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디 오픈
[미스터 퍼펙트 우승 배당 1/10! 신 황제로 인정받는가?]
배당이 US 오픈 때보다 떨어졌다.
아무래도 미국과는 다른 지극히 보수적인 링크스의 본령에서 치러지는 대회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연승 행진이 멈춘 것도 작용한 듯.
그래도 디 오픈에 출전한 150여 명의 선수 중에 가장 우승 확률이 높았다. 세계 랭킹에 따르면 당연하지만 그래도 아직 경력이 짧은 필상을 인정한 것은 주목할 부분이었다.
하나 더 흥미로운 사실은 로리 매킬로이가 타이거와 함께 1/15의 배당으로 필상의 뒤를 잇는다는 것이다.
최근 유럽피언 투어에서 우승하며 드디어 잃었던 페이스를 다시 찾았다는 분석과 대회가 그의 안방에서 개최되는 것도 유리하게 작용한 것 같았다.
“뭐야? 난 배당이 왜 이렇지?”
US 오픈 준우승자 미켈슨은 자신의 배당이 1/20로 참가 선수 중에 겨우 톱 10 수준인 것에 분개했다.
그는 과거 디 오픈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흐르는 세월은 베팅 업체의 계산 방식에도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하기야 필상이 생각해도 실망스러운 예측이었다. 최근 그의 체력이나 근력은 젊은 선수 못지않은데, 그의 분노가 경기에서 어떻게 작용할지 궁금했다.
인터뷰를 마친 필상은 일단 런던 인근에서 휴식을 취하며 식사를 한 뒤 국내선을 타고 다시 북아일랜드로 향했다.
영국이나 아일랜드는 처음이라서 모든 광경이 눈에 박혔다. 하지만 대회가 열리는 로열 포트러시 골프클럽에 도착해서는 다른 것이 일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타이거. 골프클럽 명칭에 로열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붙일 수 없는 거죠?”
“당연하지. 왕실이 있는 나라니까. 내가 알기로 영국 왕실이 지원해 주는 코스가 아일랜드에 3개가 있을 거야.”
사실이다.
로열 벨파스트, 로열 카운티다운, 그리고 이 코스가 왕실의 지원을 받는데, 그중에 포트러시를 가장 으뜸으로 친다.
매년 여러 매체에서 훌륭한 골프코스를 선정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릴 만큼 전통과 품격을 인정받는 소위 명문 클럽이었다.
그래서인지 코스에 접어든 필상은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깊은 감흥이 밀려왔다.
“대체 몇 년이나 된 코스입니까?”
“모르긴 몰라도 백 년은 훌쩍 넘었을 걸?”
눈이 부시게 푸른 북해의 바다를 마주 보고 우뚝 솟은 절벽 아래 자연과 한 몸인 양 펼쳐진 로열 포트러시는 1888년에 조성된 코스다.
아름답게 펼쳐진 링크스 코스의 기이한 매력과 엄청나게 큰 그린의 특별한 조화, 거친 러프와 코스를 온통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가시금작화를 따라 펼쳐진 페어웨이를 바라보노라니, 어서 코스로 들어가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일었다.
상상하던 그 이상이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디 오픈이 고유명사가 된 이유를 알겠네요.”
“미국인들이 일부러 낮춰 불러 브리티시 오픈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큰 상금과 규모로도 잡을 수 없는 게 있지. 전통과 역사.”
“골프 사업을 하는 저희도 명심해야 할 내용이네요.”
디 오픈을 그저 4대 메이저 대회의 하나로만 인식했으나 현지에 도착한 필상은 골프의 발상지이자 성지인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에서 대회가 개최되지 않는 것에 아쉬워했던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닷가 코스, 즉 링크스를 경기장으로 쓰는 전통은 1860년 이후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으며, 세상에 하나뿐인 오픈 대회라는 자존심을 가져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라레 저그를 가져가고 싶습니다.”
디 오픈 우승자에게는 우승컵이 아닌 특별히 제작한 은제 주전자를 수여한다. 그 또한 디 오픈만의 특별한 상징이고 타이거나 미켈슨은 이미 그걸 거실에 비치한 상태였다.
가장 오래된 전통 있는 대회를 우승했다는 자부심은 허락된 소수의 골퍼에게만 허락된 의미 있는 상징인 것이다.
그래서 필상도 반드시 그걸 쟁취하고 싶어졌다.
“모모코의 출산 선물로 그만한 게 없을 거야. 하하하.”
“아! 그렇겠네요.”
대부분의 선수들은 새로운 코스에서 열리기 때문에 코스 적응을 위해 일찍 도착했지만, 필상은 다른 선수들보다 늦었다.
때문에 호텔을 짐을 풀자마자 바로 연습장으로 향했다.
“미스터 퍼펙트. 영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 오랜만입니다, 로리. 그간 잘 지냈습니까?”
