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10화 (210/354)

210. 플레이오프

-와우! 전 공이 깨지지 않았을까 염려되네요.

-새 공을 썼을 테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너무 메마른 챔블리의 교과서적인 대답에 김이 빠질 만도 하건만 픽 웃은 프랭크는 들뜬 감정을 재차 숨기지 않았다.

필상이 연장전에 나선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그의 우울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완전히 저공비행이로군요. 저렇게 탄도가 낮은 샷으로 과연 원하는 비거리를 확보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미스터 퍼펙트가 원하는 거리는 그리 길지 않을 겁니다. 270야드 안팎, 그 정도 보낸 뒤에 정교한 아이언 샷으로 승부를 걸 것 같습니다.

표정은 심드렁했으나 그의 해설까지 편파적이지는 않았다. 필상의 기량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난히 강한 임팩트가 이뤄졌던 타구는 그의 분석을 허망하게 만들었다. 타구의 캐리는 250야드 안팎이었으나 미친 듯이 페어웨이를 구른 공이 멈춰선 지점은 모두가 기겁할 304야드나 찍었기 때문이다.

필상이 유틸리티로 그 거리를 보낸 것은 나름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담담함을 가장한 디샘보의 표정에 미세한 변화를 불어온 것을 보면 효과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의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가 302야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굿 샷! 프로님이 유틸리티를 잡는 순간, 저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 같아요. 적어도 거리에 대한 부담은 느끼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그런가?”

시치미를 뚝 뗀 필상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티 그라운드를 내려오면서 교차해 올라가는 디샘보의 기운을 체크했다.

코에서 허연 김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드라이브를 잡고 프로님보다 짧게 치면 그런 개망신도 없을 테니까요.”

“그래도 티샷 미스는 하지 않을 거야.”

“에이! 아닐 것 같은데요?”

디샘보는 이미 기세가 꺾였다.

때문에 가만히 놔둬도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예상치 못한 티샷으로 한 방을 더 추가했으니 제대로 된 티샷을 만들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그의 티샷은 페어웨이를 지켰다.

비거리도 315야드로 최소한의 체면은 지켰다.

게다가 필상이 173야드 세컨샷을 5야드에 붙이자 그도 비슷한 거리에 붙이면서 멍군을 불렀다.

팽팽한 경기 내용에 갤러리들은 흥분이 가중되었고 필상도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이동 중 토납이 필요했다.

-브라이슨 디샘보. 기세가 꺾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요.

-굉장히 차분하고 다부진 성격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놓치지 않습니다. 데뷔 후 톱 10에 16번 들었는데 그중에 6번이나 우승한 걸 보면 승부사 기질이 있다는 거죠.

-아! 그렇군요. 하지만 그런 기록도 우리 공 프로와 비교하면 별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요?

-하하하. 그렇기는 하네요. 하지만 승부는 그린 위에서 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지막 두 홀에서 그의 퍼팅이 굉장히 불안했었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막상 그린에 올라 확인해 본 결과 그냥 눈대중으로는 두 선수의 남은 거리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집중한 필상은 자신이 더 멀다는 것을 확인했고 곧바로 라이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필 필상의 위치는 아까 디샘보가 버디를 실패한 라이에 놓여 있었고 그는 필상이 퍼팅을 했던 지점이었다.

둘 다 경사가 심하지는 않지만 거리감이 중요했다.

그런데 필상이 퍼팅을 하려 하자 그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자신이 먼저 하겠다는 의미였다. 지나친 압박감을 피하려는 의도로 보였으나 필상은 흔쾌히 동의하고는 지켜봤다.

‘너무 서둘러.’

시간 오버가 신경 쓰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평소보다 빠른 템포의 루틴을 밟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시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그의 다소 강한 스트로크는 깔끔한 버디로 이어지면서 선방을 날리는 데 성공했다.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괴성을 지르는 그의 행동은 마치 우승이 확정이라도 된 것 같은 거만한 행동이었다.

아직 경쟁자의 경기가 끝나지 않았기에 바람직한 행동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를 추종하는 갤러리들의 비명도 지나치게 길었다.

하지만 필상은 퍼팅 루틴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유난히 시간에 대한 규정이 의식되는 대회였기에 팬들의 소란이 잦아들기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진행요원들이 나섰으나 짓궂은 일부 팬들의 소란은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필상은 개의치 않고 퍼팅을 시도했고 그 공이 홀컵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방금 전에 못지않은 함성이 18번 홀을 뒤집을 듯 울려 퍼졌다.

