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94화 (194/354)

194. 세계 랭킹 1위

‘갑자기 바람이 잔잔해진 건가?’

그렇게밖에 해석될 수밖에 없는 궤적을 보였다.

이대로라면 그린 좌측 벙커는커녕 그냥 바다에 빠져 버릴 것만 같았다. 우측 벙커에 빠진 미켈슨보다 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강하던 타구가 뒤늦게나마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충분하지는 못했지만 바다에서 벗어난 타구는 좌측 벙커에 떨어졌다.

모래 파편이 사방으로 튀는 장면이 보였기에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람이 조화를 부리는군요!

-그렇습니다. 필은 바람을 부담스러워하다가 벙커에 빠뜨렸으나 미스터 퍼펙트는 너무 적극적으로 해풍을 활용하려다 위기를 맞이한 셈입니다.

-수시로 바뀌는 바람이 말썽이군요. 만약 둘의 바람이 바뀌었다면 모두 온 그린이 되었을 텐데요. 하하하.

프랭크는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지만 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많았다. 각자 좋아하는 선수의 우승을 바라는 입장에서는 지금 상황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보면 미켈슨보다는 필상이 더 억울했다. 바람이 갑자기 약해졌던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하필 그 순간에 바람이 약해지다니, 좀 화가 나네요.”

“하하. 이미 결과가 나온 걸 어떡하겠어. 해저드에 들어가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지.

“네. 쓸데없는 불평만 늘어놓아 죄송해요.”

“아니야. 아직은 내가 더 유리하니까 그렇게 답답해할 이유는 없어. 필의 벙커샷부터 보자고.”

핀이 좌측에 꽂혀 있는 탓에 필상은 8야드, 미켈슨은 14야드가 남았다. 단순히 거리가 짧기 때문에 유리한 것이 아니라 미켈슨이 쳐야 할 방향에 바다가 있다는 것이다.

길어도 웬만하면 벙커에 빠지겠지만 엉뚱한 샷으로 바다에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스윙은 위축될 확률이 높았다.

파악!

미켈슨은 과감했다.

뒤에 위험 요소가 많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 과감한 샷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아는 듯 보였다.

하지만 샷 결과가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벙커에서 튀어나온 타구는 웬만해서는 스핀이 잘 먹지 않는데, 그의 타구는 이상하게도 강한 스핀이 걸려 핀 3야드 앞에 멈춰 버렸다.

버디 퍼팅인데 더블 브레이크라서 넣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다. 그러나 필상은 다른 생각은 접고 정확한 이미지를 생성해 내며 그에 맞는 빈 스윙을 가져갔다.

-한 샷 한 샷이 모두 승리를 위한 결정타가 되는, 아주 긴장되는 묘한 상황이 계속 이어집니다. 과연 미스터 퍼펙트가 핀에 바짝 붙일 수 있을까요?

-결코 만만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평소 기량이라면 얼마든지 붙일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켜보는 팬들은 물론 저도 덩달아 긴장이 됩니다.

그 해설이 마무리되는 순간, 필상의 폭발적인 벙커샷이 터졌다. 강한 바람 때문에 피어오른 모래 파편이 사방으로 날리는 가운데 유난히 하얀 필상의 타구가 사뿐히 그린 위에 모습을 드러냈고 비명을 자아내는 방향으로 굴렀다.

“아!”

깊은 탄성이 터진 이유는 공이 홀컵에 들어갈 듯 움직이더니 주변을 반 바퀴 돌고 다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만약 들어갔다면 미켈슨의 퍼팅은 볼 필요도 없다. 벙커 샷 이글로 우승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볍게 탭인 버디를 성공하는 순간, 필상의 승리는 눈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미켈슨의 공은 상당히 까다로운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군 멍군, 더블 브레이크에 오르막에 이은 내리막 퍼팅인데도 미켈슨의 공은 정확한 라인을 타고 홀컵 속으로 쏙 사라졌다.

-어허! -13 공동 선두로 마지막 라운드가 끝이 났습니다. 연장전으로 들어갈 텐데, 좀 특이한 기록이 있군요?

-아! 미스터 퍼펙트가 지금까지 한 번도 연장전을 치르지 않은 것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맞습니다. 늘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경쟁자들을 물리쳤는데, 오늘은 상황이 이전과는 다릅니다. 앞서간 것이 아니라 추격에 성공한 입장인 거죠.

-연장전은 경험이 중요하지 않나요?

-경험보다는 담력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이어진 팽팽한 긴장감이 더욱 고조가 되기 때문에 그걸 이겨 내는 선수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유리한 거죠? 제가 볼 때 멘탈은 미켈슨이나 미스터 퍼펙트나 결코 만만치가 않거든요.

팬들도 의견이 확연하게 갈렸다.

