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07화 (207/354)

207. 노던 트러스트

“형수가 이렇게 사나운 여자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그만하지!”

“하하하. 그래도 쌩쌩한 형님을 볼 수 있어서 너무 좋네요. 저도 갑자기 장가가고 싶어졌습니다.”

“네 스타일이 가까이 있잖아. 작업 안 하고 뭐해?”

“저도 뭔가를 좀 이루고…….”

마사키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둘 다 알고 있던 내용이라 아무렇지 않은 주제였다.

그런데 그 순간 나타난 당사자를 보자 성호는 말을 맺지 못했다. 한국말을 잘 모른다는 것을 알지만 괜히 찔린 것이다.

그러나 미사키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프로님!”

“배고프다. 우리 밥부터 먹으러 갈까? 이 호텔 조식은 별로던데.”

“그럼 클럽하우스 레스토랑으로 가시면 되죠. 정말 멀쩡해지신 건가요?”

“모모코는 내게 만병통치약이거든. 하하하.”

닭살 돋는 멘트에 웃음소리도 과도하게 컸지만 성호나 미사키는 태클을 걸지 않았다.

그저 건강하기만 하다면 뭐든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장 먼저 달려올 줄 알았던 이 대표가 보이지 않았다.

“대표님은?”

“먼저 출발하세요. 제가 깨워서 모셔 갈게요.”

“그래.”

좀 의외였다고 생각했는데, 내용은 달랐다.

성호나 미사키도 걱정은 했지만 모모코가 오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이 대표의 말을 듣고는 잠을 잤다.

하지만 정작 이 대표는 밤새 잠을 설쳤다.

책임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인 것인가?

그녀도 걱정이 산더미 같았지만 혹시나 해서 필상의 방 앞을 서성이다가 복도까지 들리는 짐승의 울부짖음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었다.

미사키가 깨워 겨우 일어난 그녀는 가장 중요한 의식, 화장도 하는 둥 마는 둥 클럽하우스로 달려갔다.

“콩!”

대부분의 호텔은 아침 조식을 제공한다.

때문에 누가 비싼 클럽하우스에서 식사를 하나 싶었는데, 눈에 익은 두 선수가 캐디까지 동반해 아침을 들고 있었다.

타이거와 미켈슨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최종 라운드를 준비하는 이유는 그들의 성적도 예상한 것만큼 썩 좋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타이거는 -9로 공동 13위였고 미켈슨은 필상보다 낮은 -7로 공동 21위였다. 물론 심각한 상태를 겪었던 필상은 그 내용은 전혀 인지하고 못한 상태였다.

여하튼 필상이 성호와 나란히 레스토랑으로 들어서자 모두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요? 귀신이라도 본 겁니까?”

“괜찮아진 거야?”

“네. 다행히.”

“역시!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하하하.”

다들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에 필상은 뿌듯했다.

하지만 완벽히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다. 모모코와 사랑을 나누며 균형을 잡지 못했던 기운이 일단 안정되었지만 한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을 이루기 전에는 어쩔 수 없이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현장에서의 상태는 확인이 필요했다.

“뭘 그렇게 많이 시켜?”

“다 먹고 싶어서요. 하하하.”

처음부터 아예 2인분을 시키는 걸 보며 웃었다.

그동안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을 알기에 이해했지만 그걸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 뒤에 다시 주문하는 것을 보며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그걸 막은 사람은 늦게 나타난 이 대표였다.

가장 기뻐할 것 같았던 그녀는 의외로 차분한 모습을 유지하며 필상을 조심스레 살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 같지는 않다는 걸 지레짐작한 듯.

“11시 티오프니까, 적당히 먹고 경기 전에 다시 식사를 해요. 몸이 무거우면 연습에 방해가 될 것 같아요.”

“아! 그래야겠네요.”

감히 필상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못했으나 그녀는 달랐다. 확실히 이성적이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의지가 보였다.

식사를 마친 필상이 대군단을 이끌고 연습장에 나타나자 다시 한 번 주변이 술렁였다.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가 연습하러 온 것은 당연하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따가운 시선을 외면한 필상은 모처럼 좋은 컨디션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어허! 감각이 많이 무뎌졌는데!”

“…….”

스스로 그렇게 판단하고 말을 했지만 아무도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시원한 스윙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필상은 크게 무리하지 않고 가벼운 웨지 샷부터 아이언으로 서서히 올라가며 컨트롤 샷을 집중적으로 다듬었다. 알면서도 미처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이 코스는 정교한 샷이 필요한 홀이 많기 때문이었다.