“네. 콩 프로님 덕분에 제 샷을 점검하고 가다듬느라 아주 보람된 나날을 보냈습니다. 하하하.”
“그럼 필드에서 다시 만나 멋진 경기를 펼쳐야겠군요.”
“아! 저도 기대가 아주 큽니다. 챔피언 조에서 만나시죠.”
때마침 연습장으로 들어서던 필상은 매킬로이와 마주쳤다. 얼굴을 마주하면 아주 어색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자신의 부진이 필상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개월 동안 심한 정체기를 겪은 매킬로이가 쿨 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확실히 이전보다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자국에서 펼쳐지는 대회이기에 자신감이 충만할 수도 있고 충격을 극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두고 볼 일이다.
“이젠 제법 아는 선수가 많아졌네요.”
“원래 성적이 모든 걸 대변하는 거니까.”
꾸밈없는 환영 의사를 밝히는 매킬로이와 반갑게 악수를 나눈 필상이 자신의 타석으로 향해 움직이자 연습 중이던 다른 선수들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청했다.
이전에도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인종차별이라는 느낌마저 들만큼 눈을 마주치고도 본체만체하던 이들의 태도가 일변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무명의 신인인 필상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아껴 준 타이거나 미켈슨은 자신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위상이 달라졌다고 하루아침에 태도가 바뀐 자들이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똑같은 사람은 될 수 없었다.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아시아 선수들에 대한 편견을 지우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벙커가 저렇습니까!”
“그렇다고 일부러 집어넣는 건 또 뭔데?”
“연습 라운드잖아요. 하하하.”
“절대 저런 곳에 들어갈 위인이 아니면서!”
다음 날 바로 연습 라운드를 나갔다. 허락된 기회는 단 2번뿐이라서 최대한 코스 적응에 만전을 기해야만 했다.
페어웨이를 제외한 구역은 정말 이런 라이에서 공을 쳐야 하나 싶을 만큼 험악했다. 질긴 러프는 물론이고 들어가면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벙커는 일부러 만들기 힘들 만큼 엄청난 철옹성처럼 보였다.
그래서 일부러 타구를 그리 보내 꺼내 보는 연습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다른 링크스 코스를 경험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 * *
-드디어 이 오픈이 시작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희 JBC는 이번 대회를 경기 하이라이트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경기를 생중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세계적인 기량을 지난 다양한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면서 마음껏 즐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스윙을 보는 것은 기량 향상에 도움이 되겠죠?
-물론입니다. 모든 선수가 똑같은 스윙과 공략을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체 조건에 따라 또한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독특한 스윙을 하는 선수도 많습니다.
-아! 대표적인 선수가 한국에도 있지요.
-최호성 프로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골프에 정석은 있을지 몰라도 정답은 없습니다. 누구든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스윙을 찾아 나가는 것이지요.
마침내 디 오픈의 아침이 밝았다.
그 어느 때보다 승리에 대한 갈망이 강한 필상은 연습은 물론 토납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또 하나의 큰 진전을 이뤘다.
잠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는데, 토납을 하다 말고 밤을 꼬박 새운 필상은 당황스러웠다. 소위 무아지경에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염려하던 것과는 달리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장거리 비행과 조급한 마음으로 인해 일부 샷 난조가 보였는데, 그런 증상이 말끔히 사라졌고 샷 이미지 메이킹이 보다 선명해졌다.
자신의 이능이 다시 한 번 돌파구를 뚫은 것에 지극히 만족스러운 상태로 대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형님. 응원하겠습니다!”
“흑돈! 고맙지만 내 경기를 따라다닐 필요는 없어. 어차피 내 스윙은 잘 알잖아. 차라리 너랑 체형이 비슷한 선수의 경기를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거야.”
“알았으니까. 경기에만 집중하세요.”
이번 대회 준비 기간은 짧았다.
하지만 성호가 함께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함축적인 훈련과 대비가 가능했다. 때문에 출발하기 전에 성호를 위해 조언을 했으나 녀석은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티오프를 하러 1번 홀로 향하는 필상에게 팬들의 뜨거운 응원이 쏟아졌지만 분위기는 한국이나 미국과는 또 달랐다.
유럽의 자존심이라고 해야 할까?
“시선이 좀 따가운 것 같아요.”
“미사키. 갤러리들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차피 선수는 경기 내용으로 말하는 거잖아.”
“네. 보란 듯이 잘 쳐요, 우리.”
“그래. 하하하.”
하지만 필상의 1라운드는 평범했다.
보기 없이 버디만 2개 기록해 -2, 눈에 확 띄는 장타도 없었고 핀에 쩍 붙는 아이언 샷도 오늘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필상에 대한 기대치가 워낙 높기 때문이지, 결과는 그런 느낌과는 또 달랐다. 공동 5위였기 때문이다.
“코스 세팅이 얼마나 중요한지 극단적으로 보여 준 하루였던 것 같아.”
