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96화 (196/354)

196. 가장의 본분

“놀라운 성적이로군!”

셋이 나란히 연습하던 와중에 -9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타이거도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필상도 아는 바는 그다지 없지만 아는 범위에서 최 프로에 대해 설명했다.

“투어 데뷔는 10년차인데 여태까지 우승은 한 번뿐이었답니다. 묘하게도 재작년 이 코스에서 펼쳐진 대회 우승자죠.”

“이 코스가 자신에게 잘 맞는 모양이로군.”

라운드를 해 봤기에 그 성적이 쉽지 않다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켈슨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다 말겠지. 어느 대회고 반짝하는 선수들이 있잖아.”

“그럴까요?”

필상도 거의 알지 못하는 선수였기에 그러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다음 날 -5를 치며 한결 나아진 채 경기를 마친 필상은 최 프로가 오늘도 -8을 쳤다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13번 홀에서 이글까지 기록하며 단독 2위와 무려 8타 차 선두로 나섰다는 소식에 필상만 놀란 게 아니었다.

타이거가 그의 경기 장면을 보고 싶다는 요청이 있어 필상은 이 대표에게 연락했고 곧 하이라이트 영상을 받았다.

그리고는 나란히 앉아 그의 실력을 확인했다.

“우후! 장난이 아니네!”

“샷이 굉장히 정교하군요.”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가 280야드밖에 되지 않는다던데, 이번 대회에서는 300야드를 넘기면서도 페어웨이 안착률이 완벽에 가까웠다.

게다가 아이언 샷도 정확했고 벙커에 빠져도 리커버리를 가볍게 하는 모습은 왜 그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구심이 일게 만들었다.

에이원 CC의 전장이 짧은 것도 아닌데, 자신감 넘치는 스윙은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공 프로.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하하. 장마다 꼴뚜기일 수는 없죠. 이렇게 무섭게 치고 나가면 저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17인 단독 선두 뒤로 -9가 2명이고 공동 4위가 필상을 포함해 4명이었다. 타이거는 -6, 미켈슨은 -5로 아직 톱 10에 들지 못했다.

때문에 그 성적을 접한 미국 골프팬들이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PGA 대회를 고사하고 한국에 가면 우승은 거의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림도 없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계 랭킹 1위인 필상이 선두에게 9타나 뒤지고 있는 상황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연승 행진이 멈출 수도 있다는 견해는 물론 코리안 투어의 수준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오늘 공 프로가 상당히 과감한 공략을 보여 주네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선두와의 타수 차를 줄이지 못하면 우승은 어려워진다고 봐야 하니까요.

-그런데 쉬워 보이지가 않네요. 최만철 프로가 오늘도 씽씽 날고 있거든요. 어떻게 저런 기량을 지닌 선수가 그동안 무명으로 지냈는지 알 수가 없네요.

-지난겨울 샷을 교정한 그의 올 시즌 성적은 꾸준했습니다. 톱 10에 5차례나 들었고 아쉬운 준우승도 있었지요.

-뒤늦게 기량이 만개한 거라고 봐야하나요?

-모든 것이 잘 맞아떨어졌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예선에서 특출한 성적을 기록하면 위축되게 마련인데, 오늘 그의 스윙을 보세요.

전반에 4타를 줄이며 추격의 가능성을 확인한 필상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지금 8번 홀을 마친 최 프로의 현재 성적이 -20이었던 것이다.

오늘은 주춤할 거라고 봤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 충격은 바로 필상의 스윙 리듬을 흔들었고 10번 홀부터 꼬이기 시작한 경기력은 후반에 1타를 줄이는 데 그치게 만들었다.

-13으로 공동 2위에 올라섰지만 큰 의미가 없었다. 선두와의 타수 차는 전혀 줄지 않았고 여전히 9타 차라는 거대한 벽을 느끼게 되었다.

최 프로는 이미 이 대회 최저타 기록과 동률을 이뤘고 새로운 기록 갱신에 대한 기대마저 부풀게 만들었다.

“9타는 좀 버겁겠어.”

“네. 그럴 것 같습니다. 플레이가 워낙 탄탄해서요.”

“하지만 자네랑 같이 챔피언 조에서 플레이를 하면 부담되기는 할 거야.”

“그러면 좋겠지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필상은 장타를 앞세워 초반 공략에 성공했지만 최 프로는 안전한 공략을 하는 와중에도 기회가 되면 버디를 낚았다.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그의 탄탄한 플레이에 티샷 미스가 먼저 나왔다. 502야드 파 4, 3번 홀에서 회심의 드라이브 장타를 날렸는데 넓은 페어웨이를 놔두고 우측으로 밀렸다.

타악!

카트 도로에 맞은 타구가 나무 사이로 기어들어 가는 순간, 우승은 멀어졌다는 느낌이 왔다.