-와! 정말 심장이 떨려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역시 공 프로의 기량과 집념은 대단합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저런 상황에 몰리면 제 기량을 발휘하기 어렵거든요.

-그러니까요! 전 오버 액션을 취한 디샘보의 과한 행동은 지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그에 대한 규정이 따로 없다고 하더라도 그건 동료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그런 행동은 팬들이 알아서 걸러 내리라 생각합니다. 나름 영악한 방법을 동원하고도 결과를 얻지 못했으니 타격은 오히려 그가 더 심하게 입었을 겁니다.

-아! 그렇게 되나요?

연장전이 한 홀에서 끝나지 않은 것은 의외였다.

자신도 마지막 홀에서 버디를 잡지 못하기는 했으나 디샘보의 경기력은 분명 가파른 하강세였다.

때문에 버디를 잡기만 하면 손쉽게 우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강한 의지를 드러내며 도발까지 하지 않던가!

다시 한 번 18번 홀 티 박스에 돌아온 필상에게 느닷없이 드라이브를 꺼내 들라는 팬들의 요청이 쇄도했다.

짧게 쳐도 버디를 낚을 수 있음이 확인되었지만 그 정도로는 상대에게 압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필상은 다시 한 번 유틸리티를 사용해 똑같은 샷을 재현했다. 방향도, 거리도 거의 완벽히 동일한 판박이 같은 티샷에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이번에도 페어웨이를 지킬까요?”

“응. 그러겠지. 승부는 그린에서 날 거야.”

그런데 필상의 족집게 같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의 티샷은 살짝 당겨져 페어웨이에 떨어졌으나 공이 데굴데굴 굴러 러프로 기어들어 가고 말았다.

거리는 아까보다 오히려 더 나와 남은 거리는 163야드에 불과했다. 문제는 필상이 4야드에 붙였음에도 그는 러프에서 비슷한 거리에 올리는 불꽃 샷을 작렬시켰다.

박수를 보내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 못한 이유는 아까처럼 두 팔을 치켜들고 마치 자신이 이겼다는 듯 또다시 과도한 액션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꼴불견이에요.”

“하하. 저런 행동이 스스로 평정심을 해치는 것이라는 걸 모르나?”

“기세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결과는 두고 봐야지.”

이번에도 필상의 퍼팅이 조금 더 길게 남았다.

참 어이가 없는 결과였으나 또 다시 디샘보가 먼저 퍼팅을 하겠다고 나서자 필상은 흔쾌히 동의했다.

두 명 모두 아까보다 거리는 짧지만 경사는 더 많은 애매한 퍼팅이기에 굳이 먼저 할 이유가 없는 상황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버디를 먼저 낚아 낸 그는 두 팔을 높이 치켜들며 두 발까지 동동 구르며 기쁨을 만끽했다. 그런데 팬들의 반응은 뜻밖에도 아까보다 훨씬 약해졌다.

‘오버도 적당히 해야지!’

밉상으로 비친 것이다.

아무리 미국 선수이고 환상적인 결과를 만들었어도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오버액션을 반복하는 모습에 더는 박수를 보내기 꺼려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프로는 결과로 말을 해야 하기에 필상은 잡다한 생각을 접고 퍼팅에 집중했다. 여지없이 정확한 스트로크에 다시 버디를 잡아냈지만 필상은 아무런 액션도 없이 공을 집어 들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완벽히 대비되는 두 선수의 행동이 팬들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자명했다.

-와! 정말 대단한 승부로군요.

-디샘보. 행동거지는 얄밉지만 범상치 않은 기량 하나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공 프로와 겨루며 저런 기세를 유지하기가 절대 쉽지 않거든요.

-공 프로가 장타를 날리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런 측면이 없지 않지만 이제는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습니다.

-끝이 난다니요?

-2번을 비겨서 이제 17번 홀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으아! 595야드 파 5홀이군요. 우리 공 프로가 이글을 기록했던 그 홀!

-그렇습니다. 디샘보는 장타를 쳐도 절대 2온이 불가능한 홀입니다. 반면 공 프로는 아주 쉽게 2온이 가능한 홀이죠.

물론 어폐가 있는 발언이다.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가 302야드라고 딱 그만큼만 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정하면 그도 얼마든지 350야드 이상도 날릴 수 있다.

하지만 평소에 감행하지 않는 그런 샷의 성공 가능성이 워낙 낮아 오히려 장타를 시도하는 것이 가장 쉽게 자멸로 향하는 길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허 위원이 그런 분석을 내놓은 것이다.

17번 홀로 이동하는 디샘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모습이 화면에 잡힌 것도 그런 내용과 무관하지 않았다.