“아무리 그래도 3오버파는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이거 왜 이래? 그래도 공동 37위야. 나랑 겨우 5타 차밖에 차이나지 않으면서 너무 그러지 말라고.”
평소 같으면 길길이 화를 냈을 미켈슨이다.
하지만 오늘은 애써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자신에 대한 기대 이하의 평가를 확실히 짓누르고자 뚜렷한 결과를 내겠다고 장담했기 때문에 계면쩍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오늘 가장 공격적인 플레이를 했던 선수다. 스스로 링크스 코스에 충분히 적응되었다고 자신했으나 로열 포트러시는 그의 공략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버디는 4개나 기록했지만 보기도 3개, 거기에 더블보기까지 2개나 기록하면서 아주 험난한 하루를 보낸 것이다.
그에 비하면 -2를 기록해 필상과 함께 공동 5위에 랭크된 타이거의 성적은 좋지만 그도 오늘 치명적인 미스 샷 하나로 인해 아쉬운 하루를 보냈다.
“저스틴 로즈와 로리 매킬로이가 -4를 쳐서 공동 1위더군.”
“영국 선수가 나란히 앞서 나갔네요.”
“아무래도 연습을 좀 많이 한 것 같아. 그런데 자네는 오늘 너무 얌전하게 친 거 아냐?”
“아직 코스에 적응이 덜 되어서 그럽니다. 내일부터는 조금씩 나아지겠죠. 근데 오늘 16번 홀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는 오늘 버디를 5개나 기록했다. 하지만 트리플보기 하나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는데 그 과정이 궁금했던 것이다. 동영상을 찾아봐도 되지만 그에게 듣고 싶었다.
“티샷이 밀렸어.”
언제나 문제의 출발점은 티샷부터다.
그의 얘기를 종합하자면 헤비 러프에 떨어진 공의 라이가 보이는 것과 달랐다는 것이다.
일단 충분히 칠 수 있다고 판단해 과감하게 그린을 향해 쐈는데 임팩트 순간 클럽이 뭔가에 막히는 느낌이 들었단다.
하필 공이 질긴 뿌리에 걸쳐 있었는데, 그걸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본인의 잘못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손목은 괜찮습니까?”
“응. 다행히 멀쩡해. 그런데 그놈의 타구가 하필 항아리 벙커에 들어갔어.”
거기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
그냥 꺼내려고만 했다면 못 나올 위치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벙커에서 남은 거리가 80야드 안팎이라서 핀에 붙여 파를 하려는 욕심을 부리다 탈출에 실패한 것이다.
벽면에 맞은 공은 더 어려운 라이에 떨어지고 말았다. 에그 플라이까지 생긴 공은 도저히 꺼낼 수가 없어 결국 4번째 샷을 비스듬하게 쳐내야만 했다.
그런 상황이 너무 황당하고 답답한 나머지 61야드 웨지 샷에 힘이 너무 들어가 2퍼팅, 결과는 최근 그의 플레이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트리플 보기였다.
-어제 우리 공 프로의 경기 내용에 대해 아쉬운 평가들이 많더군요. 허 위원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허허. 그동안 공 프로가 너무 잘나가서 그런 겁니다. 이전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PGA 메이저 대회에서 우리 선수가 톱 10에만 들어도 가시화되던 시절에서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 아닐까요? 공 프로는 지금 세계 랭킹 1위잖습니까!
-그러니까 더 두고 보시죠. 제가 볼 때 어제는 코스를 점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개인 사정으로 인해 현지에 늦게 도착해 코스 적응이 어려웠다고 들었습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또 오늘보다는 3, 4라운드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허 위원의 해설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1라운드에서 -2를 기록한 필상은 2라운드에서 -4를 치면서 단독 3위로 올라섰다. 이틀 연속 -4를 쳐 -8이 된 매킬로이와 -7이 된 저스틴 로즈에 이어 바짝 선두 추격에 나선 것이다.
또한 3라운드를 마친 뒤에는 모든 언론의 시선이 필상에게로 몰렸다. 이날도 -4를 기록한 단독 선두 매킬로이의 플레이는 흠 잡을 데가 없었고 -5를 치며 단독 3위로 올라선 타이거도 대단한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하루에 2타씩 더 줄이며 이날 -6을 친 필상이 -12로 공동 선두로 올라서는 광경은 모두에게 역전 드라마를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일은 -8을 치겠네.”
“그러려고요.”
“아이고! 할 말이 없네.”
미켈슨도 나름 분전했다.
종합 -5가 된 그는 공동 10위로 겨우 체면치레를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베팅 업체의 예측이 얼마나 정확한지 증명한 꼴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선두권의 성적도 끔찍할 만큼 정확하지 않던가!
필상 스스로도 서서히 코스에 대한 자신감이 붙어 내일 우승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밤 뜻하지 않은 증상이 나타났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