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05화 (205/354)

205. 비범함은 어디에

“제 최장타 신기록이에요!”

“페어웨이가 아니야.”

“치!”

페어웨이를 지켰다면 소중한 기록으로 남을 뻔했다.

물론 바람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가용한 힘을 모두 쏟아낸 타구감은 확실히 이전보다 강력해졌음을 느꼈다.

자신의 피와 살이 떨어져 나간 것 같은 소중한 아이를 낳았고 오랫동안 운동을 하지 못했기에 과거만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필상이 바쁜 와중에도 자신에게 많은 정성을 쏟았고 곁에서 늘 따스한 사랑을 나눠줬기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만하면 만족해요!”

“다행이네.”

실망과 희망이 교차한 경기였고 이제 자신에게 남은 홀은 3개밖에 없지만 필상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자신과 함께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든 갚고 싶었던 것이다.

본인의 경기도 중요하지만 모모코가 하루 빨리 과거의 모습을 찾아 꿈을 이뤄 가는 것이 필상에게도 소중했던 것이다.

물론 사랑하기 때문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전과 달리 감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을 이해하면서도 또한 강하게 질타하기도 했다.

“전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을래요.”

“왜? 같이 일정을 소화하면서 연습하면 되잖아.”

“한 달은 너무 길어요. 수미도 보고 싶을 거고 그냥 편하게 최 이사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될 것 같아요.”

의외였다.

필상이 가는 길이라면 형편이 허락하는 한 어디든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일정의 대부분의 연습이다.

함께 샷을 가다듬으면서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데, 단 한 마디에 사족을 붙일 수 없었다. 바로 수미가 보고 싶다는.

엄마가 어련히 잘 돌봐 주시겠느냐마는 아빠가 자리를 비운 사이, 모모코라도 갓난아이의 곁을 지키는 것이 바람직했다.

“최 이사님은 요즘 바쁠 거고 적당한 코치를 알아봐 줄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할 테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른 의미도 있음을 알았다.

아무래도 아내와 함께 움직이면 이래저래 신경을 쓸 수밖에 없기에 오로지 시합에만 집중하라는 뜻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려했지만 모모코는 경기에 대한 화제로 말을 돌렸다.

“대체 얼마나 날아간 거예요?”

“음……. 화단이 없었다면 390야드를 넘었을 거야. 지금은 368야드.”

“히히히…….”

차분하게 칩샷을 붙여 버디를 낚았다.

또한 마지막 홀에서도 집중력을 발휘해 1타를 더 줄였다.

최종 스코어 -2,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한 후회 없는 경기였기에 경기를 마친 두 내외는 뜨겁게 포옹했다.

“수고했어.”

“고생은 오빠가 다 했죠. 고마워요.”

“그럼 연습장에서 남은 선수들의 결과를 기다려 볼까?”

“아니요. 우리 샤워하러 가요.”

그 말은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경쟁자들이 -2까지 내려올 것 같지 않다는 확신에 찬 분석이었다. 아쉬웠지만 동의한 필상은 스코어 카드를 제출하고 브리티시오픈을 그렇게 마무리했다.

[모모코 단독 3위.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다.]

[아쉽지만 다음이 기대되는 경기 내용, 모모코의 재도약을 기대한다.]

대체적인 평가가 좋았다.

-5를 지킨 신지애는 이 대회 3연패를 이뤄 냈고 김세영도 마지막까지 경쟁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했다.

하지만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선수는 단연 모모코였다. 단지 필상의 아내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인이 쌓은 커리어에 어울리는 우월한 경기력을 증명해 냈기 때문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우에하라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낸 것에 대해 일본 언론도 요란한 반응을 드러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JLPGA를 나가지 않겠다니?”

“오빠랑 다른 이유에요. 일본이 가깝다지만 보고 싶을 때 수미를 보러 달려올 수 없는 거리는 싫어요. 적어도 백일은 지나야 저도 마음 편하게 일본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결국 내년 시즌에나 가능하다는 말이다.

할 말이 없었다.

누구보다 일본 팬들 앞에 서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갓난아이를 두고 멀리 갈 수 없다는 모정(母情), 부끄럽고 또 미안해 그저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필상은 미국행 비행기에 먼저 오를 수밖에 없었다. 한시가 급해 모모코가 한국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오르는 것도 지켜보지 못하는 심정이 찹찹했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말은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1500만 달러 꼭 벌어 오셔야 해요!”

