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위민스 브리티시 오픈
필상이 내년이면 충분하다고 언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여건이 차츰 무르익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필상이 출전하지 않으면서 흥행이 시들해진 JGTO가 10월에 한국에서 열릴 예정인 나이키 아시안 챔피언십에 대해 유난히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유러피언투어와는 상당한 진전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상금 규모가 크고 대회 일정이 겹치지 않기 때문이다.
유러피언투어로서도 매년 그런 대회를 하나 더 유치한다면 손해될 것이 없다. 오히려 확장성 면에서 투어에 참가하는 선수들에게 환영받을 일인지라 공동 주최에 대한 사안을 추인하기 위한 회의가 곧 열릴 것이라고 했다.
“수미는 할머니를 가장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빠 엄마를 도와주는 착한 아기네. 하하하.”
모모코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그건 엄마의 지독한 남아 선호 사상이다. 오죽하면 어릴 적에 필상만 챙기는 엄마의 편애가 너무 심해 누나들에게 수도 없이 꼬집혔다.
그게 발각이 나 세 누나가 나란히 오밤중에 집밖으로 쫓겨난 적도 있다. 꽤나 싸늘한 늦가을이었는데, 막내 누나는 그때 독감이 걸려 며칠간 학교도 못 가고 앓아누웠었다.
하지만 엄마는 끝내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엄마가 수미를 알뜰하게 챙기는 이유는 다름 아닌 필상과 모모코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서였다. 어서 손자를 안아 보려면 아들과 며느리가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야 하는 까닭도 한몫하리라 미뤄 짐작해 봤다.
* * *
“일본 오픈도 참가하지 않을 건가요?”
모모코와 비슷한 질문이 이 대표의 입에서도 흘러나왔다.
작년 우승자가 출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사적인 감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출전에 대한 압박이 들어오는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이 시기를 즈음해서 일본 언론의 부정적인 기사도 수그러들어 한 번쯤 출전을 저울질할 분위기도 조성되었다.
하지만 필상은 단호했다.
“관심 없습니다. 그보다 제주도 코스의 인수 건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필상이 아예 대꾸를 회피하자 이 대표도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건 단지 감정적인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코리안 투어 활성화, TPK 일본 사업 추진과 맞물린 전략적인 판단에 근거했으며 아직은 분위기가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상황에 괜히 어설픈 공격의 빌미만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현재 새롭게 추진 중인 새로운 코스 인수에 대한 화제로 전환이 되었다.
이미 동해안CC와 서해안CC가 불야성을 이룰 정도로 야간 골프까지 풀 예약으로 성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코스의 개발은 급한 과제가 되었다.
“인수는 어려울 것 같아요. 어디든 저희가 제주도에 상륙하면 덩달아 수익 구조가 개선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더 보수적으로 나오는 양상이에요.”
“내줄 생각은 없고 곁다리를 끼겠다는 놀부 심보로군요.”
“그래서 말인데…….”
초기 자본금을 무리하게 운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즉에 검토했으나 실제 오픈된 이후의 경영 상태가 워낙 좋아 고려하지 않았던 제안을 이 대표가 다시 꺼내 놨다.
위탁 경영, 무리하게 자금을 투입해 코스를 인수하지 않고 경영 상태가 좋지 못한 곳을 장기 임대해 운영하는 방안이다.
“이미 수익성이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비싸게 부를 가능성이 높겠네요.”
“그게 문제죠. 팔 생각은 없어도 임대를 주겠다는 제안은 상당히 많이 들어와 있어요.”
“그럼 최대한 돈을 들이지 않는 방안을 모색하죠.”
“장기 임대가 아니고요?”
필상은 TPK 직영 코스는 2개면 충분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직영을 늘리면 좋지만 그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는 좋은 모델을 금방 따라잡으려는 노력과 성과가 뒤따를 것이라는 판단 아래, 아예 새로운 모델로의 방향 전환을 제안했다.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방안으로 일괄 위탁 운영을 하되, 수익을 나누는 형태였다. 단, TPK 이름을 붙이려면 일정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했다.
그러면 단지 처음에 목표했던 3개 코스가 아니라 제주도에 2개, 남해안에도 2개, 그리고 지역별로 하나씩, 대략 10개 안팎의 코스를 운영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조건을 충족해야 되는 것이 걸리겠지만 엄청나게 많은 제안이 몰려들 것 같아요.”
“다다익선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철저히 옥석을 가려내야 할 겁니다. 대충 규모만 늘리다보면 결국 기존 방식과 구별될 수 없을 테니까요.”
“골프장운영자협회의 반발도 적지 않을 것 같기는 해요.”
“어차피 우리도 가입이 되어 있잖습니까! 내부로부터 좋은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개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이겨 낼 수 있어요. 결국 이익을 쫓는 자들이니까요.”