게다가 최 프로가 차분하게 302야드를 날린 후, 204야드를 아이언으로 온 그린 시켜 버리자 더는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타수 차를 줄였지만 결국 안전한 공략을 이어간 최 프로에게 5타 차의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

너무 우승에 익숙했는지 준우승을 하고도 기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누구는 부러워할 성적일 텐데 말이다.

“축하합니다. 최 프로.”

“고맙습니다. 제가 우승한 거 맞죠?”

“하하하. 네. 대회 최저타 기록까지 갱신하며 우승했어요.”

믿기지 않는지 필상에게 되묻는 그의 눈가는 이미 촉촉했다. 무명으로 지냈던 긴 세월이 눈앞을 스쳐가는 것 같았다.

재작년 1승을 거둬 가능성을 확인했지만 작년에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성적이 좋지 않아 은퇴까지 고려했다고 말했다.

마지막 승부라고 생각하고 뼈를 깎는 전지훈련을 통해 샷을 교정했는데, 그게 주효했던 것이다.

“익숙하지 않겠지만, 준우승 축하해.”

“하하하. 형도 톱 10에 들어 명예 회복하신 거 축하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한국 선수들 원래 이렇게 잘 쳤나?”

“좋은 무대가 마련되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이전에는 투어에 참가하는 선수 중에 기본 생활이 되지 않는 선수들도 많았거든요.”

“그게 말이 돼?”

“투어가 침체되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젠 상금도 늘고 대회 수도 많아져 동기부여가 잘되는 것 같습니다.”

“은근히 자기자랑 하는 거 같은데?”

“하하하. 그렇게 되나요? 하지만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한동안 너무 침체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이런 상황을 희망했고 그래서 쉽게 제자리를 찾은 거지요.”

“이러다 아시아에서는 최고의 투어가 될 것 같아.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봐도 될지도 모르겠고.”

선수들의 기량이 활짝 만개한 것은 물론 대회 흥행도 연일 기록을 갱신했다.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서 열린 경기임에도 총 입장객 수가 3만 명을 넘었다.

투어에 활기가 넘치는 모습은 필상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 박세리로 인해 골프 붐이 일고 세리 키즈가 등장한 것처럼 요즘 한국은 다시 골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각 골프장의 내장객 수가 늘었을 뿐만 아니라 골프 용품 매출도 현격하게 늘었다. 특히나 필상의 메인 스폰서는 역대 최고 매출 기록을 달성하며 톡톡히 덕을 봤다.

우승하지 못했으나 인터뷰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다음 주에 저희 TPK 컴퍼니의 정식 개업식이 열립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을 초대하오니 모두 오셔서 축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 질문이 많았으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우승자다. 때문에 그걸 강조한 필상은 양해를 구한 뒤, 개업식 초대만 알리고 먼저 물러났다.

기다리던 일행과 함께 늦었지만 집으로 향하는데, 마음이 이렇게 편안했던 적이 또 있나 싶었다.

그동안 우승에 대한 부담이 압박감으로 다가와 대회 기간에는 소화가 되지 않아 애를 먹었는데 오늘은 그렇지가 않았다.

연승 행진에 멈췄지만 그래서 더 홀가분했다.

* * *

“연회장이 커서 다행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오란다고 정말 다 온 건가? 하하하.”

TPK 컴퍼니 창업 기념식은 TPK 서해안 CC에서 열렸다.

이전 운영진이 연회장을 왜 쓸데없이 크게 만들었는지 불만이었는데, 그 자리를 가득 채운 손님들을 보노라니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기념식은 최대한 간단하게 줄였고 다들 일어나 골프 코스로 흩어졌다. 왜냐면 오늘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기념 토너먼트 대회이기 때문이었다.

추첨을 통해 필상이나 타이거, 미켈슨과 함께 라운드를 할 영광을 얻은 기자들은 물론 초청 라운드를 즐기는 모든 이들이 새롭게 단장한 이 코스에 대해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저희가 이 멋진 코스의 홍보는 무조건 책임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홍 기자님은 백스윙을 할 때 오른팔이 치킨 윙이 되네요. 너무 들립니다.”

“아! 실전 레슨까지 해 주십니까?”

“레슨이랄 건 없고 그냥 좋지 못한 습관을 지적하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와! 영광입니다. 공 프로님.”

리노베이션을 마친 코스는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큼 훌륭했다. 거기에 보태 앞으로 TPK의 주요 사업이 될 레슨 프로그램도 홍보하기 위해 필상이 직접 나섰다.

이미 프로그램의 골격은 다 나왔고 필요한 인력까지 뽑아 교육 중이다. 표준화된 교육을 위해 필상도, 타이거도 꽤 많은 정성을 들였다.

때문에 곧 교육 현장을 찾아가 프로그램의 적용 상황을 직접 확인하고 코치들을 격려할 생각이었다.

“오신 분들이 모두 극찬하시더군요. 코스가 아주 좋다고.”

“어차피 예약이 밀려 당분간은 풀로 돌려야 해요. 동해안 CC도 마찬가지고요.”