풍부한 경험을 가진 미켈슨이 유리하다는 생각을 가진 팬들이 있는가 하면 젊고 당당한 필상이 유리하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까지 철혈을 지닌 것처럼 연승을 이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 더 주목할 부분이 있는데, 그건 바로 미켈슨의 US오픈 징크스였다.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아픈 기억이 바로 6번이나 준우승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2006년 미켈슨은 이 대회 최종일, 챔피언조로 출발해 17번 홀까지 1타 차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드라이브 티샷이 슬라이스가 나 나무숲으로 기어 들어갔고 좋지 못한 라이임에도 레이 업을 하지 않고 나무를 뛰어 넘기려다 가지에 걸리는 바람에 30m밖에 보내지 못했다.

이후 3번째 샷이 다시 벙커에 빠졌고 그 벙커샷도 너무 길어 1퍼팅에 실패하면서 제프 오길비에게 우승을 넘겨줬다.

만약 한 번의 샷만 잘 참아 보기만 기록했어도 연장전을 갔을 텐데, US 오픈 챔피언의 길은 그에게 너무도 험난했다.

“연장전은 처음이지?”

“US 오픈 연장전은 형도 처음 아닙니까?”

“컥!”

혹을 때려다 커다란 혹을 붙이게 된 미켈슨은 아픈 기억이 떠올랐는지 더는 필상과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필상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그에게도 중요한 승부지만 필상에게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소중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PGA 챔피언십을 거머쥐면서 메이저 대회의 가치를 체험한 필상은 이 대회의 우승이 얼마나 어려운지 미켈슨을 통해 확인했다.

우승 가시권에 드는 것도 어렵지만 둘로 압축된 경쟁에서 진다면 그 후유증은 생각보다 오래 갈 수 있기 때문에 필히 잡아야만 했다.

‘그랜드슬램. 난 그게 필요하거든!’

실은 더 마스터즈부터 출전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당시 코리안 투어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인데, 이렇게 빨리 자신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

자신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최고의 선수들이 경쟁하는 무대라면 우승을 밥 먹듯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모든 일들이 착착 풀리면서 예상보다 훨씬 일찍 PGA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걸 실감할 때마다 소름이 돋을 만큼 기쁘고 만족스러웠다.

또한 이미 구상한 것보다 코리안 투어의 성장은 확연했기 때문에, 또한 본의 아니게 일본 투어 출전이 기껍지 않게 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PGA 출전 기회가 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최고의 목표로 잡은 것이 바로 그랜드슬램이다. 어차피 마스터즈는 불참했기에 커리어 그랜드슬램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 타이틀을 거머쥔다면 더는 자신의 실력에 의심을 가지는 골프팬들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너를 뽑겠습니다.”

경기위원이 동전을 던졌는데, 미켈슨이 먼저였다.

결코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은 그가 이번에는 드라이브를 들고 나섰다. 사실 그의 드라이브 티샷은 정확하지 않다.

페어웨이 적중률이 50%안팎으로 투어 최하위권이다. 그런데 대체 뭘 믿고 드라이브를 잡았는지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조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최근 그의 샷이 호조를 보이기 때문에 그의 티샷을 바라보는 필상도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티샷에 대한 반응은 미사키에게서 먼저 나왔다.

“와! 좋은데요!”

“과연 그럴까?”

미켈슨은 아까 이 홀에서 3번 우드를 때리고 우측으로 당겨진 쓰라린 경험이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드라이브를 잡지 말았어야 하는데 강한 집념이 그를 일으켜 세운 것 같다.

왼쪽 골퍼인 그에게는 슬라이스 구질이 나면 좌측 벼랑이 위험하다. 필상은 그의 타구가 깎여 맞았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걸 정확히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욱이 경기를 중계하고 있는 캐스터와 해설자도 캐치하지 못한 것 같은 대화를 이어갔다.

-방향이 상당히 좋은데요?

-해풍이 아까 티샷 할 때처럼 분다면 알맞은 방향으로 보이지만 콩 프로의 세컨샷의 경우처럼 바람이 불지 않으면 지금 방향은 곤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 경우는 특수했던 상황이고 지금 풍향계가 가리키는 바람은 충분히 타구를 안으로 밀어낼 것 같습니다.

모든 정신력을 쏟아부은 이 티샷의 정확도에 대해 의심하는 이는 적었다. 그러나 바람이 확연한데도 좀처럼 안으로 감기지 않는 타구의 궤적을 바라보는 이들의 입에서는 아무 말이 나오질 않았다.

“어? 왜 안 들어오는 거죠?”

“슬라이스가 났어.”

“정말인가요?”

“응. 내가 볼 때는.”

그 말을 남긴 필상은 유틸리티를 들고 티 그라운드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직도 타구를 쳐다보고 있는 미켈슨이 있었다.

“결과를 알면서 뭘 그렇게 집착하십니까?”

