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40초 룰
“어?”
“거 봐! 긴장하면 저럴 수도 있다니까!”
그냥 부드럽게 밀기만 하면 되는 퍼팅이었다.
유난히 몸을 바짝 숙여 라이를 정밀하게 살피는 디샘보는 신중하기로 유명한 선수다. 그러고도 평균 퍼팅 수가 최상위권이 아니라는 것이 흥미롭지만 그의 퍼터가 어이없게 열리는 순간, 필상은 기회가 찾아왔다고 직감했다.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나름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겠으나 그런 쉬운 퍼팅을 놓치면 자신이 여태까지 놓쳤던 수많은 실패가 한꺼번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잔뜩 찡그린 채 탭인파로 마무리하는 그의 표정에는 불안의 그늘이 덧씌워졌다. 아직 1타 차로 앞서고 있는데도 급격하게 떨어진 자신감이 그를 나락으로 밀어낼 가능성이 높다.
“우우우우…….”
갑자기 옆 화면에서 갤러리들의 탄식 소리가 들렸다.
18번 홀 티샷 장면이었는데, 장타가 절실한 더스틴 존슨의 드라이브 티샷이 이번에는 좌측으로 확 당겨진 것이다.
최소한 2온 버디를 해야만 했기에 조금이라도 더 멀리 보내고자 했으나 방금 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체중 이동을 자제한 스윙이 되레 극단적인 드로우 샷을 만들어 냈다.
타구가 좌측 숲으로 들어가면서 강력한 경쟁자 한 명이 제거되었다. 그러나 그 상황은 필상에게만 유리한 것은 아니다.
이제 막 18번 홀에 도착한 디샘보에게도 낭보였다. 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여유가 보이지 않았다.
“긴장한 것 같지 않아?”
“그래도 3년 동안 6승을 거둔 전력의 소유자입니다. 파를 하려고 마음먹으면 못할 것도 없죠.”
필상은 연장전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왜냐면 경력에 비해 화려한 성적을 기록한 디샘보의 장점은 역시 침착한 마인드 컨트롤에 있기 때문이다.
필상이 1타 차로 경기를 끝내고 기다린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안전한 공략을 할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드라이브를 잡기는 했으나 풀스윙을 하지 않고 정확한 방향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시킨 샷을 감행했다.
-나이스 샷!
-굉장히 안전한 공략이로군요. 전 챔블리가 중계 도중에 누군가의 샷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처음 보네요. 이번 스윙이 그렇게 멋진 샷이었나요?
-꼭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친다면 그게 바로 베스트 샷입니다. 꼭 강하고 멀리 보내야만 나이스 샷인 건 아니죠.
-아! 그야 그렇지요. 디샘보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한다면 확실히 좋은 그림이 그려지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최근 들어 PGA를 휩쓸어 버릴 것 같던 미스터 퍼펙트의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하는 셈이니까요.
-맞습니다. 타이거에게는 미켈슨이라는 좋은 경쟁자가 있었듯이 디샘보 역시 미스터 퍼펙트의 독주를 막을 좋은 대항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미국을 대표하는 신예이기도 하죠, 하하하!
NBC 골프 중계진의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필상의 열성 팬이 된 캐스터 프랭크는 이번 대회 들어 유난히 필상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팬들의 질타는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필상이 모처럼 고전했던 경기 내용과 무관치 않다. 약자를 배려하는 행동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했던 챔블리는 은근히 필상의 우승을 바라지 않는 듯, 편향된 경향을 보였다.
아예 드러내고 당당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가 며칠 전 한 언론 매체와 진행했던 인터뷰 내용과 무관지 않다.
필상의 우승 포부에 대해 ‘당돌하다!’, ‘교만하다’라는 직설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을 팬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걸 마치 좋은 경쟁 구도처럼 에둘러 표현하는 모습에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던 것이다.
“파를 하겠다고 작정을 했군!”
“그러게요. 저라도 저렇게 했을 겁니다.”
당연한 공략이라는 것에 모두들 공감했다.
경쟁자가 오로지 필상 한 명으로 줄었다는 것이 더는 복잡한 계산을 하지 않도록 만들었으나 필상의 팬들이 느끼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남의 실수를 바라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았으나 유독 어려운 일정을 소화한 필상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상황을 앞두게 되자 어제 벌어졌던 벌타가 더 아프게 다가왔다.
그런 생각은 미켈슨도 마찬가지였으나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그 또한 경기의 한 부분이라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181야드에 7번 아이언을 잡는군.”
“컨트롤 샷을 하려는 거겠죠.”