필상의 다음 스케줄은 PGA 페덱스 컵 시리즈였다.
때문에 3주간 한국에 머물며 TPK 코스들의 운영 상태를 직접 확인했고 새롭게 시작된 레슨 프로그램에 직접 참가해 일반인을 위한 레슨과 골프 꿈나무를 위한 훈련도 진행했다.
필상이 나타날 때마다 성황리에 진행된 프로그램은 서서히 자리를 잡아 가는 추세였고 그 바쁜 와중에 필상은 모모코의 훈련에도 바짝 정성을 들였다.
출산 전의 몸 상태를 단 2주 만에 완벽하게 복구했고 그녀의 스윙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제 궤도에 오르게 된 것은 두 부부의 뜨거운 사랑과 무관지 않은 것 같았다.
모모코가 훈련을 재개했고 스윙이 좋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처 생각지도 않았던 대회 초청이 빗발쳤다.
“대회 출전이라니요?”
“저도 너무 이르다는 건 알지만 들어온 초청이 있다는 것은 알려야 할 것 같아서요.”
이 대표가 직접 모모코가 훈련하는 페럼CC까지 찾아와 알리는 걸 보면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보지는 않는 것 같았다.
마치 필상과 같은 눈높이로 보는 것 같은데, 이건 아무래도 적절한 판단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귀를 쫑긋 세운 모모코는 그 내용에 대해 물었다.
“JLPGA인가요?”
“네. 일본 투어도 있고 KLPGA도 강렬히 원하지만 더 놀라운 소식이 있어요.”
일본과 한국이 아니라면 상상되는 곳은 하나뿐이다.
‘JLPGA의 퀸’으로 추앙받는 그녀의 가치를 안다면 다른 소소한 투어를 놀랍다고 말할 이 대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마?”
“네. LPGA에서 AIG Women's British Open에 출전해 달라는 초청장이 도착했어요.”
“끼야아악!”
모모코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곁에 있던 필상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브리티시오픈이 대단해도 이렇게 비명까지 지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느껴진 게 있었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그녀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절절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녀의 기쁨에 동참해 주고 싶었다.
“오빠! 들었죠?”
“응. 정말 놀라운 소식이네.”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요. 저 지금 너무 행복해요.”
그녀의 말투는 그저 그 소식에 기쁘다는 것일 뿐, 스스로 대회 출전은 무리라고 생각하는 뉘앙스였다.
그러나 필상은 도저히 그대로 놔둘 수가 없었다.
“대표님. 브리티시오픈 일정이 언제죠?”
구체적인 일정을 물어 오자 이 대표의 눈빛이 반짝였다. 물론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내자 모모코의 눈은 왕방울만큼 커다래졌다.
자신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필상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남편을 바라봤다.
“8월 첫 주에 열려요.”
“다행히 제 일정과 겹치지는 않는군요.”
“하지만 위민스 브리티시 오픈이 열리는 영국 프레스턴에서 미국 뉴저지는 절대 가까운 거리가 아니에요.”
모모코의 브리티시오픈 출전을 예상하고 왔지만 이 대표는 필상이 직접 챙길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바로 4일 뒤에 필상이 페덱스 컵 첫 대회인 노던 트러스트에 출전할 일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의 대답은 아주 담담했다.
“제 페덱스 컵 포인트는 충분하잖아요. 그리고 설마 아무리 힘이 들어도 제가 70위 안에 들지 못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야 그렇지만…….”
이 대표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 터지는 순간,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질 수가 없었다.
눈물을 글썽이던 모모코가 필상을 와락 껴안았기 때문이다. 정말 흐느껴 우는 바람에 필상의 티셔츠가 축축하게 젖었다.
“모모코. 진정해. 우리 연습해야 하잖아.”
“네. 흐흐흐…….”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를 모모코의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되었다. 하지만 필상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분명하게 말했다.
“당신의 골프백을 다시 맬 수 있게 되어 나도 정말 기뻐. 우리 연애하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 볼까?”
“히히히. 좋아요. 코치님!”
이 대표는 슬그머니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녀가 바라던 모모코의 출전은 성사되었고 더는 두 부부의 닭살 돋는 멘트를 보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부러워도 어쩔 수 없었다.
필상이 이룬 기적 못지않은 커리어를 쌓아 가던 모모코의 재기에 박수를 보내고 응원하며 알뜰히 지원하는 것이 그녀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회사로 복귀하는 그녀의 마음이 찹찹한 것은 단지 부러운 감정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영국에 같이 간다고?”
“네. 오빠가 제 복귀 경기를 도와준대요.”
“잘됐네. 암, 그래야 남편이지!”
“고마워요. 엄마!”