“연장전을 3홀까지 오다니!”

“파 5홀이에요.”

“이제 끝내고 밥 먹으러 가자.”

“배고프세요?”

“응.”

미사키는 바나나를 내밀었다.

일단 요기라도 하라는 의미였다. 필상도 절반을 먹은 뒤 물을 마시며 마지막 승부처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

그런데 막상 티 박스에 다다르자 3번 우드를 직접 꺼내 들었다. 당연히 드라이브를 치리라고 예상했던 미사키도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걱정 마. 이거로도 350야드는 날릴 수 있으니까.”

“350야드요?”

“응.”

이건 순전히 즉각적인 감이었다.

자신의 드라이브 티샷 페어웨이 안착률이 굉장히 높고 자신감도 여전하지만 묘하게도 3번 우드에 눈길이 갔다.

아까는 드라이브로 좁은 페어웨이를 잘 지켰지만 이번에도 동일한 결과를 얻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방향성을 유지하기에는 3번 우드가 더 낫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비거리인데 방향성이 유지되는 한도를 생각해 보니 얼마든지 3번 우드를 잡아도 2온이 가능했던 것이다.

-와우! 지금 미스터 퍼펙트가 든 클럽이 3번 우드 맞죠?

-네. 안전한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하기야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는 하죠. 그렇다면 디샘보가 불리한 것도 아니로군요. 하하하.

-챔블리. 왜 안전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시죠? 미스터 퍼펙트의 3번 우드 티샷이 330야드를 날아간 경우가 있는데.

-에이. 그럴 바에는 드라이브를 잡았겠죠. 아까 드라이브를 잡아 이글을 기록한 선수가 뭐가 무서워 우드를 잡는단 말입니까!

-만약 2온에 성공하면 저녁을 사십시오.

-좋습니다. 하하하.

보통 내기를 제안하면 반대급부에 대해 언급한다.

하지만 2온을 하면 저녁을 사겠노라고 대답하면서도 못하면 당신이 저녁을 사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만큼 확신에 찼다는 말인데, 필상의 강력한 우드 샷이 터지는 순간, 화면에 잡힌 그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뭐든 해설을 해야 하는 그가 입을 헤 벌린 채 총알같이 날아가는 타구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프랭크는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각종 데이터를 언급하며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헤드 스피드가 무려 128마일입니다. 3번 우드로 대체 얼마나 보내려는 걸까요?

-방향도 아주 좋습니다. 350야드 정도 날아간다면.

잘 맞았다는 확신은 들지만 350야드를 언급하는 것은 다소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떨어질 줄 모르고 치솟은 타구는 하염없이 날아가 위험천만한 숲을 지나갔다.

좌측으로 휜 도그렉 홀이라서 만약 캐리가 265야드를 넘지 못하면 끔찍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러프까지 넘어가 페어웨이에 떨어진 타구는 드라이브에 비해 탄도가 낮았기 때문인지 런도 많았다.

-우후! 352야드!

-하하하.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이 홀마저 안전하게 공략할 이유가 없죠. 세계 최고의 장타자가 말입니다.

-괴물이군요, 괴물!

3번 우드로 352야드를 기록한 필상의 어마어마한 우드 샷에 챔블리는 더 이상의 태클을 걸지 못했다.

웬만한 장타자의 드라이브 비거리보다 더 길지 않은가!

티 그라운드에 올라서는 경쟁자, 디샘보의 심정이 어떨지 생각만 해도 답답했다. 그런데도 그는 의외로 안정된 티샷을 보여줬다.

308야드, 페어웨이를 잘 지킨 타구는 이제 290야드의 세컨샷을 남긴 채 그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리하지 않네요?”

“응. 멘탈 하나는 굉장히 단단한 친구로군.”

“그런 자가 몸에 이상도 없는데 시간 지연으로 벌타를 받다니,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져도 밑질 게 없기 때문인가?”

그렇게밖에는 해석되지 않았다.

심한 심적 타격을 입은 선수가 갑자기 컨디션이 올라오기는 쉽지 않아 나름 인정해 주려고 했는데, 이상한 결정은 그때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가 3번 우드를 꺼내 들었던 것이다.

“쟤 좀 보세요.”

“어허! 3번 우드?”

“네. 2온을 노리려나 봐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 내가 2온을 할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기는 하다.

하지만 과연 3번 우드로 평소 그가 얼마나 보내는지 감안하면 이건 무리수였다.

실제 그의 3번 우드는 250야드에 맞춰져 있었다.

물론 강하게 때리면서도 방향을 유지할 수도 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안타깝게도 그리 밝지 못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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