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99화 (199/354)

199. 칼라미티

“로리. 파이팅!”

제발 무리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면 안 그래도 자신을 의식할 그의 신경을 건드릴 것 같다는 생각에 차마 뱉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느닷없이 경쟁자에게 한국식 영어인 ‘파이팅’을 외친 것도 좀 어색한 일이기는 했다.

씩 웃은 그가 뜻을 알아들은 것 같아 다행이었지만 샷 루틴에 들어선 매킬로이는 결국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누가 그더러 장타를 치지 못한다고, 아니 장타를 쳐야만 한다고 강요라도 했단 말인가?

“프로님에 대한 경쟁의식이 과도한 것 같아요.”

“그렇다고 프로가 자기 스윙 리듬마저 잃다니, 안타깝네.”

그의 타구는 과도하게 감겼다.

일부러 그렇게 강한 드로우를 걸라고 해도 쉽지 않을 것 같은 악성 훅이 만들어져 진행위원들이나 주변에 있던 이들이 모두 일제히 ‘볼’이라고 외쳐야 했다.

비거리가 무지막지하게 나와 홀 주변을 둘러싼 갤러리들의 뒤로 넘어간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따지고 보면 필상의 등장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선수는 그가 분명했다. 타이거의 뒤를 이어 차세대 골프 황제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로지 필상에 대한 경쟁심에 사로 잡혀 평소 스윙 리듬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한 번 호되게 당했으면 바뀔 만도 기껏 마음을 추슬러서 정상에서 만났는데 또다시 첫 홀부터 꼬이게 되고 말았다.

-하하하. 이거 정말 보기 드문 장면이네요. 세계 정상급의 선수가 어떻게 저런 샷을 할 수가 있죠?

-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프로 선수도 결국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심마가 끼면 잘 훈련된 몸이 오히려 깜짝 놀랄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심마(心魔)요? 하하하.

-표현이 너무 과하기는 하지만 프로라면 자신의 플레이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 프로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자신이 준비했던 공략을 버린 것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아! 그렇겠군요. 이미 코스를 충분히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전에 각 홀에 대한 공략 방법을 준비했겠군요.

-보통 상황에 따라 두세 가지 공략을 준비하지만 그 중에 1온을 노리는 카드는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 공 프로가 쳤다고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좋지만 그게 이런 참담한 결과로 나올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결국 우리 공 프로가 아너였던 것이 그에게는 불행의 시작이로군요!

결과가 그러했다.

만약 매킬로이가 먼저 샷을 했다면 자신이 준비한 대로 안정한 샷을 구사했을 것이나 하필이면 필상의 장타를 먼저 본 것이 불행의 씨앗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쟁자가 이글 기회를 맞이했다는 것이 신경 쓰였는지 그의 무리수는 계속 이어졌다.

갈대숲에 들어간 공을 찾지 못했더라면 차라리 벌타를 먹고 샷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기구하게도 볼을 찾아냈다.

문제는 매킬로이의 생각에 잘만 치면 그린에 올릴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었다.

철퍼덕!

그 표현만이 그의 부질없는 샷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겨우 머리만 보일 정도로 깊은 갈대숲에서 스윙을 했으나 빠져나오지 못했다. 가까이 가지 않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상태는 더 안 좋아진 것이 분명했다.

그의 입에서 격한 발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 그린 근처에 있던 필상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으니까.

그나마 한 번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는지 3번째 샷은 갈대숲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린 좌측의 벙커에 빠지고 말았다.

이미 얼굴이 붉게 상기된 그는 갤러리들의 격려도 모두 야유처럼 느껴졌는지 평정심을 잃은 듯 보였다. 그렇지 않다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벙커 샷을 그렇게 터무니없게 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악!’

굉장히 특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필상은 그가 빠진 벙커로부터 10시 방향에서 그린의 라이를 살피고 있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공이 자신을 향해 날아왔기 때문이다.

매킬로이의 벙커샷이 공을 직접 가격한 결과였다.

문제는 필상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그 위험한 공을 손을 번쩍 들어 막은 장면이었다. 다른 선수의 플레이 중인 공을 고의적으로 건드리는 행위는 있을 수 없다.

강하게 책임을 물어 벌타를 2개나 받는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데, 너무도 어이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갤러리들의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어허! 이거 정말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네요.

-공 프로의 행동은 사람이라면 당연한 겁니다. 만약 그 공을 막지 않았다면 뒤에서 구경하던 갤러리들 중에 누군가 크게 다쳤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건 구제받을 수 있는 행동은 아니잖습니까! 누군가에게 맞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아마 그 정도는 감수할 각오를 했을 겁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난번에 자신의 공에 맞아 다친 관중에게 직접 찾아가 사과하고 치료비를 모두 냈던 일화가 그의 심성이 어떤지를 그대로 보여 주잖습니까!

