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03화 (203/354)

203. 그녀를 위해서라면

“오빠. 저 숙소로 데려다 줘요.”

“숙소에?”

“너무 창피해서 연습장에 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무슨 말이냐며 다그치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 꾹 참은 필상은 일단 장비를 모두 챙겨 차에 실었다. 그리고 운전해 간 곳은 호텔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 위치한 페어헤이븐이라는 다른 골프코스였다.

“내려.”

“싫어요. 호텔로 데려다 줘요.”

“나랑 둘이 라운드하기 싫어?”

“둘이요?”

“응. 경기는 잊고 그냥 나랑 공 치면서 놀자.”

하고 싶은 말은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좋은 그 어떤 말도 듣는 사람이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모든 것을 잊고 그저 모모코와 라운드를 즐겼다.

지치고 힘들어하던 그녀도 몇 홀이 지나자 얼굴이 풀렸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쾌활한 모습을 되찾았다.

“오빠. 내가 참 바보 같죠?”

“무슨 소리야. 난 바보를 사랑한 적이 없는데?”

“뭐에요? 나 말고 다른 애인이라도 있단 말이에요!”

“그런가?”

“에이 진짜!”

오늘 부진했던 경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둘만의 오붓한 라운드를 마치고는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먹었고 호텔로 돌아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잠들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나 함께 경기가 열리는 로열 리담 앤 세인트 앤 골프클럽으로 향했다.

어제는 오전 경기였지만 오늘은 오후 티오프라 연습할 시간은 충분했다. 적어도 오늘 이븐파는 쳐야 컷 오프를 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압박감은 상당했다.

그러나 필상도 모모코도 그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오로지 스윙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좋았던 감각을 찾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번 대회는 묘하게도 한국 선수들의 성적이 부진하네요.

-이제 2라운드가 진행되고 있을 뿐입니다. 얼마든지 치고 올라올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응원하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겠죠? 그런데 우리 공 프로 내외의 경기력은 어떤지 참 궁금합니다. 성적이 부진하기 때문인지 좀처럼 화면에 잡히지 않아 기록만 보고 있는데, 은근히 걱정이 되네요.

-너무 이른 출정이라는 말이 있고 어제에 이어 오늘도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이지만 어쩌면 우리가 잘못된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시죠?

-출전하면 무조건 우승하는 것이 목표라고들 생각하는데, 그게 골프의 전부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좀 특이한 접근법이었다.

프로 선수라면 당연히 우승을 바라고 출전하지만, 또 워낙 인지도가 높은 선수라서 좋은 결과가 당연시 되지만 실제 모모코가 처한 상황은 그러기 힘들다.

그걸 잘 알면서도 좋은 성적을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팬들의 이기적인 바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저 경기 감각을 익히기 위해 출전할 수도 있는 것이며 골프 자체가 좋아 경기 자체를 즐기기 위해 나섰을 수도 있다.

성적 만능주의에 지나치게 침몰된 나머지 결과를 내지 못하면 마치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매도하는 것이 진정한 팬심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허 위원의 그 말에 많이 이들이 공감했다.

“이번 샷 좋았죠?”

“응. 스윙 템포가 아주 기가 막혔어.”

“고마워요.”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하하하.”

사실 모모코의 지명도를 고려하면 152야드 거리에서 온 그린을 한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버디를 낚기에는 충분치 않은 거리를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도 모모코도 활짝 웃으며 경기를 즐겼다.

누군가는 대회에 나선 프로의 자세가 아니라고 꾸짖을 수도 있지만 본인들이 만족하고 있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연습이 실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이스 버디!”

“안아 줘요.”

“에이!”

모모코가 8야드 롱 퍼팅을 집어넣었다.

갤러리들의 시선을 우려해 차마 감행하기 힘든 행동이었으나 눈을 질끈 감은 필상은 모모코가 원하는 대로 안아줬다.

경기 중에 무슨 징그러운 사랑 행각이냐며 질타가 쏟아질 것 같았지만 갤러리들은 오히려 열렬한 박수로 화답했다.

이번 대회 들어 처음 낚은 버디였기 때문이다.

후반 첫 홀이었으니 무려 28번째 홀에 이르러 처음 타수를 줄였다. 그동안 더블보기는 없었으나 보기만 7개를 기록하면서 실망과 좌절을 수없이 느꼈다.

원래 기량이 부족한 선수였다면 모를까, 팬들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선수가 받을 부담을 이해한 팬들이 급기야 그 심정을 내면화시킨 것이다.

“모모코. 파이팅!”

“힘내요!”

“고! 고! 모모코!”

