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95화 (195/354)

195. 뚱보 아줌마

US 오픈 우승은 필상의 위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PGA 챔피언십의 우승도 대단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놀랍다는 반응이었을 뿐, 새로운 황제의 탄생이니 하는 말들은 거북하게들 느꼈다.

하지만 우승 과정이 험난했던 것이 더 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인지, 세계 랭킹 1위에 등극한 것이 결정적이었는지 모든 스포츠 지면의 톱은 필상의 사진으로 도배가 되었다.

일찍이 한국 출신의 수많은 스타가 존재했고 현존하지만 이렇게 전 세계인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경우는 없었다.

“우리가 함께 한국으로 가는 것에 대해 말들이 좀 있더군.”

“코네티컷으로 향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그러니까.”

이번 주에 열리는 PGA 대회, 트레블러스 챔피언십이 코네티컷에서 개최되는데 투어에서 가장 뜨거운 선수 3명이 모두 불참하게 되면서 흥행에 빨간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셋이 나란히 한국에서 열리는 KPGA 선수권대회에 출전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너무 무책임한 게 아니냐는 반응이 쏟아진 것이다.

하지만 대회 출전은 선수의 선택 사항일 뿐, 의무 사항이 아니다. 더 큰 상금이 주어지는 대회를 놔두고 굳이 소중한 시간까지 허비하면서 코리안 투어에 참가한다는 소식에 의도치 않게 KPGA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

“그나저나 디 오픈 출전을 아직 확정하지 않았다면서?”

타이거는 메이저 연승을 달성한 필상이 아직도 디 오픈 출전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걱정의 말을 던졌다.

사실 KPGA 선수권대회가 끝나면 코리안 투어는 여름 휴식기에 들어간다. 소규모 대회가 있지만 팬들도 미국을 오가며 피곤한 필상의 출전을 바라지는 않는다.

같은 값이면 PGA 우승을 바라기 때문에 디 오픈 참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어 보류 중이었다.

“아내가 출산을 할지도 몰라서요.”

“아! 그렇게 되나?”

미국인들은 가족 행사를 굉장히 소중히 여긴다.

동양에서는 남자가 큰일을 하는 게 우선이지만, 딸의 졸업식과 같은 행사에 참가하려고 메이저 대회를 거르는 선수도 왕왕 있다.

그러니 첫 아이의 출산이라면 얼마든지 디 오픈은 건너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얘기가 나오자 곁에서 곤히 자는 줄만 알았던 미켈슨이 반응을 나타냈다.

우승 기회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잘 조절해 봐.”

“뭘 조절해요? 출산일을 당기기라도 하라는 말입니까?”

“그건 아닌데, 일단 출전 의사부터 밝히고 상황을 지켜보자는 거지. 1년에 한 번뿐인 대회이고 다른 대회도 아닌 메이저 대회잖아. 연승을 바라는 팬들의 소망도 고려해야지.”

“7월 19일부터 시작되니까 적어도 15일에는 북아일랜드에 도착해야 하는데, 출산 예정일이 15일입니다.”

“끄응!”

필상이라고 왜 디 오픈 출전을 바라지 않겠는가!

하지만 늘 곁을 지켜 주지 못하는 자신이 출산 때마저 골프를 핑계로 나가는 것은 스스로 용납되지 않았다.

[세계 랭킹 1위, 공필상 프로의 귀국을 환영합니다.]

[US오픈 우승! 한국 골프가 낳은 최고의 선수, 공필상 프로 사랑합니다.]

인천공항은 미어터졌다.

기자들은 물론 열성 골프팬들도 찾아왔고 입출국을 위해 대기하던 승객들도 모두 필상의 귀국 소식에 몰려들었다.

이전에는 동반한 타이거와 미켈슨에게 적지 않은 스포트라이트가 분산되었지만, 이번에는 그들이 서운할 만큼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저 한 화면에 담기 위해 포즈를 취해 달라는 부탁만 있었을 뿐, 인터뷰에서도 모든 질문은 필상에게 쏠렸다.

-먼저 US 오픈 우승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밤을 새면서까지 열렬히 응원해 주신 한국 열성 팬들의 뜨거운 성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미 대단한 기록을 세우고 계신데 다음 목표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현재로서는 KPGA 선수권대회 이외의 계획은 없습니다.”

-그래도 디 오픈 출전은 하시는 거죠?

“출전하고 싶습니다.”

그 대답이 출전의사라고 판단한 기자들은 안심하고 다른 화제로 전환했다.

-최근 JGTO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들었는데, 일본 투어 출전 구상은 없으신가요?