“응?”

“슬라이스가 났잖아요.”

“그래. 그랬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것도 실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공을 바라본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그래도 서운한 감정이 남았는지 그는 벼랑 법면에 맞은 공이 바다에 빠지며 만든 포말을 쳐다보며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그러더니 돌아서며 한마디 던지는 걸 잊지 않았다.

“봤다시피 과욕은 금물이야.”

필상더러 무리하지 말라는 조언이었다.

그는 필상이 안전한 선택을 하리라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앞선 경쟁자가 해저드에 빠뜨렸지만 그래도 아까처럼 329야드의 강력한 티샷을 날릴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필상의 티샷은 평범하지 그지없었다.

-아! 287야드. 전혀 무리하지 않는군요!

-당연합니다. 만약 필의 타구가 해저드에 빠지지 않았다면 콩 프로도 장타를 선택했을 겁니다. 그러나 뻔히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도 무리를 한다면 그게 멍청한 거죠.

-그래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는데…….

-하하하! 자존심은 그렇게 지켜지는 게 아닙니다. 쉽고 편한 길이 있는데 굳이 어려운 길을 간다면 그건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겁니다.

챔블리의 해설은 냉정했다.

미켈슨의 미스 샷은 본인의 몫이지 그걸 상대가 굳이 고려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무리하다가 똑같은 실수라도 반복한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진단 말인가!

안전한 공략을 하고 내려오는 필상의 클럽을 받은 미사키는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한껏 붉어진 그녀의 얼굴은 이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나이스 샷!”

“아직 승부가 끝나지 않았어.”

“치! 알았다고요.”

그러나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왜냐면 해저드에 빠진 미켈슨의 3번째 샷 위치가 같은 티 박스 위였기 때문이다. 규정상 해저드에 빠진 공은 해저드에 들어간 직후방이기 때문에 애초에 바다를 보고 쏜 그는 겨우 30야드 앞에서 다시 샷을 해야만 했다.

3번 우드를 잡은 그의 타구가 268야드를 날았지만 남은 거리는 246야드, 아이언으로 올리기에는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하지만 기다리던 필상과 함께 세컨샷 지점으로 이동하는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마치 그를 억압하던 긴 압박에서 해방된 듯.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저녁은 제가 거하게 쏘겠습니다.”

“하하하.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아직 장갑을 벗지 않았잖아.”

“물론이죠.”

그러나 필상이 남은 267야드를 22도 유틸리티로 낮게 깔아 그린 초입에 올리자 그도 3번 아이언으로 온 그린에 성공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2온과 4온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는 필상의 롱 퍼팅이 핀에 붙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패배의 인정한 미켈슨이 마크를 집었다.

“진심으로 축하해!”

“감사합니다. 이게 다 저를 아껴 주신 두 형님들의 도움 덕분입니다.”

“아니야. 자네 때문에 다시 내가 살아 있음을 절감하고 있지. 비록 준우승이지만 난 내가 자랑스러워.”

크게 실망했을 것 같았는데 오히려 필상을 뜨겁게 안아주는 미켈슨, 필상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감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순식간에 몰려나온 동료들의 샴페인 세례에 온몸이 흠뻑 젖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필상은 또 한 번 골프 역사에 남을 우승을 이뤄 냈다.

[미스터 퍼펙트. US 오픈 제패!]

[메이저 2연승! 새로운 황제의 대관식인가?]

[루키 시즌 4승을 달성하며 세계 랭킹 1위 등극!]

10월에 시작해 8월에 시즌이 마감되는 PGA는 아시아 투어와는 일정이 다르다. 때문에 멕시코 챔피언십부터 시작해 US 오픈까지 4승을 달성한 필상은 세계 랭킹 1위에 올라섰다.

메이저 대회 포인트가 워낙 높아 페덱스 컵 포인트마저 1위에 올라섰을 뿐만 아니라 최저타수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에서 필상은 최고 윗자리를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시드를 확보한 해에 4승을 달성한 선수, 또한 5번의 대회 출전에 4승을 거뒀던 선수도 물론 없다. 게다가 4번의 우승 중에는 2번이 메이저 대회이고 제5의 메이저 대회라는 더 플레이어스까지 포함되어 있어 그 순도까지 최고로 높았다.

“나이키가 재협상을 제안해 왔어요.”

우승 만찬이 진행되는 내내 주인공인 필상은 축하 전화를 받기에 바빴다. 가족들과 가장 먼저 통화했고 뒤이어 이 대표와 통화했는데, 새로운 계약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굳이 나이키일 필요가 있나요?”

“그렇지는 않지만 나이키보다 더 거금을 내놓을 스폰서는 많지 않아요.”

“적절한지 여부는 논란이 있겠지만 메인 스폰서가 꼭 하나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걸 한 번 고심해 보세요.”

“아!”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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