힘을 보태 준 엄마에게 달려들어 뺨을 비비는 모모코, 누가 그녀를 미워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필상과 모모코는 가족은 물론 전 국민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맨체스터공항에 도착한 두 사람을 맞이한 기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3주 전에 클라레 저그를 들고 돌아갔던 필상이 이번에는 아내를 위해 다시 영국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이미 모모코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두 선남선녀가 만들어 내는 멋진 포즈에 수많은 카메라가 플래시를 터트렸다. 뭘 찍어도 화보처럼 나올 멋진 그림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 *
“어머! 언니. 반가워요.”
“모모코. 예쁜 아기 낳은 거 축하해.”
“고마워요. 저 너무 오랜만에 필드에 나와서 너무 떨려요.”
“호호호. 그래도 잘할 것 같은데?”
대회가 열리는 밀턴 케인즈 CC에 도착한 모모코는 만나는 선수마다 먼저 인사하는 정말 대단한 붙임성을 보였다.
서양 선수들은 그냥 웃고 말았지만 그녀의 존재감을 아는 일본과 한국 선수들은 대부분 살갑게 대했다.
특히나 언제 친해졌는지 유소연과는 제법 수다스럽게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다. 서툰 한국말이지만 대화가 통하는 모습이 뒤에 앉아 있던 필상의 웃음을 자아냈다.
모모코와 수다를 떨던 그녀가 필상에게도 안부를 물었다.
“안녕하세요? 프로님.”
“아! 반갑습니다. 유 프로.”
“정말 너무 멋지신 것 같아요. 아내를 위해 이렇게 직접 영국까지 함께 오실 줄은 몰랐거든요.”
“오히려 제가 행복합니다. 모모코를 위해 뭐든 제가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다음 주에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신다면서요?”
“네. 좀 바쁘기는 하죠. 하하하.”
‘쩐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페덱스 컵 시리즈를 앞두고 있다. 각 대회 상금도 거대하지만 최종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보너스 1500만 달러는 보통 사람은 평생 쥐어 볼 수 없는 거금이다.
그래서 전력이 화려한 프로들도 모두 이 시기가 되면 모든 역량을 끌어올리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아내를 위해 캐디를 자처한 필상의 선택은 모든 여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동안 모모코를 희생시켰다고 필상을 매도하던 일본 팬들마저도 이번 결정에 박수를 보냈다.
“모모코. 아무리 기분이 좋고 설레도 절대 흥분하면 안 되는 거 알지?”
“그게 잘 안 돼요. 나 어쩌죠?”
“너무 신경 쓰지 마. 경기가 시작되면 나아질 거니까.”
모모코는 밝은 성격의 소유자다.
보수적인 일본 골프 전문가 중에 너무 천진난만한 그녀의 성격이 골프 선수로 대성하는 데 결정적인 단점이 될 것이라는 악담을 한 자도 있다.
하지만 필상을 만난 모모코는 일본 여자 골프의 역사를 다시 쓰는 위대한 기록을 남겼다. 오랫동안 정상을 지켜 온 강자가 아닌 신인 선수가 한 시즌 10승을 달성하지 않았던가!
당시의 기량이라면 LPGA도 씹어 먹을 것이라는 평가가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과 임신, 출산으로 이어진 공백기는 그녀에 대한 그런 평가를 까맣게 잊은 채, 너무 이른 복귀에 대해 염려하는 분석이 적지 않았다.
[모두를 절망에 빠뜨린 퇴장보다 더 갑작스러운 재기. 과연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까?]
[출산 후 3주 만의 대회 출전, 누구를 위한 쇼인가?]
많은 전문가들이 다시 경기에 출전한 것을 축하했지만 단순히 걱정하는 수준을 넘어선 부정적인 분석도 많았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것이라는 판단은 그녀가 이뤄 냈던 화려한 성적에 비해 기대 이하의 성적이 나올 경우, 원지 않는 침체기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쇼’라고 치부하는 마당이기에 막상 출전을 강행한 모모코도 느끼는 부담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필상은 욕심은 감추고 모모코를 최대한 편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냥 연습 라운드를 나왔다고 생각하자고.”
“네.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전 오빠랑 다시 필드에 나온 게 행복해요.”
“그래. 그런 기분으로 플레이하자고.”
모모코의 스윙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창 잘나갈 때의 샷은 아니라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편하게 경기에 임하고자 했지만 실전에 나서자 모모코의 전투 본능은 되살아났고 그게 오히려 악영향을 미쳤다.
연습 라운드에서 언더파를 기록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던 모모코는 결국 1라운드에서 4오버파를 기록하고 말았다.
69.28타로 평균 타수 부문 신기록을 달성했던 시즌과 비교하면 너무 아쉬운 성적에 특유의 밝은 표정마저 잃어버렸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