“조만간 일본에 갈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대단한 말도 아니건만 기자들 중에는 환호성을 터트린 이들이 적지 않았다. 추측컨대 아직도 매듭짓지 못한 민족적 감정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일본 내에 확인되지 않은 부정적인 가십성 기사가 너무 잦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투어시드를 처음 확보하고도 정작 JGTO는 무시하고 외면한다는 사실무근의 기사가 실리는데, 많은 골프팬들이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편향적인 내용을 접한 한국 기자들은 팩트 체크에 들어갔고, 사실은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 이유가 바로 코리안 투어를 살리기 위한 일정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때문에 반박성 기사를 쓴 기자도 있었지만 오히려 점점 더 악의적인 반응이 팽배하는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도 필상이 이미 공언한 바가 있어 대회 출전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봤는데, 자신의 말을 뒤집은 것이다. 그러나 그걸 따지는 기자는 없었고 오히려 기분 좋아하는 것을 보며 그다지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본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요.”

인터뷰를 마치고 차에 오르자 이 대표는 인터뷰 내용에 대해 지적했다. 이미 그녀와는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그건 내부적인 결정이고 공식적인 입장을 드러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상은 단호했다.

“내 생각과 실력을 증명하는 그 지겨운 과정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젠 그럴 이유도 없고요.”

“사토시 때문이라면 보다 세련된 다른 방도를 강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 얘기가 아닙니다. PGA라면 모를까, 이제 JGTO는 특별한 대우가 보장되지 않는 한, 참가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아!”

세계적인 선수가 굳이 상금 규모도 작고 이동 거리도 만만치 않은 일본 투어에 참가하려고 기회비용을 잃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이 대표에게 상기시킨 것이다.

타이거나 미켈슨, 리키 파울러처럼 당대 최고라고 인정받는 선수를 일본에 초대할 경우, 비공식적이나마 우승 상금에 버금가는 초청료가 지불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일본 투어 관계자들이나 전문가라는 이들이 필상의 달라진 위상을 애써 무시하고 거꾸로 비난을 방조하는 것은 필상의 입장에서 보면 가소롭기 그지없는 행위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대표도 필상의 말을 듣고 나서야 상황을 인지했다.

“제가 착각을 했네요. 매니저라는 사람이 칠칠맞게.”

“하하하. 왜 그러세요. 일본 시장은 제게도 절대 버릴 수 없는 곳이라는 걸 아시잖아요. 다만 제 가치를 부정하는 자들과 실랑이를 벌일 시간도, 마음도 여유도 없을 뿐입니다.”

그 문제가 매듭지어지자 이후 이 대표는 전화 통화로는 확인할 수 없었던 스폰서 계약에 대한 필상의 상세한 의견을 경청했다.

나이키는 필상에게 굉장히 고마운 존재다. 어려운 시기에 자신의 가치를 가장 먼저 인정하고 깜짝 놀랄 거금을 안겨 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계약에 우선권을 부여하지만 그렇다고 정당하지 않은 대우를 받을 마음은 없기 때문에 다양한 방도를 고려하고 최선의 스폰서를 구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오빠!”

“하하하. 이 뚱보 아줌마는 대체 누구지?”

“이씨! 정말 이러기에요!”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가족들이 모두 몰려나왔지만 가장 먼저 필상에게 안긴 사람은 역시 아내 모모카였다.

둘의 알콩달콩한 해후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만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확인한 필상은 모모카를 번쩍 안아들고 엄마에게로 향했다.

“저 왔어요.”

“아기 다칠라. 조심해.”

“제가 아빠인데 별 걱정을 다하세요.”

반가워하는 마음이 읽혔으나 엄마는 무덤덤한 기색을 유지했다. 남들 같으면 장한 아들을 부둥켜안고 눈물이라도 보일 것 같은데, 그런 역할은 모두 모모카에게 일임한 사람 같았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힘이 되었던 분이 바로 당신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아이를 가진 모모카가 품에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아. 어서들 와요. 시장하죠. 내 맛있는 밥상 차려놨으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와요.”

“네. 엄마.”

“호호호. 넉살도 좋네. 이 양반.”

미켈슨이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몰라도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엄마라고 부르는 바람에 다들 크게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집에서 며칠 푹 쉬고 싶었으나 다음 날 아침, 필상 일행은 양산으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KPGA 선수권대회가 양주시 에이원 CC에서 열리기 때문이었다.

