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한국 며느리
-와! 정말 기가 막힌 각도 아닌가요?
-마치 의도적으로 드로우 샷을 건 것처럼 휘네요. 바람을 가늠하기 힘든 와중에 아주 절묘한 판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우리 공 프로가 코치를 하고 있으니까요!
타구는 아슬아슬하게 그린 앞 우측 벙커를 피하더니 급기야 굴러서 그린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깃대를 향해 힘차게 구르는데 경사를 타고 그 방향마저도 정확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갤러리들은 홀인을 힘차게 외치기 시작했다.
“아! 오버한 거죠?”
“응. 살짝. 언덕을 넘은 건 아주 잘된 것 같아.”
“오늘은 뭔가 잘 풀리는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하하하.”
타구는 이단 그린의 첫 번째 둔덕을 넘어섰다.
샷 지점에서는 공이 어디에 멈췄는지 잘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버디는 보장된 지점까지 굴러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린을 향해 걸어가던 필상과 모모코는 팬들의 끊이지 않는 박수를 받으며 어쩌면 손쉬운 이글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오빠! 저거 좀 봐요!”
“하하. 좋네. 침착하게 라이를 살펴 봐.”
놀랍게도 3야드가 조금 넘는 거리의 이글 찬스였다.
하지만 그린 위에서의 플레이는 선수의 몫이다. 라이에 대한 조언을 얹고 싶지만 모모코 스스로 판단해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 그녀를 위해서라도 낫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시작일 뿐, 모모코는 이 날 이후 다시 저 홀로 외로운 전장을 누비고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동반자들이 플레이가 지연되면서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경사를 읽은 모모코는 특유의 밝은 표정을 되찾았다.
뭔가 깊이 생각할 때면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고 아미를 살짝 찌푸리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를 것이다.
“누구 마누라인지, 정말 깜찍하네. 하하하.”
이제 겨우 21살이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다는 말을 들으면 장난하느냐고 화를 낼 깜짝한 미모다.
가족들과 있을 때는 수더분하게 착한 막내딸처럼 굴지만 필드에 나오면 그녀는 그야말로 비교가 불가한 퀸이 된다.
뭇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탁월한 미모와 패션 감각, 거기에 파워풀한 스윙과 남다른 실력, 매혹되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런 여인을 1년 가까이 집에 묶어 놨으니 그 책임은 절대 가벼울 수가 없다. 하지만 필드에 나와 자신의 존재감을 서서히 찾아가는 그녀를 보자 가슴이 뭉클했다.
‘한국 며느리?’
일본 골프계는 세계 여자 골프계를 장악한 한국 여자 선수들에게 대항할 모모코가 드디어 다시 기지개를 켰다고 떠들썩했지만 한국 언론은 구수한 표현을 사용하며 애정을 드러냈다.
좀처럼 우호적이기 힘들지만 그녀가 결혼 후에 보여 준 행보는 칭찬을 받아 마땅했다. 여주 고향집에 들어와 가족들과 함께 살며 한국에서 출산한 것부터 시작해 필상의 성공을 든든하게 지원하는 내조 또한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두가 염려하는 가운데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재기 전에 나선 것도 인간 승리라고 추켜세웠다.
“인 더 홀!”
스트로크가 이뤄져 공이 구르기 무섭게 팬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응원 소리가 빗발쳤다.
살짝 내리막 뒤에 오르막이며 반 컵 정도 좌측을 봐야 하는데, 정확히 읽어 낸 모모코는 흔들림 없는 과감한 터치를 보여 줬다.
다소 강한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홀컵 뒷벽을 땅 때린 공이 만들어 낸 잔음이 그렇게 청명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글 퍼팅이 들어가는 순간, 그린 주변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난리가 아니었다.
-와! 이글 접수! 졸지에 이븐파로 올라서는군요.
-이번 대회 들어 첫 7개 홀에서 4타를 줄인 선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이렇게 비바람까지 몰아쳐 스윙에 집중하기도 힘든 판에 정말 필드의 여신이라고 불릴 만하네요. 하하하.
-이제 허 위원께서도 그런 표현을 다 쓰시네요?
-제가 웬만해서는 통속적인 표현은 자제를 하는 편이죠. 하지만 이건 정말 너무 환상적이지 않나요?
-물론입니다. 한국의 며느리, 여주 며느리, 모모코 양의 눈부신 선전에 일본 방송들도 지금 굉장히 흥분했다고 합니다. 벌써 역전 우승까지 언급하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역시 과장과 오버액션을 좋아하는 특성이 드러나는군요. 하지만 솔직히 제 마음도 다르지 않습니다. 11타 차라면 모르지만 7타 차는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말을 뱉고 보니 좀 과했다.
