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특별한 나라
솔직히 갓 태어난 아이의 얼굴이 생각만큼 예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모모코와 무척 닮았다.
계란형의 얼굴형은 물론 작지만 앙증맞게 솟은 코, 작고 도톰한 입술, 인상을 찡그리는 눈가의 묘한 거만함까지도 빼다 박았다는 생각에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공수미. 수미라는 이름은 어찌 보면 흔한 이름이다.
하지만 많이 쓰는 이름인 만큼 좋다는 엄마의 제안을 철석같이 믿는 모모코도 동의했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아들을 낳으면 필상에게 작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양보에 결국 받아들였고 그날 온 가족은 새로 태어난 생명으로 인해 모두 행복했다.
“전 클라레라고 부를 거예요.”
“왜?”
“당신이 클라레 저그를 들고 온 날에 낳았잖아요.”
“무슨 뜻이지?”
“보통은 프랑스 보르도산 적포도주를 의미하지만 라틴어 고전을 찾아보면 찬란하게, 빛나게, 밝게, 맑게, 그런 좋은 의미도 있더라고요.”
출산을 기다리며 모모코는 아이의 예명을 찾아본 것 같았다. 본명도 나쁘지 않지만 엄마의 마음이 담긴 예명도 괜찮다는 생각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디 오픈마저 접수한 미스터 퍼펙트. 한국은 특별한 나라!]
수많은 우승 기념 축하 기사가 떴지만 필상의 눈길을 잡아끌고 기분이 좋아지게 만든 외신 기사는 바로 이거였다.
축구는 영국이 종주국이지만 그들이 월드컵에서 우승한 역사는 너무도 오래되어 기억조차 어렵다. 이제는 세계인이 모두 즐기고 있으며 오히려 유럽이 아닌 남미의 나라들이 더 좋은 결과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골프는 아직 서양인들이 우세한 운동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도 골프를 시작한 지 오래되었고 실제로 여자 골프는 한국 선수들이 주름잡고 있지만 주 무대인 미국 시장은 아직도 보수적이었다.
한국과는 달리 남자 골프 시장이 여자 골프보다 배 이상 거대하고 중심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의 등장으로 인해 판도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축구에는 손흥민, 야구에는 류현진. 게다가 이젠 골프마저 한국산 히어로가 나타났으니 그런 반응은 당연하지.”
“그런 선수들과 비교하는 것은 아직은 좀 낯서네요.”
“왜 이래. 실제 자네 위상이 어떤지 잘 알면서.”
“솔직히 너무 단기간에 이룬 성과라서 좀 얼떨떨합니다.”
모모코의 출산을 기점으로 필상은 당분간 경기 출전을 자제하고 일단 휴식기를 가지기로 결정했다. 딱히 출전해야 할 눈에 띄는 대회가 없기도 했고 TPK 한국 시장의 안착을 위한 행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차분하게 일정을 소화하던 차에 페럼 CC 최 이사로부터 연락이 와 만났다.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그에 대한 고마움이 적지 않기에 기꺼이 만나 모처럼 회포를 푸는 중이었다.
그도 그 기사를 봤다는 말에 한국 스포츠의 우수성에 대해 논한 화제를 서로 나눴다.
“한류가 한국의 문화를 알린다면 스포츠는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는 셈이지. 아무리 봐도 이 작은 나라에서 그런 대 스타들이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거든!”
“사실 골프는 이미 여자 선수들이 점령한 상태였잖습니까!”
“여자니까 가능하다고 봤던 거지. 하지만 남자 골프마저 자네가 접수해 버리자 이젠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거라고 봐.”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먼 것 같아요. 당장이야 연승을 거둬 뜨겁지만 조금만 부진하면 물고 늘어질 거니까요.”
“그 점을 알고 있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 하루빨리 코리안 투어를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사님이 좀 발 벗고 나서 주십시오.”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실제 프로 협회에서 힘을 쓰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대부분의 스포츠 협회는 무리 짓기 좋아하고 정치적인 성향을 지닌 이들이 장악하고 만사를 주무르는 경향이 강하다.
작은 나라에서 결과를 중시하는 성향이 강했던 과거의 우리나라 스포츠 행정은 그런 힘으로 적잖은 결과를 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가 변했고 사람들의 인식도 덩달아 높아졌는데 아직 그런 풍토는 일반인들의 인식을 따라 주지 못해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키는 사태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강압적인 훈련 방식과 폭력 행사에서부터 출발해 성추문까지 이어지는 전근대적인 스포츠 행정은 시대에 뒤떨어진 감이 없지 않다.