그 어떤 응원보다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인지 이후 모모코의 샷은 점점 더 좋아졌다. 비록 버디는 없었으나 더 이상 타수를 잃지 않고 예선 2라운드를 +6으로 마쳤다.

중요한 것은 그 성적이 컷 탈락의 마지노선이라는 점이다. 공동 65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성적이지만 예선을 통과했다는 사실에 모모코는 또 한 번 필상의 품에 파묻혀 눈물을 한 움큼 쏟아 냈다.

우승을 놓치면 분을 삼키지 못하던 그녀가 컷 탈락을 모면한 것에 이렇게 감동하는 것을 보며 필상은 다시 한 번 골프라는 운동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건 인생이야!’

한 대회가 그러했고 한 라운드도 그러했다.

화려한 전성기가 있는가 하면 너무도 힘들고 고단한 라운드도 있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우승 여부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이룬 결과에 얼마나 만족하느냐는 점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모모코는 인간 승리를 거뒀다.

그녀의 등을 도닥여 주던 필상은 울던 와중에 던진 모모코의 한마디에 터지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선두랑 몇 타 차에요?”

“왜? 이제는 우승이 하고 싶은 거야?”

“도전해 봐야죠. 혹시 이틀 먼저 미국에 가지 못하게 된 걸 아쉬워하는 건 아니죠?”

“그러게 말이야. 내일 아침 비행기 예약했는데 미뤄야겠어.”

“정말이에요? 진짜 나쁘다!”

물론 농담이었다.

하지만 한껏 밝아진 모모코의 모습을 확인한 필상은 그녀의 바람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분석을 시작했다.

그래서 모처럼 모모코와 연습장 조명이 꺼질 때까지 샷을 끈질기게 가다듬었다. 군소리가 나올 법도 한데 모모코도 굉장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다음 날 드디어 언더파를 만들어 냈다.

북해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강했고 가끔 비를 뿌린 궂은 날씨도 좋지 않았으나 -2를 쳐 종합 +4로 올라선 모모코는 공동 29위까지 따라붙었다.

“주타누간과 김세영의 성적이 -7에요.”

“선두와 겨우 11타 차네?”

“겨우요? 흐흐흐……. 아무래도 목표를 수정해야 할 것 같아요. 톱 10진입으로.”

“하하하. 누가 알아? 하늘이 도와줄지.”

그 말을 꺼낸 이유는 일기예보를 미리 체크했기 때문이다. 비바람이 거세 다들 타수를 잃는다면 오히려 모모코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자신에게는 애써 봉합했던 초감각을 모모코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드러낼 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라운드가 시작된 아침, 과연 정상적인 진행이 가능할지 염려될 정도로 날씨가 험악했다.

“이런 날씨에도 경기를 진행한다고요?”

“이 동네는 원래 이런 날이 잦은가 봐. 어림도 없다던데?”

“에이. 예쁜 옷을 준비했는데.”

모모코는 오랜만에 노란 병아리가 연상되는 깜찍한 패션을 준비했다. 뭇 남자들을 설레게 했던 앙증맞은 그 사이즈를 다시 되찾은 것을 만방에 알리겠다나?

하지만 비바람 때문에 바람막이까지 걸쳐야 하는 걸 무척 아쉬워했다. 물론 필상은 하늘에 감사했지만.

여하튼 중무장을 하고 1번 홀로 나서는 모모코의 발걸음은 지난 사흘보다 확실히 당당했다.

-김세영 선수가 공동 선두이고 이 대회를 2번이나 접수했던 신지애 선수가 2타 차 공동 4위입니다. 게다가 유소연 선수도 -4로 공동 7위, 이만하면 우리 선수의 우승을 기대해 볼 만하겠죠?

-그러게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우리 선수들의 저력이 나타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인정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선수가 있죠?

-아! 한국 며느리 모모코 프로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첫날 +4, 둘째 날 +2, 그리고 어제는 급기야 2언더를 치면서 공동 29위까지 올라왔더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전 솔직히 경기 감각도 익히고 공 프로와 바람도 쐴 겸 나들이를 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출산 후에 몸을 추스르기도 힘든 상황에 어떻게 그런 성적을 내는지 역시 타고난 골프 여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하하.

모모코의 선전에 대한 칭찬은 아끼지 않았지만 우승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필상과의 여담을 한참 소개했다.

그러나 우승 경쟁자들이 아직 티오프를 하지 않은 상황에 카메라가 모모코의 경기 장면을 자주 비추게 되면서 중계진은 점차 흥분이 고조되어 갔다.