필상은 모모카를 데려가고 싶었으나 엄마가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시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산달이 다가온 며늘아기를 자신보다 더 아끼시는 그분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미국에서 월요일 저녁에 출발했지만 빡빡한 일정 때문에 양산에 도착한 필상 일행은 곧바로 연습 라운드를 하며 코스 적응부터 시작했다.

“제법 멋진 코스로군!”

“그러네요. 늘 세계적인 코스만 다니던 분이 좋게 평가를 해 주시니 제가 다 기분이 좋네요.”

타이거는 에이원 CC가 무척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하기야 경남을 대표하는 명문 클럽이고 10년간 KPGA 선수권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한 코스가 허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 코스를 소개하는 테마가 적힌 한글 글귀를 보자 무슨 뜻인지 궁금했던지 해석을 부탁했다.

[한 번의 라운딩으로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해 드립니다.]

“저게 무슨 뜻이지?”

필상은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그런데 픽 웃는 그의 반응은 의외였기에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작위적이잖아. 감동은 골퍼가 라운드를 하며 직접 느끼는 거지, 감동시키려고 노력한다고 가능한 걸까?”

“그래도 좋은 마인드 아닌가요?”

“내게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말로 들려. 감동을 줄 테니 많이들 와. 그런 뜻이잖아.”

“그럼 어디 한 번 라운드를 돌아 보죠.”

대회가 열릴 남 코스와 서 코스를 직접 돌아본 미켈슨과 타이거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스코어 빼고는 다 마음에 드네.”

“하하하. 필, 전 한국적인 코스 레이아웃이 무척 인상적이라고 느꼈습니다. 한국의 산악 지형을 있는 그대로 잘 살린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반응 못지않게 필상도 코스가 마음에 쏙 들었다. 사실 한국 골프장을 많이 다녀 보지 못한 필상으로서는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된 셈이다.

나름 이 코스를 미리 살펴봤지만 실제로 라운드를 해 본 느낌은 결코 한국적인 코스가 외국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우리 TPK 코스에도 이런 장점을 십분 활용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좋아. 일본 코스들은 일본대로 나름의 특색이 있잖아. 한국도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은 좀 다른 것 같아. 코스를 설계하기에 더 풍부하다고나 할까?”

타이거는 일찍이 코스 설계에 관심이 많았다.

때문에 전문적인 학습과 실험을 병행해 왔다. 그런데도 쉽게 한국형 코스에 대한 판단이 정립되지 않는 것 같았다.

물론 본인은 태국을 담당하지만 아시아 시장의 중심이 될 한국의 코스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 같았다.

그래서 3번째 코스를 찾게 되면 코스 리노베이션을 그에게 맡기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제안했더니 크게 기뻐했다.

* * *

-제 63회 KPGA 선수권대회가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날씨가 좀 흐렸지만 다행히 비 소식은 없더군요. 구름 때문에 잔디가 더 짙어 보여 무척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그럼 좋은 성적을 기대해 봐도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올해로 이미 5번째 이 코스에서 개최되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선수들이 코스에 적응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 처녀 출전인 공 프로나 타이거, 미켈슨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이로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코스가 전체적으로 언듈레이션이 심하고 그린도 빠르고 경사가 복잡해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경기를 펼쳐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 이 코스에서 우승한 선수들의 성적은 대체로 좋았다. 대략 -20 가까이 가야만 우승 경쟁이 가능했다.

하지만 주최 측에서는 지난 성적들이 메이저 대회치고는 너무 좋은 편이라 올해는 위험 요소를 추가했다는데, 분화구식 잔디 벙커와 그린의 경사를 더 높인 것이 관건이었다.

실제 첫 라운드를 마친 필상은 생각만큼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샷 컨디션은 최상이지만 핀을 바로 노리다 가드 벙커에 빠져 보기를 2개나 적어 낸 것이 아쉬웠다.

1라운드 최종 성적은 -3, 무난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필상의 순위는 공동 14위에 그쳤다.

“다들 미리 약속한 건가요?”

“왜?”

“어떻게 TPK 세 사람의 성적이 똑같으냐고요.”

가장 먼저 라운드를 마친 필상이 점심을 먹고 연습장에서 샷을 가다듬고 있는데 미사키가 두 사람의 결과를 물어 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성적이 동일했다.

타이거는 보기가 없는 안전한 플레이를 펼쳤지만 미켈슨은 버디 5개, 보기 2개로 필상과 기록마저 똑같았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단독 선두의 성적이었다.

-9 최만철. 그는 무려 10개의 버디를 잡아냈다. 신들린 퍼팅이었다는데, 평균 퍼트 수가 겨우 1.36에 불과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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