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컴 온!
쉭!
빈 스윙을 하는 필상의 아이언 헤드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경쾌한 수준을 넘어 다소 살벌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샷 이미지를 차츰 완성해 나가는 필상의 진지한 모습을 지켜보는 골프 팬들은 느끼는 바가 적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선수도 이렇게 진지하게 준비하는데, 제 실력을 과신한 나머지 지나치게 긍정적으로만 생각하고 성급하게 스윙을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장면이었다.
기역자로 기이하게 휜 그린의 좌측 끝에 걸린 핀을 바로 공략하다 짧으면 여지없이 깊고 좁은 항아리 벙커에 빠진다.
때문에 필상은 그동안 그린 중앙을 공략한 뒤에 2퍼팅을 시도했다. 그런데도 그린이 무척 빠르고 경사가 심해 2라운드에서는 보기를 범하기도 했다.
하지만 필상은 지금 핀을 바로 노렸다.
-과연 재앙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공 프로가 마음먹고 집중한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는 늘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두가 깜짝 놀랄 결과를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까!
-간혹 좋은 결과를 냈던 선수가 없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행운이 아닌 확실한 실력으로 결과를 만들어 낸다면 이번 우승은 더욱 값질 것 같기는 하네요.
-화룡점정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따라 칼리미티에는 바람이 더 지랄 맞게 불었다.
때문에 우승이 거의 확정되다시피 한 필상이 핀을 바로 노리는 것은 어리석게 비칠 수도 있다. 그냥 안전한 공략을 하면 디 오픈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팬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이 상황을 즐겼다.
두려움을 넘어선 도전이 위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따악!
충분히 강한 임팩트가 이뤄졌다.
공을 숏 티에 올려놓고 쏜 샷이지만 듬뿍 떠진 잔디가 전방으로 멀찌감치 날아가는 광경에 사방에서 감탄사가 터졌다.
혹자는 너무 강한 샷이 아닌지 의구심을 품었다.
필상이 9번 아이언을 잡았다는 사실은 알 수 없었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샷의 세기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홀의 맞바람을 잘 알고 있는 일부 팬들은 탄도가 너무 높이 뜬 것을 보며 경악성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런 탄도라면 도저히 그린까지 갈 수 없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어! 너무 멀리 날아가는 것 아닌가요?
임 캐스터는 맞바람마저 꿰뚫고 쭉쭉 뻗어나가는 공이 도무지 떨어질 것 같지 않다는 느낌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냥 그린을 훌쩍 넘어 온갖 잡풀들이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곁에 앉은 허 위원도 비슷한 생각을 했으나 입을 열지 않고 꾹 참았다. 지금 샷이 어떠했는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고 오로지 필상의 탁월한 능력을 굳게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길게 날아가는 타구를 보며 주먹이 절로 불끈 쥐어지고 있음을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컴 온!”
필상의 입에서 돌아오라는 주문이 터지는 순간,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잡풀 사이로 떨어질 것만 같던 타구가 기아하게도 후방으로 쭉쭉 빨려 왔던 것이다.
자유낙하에 가까운 하강 궤적을 보이던 타구가 맞바람의 영향을 받아 오히려 되돌아오는 광경은 과학적 이론을 비웃어 버리는 자연이 만들어 낸 기적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더니 급기야 그린 끝부분 에이프런에 떨어졌다. 하지만 충분치는 않은 결과였다. 그린의 경사는 뒤가 내리막이었기에.
그때 다시 사람들의 입이 벌어질 기적이 연출되었다.
-백스핀!
-네! 마치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힘찬 본능이 연상되는 장면입니다!
-아!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네요!
방송 용어로 적절치 않은 표현이지만 눈앞에서 펼쳐진 믿기 힘든 장면은 그런 말로 밖에는 달리 형용하기 어려웠다.
점잖은 말투로는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충분하게 거슬러 오르지는 못해 홀컵 뒤, 2m 지점에 멈췄으나 과학적 이론을 무시하는 탁월한 기술에 비명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도 말고 버디를 잡기에 더없이 좋은 최적의 지점에 보낸 이 샷은 결국 이번 대회를 상징하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 샷으로 선정이 되었다.