“시작이 기대 이상이네요.”

“일단 합리적인 가격이 주효한 것 같아요. 회원권이 없어도 이런 훌륭한 골프 코스에서 즐길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지속성이죠. 레슨 프로그램이 가동되는 시기를 앞당겨야 할 것 같습니다.”

“마무리 단계니까 프로님이 한 번 격려차 들러 주시면 코치들이 상당히 좋아할 것 같아요.”

“물론이죠.”

창업 기념식은 성황리에 끝났고 타이거와 미켈슨은 먼저 영국으로 떠났다. 디 오픈까지는 2주의 여유가 있지만 철저히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당장 그날 저녁부터 호의적인 홍보 기사가 모든 스포츠 언론을 장식했고 예약 문의가 쇄도했다. 이미 예약이 꽉 차 두세 달 후에나 라운드가 가능하다는 대답에 벌써부터 다른 코스는 언제 개장하느냐는 문의가 이어졌다.

솔직히 18홀 라운드 총비용이 15만 원이면 그다지 저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대비용의 기름기를 쫙 뺐다.

한 팀이 그늘 집에서 간단히 요기만 해도 10만원을 훌쩍 넘는 불합리한 구조를 혁파하고자 모든 매장을 직영했다.

어차피 수익은 많은 손님을 유치함으로써 꾸준하게 이어져야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고비용은 이제 개선되어야 하고 그런 추세가 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 * *

“아들. 대회 없어?”

“모모코가 출산할 때까지는 집에 있으려고요.”

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필상이 며칠째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서 빈둥거리자 급기야 어마마마의 하문이 떨어졌다.

평소 남자는 나가서 일을 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분이시기에 당장 나가라고 쫓아낼 줄 알았는데, 일단 조용했다.

하지만 모모코를 설득한 것 같았다.

“오빠! 어머니랑 언니들이 있어서 전 괜찮아요.”

“내가 있는 거는 또 다르지. 나가라는 소리는 하지 마.”

“디 오픈이 곧 열리잖아요. 설마 신청도 안 한 거예요?”

“응. 나 바람이나 쐬고 올게.”

출산 때는 꼭 곁을 지키고 싶어 얼른 자리를 피했다.

모모코가 어떤 여자인가?

수많은 남자들의 로망이었고 나이 많고 볼품없던 자신에게는 너무도 고맙고 분에 넘치는 여인이다.

서로 좋아했지만 갑자기 덜컥 애를 가지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결혼이라는 속박에 갇히게 되었고 타국에 와서 시집 식구들과 함께 산다.

그녀는 아주 만족스럽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꿈을 이루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다니면서 그녀에게는 많은 것을 인내하도록 강요하는 꼴이다.

그래서 늘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하지만 끝내 필상은 영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가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자신과 태어날 아기를 위해 가장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는 모모코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필히 우승해야 해!’

참가에 의의를 두기에는 너무 아쉬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보다 완벽히 대비하기 위해 필상은 흑돈까지 대동했다. 아직 코리안 투어 직행을 위한 포인트를 쌓지 못했지만 아일랜드의 코스를 경험하는 것도 큰 공부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덕분에 긴 비행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마사키가 좋은 캐디지만 여자라서 함께할 수 없는 행동이나 대화도 있고 필상을 잘 아는 성호가 잡다한 것을 챙겨 주기 때문에 오직 대회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형수가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고요?”

“그랬다니까!”

“에이! 무슨 남자가 그런다고 그냥 나와요.”

“이 자식이 진짜!”

성호의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디 오픈에 출전하라는 말은 진심이었을지 모르나 그래도 곁을 지켜 줬으면 더 행복해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미 비행기는 떴다.

기왕 나선 김에 확실한 결과를 내는 것만이 그나마 모모코를 위한 일이라고 판단한 필상은 곧바로 코스에 대한 분석에 들어갔다.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배웅 나온 이 대표는 상당한 관련 자료를 안겨 줬다. 혹시 몰라서 준비해 뒀다는데, 그녀가 엄마를 부추긴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여하튼 런던공항에 도착한 필상은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에 놀랐다. 타이거와 미켈슨이 마중 나온 것은 이해되지만 영국에도 자신을 인터뷰하고자 기다린 기자들이 수십 명이라는 사실에 뿌듯했다.

“이젠 확실히 세대가 바뀌었나 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가 같이 입국할 때도 이렇게 많은 기자들이 몰리지는 않았거든.”

“난 또 무슨 얘기라고! 당연하죠. 제가 세계 랭킹 1위잖아요.”

“으으으! 졌다. 졌어!”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는데, 티를 내는 미켈슨이나 빙긋이 웃는 타이거나 세계 골프의 중심이 누구를 기준으로 돌아가는지 이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상은 인터뷰 내내 여유롭게 질문에 답을 했는데, 이전과는 달리 필히 이번 대회는 우승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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