현재 상위권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강자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모모코를 응원하느라 한국 선수에 대한 평가절하를 하게 된다면 그 대가는 굉장히 치명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시간 댓글 창에는 허 위원의 해설에 공감을 표하는 팬들의 격려와 응원이 미처 읽을 새도 없이 흘러내려 갔다.
모모코를 그 누구도 일본 선수라고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하기야 필상이 직접 백을 메고 캐디를 보고 있기 때문에 모모코는 이미 일본인이 아니었다.
한국에 시집와 이미 우리 편이 된 아주 바람직한 여인일 뿐인 것이다.
“정말 멋진 터치였어.”
“히히히. 톱 10에 들어갈 것 같죠?”
“당연하지. 하지만 침착하게 한 홀 한 홀 가자고.”
“알았다고요. 히!”
적어도 실전 감각만큼은 확실하게 돌아왔다.
필상과 나란히 발을 맞춰 성큼 성큼 걷는 걸음에 자신감마저도 느껴졌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선두권의 성적이 궁금했다.
이미 모두 다 출발을 했을 것이고 첫 몇 홀의 성적이 모모코의 우승 가능성을 가늠하게 될 것이다.
물론 녹록한 선수는 없다. 특히나 김세영이나 유소연, 신지애는 실력뿐만 아니라 노련한 경험까지 갖춘 선수들이다.
절대 빈틈을 보이지 않을 테지만 골프가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는 운동인가?
‘만약 5타 정도만 더 줄일 수 있다면 우승 경쟁에 끼어들 수 있을 텐데!’
하지만 8번 홀은 세컨샷이 좀 짧았고 156야드의 파3, 9번 홀은 4야드에 붙이고도 버디를 놓치며 큰 아쉬움을 남겼다.
그런데 프런트 나인을 마치고 이동하던 도중, 선두권 선수들의 성적을 크게 표시한 대형 보드를 마주하게 되었다. 때마침 제일 아래 줄의 열 번째 선수 이름이 바뀌고 있었다.
-5 김세영, 신지애
-4 아리아 주타누간, 넬리 코다
-3 유소연, 아야코 우에하라
-1 안젤라 스탠포드, 엔젤 잉, 카트리나 매튜
0 미우라 모모코
“오빠! 저기 제 이름이?”
“어허! 드디어 공동 10위까지 올라섰나 봐.”
모모코보다 상위에 28명이 있었지만 파격적인 굿 샷을 연거푸 터트리며 4타를 줄였기 때문에 톱10 근처에 다다랐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대다수의 선수들이 타수를 잃기 쉬운 악천후였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더 높다고 생각했는데, 선두권의 성적을 알 길이 없어 좀 답답했었다.
그런데 확인해 보니, 거의 모든 선수들이 초반에 내리막을 탔다. 몇몇은 완전히 무너져 모모코보다도 뒷줄로 밀려났다.
특히나 남은 홀이 더 많은 선두권 선수들이 흔들리고 있다면 얼마든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수록 더 차분하게.”
“네.”
대답은 똑 부러졌지만 실제 스윙은 받쳐 주지 못했다. 선두권이 더 떨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븐파로는 경쟁이 불가능해 몇 타라도 줄여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흐윽!”
11번, 540야드 파 5홀은 장타자인 그녀에게 기회의 홀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티샷이 페어웨이를 지키지 못했다.
결국 2온을 포기하고 세 번째 샷을 핀에 붙여 버디 기회를 만들 전략을 취했으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50야드 웨지 샷에서 모모코는 엉뚱하게도 뒤땅을 때리고 말았다.
기껏 잡아 놨던 스윙 리듬이 흩어졌고 좋았던 샷 감각이 우승이라는 환상이 눈앞에 펼쳐지자 욕심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제까지 격려로 일관했던 필상은 마음은 아프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어림도 없어.”
“네?”
“우승은 꿈도 꾸지 말라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말을…….”
“보통 캐디라면 할 수 없겠지. 하지만 난 당신 코치잖아. 만약 1년을 쉬고 단 몇 주 만에 나왔는데도 당신한테 따라잡힌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냐?”
“왜 이래요?”
“신지애가 부족해? 김세영의 실력이 부족해? 아니면 유 프로가 당신보다 샷이 안 좋을 것 같으냐고!”
“…….”
모든 집중력을 발휘해도 따라잡기 어렵다는 것을 확실히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저 긍정적인 바람만으로 요행을 바란다면 그건 도리어 경쟁자들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평생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달려온 그녀들에게도 메이저 대회인 이 대회의 우승은 소중하고 값진 결실이다.
하물며 꼭 필요한 순간에 자신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는 모모코가 우승을 바라는 것은 필상으로서도 기껍지가 않았다.