한 조에 편성된 펑 샨샨과 산드라 갈은 절대 만만한 선수가 아니다. 하지만 다들 비바람에 고전하며 타수를 잃는 가운데 오로지 모모코만은 신비로울 정도로 정확한 샷을 구사하면서 홀로 타수를 줄였기 때문이다.

“페어웨이 우측 끝에 있는 벙커보다 조금 더 우측을 봐.”

“그렇게 많이 봐야 해요?”

“응. 270야드 티샷을 할 거잖아.”

“정말 270야드 쏴도 돼요?”

“마음 놓고 질러. 지금 타수 잃는 것까지 신경 쓸 때는 아니잖아.”

“좋아요! 흐흐흐.”

6번 홀까지 2타를 줄였다.

동타였던 펑 샨샨과는 3타 차, 산드라 갈과는 4타 차로 벌렸다. 하지만 아직 출발하지 않은 선두와는 9타 차라서 샷을 아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까앙!

본시 장타자였다.

하지만 오늘 모모코는 자신의 남편이 누군지 자랑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장타를 마구 뽐냈다.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 관전하는 갤러리들이 우산조차 펴지 못하는 와중인데도 그녀의 장타는 어김없이 페어웨이 한가운데 떨어졌다.

-우와! 정말 아낌없이 때리는군요!

-278야드. 맞바람이 살짝 불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웬만한 남자 프로의 티샷 거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출산 후에 오히려 비거리가 늘어난 것 같지 않나요?

-하하. 그건 아닐 겁니다. 본래 저렇게 강하게 때리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가용한 힘을 모두 쏟아내는 것 같습니다.

-더 잃을 게 없다는 거군요!

그에 비해 평균 드라이브 비거리 260야드로 리그 중하위권인 펑 샨샨과 산드라는 완전히 기선까지 제압당해 250야드에도 미치지 못하는 티샷을 날렸다.

그런데도 페어웨이를 지키지 못해 갤러리들의 박수조차 이끌어 내지 못했다. 안 그래도 날씨 때문에 한껏 짜증이 났는데 홀로 진격하는 모모코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7번 홀은 502야드 파 5홀로 지금처럼 바람이 강하게 불 때는 아예 2온을 노리는 선수가 없다. 욕심에 대한 대가가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다.

비에 젖은 항아리 벙커, 그건 악몽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필상은 동반자들의 샷이 끝나기도 전에 3번 우드를 내밀었다.

“3번 우드요?”

“응. 이번에도 마음껏 때려 봐.”

“231야드밖에 되지 않는데 괜찮을까요?”

“슬라이스 맞바람이 생각보다 훨씬 강력해. 그러니까 우측 벙커를 노리고 낮은 탄도로 쏴.”

“알았어요.”

도그 렉 홀이라서 티샷은 바다와 비스듬한 방향이었으나 이번 샷은 바다를 우측으로 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탄도를 낮추면서까지 우측 벙커를 보는 것은 굉장한 부담이었다. 만약 휘지 않으면 너무도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샷을 준비하는 모모코의 표정에는 일말의 의심도 드러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필상의 에이밍을 따라 한 번도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우! 지금 2온을 노리는 건가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평소 같으면 5번 우드를 쳐도 될 거리지만 바람을 의식해 탄도를 낮추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지금 에이밍이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요?

-그럴 리가요! 지금 그녀의 캐디는 남자 골프 세계 랭킹 1위 공필상 프로입니다. 칼리미티에서 명장면을 만들어 냈던!

-아! 할 말이 없네요.

당시의 필상은 초감각을 개방하지도 않았다.

그저 몇 번의 라운드를 통해 경험적으로 쌓인 데이터에 기반하고도 그렇게 멋진 베스트 오브 베스트 샷을 만들어 냈다.

하물며 모든 감각을 개방한 지금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모모코가 필상의 공략만 따라 준다면 오늘 이 홀에서 유일한 이글을 기록할 선수가 될 것이다.

쉬익!

필상은 시원하게 휘둘러지는 모모코의 스윙을 보며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누군가의 샷을 보며 이렇게 감정적 동요를 느끼는 걸 보면 자신에게 캐디라는 직업은 운명이 아닌지.

어쩌면 사랑하는 모모코를 만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또 다른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총알처럼 쏘아진 타구에 시선을 옮겨갔다.

그녀의 우드 샷은 필상이 주문한 방향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다만 수시로 변하는 바람이 생각만큼 강하지 않아 위험천만한 방향에서 꺾이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필상은 강한 의지를 품어 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집념은 기어코 바람의 조화마저도 이끌어 내고야 만 것인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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