페덱스 컵 최종전 승리 보너스가 1500만 달러다.

이미 평생 쓰고도 남을 거금을 벌었기에 그저 돈을 벌어오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왕 장시간을 비울 바에는 반드시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라는 응원이었다.

물론 많이 벌어다 줘서 싫어할 아내는 없지만.

각오를 다진 필상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곧바로 다음 경기 대비에 들어갔다.

페덱스 컵 시리즈는 3차전으로 이어진다.

첫 관문인 노던 트러스트는 페덱스 컵 상위 125명만 출전해 70명이 2차전인 BMW챔피언십에 오르고 다시 최종전인 투어챔피언십에는 30명만 올라가 최후의 승자를 가린다.

“싹쓸이하면 1960만 달러인가?”

각 대회 우승상금이 162만 달러에 최종우승 보너스를 합하면 그런 총액이 나온다. 하지만 스폰서에서 제공하는 우승 보너스를 더하면 2500만 달러를 훌쩍 넘게 된다.

단 3주 동안 그런 거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야말로 돈 잔치인 것이다.

이미 PGA 투어에 출전해 5승을 기록한 필상은 상금 순위 1위였다. 하지만 3개 대회를 휩쓸면 단 9개 대회만 참가해 타이거가 달성했던 한 시즌 상금 최고액을 돌파하게 된다.

노력한 것에 비하면 너무 거금을 버는 것이기 때문에 약간의 김칫국을 마시는 상상을 하며 잠을 청했다.

* * *

“프로님. 여기요!”

“어서 오십시오. 형님.”

“너희 둘이 마중을 나오니 든든하구나.”

아쉽게도 JFK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은 측근 2명뿐이었다. 왜냐면 필상이 뉴욕에 도착한 화요일은 출전 선수들의 이벤트 라운드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타이거나 미켈슨도 참가하기 때문에 오고 싶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 대신 200여 명의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난감하던 차에 기자들을 통제하는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필상을 보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그녀는 다름 아닌 이 대표였다.

“온다는 말씀 없었잖아요.”

“모모코가 한국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너무 늦게 들어 갑자기 일정을 잡느라 그랬어요. 설마 꼴도 보기 싫은 건가요?”

“무슨 말씀을! 고맙습니다. 하하하.”

모모코와 동반하지 못할 경우 그녀라도 있어야 했다.

휴식기에는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3주 연속 대회를 치르다 보면 언제 다시 위험이 찾아올지 알 수 없다.

당연히 모모코가 따라올 줄 알았기에 미처 상의도 하지 못했다. 부작용이 나타났을 때 이 대표가 도와주는 것에 대해.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게다가 입이 무겁고 신중한 그녀라면 본인들이 떳떳한데 찜찜할 이유는 없었다.

“기왕이면 3개 대회 모두 이기고 싶습니다!”

거의 핵탄두급 발언이었다.

필상의 탁월함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3주 연속 우승을 하겠다는 말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할 줄은 기자들도 몰랐다.

필상도 이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지 않는다.

언론은 물론 동료들도 지나친 자신감이라고, 마치 자신을 모욕한 것 같은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발언은 배수의 진이었다.

절대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승부에 임하겠다는.

여하튼 모두에 그 발언을 하는 바람에 인터뷰 내내 공격적인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갑자기 왜 그런 거죠?”

“글쎄요……. 많이 피곤했나 봅니다.”

대외적인 사무를 처리하는 이 대표와 사전에 상의하지 않고 터트린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어 그렇게 대충 넘기려 했다.

다행히 이 대표는 긍정적으로 받아넘겼다.

“이뤘을 때의 극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라면 대성공이지만 만에 하나 그렇지 못하면 생각보다 훨씬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몰라요.”

“만에 하나라고 해 줘서 고맙습니다. 하하하.”

어쩌면 그녀는 필상 본인보다 더 필상을 신뢰할지 모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도 그녀는 필상의 가치를 알아봤다.

지금까지 오는 과정이 쉽지 않았으나 필상이 한 번도 어긋난 판단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지만 용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 *

소문은 필상의 이동보다 빨랐다.

대회가 열리는 뉴저지 더 리지우드 컨트리클럽에 도착한 필상은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안면이 있는 선수들도 마주치면 일단은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어딘가 모를 싸한 느낌은 표현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미켈슨은 그나마 모른 척했지만 타이거는 언급했다.

“이해는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좀 심했죠?”

정면 돌파를 할 거라고 예상했는지 의외로 필상이 꼬리를 내리자 다들 한 번 크게 웃고 말았다.