갑자기 냉랭해진 필상의 태도에 속이 상한 모모코는 샌드웨지를 들고 4번째 샷 위치로 이동했다. 웃음기가 사라진 그녀에게서 더는 들뜬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이스 어프로치!”
“…….”
다행히 핀에 바짝 붙여 칭찬했지만 퍼터를 건네받은 모모코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그린으로 향했다.
‘삐쳤나?’
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설사 자신에게 감정이 상하더라도 주어진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모든 것을 쏟아부을 때였다.
파를 기록하고 위기를 모면한 모모코에게 극약 처방은 일단 효험이 있었다. 흥분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지 않은 힘이 빠진 스윙으로 타수를 잃지는 않았으나 줄이지도 못했다.
그렇게 어느새 16번 홀까지 와 버렸다.
“모모코.”
“왜요?”
“승부를 걸 타이밍이야.”
“승부요? 어림도 없다면서요!”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당신의 존재감은 확실히 심어 주고 가야 하잖아.”
“제 존재감이요?”
“그래. 1온 노리자.”
“…….”
무려 349야드 파 4홀이다.
비록 해안을 등져 뒷바람이 부는 홀이지만 그 어떤 선수도 감히 이 홀에서 1온을 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필상의 입에서 미들 홀 1온이 언급되는 순간, 모모코의 입가에는 억누르고 있는 미소가 살짝 비쳤다.
자신은 이미 삐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절대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필상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드라이브를 받아 든 그녀는 방향을 틀어 자신이 걸어갈 16번 홀을 훑어보며 필상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방향이나 샷의 크기를 비롯한 티샷을 위한 관련 정보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
“어서요.”
“뭘?”
“어디를 얼마나 봐야 해요?”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필상이 팔짱을 풀자 그의 두 손에는 손가락 하트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걸 쭉 모모코에게 내미는 행동은 지극히 유치해 보였다.
하지만 장타가 필요한 모모코를 안심시키기 위한 배려였다. 모모코의 활짝 핀 미소를 확인한 필상의 입이 열렸다.
“그냥 핀 방향으로 치면 돼. 샷의 크기는 90%!”
“90%? 349야드인데 충분할까요?”
“응. 난 그린을 넘어 막창이 날까 걱정이야.”
“치!”
필상의 요구대로 때리면 290야드가 정상이다.
아무리 바람이 강해도 그린에 올라갈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물론 핀을 바로 보고 때리기 때문에 짧아도 좋은 칩샷 거리가 남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티 그라운드에 올랐다.
-초반 분위기는 아주 좋았는데 이후로는 좀 아쉽네요.
-아쉬울 거 없습니다. 어차피 11타를 뒤집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요! 10타 차 역전 우승은 가끔 나오지 않나요?
-그렇죠. 10타 차는 극복한 기록이 여러 번 있지만 11타 차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찬물을 끼얹는 해설이었다.
아무리 운이 따르고 실력이 출중해도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 분명 초반 분위기는 좋았지만 모모코는 주춤했고 선두권은 좀처럼 타수를 잃지 않았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지켜봤는데 통계를 들이대는 순간, 부질없는 꿈이라는 생각에 모모코를 응원하던 팬들은 마음을 접었다.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모모코의 힘찬 16번 홀 티샷을 쳐다보던 팬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벌떡 일어서거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강하게 때린 샷이기는 하지만 떨어질 것 같던 타구가 계속 쭉쭉 뻗어 나가는 광경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90%로 치라고 했잖아.”
“짧을 줄 알았어요. 설마 오버할까요?”
“응. 화단에 들어가지 않으면 다행일 텐데…….”
그린 뒤쪽 25야드 후방에 나무와 꽃이 우거진 화단이 있었다. 필상의 말을 들었지만 모모코는 아무리 길어도 거기까지 들어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핀까지 349야드인데 그걸 넘기는 것은 웬만한 남자 프로들도 어려운 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놈의 바람은 골프공을 마치 바람에 실려 가는 나뭇잎처럼 멀리 데려갔다.
그러더니 그린에 떨어뜨렸다.
절로 악 소리가 터질 말도 되지 않는 비거리였다.
-어어! 저게 지금 말이 되나요?
-자연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 모모코는 거의 300야드에 가까운 샷을 날리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캐리가 무려 292야드나 찍혔습니다.
-아이고! 그냥 그린을 오버해 버리네요.
다행이라면 화단까지 튀어 들어갔던 공이 나무 가지에 정통으로 맞고 다시 튀어나왔다는 것이었다.
바람이 작용한 것은 알지만 그래도 너무 어마어마한 장타에 갤러리들의 탄성이 그칠 줄을 몰랐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