필상이 연습장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기자들의 모습이 하나둘 보였다. 안에 들어오지는 못했으나 연습장 밖에서 들리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모두 자신을 향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필상도 이 대표도 말리지는 않았다.

어제 저녁 그들이 일제히 기사에 담았던 엉터리 예측이 모두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기사 보셨습니까?

-아! 공 프로에 관한 아침 기사라면 저도 봤습니다.

-밤새 씹어 대더니 논조가 일부 바뀌었더군요. 오늘 경기를 포기할지도 모른다던 자들이 아침에 연습장에 나타난 우리 공 프로를 보고 깜짝 놀란 모양입니다.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컨디션이 아주 좋다고 합니다. 모든 샷이 정교하고 어제 같은 이상한 증상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아! 그래야지요. 그가 누구입니까!

-선두와 7타 차, 물론 힘들겠지만 정상 컨디션을 찾았다면 반드시 우승 경쟁에 뛰어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허 위원님이 그렇게 확신에 찬 말씀을 주시니 저도, 경기를 시청하는 팬들도 힘이 납니다. 하하하.

우려와 기대를 한 몸에 받은 필상이 드디어 1번 홀에 나타났다. 여느 때처럼 담담한 포커 페이스였지만 오늘 따라 더 비장해 보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필상이 미켈슨과 한 조에 편성되었다는 점이었다. 미켈슨에게는 부담이 될지 모르나 아직 우려가 가시지 않은 필상에게는 잘된 일이라고들 생각했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자 희귀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1번 홀 380야드 파 4, 2온 1퍼팅 버디.

2번 홀 191야드 파 3, 1온 1퍼팅 버디.

3번 홀 589야드 파 5, 3온 1퍼팅 버디.

필상과 미켈슨이 나란히 첫 3홀에서 타수를 파격적으로 줄이며 고공 행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중계를 해야 하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도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하하하.

-말이 필요치 않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 공 프로도 대단하지만 미켈슨도 최절정의 기량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한물갔다는 항간의 평가가 무색한 장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 프로와 적대적이지 않은 동업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영향을 받는 게 아닐까요?

-서로에게 이득이라고 봐야겠지요. 사실 티샷 비거리가 짧은 그가 불리한데 오히려 앞에서 리드를 하면서 공 프로의 공략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아! 그렇군요.

그 해설이 끝나기 무섭게 미켈슨의 또다시 환상적인 아이언 샷이 터졌다. 4번 홀은 445야드 파 4홀로 좁은 페어웨이를 사수하는 것이 관건이다.

필상은 안전하게 324야드 페어웨이를 공략한 반면 미켈슨의 티샷은 퍼스트 컷에 굴러들어 갔다. 비거리도 러프에 걸리는 바람에 298야드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156야드 러프에서의 샷을 그냥 핀에 꽂을 듯 쐈던 것이다. 러프에서 스핀을 먹이기 힘들어 그린을 오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어림도 없는 예측이었다.

한 번 크게 튄 공이 떨어진 뒤에는 오히려 살짝 뒤로 물러나는 고수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나이스 샷!”

“하하. 오늘 샷이 좀 되는데!”

“그러게요. 이참에 확실히 올라서자고요.”

둘이 의기투합하며 기세를 올리려 했으나 필상의 아이언 샷은 지나치게 스핀이 먹어 애매한 옆 라이에 놓이고 말았다.

그러면서 아깝게 버디에 실패했고 미켈슨은 4연속 버디에 성공하며 -11 동타가 되었다. 순위는 나란히 공동 10위에 턱걸이를 하게 되었다.

다들 마지막 라운드에서 분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필상은 5번 홀에서 다시 한 타를 줄이며 앞서 나갔고 주거나 받거니 7, 9번 홀에서 버디를 추가한 필상은 프런트 나인을 마친 결과 -14로 공동 3위로 올라섰다.

미켈슨은 -13으로 공동 5위까지 치솟았다.

-16 브라이슨 디샘보

-15 저스틴 토마스

-14 공필상, 더스틴 존슨

-13 필 미켈슨 외 3명

다들 화려한 불꽃 쇼를 공연하는 가운데 우승에 다가간 선수들이 더는 안전한 샷을 고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특히나 1, 2위로 마지막 라운드를 출발한 미국 출신의 두 선수, 디샘보와 토마스는 바짝 추격한 두 선수의 이름을 보는 순간 진땀이 났을 것이다.

더스틴도 다들 인정하는 최고의 선수지만 필상의 추격은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전반에만 무려 6타를 줄였네요. 두 선수 모두.

-이젠 그야말로 우승 경쟁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죠. 하하하.