하지만 언론은 생각보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나마 한국 언론은 자신감의 피력이라고 감쌌지만 기회다 싶었는지 일본 언론은 썩은 고기를 만난 하이에나 같았다.

‘어디 마음대로 떠들어 봐!’

다소의 후회가 없지는 않지만 일체 무시한 필상은 그 날 이후 거의 호텔에 머물며 두문불출했다. 늦은 만큼 더 매달려야 옳지만 지금 필상에게 필요한 것은 샷을 점검하는 것보다 긴 여정을 무사히 마치기 위한 완벽한 대비를 하는 것이다.

혹시 건강에 문제가 있는지 염려한 타이거와 미켈슨이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으나 필상은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실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연속 출전에 대한 부담이 여전했고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부작용을 잠재우기 위해 자신과의 사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잡힐 듯 잡힐 듯, 조금만 더 안정이 되면 될 것도 같은데 결국 만족한 결과는 얻지 못했다.

-공 프로가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요?

-하하하. 이제 첫 라운드일 뿐입니다.

페덱스 컵 시리즈를 여는 첫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필상은 웬만한 파 4홀에서는 모두 1온을 노렸다. 투어 최고의 장타자가 시원한 샷을 펑펑 날리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통쾌하게 해 줬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특유의 정확성이 받쳐 주지 못해 이글도 하나 나왔지만 좀처럼 보기 드문 보기를 여러 개 기록하는 롤러코스터 라운드를 연출했다.

그래도 다들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필상은 누가 뭐래도 현역 최고의 선수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가 타는 이도 있었다.

“프로님. 바쁜 일 있으세요?”

“왜?”

미사키의 한마디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표현이었다.

3인 1조로 경기하기 때문에 서두른다고 먼저 집에 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지 않은가.

그만큼 필상은 평소와 다른 공격적인 샷을 구사했다. 만약 결과가 좋다면 굳이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두 홀 건너 버디를 하나씩 낚고 있지만 어렵게 번 타수를 너무도 쉽게 잃었다. 14번 홀을 마친 상황에서 보기가 5개나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너무 샷을 서두르시는 것 같아서요.”

“이상하게 마음이 급하네. 조절이 잘 안 돼.”

“연습을 안 하셔서 그런 건 아닐까요?”

“그런가?”

이후 티샷은 아예 드라이브를 잡지 않았다.

3번 우드로 티샷을 했으나 양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3번 우드로 동반자들보다 더 멀리 보냈으나 특유의 정확한 아이언 샷이 터지지 않았다.

결국 1라운드를 -2로 마쳤다.

공동 29위, 크게 나쁜 성적은 아니나 우승을 장담해도 이상하지 않은 현역 최고 선수의 성적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샤워를 마친 필상은 연습장으로 향하지 않고 호텔로 바로 돌아갔다.

“대표님. 아무래도 한 번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네. 제가 가 보고 싶지만 제 말이 먹힐 것 같지 않습니다.”

미사키도, 성호도 안절부절못했다.

필상이 너무도 평소와 다른 플레이를 이어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대표에게 어떻게든 해 보라고 권했지만 그녀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지켜봐요. 그가 언제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있던가요?”

“그렇기는 하지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이 대표의 말대로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오늘도 똑같은 것 같은데요?”

“아니. 더 안 좋아 보여.”

“대체 왜 저러죠?”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아.”

“그럼 억지로라도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요?”

“그런 문제가 아닐 거야.”

2라운드 내내 필상을 따라다니며 상태를 확인하는 이 대표와 성호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스코어는 어제보다 낫다. 하지만 샷이 너무 들쭉날쭉했다. 환상적인 샷이 터지는가 하면 평소에 전혀 없던 탑핑이 나오기도 하고 뒷땅도 때렸다.

[-5. 예선 종합 공동 25위. 그의 비범함은 어디에?]

필상의 부진에 대한 건강 이상설이 가장 설득력을 얻었다.

하지만 당치도 않은 의견도 나왔다.

가정 불화설, 영국에서 함께 단란한 모습을 보였던 모모코가 다른 대회에 출전한 것도 아닌데 남편을 따라오지 않고 한국으로 귀국한 것을 지적했다.

둘이 심하게 다투는 장면을 봤다는 증언도 나왔다.

그런 기사를 확인한 측근들은 애가 탔지만 필상은 그 어떤 기사의 내용도 알지 못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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