신중하게 루틴을 밟은 디샘보가 어드레스를 한 번 풀었다.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수많은 팬들이 모두 18번 홀에 몰려든 상황이기에 우승을 향한 마지막 스윙이 가진 무게감은 클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미 우승 경험이 있는 프로가 자세를 푸는 모습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이언 샷은 그린에 올라섰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8야드 퍼팅을 남겼으나 파를 기록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미켈슨은 무릎을 탁 쳤다.
“허허! 잘하면 연장전 가겠는데?”
“바람 잡지 마십시오. 본인이라면 저걸 3퍼팅 하겠습니까?”
“하지. 얼마든지 가능해. 나도 그런 적이 있거든.”
필상도 알고 있다.
US오픈에서 그는 이런 거리에서 2번에 집어넣지 못해 준우승에 머문 적이 있다. 당시 그랜드슬램 작성을 앞둔 그로서는 통한의 퍼팅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걸 자신의 입으로 꺼낸 것부터가 심상치 않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팬들이 그렇듯 필상도 승부는 끝났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디샘보가 지나치게 오랫동안 그린 주변을 돌아다녔다. 더블 브레이크지만 내리막 뒤에 오르막인 이 퍼팅은 결국 남은 거리를 그대로 봐도 되는 비교적 무난한 퍼팅이다.
“그냥 제 거리만 보면 붙일 수 있는 라이 아닌가요? 집어넣으려는 건가?”
“아니. 붙이려는 것 같아. 그런데도 저렇게 빙빙 돌며 본 걸 또 보는 걸 보면 퍼팅의 가장 큰 적이 찾아온 거지.”
“의심이 싹 트는 건가요?”
“응. 볼 때마다 달리 보이는 라이.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지는 거지. 하하하.”
퍼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신감이다.
자신의 기량과 감각을 믿고 집중력을 발휘하면 그만인데, 지난 홀의 어이없는 퍼팅이 발목을 잡은 것 같았다.
본인도 시간이 많이 흐른 것에 대한 부담을 느꼈는지 결국 이를 악문 그가 어드레스에 들어섰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대로 퍼팅을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디샘보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세를 풀었다.
“우우우우!”
팬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우승을 앞둔 선수에게 한없이 호의적인 팬들의 입에서 그런 반응이 나오는 순간, 보다 못한 한 사람이 나섰다.
동반자인 저스틴 토마스였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경기위원에게 다가간 그는 왼쪽 손목을 가리키며 거칠게 항의했다.
“타임 오버인가?”
“네. 1분이 훨씬 넘었습니다.”
“으흐! 벌타네.”
정확히 말하면 2온을 하지 못한 토마스가 어프로치를 마친 뒤 1분 20초가 지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간을 체크하고 있는 경기위원은 그걸 모를 리 없다.
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동반자의 문제 제기가 없으면 그냥 넘어가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런데 어드레스를 푸는 순간, 그도 번민에 휩싸였다.
어제 이 규정으로 인해 벌타를 2개나 먹은 선수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당사자가 지금 1타 차의 2위였기에 그로서는 아주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나중에라도 문제를 제기하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본인이 나서서 벌타를 부여하는 것도 아주 부담스러웠다.
그 벌타가 우승의 향방을 가를 가능성이 높아 디샘보의 우승을 바라는, 아니 엄밀히 말하면 필상의 우승을 바라지 않는 수많은 팬들의 비난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토마스가 나섰다.
“브라이슨 디샘보. 시간 지연으로 1벌타 부여합니다.”
본인도 알고 있었는지 디샘보는 인상을 구겼으나 항의는 하지 못했다. 다만 그 결과를 지켜보는 팬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려 야유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규정은 규정, 그걸 알면서도 지키지 못한 사람의 몫이라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고 중계진도 정확한 사실 관계를 알렸다.
-벌타를 받는 순간에 이미 86초가 흘렀습니다. 이건 재론의 여지가 없는 지연 플레이가 맞습니다.
-끄응! 인정합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정신을 가다듬고 퍼팅을 시도해야 합니다.
-넣어야겠군요. 그건 절대 쉽지 않을 텐데요.
-이번 대회를 통해 ‘40초 룰’에 대한 확실한 기준이 생긴 것은 좋습니다. 이건 공평성에 대한 문제거든요.
그사이 디샘보는 결국 퍼팅 스트로크를 감행했다.
벌타를 받은 뒤에 오히려 차분해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어렵게 느껴졌던 퍼팅이 홀컵을 향해 정확히 구른다는 것이었다.
사방에서 비명에 가까운 응원의 소리와 함께 박수가 쏟아졌다. 그러나 들어갈 것 같던 공은 홀컵 바로 앞에서 멈췄다.