“정말 환상적인 샷이었습니다!”
“운이 좋았지요. 하하하.”
“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곳에 살면서 늘 즐겨 라운드를 했던 저도 이 홀의 바람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데, 어떻게 정확하게 바람을 가늠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북아일랜드의 로열 포트러시 골프장은 위대한 챔피언들을 키워 낸 골프의 산실이다. 라이더 컵 캡틴을 역임한 대런 클락과 그레이엄 맥도웰은 이곳 포트러시에서 태어났다.
또한 이곳에서 30분 거리에 살고 있는 매킬로이는 어릴 적 자신의 영웅이던 클락을 만나러 자주 포트러시를 찾아왔다.
그래서 그 어느 대회보다 우승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가졌지만 장타 대결에 말려 결국 저 홀로 무너지고 말았다. 필상의 의도에 말렸다고 생각했지만 칼리미티의 공략을 본 뒤, 생각이 달라졌다.
실력에서 밀린 것이다.
“축하합니다. 미스터 퍼펙트!”
“고맙습니다. 곧 다시 뵐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지난번처럼 머리 싸매고 눕지는 않을 겁니다. 하하하.”
우승이 확정된 뒤 가장 먼저 축하한 이는 동반자, 매킬로이였다. 그는 후반 들어 샷 감각을 되찾아 공동 9위로 마감했다.
공동 선두에서 와르르 무너진 결과였으나 처음과는 달리 상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승자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보내는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실망스러운 경기력에 야유까지 보냈던 팬들도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를 격려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가 또다시 필상으로 인해 정체기를 겪는다면 그 또한 기꺼운 일은 아니었기에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님!”
“축하해요.”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어서 팬들에게 인사부터 해요. 제 안부는 천천히 챙겨도 되잖아요!”
우승을 확정한 뒤 동료들의 격렬한 축하를 받던 필상은 그제야 앞으로 나선 성호와 이 대표를 발견했다.
보자마자 달려가 뜨겁게 포옹하는 모습은 오해를 살 만했으나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승은 불가했기 때문이다.
또한 어차피 가족들이 오지 않아 가장 측근인 그녀와 기쁨을 함께 나누는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PGA 챔피언십, US 오픈에 이어 디 오픈까지 우승하셨는데, 마스터즈를 건너뛴 것이 아쉽지 않으십니까?
“왜 아쉽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꼭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코리안 투어의 활성화인가요?
“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한국 투어는 최근 아시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투어로 성장했습니다. 아름다운 한국의 코스에 여러분들을 모두 초대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오픈한 TPK 코스가 무척 좋다는 말은 저희도 익히 들어 알고는 있는데, 아직 세계적인 대회를 개최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 않나요?
“하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에 제 후원사에서 개최하는 아시아 챔피언십은 유러피언 투어와 PGA 선수들에게도 폭 넓은 출전 기회를 제공할 생각입니다.”
현재는 KPGA와 아시안 투어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대회지만 필상은 유럽과 미국에서 활약하는 선수들도 대거 참가할 수 있도록 공동 주최를 제안했다.
즉석에서 생각해 낸 아이디어로 콧대가 높은 PGA와 EUR이 응할 가능성은 아주 낮다. 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고 판단했고 그를 위한 노력을 경주할 생각도 했다.
만약 그게 성사된다면 스스로 언급한 아시아 최고의 투어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물론 그동안 아시아 최고라고 자부하던 일본 투어는 탐탁지 않게 여길뿐더러 오히려 방해 공작을 펼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최근 필상의 고공 행진에 거꾸로 하강세를 드러내고 있는 JGTO의 흐름을 보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닐뿐더러 현지 기자들의 반응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현재의 프로 투어 시스템이 굳어진 뒤로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는데, 내년에는 골프 팬들이 대기록 달성을 볼 수 있는 건가요?
“그건 두고 봐야겠죠. 그저 저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자신감은 넘치지만 그걸 입으로 드러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지나치게 건방진 태도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면 굳이 행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기록 달성에 가장 유력한 선수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메이저 대회 3연승, 드러난 이 결과만으로도 이제 현역 최고의 자리는 필상의 몫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골프계에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었다.