실제 필상도 한 연습장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코치가 어린 선수의 뺨을 때리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남들이 보는데도 개의치 않는 광경에 소름이 돋았다. 말리는 사람도 없었고, 구타를 당한 선수도 아무런 항변을 하지 않았다.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분들이 헌신하는 협회, 그게 절실한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지나친 비약 아닌가?”
“물론 공과 흠이 공존하겠지요. 하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그 맛과 향이 오래갑니다. 흠결이 있는 분들은 아무래도 자기 편향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이제는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던 분들이 나서 줄 차례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남자 골프가 활성화되지 못한 책임을 일부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이 과거와 같은 전횡을 반복하는 꼴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어떻게 이룬 흥행인데, 남 좋은 잔치를 허락한단 말인가!
“쉽지 않을 텐데.”
“정당한 명분이 있다면 당장은 어렵고 힘들어 보여도 현실적인 어려움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갑자기 아무런 대비도 없이 꺼낸 말은 아니었다.
이래저래 바빠 구체적인 실행은 뒤로 미뤄 왔지만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여러 선배들을 만날 때마다 코리란 투어가 나갈 방향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해 왔다.
개혁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당장 먹을거리가 없는 마당에 혁신을 요구하는 것은 헛짓으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에 일단은 투어를 활성화하는 것을 우선시했다.
그런데 과실이 풍성하게 열리자 그걸 마치 자신들이 노력한 수확물인 양 수확하려는 행태를 보며 적당한 시기를 저울질해 왔다.
적어도 올 시즌이 마무리된 후에 실행하기로 했지만 총회를 앞당기기로 결의했다는 소식이 들려 최 이사를 만난 김에 결행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에 착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결국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합법적인 세대교체를 이뤄야 하는데 그러려면 폭넓은 공감대부터 형성해야겠군.”
“조심해야 할 점은 이게 밥그릇 싸움처럼 비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확실한 명분부터 쌓는 것이 중요합니다.”
“명분이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다만 이게 순수한 회원들만의 경쟁이면 좋은데, 혹여 더러운 손길이 끼어들까 그게 염려될 뿐이야.”
타 종목에 비해 깨끗하다고 생각했지만 최 이사의 입을 통해 확인된 사실은 뜻밖에도 외부의 조력까지 동원되었다.
정당하지 못한 이들이 비슷한 이익집단의 후원을 등에 업고 서로 이해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순수해야 할 스포츠 행정이 돈과 권력 앞에 휘둘려진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하기야 돈이면 무엇이든 된다고 믿는 이들의 참혹한 사고방식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시작해 보죠. 만약의 사태를 위한 예방 조치는 저도 알아보겠습니다.”
최 이사와의 대화를 통해 확인된 사실은 무엇이든 기득권과의 싸움은 추악하고 힘들다는 것이었다.
단맛을 아는 자들의 발악은 때로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당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해야만 했다.
이게 단순히 행정력의 교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협회가 공정하고 투명하게 운영될 때야 투어의 활성화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의 배를 채우는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몹시 기분이 나빴다.
이걸 권력이라고 여기는 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다 단단한 각오와 준비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고 요구되는 다양한 상황에 대한 논의를 이어 갔다.
* * *
“설마 협회장을 교체하고 싶은 건가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을 바꾸고 싶은 겁니다.”
“그게 그거죠.”
“왜요? 불가능한 싸움인가요?”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힘든 싸움인 것은 분명하죠. 조직을 이끌기 위해서는 그저 리더십과 명분만 있다고 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럼 대표님은 어떤 방안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일단은 보다 나은 분을 내세우는 것이죠. 과도기적인 시간을 버텨낼 만한 재력과 인품을 갖춘 분으로요.”
“하하하.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합니까? 재력을 갖췄는데도 인품까지 좋은 분.”
그 대목에서 이 대표는 말을 잃었다.
적어도 한국프로골프협회를 이끌 만한 인물이라면 재계에서 알아주는 기업의 대표여야 한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런 인물이어야 한다는 선입견이 굳어 있었다.
그들이 가진 재력으로 협회를 위해 많은 돈을 쓴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참으로 어리석은 편견이었다. 타 종목도 마찬가지로 협회를 이끈다는 명목으로 각가지 감투를 섰던 누군가는 약속한 지원은 고사하고 서울 시내 버스비가 70원이라고 말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사고를 지녔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적이 있지 않던가!