반 바퀴만 더 굴러도 들어갈 공이 멈추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던 디샘보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건 패자의 액션이다. 아직 승부가 끝난 것도 아닌데, 그런 행동을 취하는 것은 금기시되는 행동이라는 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드라마틱하군요. 하하하! 전 들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얼른 몸 풀어야지.”
“네.”
“나가면 기자들이 달려들 거야. 표정 관리 좀 하고.”
“하하하. 알겠습니다.”
운영본부 부스를 나서는 순간, 몰려든 기자들의 카메라가 동시에 터졌다. 사실 그들은 결과를 기다리는 필상의 표정을 찍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잘 아는 필상이 취재진들이 들어올 수 없는 지역에 들어서면서 언론을 차단해 버렸다. 굳이 숨을 이유는 없지만 우호적이지 않은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파를 해치며 나가던 필상은 우뚝 멈춰 섰다.
“모모코!”
“우리 오빠 파이팅!”
“하하하. 근데 언제 일어났어?”
“방금 전에요. 연장전이라서 다행이에요. 하마터면 못 볼 뻔했잖아요.”
“그러게. 피곤하지 않아?”
“네. 힘이 펄펄 나요.”
필상은 아내의 손을 잡고 잠시 그 따스한 온기를 즐겼다.
그저 좋은 기운을 받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녀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각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모습에 주변에 있던 팬들의 뜨거운 환호가 터졌다. 모모코와 필상이 부부라는 것을 모르는 팬들은 없다. 이미 둘이 나란히 등장하는 광고가 미국에도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브라이슨.”
“아. 네.”
그는 먼저 18번 홀 티 박스에 가 있었다.
연장전을 펼칠 필상이 뒤늦게 카트를 타고 도착했으나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그의 냉랭한 행동에 필상이 먼저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이놈 보게!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이해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느낄 부담을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악수를 한 뒤에 다시 홱 돌아서는 그를 보며 그저 씩 웃고 말았다.
하지만 경기위원이 나서 아너를 정해야 했기에 그는 다시 돌아섰고 동전을 던진 결과 하필이면 필상이 먼저였다.
-허 위원님. 보통 뒤에 치는 선수가 더 유리하지 않나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앞 선수가 실수를 하면 기회가 찾아오지만 프로들의 대회에서 그럴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하지만 우리 공 프로라면 상황이 좀 다르긴 하죠.
-장타가 터지면 디샘보로서는 큰 부담이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과연 공 프로가 장타를 날릴지 여부는 두고 봐야 합니다. 천하의 공 프로도 부담스러운 상황이거든요.
필상의 과감한 공격성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는 또 다르다. 한 홀에서 모든 승부가 결정되는 매치 플레이가 주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18도 유틸.”
“유틸리티요?”
“응. 난 안전하게 가려고.”
미사키는 좀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방긋 웃으며 필상이 원한 3번 유틸리티를 건네줬다.
드라이브도, 3번 우드도 아닌 유틸리티를 들고 티 그라운드에 오르자 갤러리들의 뜨거운 반응이 터졌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클럽이었기 때문이다.
극적인 승부가 펼쳐진 상황에 흥분하고 있던 NBC 중계진도 격한 반응을 보였다.
-우후! 유틸리티를 잡은 것 맞나요?
-네. 정말 기가 막히네요.
-18도 유틸리티 같은데, 그 비거리가 얼마나 되죠?
-공식적으로 밝힌 비거리는 270야드입니다. 3번 우드가 280야드니까 별 차이가 없는 클럽입니다.
-하지만 그가 유틸리티를 잡았을 때 아주 특이한 이력이 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미스 샷도 기록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상대에게 주는 부담은 실로 엄청나죠.
-난 절대 실수하지 않을 거야! 뭐 그런 건가요?
-그렇습니다. 드라이브를 들고 있는 디샘보의 표정을 비치는 이유도 그와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디샘보도 그 특이한 이력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일체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그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 어떤 상황도 그의 굳은 집념을 가로막지 못한다는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그 속마음은 알 길이 없었다.
473야드 파 4홀에서 유틸리티를 들고 올라간 필상이 바람을 가르는 빈 스윙을 휙휙 휘두르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초점이 잡히지 않은 걸 아무도 몰랐다.
필상은 3번의 연습 스윙을 하며 샷 이미지를 확실하게 잡았다. 비스듬하게 우측으로 휘는 홀의 모양을 그대로 따르는 완만한 페이드 샷을 준비한 필상은 마침내 스탠스를 취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