“인터뷰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어떤 부분에서요?”
“이젠 다들 최고로 인정하는 것 같았어요.”
“그건 진즉에 드러난 사실인데,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지요. 그나저나 정말 몸은 괜찮은 건가요?”
“그렇다니까 왜 자꾸 그래요.”
곧바로 한국행 밤 비행기에 오른 이 대표의 안색은 확실히 좋아 보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상당한 기운을 빼앗긴 그녀의 건강은 필상으로서도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꾸 꼬치꼬치 상태를 캐묻자 급기야 이 대표는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언급했다. 다만 남들이 듣지 못하도록 소곤거리는 모습은 그 내용이 극히 사적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당신의 기이한 기운이 갑자기 제게 확 몰려 들어왔어요!”
“아! 그랬나요?”
“너무 당황스럽고 두려워 거부했기 때문에 기절한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뜨거운 기운이 제게는 아주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도움이 되다니요?”
“지금 저는 전보다 훨씬 컨디션이 좋아졌거든요. 마치 십 년은 젊어진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그 대목에서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 이 대표는 잠이 말을 머뭇거렸다. 해도 되는 말인지에 대한 자신이 없는 것 같았다.
궁금한 필상이 괜찮다며 채근하자 그제야 겨우 털어놨다.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생길지도 모르는데, 항상 모모코가 프로님의 곁을 지킬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렇겠지요.”
“또 모모코가 출산하면 자신의 못 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선수 생활도 재개해야 할 거고요.”
대충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었다.
굉장히 사적인 문제지만 어차피 이 대표와는 각별한 사이다. 불순한 남녀 관계로 발전하지 않으면서도 비밀을 유지할 수 있는 신뢰하는 관계, 그것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갑자기 발생한 문제로 인해 모모코가 필요 이상으로 희생하는 것은 그다지 기꺼운 일이 아니다. 다만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아내와 상의한 후에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모모코가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확신하기 어려워요. 의외로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사안이거든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떤 결과든 받아들여야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증상을 하루 빨리 없애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부작용 때문에 우승을 거두고도 내내 찜찜했는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도출되어 부담을 덜었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능력을 얻었지만 그에 따르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다. 지금보다 더 큰 위협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을 대비할 필요도 있었다.
“지금 바로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이요?”
“네. 산통이 시작되었다고 해요.”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귀국한 필상을 기다린 기자들이 인터뷰를 기다렸지만 그들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었다. 모모코의 산통이 시작되었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대표가 남아 그 문제를 처리하기로 했고 필상은 곧바로 출국장을 빠져나왔다.
태어나기도 전에 효도를 하는 줄 알았더니 간발의 차이로 나쁜 남편과 아빠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예정된 인터뷰에 나타나지 않아 실망한 기자들도 그 이유를 듣고는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여주로 향한 것이다.
필상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이슈가 되는 마당에 필상과 모모코의 아이 출산도 상큼한 화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 * *
“모모코. 그냥 수술하자.”
“싫어요. 절대!”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제왕절개를 제안했지만 오랜 시간 고생하면서도 모모코는 절대 자연분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덕분에 곁을 지키는 필상의 마음은 하얗게 타들어 갔다.
아이를 낳는 일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할 뿐이었다.
수시로 자신의 기이한 능력을 쓰고 싶은 욕망이 일었으나 차마 그러지 못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그 어떤 확신도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는 쓸 수 있지만 행여 정상 분만에 해를 끼친다면 그건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아이는 안아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무사히 출산을 마친 아내를 위해 그녀를 마사지하는 것만으로 과연 남편의 도리를 다했는지 자신할 수 없었다.
차라리 모모코를 이렇게 애를 먹인 아이가 미웠으나 결국 그 작은 존재를 품에 안아 볼 때 느낀 감동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이 녀석! 건강하게 태어나 줘서 고맙다!”
“여자 아이한테 녀석이 뭐에요! 싫다고 인상 쓰잖아요.”
“하하하. 그런가?”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