경쟁자가 있다면 봉인했던 초감각을 깨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 팬들을 위해 멋진 샷으로 보답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감각을 모두 개방하고 홀 주변의 상황을 면밀히 살피자 최적의 궤적이 그려졌다. 위험하지만 제 감각을 신뢰한 필상은 의심하지 않고 어드레스를 취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데 필상의 시야에 새로운 현상이 잡혔다. 공을 꽂아 놓은 티에서부터 그린 위의 핀까지 파란 색의 굵은 선이 길게 쭉 이어진 믿기 힘든 장면이 나타났다.

그건 바로 지금 잡고 있는 9번 아이언으로 샷을 했을 때, 타구가 날아갈 가장 이상적인 궤적이었다.

‘뭐야? 정말 홀인원이 나오는 건가?’

아직 불분명한 이 현상은 추후 확인이 필요했다.

만약 자신이 의도한 샷에 대한 궤적이라면 이건 정말 무섭도록 대단한 초능력을 보유하게 되는 셈이었다.

그런데 어드레스를 취하자 갑자기 궤적이 변경되면서 색깔도 빨간색으로 변했다. 뭔가 이상해 확인해 봤더니 너무 흥분한 나머지 서 있는 방향이 살짝 우측으로 틀어져 있었다.

그래서 재조정한 필상이 정확한 방향으로 섰더니 붉은 색이 사라진 매우 이상적인 본래의 궤적이 아름답게 나타났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 바로 샷을 감행하지 못했다.

그러자 갑자기 주변도 덩달아 조용해졌다. 팬들은 자신들이 낸 소음 때문에 필상이 스윙을 하지 못한다고 여긴 것이다.

-왜 주춤한 걸까요?

-가끔 에이밍이 잘 나오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아마도 바람을 의식해 좌측 호수 방향을 보려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불안하겠죠.

-방금 전에 조정을 하더군요. 그래도 좀 이상하네요. 이번 대회 들어서는 항상 과감하고 빠른 템포의 샷을 보여 줬잖습니까!

-하하하. 홀인원이라도 하려는 것 아닐까요?

물론 허 위원의 그 말은 지나가는 농담이다.

자신이 이미 분석을 내놨는데도 임한석이 토를 달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냥 받아넘기고 말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숏티를 부숴 버리며 시원하게 공중에 치솟은 타구는 지나치게 탄도가 높았다.

이 홀에 부는 바람을 감안하면 왜 그런 샷을 구사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타구 방향도 너무 좌측이라서 바람이 부는 것을 알면서도 불안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해진다고 했던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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