-위로금도 주려고 했는데 그 열성 팬은 직접 찾아온 것이 고맙다고 받지 않았다는 미담은 저도 기사를 통해 봤습니다. 정말 훈훈한 스토리가 아닐 수 없죠.

-그러고 보면 공 프로는 훌륭한 골퍼이기 이전에 좋은 품성을 지닌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하하.

중계를 맡은 PD는 좋은 화젯거리라고 판단했는지 필상이 막은 공의 궤적을 추적하는 화면을 내보냈다.

의도가 섞였는지는 몰라도 그 공을 막지 않았다면 어린아이를 안고 경기를 구경하던 젊은 여인에게 향했다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그 여인의 반사 신경이 얼마나 좋은지 확인되지는 않지만 아이가 다쳤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팬들이 골프 경기를 가까이에서 관전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은 프로 선수들의 기량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거의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인접한 거리를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수는 그 점을 유의해 샷을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정말 잘하셨어요.”

“잘했다고? 엉겁결에 벌타를 먹고 말았는데?”

“벌타보다 더 큰 칭송을 받고 있잖아요. 설사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어때요. 좋은 일을 했는데.”

“하하하. 그런가?”

미사키의 잔잔한 칭찬에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후회가 밀려들던 필상은 그냥 웃고 말았다.

경기위원도 안타까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계면쩍은 웃음을 보냈다. 알아서 타수를 적용하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갑자기 야유가 쏟아졌다.

벙커에서 걸어 나온 매킬로이가 여전히 뿔이 잔뜩 난 채로 러프에 놓인 공을 연습 스윙도 없이 무성의하게 때렸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핀에 붙여 더블보기라도 해야 하는데, 퍼팅이 가능했던 공을 샌드웨지로 툭 때려 겨우 그린에 올려놨다.

-저건 대체 무슨 의미죠? 혹시 자신의 공을 건드린 것에 대한 불만인 건가요?

-굳이 좋게 해석하자면 배려 받고 싶지 않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쁘게 해석하면 프로로서 자질이 부족하다고 봐야 할 것 같고요.

-전 아무리 봐도 후자라고 보이네요. 가까이에서 구경하는 팬들의 야유가 쏟아지는 걸 보면 말입니다. 거의 대부분이 그를 열렬히 응원하던 영국 팬 아니었던가요?

-이미 마음에 상했더라도 2벌타를 받은 공 프로도 이제 파가 쉽지 않은 상황인데, 어쩌면 그게 공평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허 해설의 두 번째 분석은 정확했다.

자신의 어이없는 샷으로 인해 필상이 벌타를 먹은 장면이 묘한 심리 상황을 자아냈다. 칭찬하고 감사를 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상심한 그에게 그럴 여유는 없었다.

그저 그런 와중에 자신이 핀에 붙여 꾸역꾸역 타수를 줄이는 것이 오히려 정당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오판한 것이다.

미스 샷을 한 것은 자신이지만 공을 막은 행위는 자신과는 별개의 사건이다. 그것까지 고려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팬들이 그에게 바라는 모습이었는데 생각이 엇갈려 빚어진 불행한 사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마 필상은 그의 마음을 읽었는데, 라이를 살피느라 가까이 다가선 매킬로이는 마음에도 없는 호기를 드러냈다.

“퍼펙트. 이제 겨우 첫 홀일 뿐입니다.”

“오케이! 골프는 장갑을 벗어 봐야 안다잖아. 동의해.”

결국 그는 첫 홀에서 치명적인 트리플 보기를 기록하고 말았다. 대략 18야드의 먼 거리에서 흥분이 고조된 그의 정확한 거리감은 그나마 인정해야할 것 같았지만, 필상은 그에게 향하는 일말의 칭찬도 일거에 잠재워 버렸다.

11.4야드의 거리에서 파 퍼팅을 한 공이 그대로 홀컵에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공이 지면에서 사라지는 순간, 필상은 적어도 오늘 하루는 모든 팬들의 영웅이 되었다.

만약 벌타를 먹지 않았다면 이글 퍼팅이었다는 사실에 전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거실에서 혼자 골프 중계를 보던 한국 팬들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마치 2002년 월드컵 중계 때 동네 아파트에서 벌어진 촌극을 연상케 하는 극적인 장면이 이날 다시 연출되었다.