-그래도 앞서 나가기 때문에 한 타라도 더 줄여야 될 것 같은데, 지금 기세라면 얼마나 줄일 수 있을까요?

갑작스러운 그 질문은 참으로 어려웠다.

아무리 전문가라도 쉽사리 타수를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기회이기도 했다.

어차피 시청자들이 바라는 것은 뻔하다.

자신들이 응원하는 선수의 우승.

그렇다면 되든 말든 일단 지르고 봐야 하는데, 잠시 멈칫한 허 위원은 정답을 제출하지 못하고 중용을 택하고 말았다.

-4타 정도 줄이지 않을까요?

-에게……. 4타요?

캐스터는 물론 시청자들도 입가에 쓴웃음에 절로 지어졌다.

허 위원이 전문가적인 견해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은 이해하지만 너무 고지식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대답이 나온 근거를 들어보니 그럴 듯했다.

지난 3일간의 통계를 보면 대체로 프런트 나인이 쉬웠고 백 나인은 어려웠다. 그 차이가 거의 2타라는 것이 그의 신중함의 근거였던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4타를 줄이면 과연 필상이 우승을 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현재 선두가 3타만 줄이면 우승은 물 건너가기 때문이다.

-2018시즌 우승자인 디샘보가 이 노던 트러스트 대회에 유난히 강하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그가 우승할 때 백 나인에서 3타를 줄인 기록이 있군요. 물론 이 코스는 아니지만.

막상 말을 꺼내고 보니 찜찜한 내용이었다.

자신의 예측대로라면 필상이 우승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반에 접어든 필상의 경기 양상은 기가 막히게도 허 위원의 예측대로 흘러갔다.

12, 13번 홀에서 버디를 잡으며 기세를 올린 필상이 14, 15, 16번 홀을 지나며 계속 아쉬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정확한 샷이 구사되었지만 그린에 오른 공이 애매하게 흘러 라이가 어려웠고 퍼팅마저도 홀컵을 아슬아슬하게 외면하면서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디샘보가 -18이야. 이번 홀에 승부를 걸어.”

17번 홀로 향하던 미켈슨이 강하게 권했다.

그는 후반 들어 좀처럼 타수를 줄이지 못해 우승 경쟁에서 멀어졌다. 2홀 남기고 5타를 뒤집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필상은 그렇지 않음을 피력한 것이다.

다른 선수의 성적은 일부러라도 신경 쓰지 않았으나 그 말을 듣고도 담담할 수는 없었다.

“그래야겠네요. 고맙습니다.”

“왜 이래. 선수끼리. 하하하.”

승부를 걸기 부담스러운 이유는 17번 홀은 무려 595야드의 굉장히 긴 홀이기 때문이다. 장타자라도 2온을 노리는 것은 어렵다.

280야드 근방에서 좌측으로 휘어지는 도그렉 홀이며 310야드를 넘으면 페어웨이가 급격히 좁아지고 완만하게 S자로 꺾이는 부분도 있어 득보다는 실이 많다.

“정말 2온을 노리시려고요?”

“응.”

“그럼 좌측 벙커를 봐야겠네요.”

미사키는 말릴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굴곡을 따라가면 420야드에 위치한 페어웨이 벙커를 바로 언급했다. 그녀도 우승에 대한 염원이 간절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필상의 안타까운 모습을 곁에서 생생하게 지켜보고 있는 마음은 타 들어가는데 언론의 부당한 난도질에 치가 떨렸기 때문이다.

“좋아. 한 번 도전해 보자고.”

도전이라는 단어에 용기가 샘솟았다.

사실 그 벙커는 직선거리로는 392야드에 위치한다. 때문에 400야드를 염두에 준 필상은 벙커가 아니라 벙커 우측을 보는 것이 옳은 에이밍이다.

하지만 필상은 그녀가 말한 방향대로 섰다.

바람이 강하지는 않지만 높고 긴 궤적을 따라가야 하는 이번 타구는 슬라이스 바람의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승 경쟁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팬들은 이번에야말로 필상의 장기인 장타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빈 스윙이 보기 드물게 강력했으며 에이밍도 장타를 가리키고 있어서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벌타를 2개나 먹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는데, 정말 화딱지가 납니다.”

“성호 씨. 이럴 게 아니라 어서 호텔로 가요.”

“호텔이요?”

“모모코를 데려와야 하잖아요.”

“아! 그러네요.”

설사 필상이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이곳까지 온 모모코가 마지막 장면을 함께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잠이 부족해도 도중에 나타날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자 데리러 가는 게 적절하다고 봤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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