매년 수백억의 예산 집행은 감사 한 번 받지 않았고 비리를 저지른 직원이 자신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위로금까지 줘서 내보내는 촌극을 빚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 어려운 문제네요.”
“이제 주인에게 돌려줄 때가 된 겁니다.”
“주인이요?”
“프로 협회의 주인은 프로 선수입니다. 은퇴했든 현역이든 현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지휘해야 한다는 겁니다. 리더에게 요구되는 것은 헌신이지 경제력일 수 없다는 겁니다.”
“알겠어요. 하지만 결코 만만한 싸움은 아닐 거예요. 그들은 절대 순순히 물러날 인간들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필요한 것은 기득권에 부화뇌동하는 이들의 명단과 조직, 그리고 그들이 저지른 비리의 내용입니다.”
“그걸 어떻게 구하죠?”
“때로 대악을 없애기 위한 피치 못할 소악은 불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지 애매하다는 표정을 짓던 이 대표는 필상의 이어진 제안에 처음에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 내용은 밖에 드러낼 수 없는 방식이었다.
돈을 너무도 사랑하는 내부인을 통해 그들의 약점을 찾아내는 일종의 편법이었기 때문이다. 미처 준비되지 않은 시점에 실행하기 때문에 더 효과가 클 수밖에 없을 테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언제나 정정당당한 필상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인데, 그건 이 대표가 필상이 살아온 인생의 굴곡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일 뿐이다.
더러운 싸움에 깨끗한 수만 둬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그걸 알면서도 싸움을 준비하는 것은 책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현실의 풍파를 고스란히 겪은 필상은 그렇게라도 개혁을 이뤄 낼 생각이었다.
“필요한 비용은 아낌없이 쓰세요. 제가 다 충당하겠습니다.”
“그래서 공 프로가 얻는 이익이 뭐죠?”
“제가 활동하는 무대가 깨끗해지는 것. 그거면 충분합니다.”
“코리안 투어가 정말 아시아 최고의 무대가 되겠네요.”
“그것까지 이뤄진다면 더 바랄 게 없겠죠. 하하하.”
한국 사회는 최근 몇 년 새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단순히 단기간에 기적처럼 여겨지는 가파른 경제 성장을 이룬 국가로 인식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각박한 삶이 현실을 짓누르지만 시민들의 깨어난 의식은 사회 전반에 대한 강한 변혁을 요구했고, 공정하고 나라다운 나라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해 민족의 자주성을 잃고 외세에 침탈을 당했고,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지 못했던 아픈 과거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오랫동안 쌓인 적폐를 청산하는 일이 어찌 가벼운 일이겠는가!
* * *
“정말 JGTO 출전은 안 할 거예요?”
“응. 굳이 나갈 이유를 찾지 못하겠어.”
“일본 언론이 저질적인 기사를 쓰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화가 나요. 하지만 당당히 실력으로 우승한다면 분위기는 확 달라질 것 같아요.”
“미안해. 하지만 지금 스케줄로서는 어쩔 수가 없어.”
모모코는 필상이 일본 투어와 점점 더 벌어지는 것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좀처럼 필상의 일정에 대해 잔소리가 없었으나 자신의 고국과의 관계가 자꾸 어그러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필상은 그동안 그녀에게 함구해 왔던 배경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토시라는 분, 저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악질인지는 몰랐어요.”
“지금도 이 대표에게 가끔 연락이 온다고 하는데, 아직은 그 손을 잡을 의사가 전혀 없거든.”
“혹시 그 사람이 나쁜 영향력을 끼치는 건가요?”
“난 그렇다고 봐. 한국과 한국 사람들에 대한 불편한 인식과 편향된 의견을 지닌 이들이 극소수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을 선동하는 아주 불순한 의도, 그걸 스스로 접고 사과하지 않는다면 일본에서 라운드를 할 일은 없을 거야.”
“오빠!”
너무 강한 어조에 모모코의 표정이 거의 울상이 되었다.
출산 후에 이제 슬슬 운동을 시작한 그녀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필상은 이미 생각한 바가 있었기에 편안하게 그녀를 설득했다.
“그 시간이 생각처럼 그리 길지는 않을 거야.”
“얼마나 걸릴 것 같은데요?”
“적어도 당신이 투어에 다시 참가할 내년에는 당신이나 나나 일본 팬들 앞에 다시 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럼 전 괜찮은 거잖아요. 어차피 올해는 대회에 나갈 수 있는 컨디션을 만들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천천히 페이스를 끌어올리면 된다니까.”
“치! 그런 얘기는 진즉에 해 줬어야죠!”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