-정말 미치겠네요. 저걸, 저걸 어떻게 집어넣을 수가 있는 거죠? 착하게 살면 역시 하늘이 돕는다는 건가요!

-하하하. 하늘이 돕기 이전에 정확한 퍼팅 스트로크를 구사한 그의 집중력과 실력에 찬사를 보내야겠지요. 이제 겨우 첫 홀을 지났지만 이만하면 클라레저그의 주인공이 거의 정해졌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너무 이른 판단이지만 그 말에 태클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단순히 3타 차로 벌어진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두 선수의 심리 상황과 팬들의 반응이 너무도 극명하게 걸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2번 홀부터 필상은 안전한 공략을 이어 가면서 착실하게 타수를 지키거나 줄였지만 매킬로이는 자신이 판 함정에 점점 더 깊이 빠지는 광경이 목도되었다.

-14 공필상

-10 저스틴 로즈, 더스틴 존슨

-9 프란체스코 몰리나리, 타이거 우즈, 그레이엄 맥도웰

-8 조던 스피스 외 5명

결국 프런트 나인이 끝났을 때, 매킬로이의 이름은 톱 10 리더 보드에서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필상이 천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 분명하다는 평가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분전한 미켈슨이 공동 6위까지 치고 올라온 점이 눈에 띠었고 5명이나 출전한 다른 한국 선수들의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

그 와중에도 4타 차 선두로 올라선 필상의 우승은 이미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대일 매치 업을 펼치고 있는 두 선수의 경기력이 너무도 극명하게 갈렸고 팬들의 성원이 든든하게 받쳐 줬기 때문이다.

“대표님. 형은 지금 자신이 엄청난 영웅이 되었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요?”

“알 리가 없죠. 경기에 집중하기도 바쁠 테니까요.”

“흐흐흐. 여하튼 인간도 아니라니까요! 그 빠른 공을 어떻게 손으로 막을 수가 있느냐고요.”

“자신의 몸이 얼마나 귀한 줄 모르는 건 이번 기회에 분명히 지적해 줘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건강한 몸 하나만큼은 정말 타고났으니까요.”

이 대표가 퇴원해 골프코스로 돌아왔다.

별다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의 조언을 뿌리치고 필상의 우승을 함께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물론 성호가 곁을 든든히 지키는 와중이었는데, 건강 하나는 타고났다는 말을 하다가 아침에 벌어진 일이 기억난 성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이번에 겪어 봤지만 미사키 혼자 공 프로의 곁을 지키는 것은 불안한 것 같아요.”

그 말은 곧 필상이 편하게 생각하는 성호더러 도와 달라는 의미였다. 꿈을 이루라고 권한 필상의 조언에 반하지만 성호는 기꺼이 그럴 의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 문제는 필상과 의논해 봐야겠다는 말로 대신했다.

“그보다 대표님이 무사하다는 걸 보여 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멀쩡해 보여도 은근히 신경 쓰고 있을 겁니다.”

“지금 이대로 충분한 것 같아요. 잘하고 있는데 변화를 줄 필요는 없죠. 우승하면 그때 봐도 될 것 같아요.”

아직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지만 필상이 공을 막은 장면은 인터넷 공간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반대로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인간이 된 매킬로이가 불쌍할 정도였다.

“백 나인은 안전하게 가실 거죠?”

“그래야겠지. 하지만 칼라미티는 한 번 도전해 보려고.”

칼라미티는 재앙이라는 의미다.

그런 최악의 별칭이 붙은 13번 홀은 165야드에 불과한 파 3홀이다. 하지만 로열 포트러시를 상징하는 시그너처 홀로 수많은 선수들에게 재앙을 안긴 장소였다.

그래서 필상도 그동안 안전하게 파를 의식한 공략을 했다. 핀을 바로 노리다 악몽을 겪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인데,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12번 홀까지 1타를 더 줄여 여유가 생긴 필상은 좌측으로 심하게 기운 경사면에 꽂힌 핀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페이드 샷을 구사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9번 아이언.”

평소 필상의 비거리를 고려하면 적절한 선택이었으나 미사키는 잠시 멈칫했다. 맞바람이 강한 이 홀에서 너무 짧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일순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정신 차린 그녀는 클럽을 건네며 방긋 웃었다.

“죄송해요. 제가 의심하면 안 되는데.”

“아니야. 그만큼 정확한 샷을 구사하라는 의미잖아.”

“행운을 빌어요.”

“하하하. 행운이 아니라 당당히 실력으로 승부할 거야.”

며칠 동안 이 홀을 경험하며 195야드를 봐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시각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무려 30야드나 더 보내는 샷을 구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