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93화 (193/354)

193. 인 더 홀

“아! 정말 아깝네요!”

“너무 강했나 봐.”

“이럴 때는 왜 바람이 안 부는 거죠?”

바람도 막을 수 없을 만큼 타구가 강했기 때문이지, 딱히 이번에만 바람이 약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홀컵 부근에 멈출 것 같던 타구가 그린 뒤편까지 굴러가는 광경에 미사키만 안타까워한 것은 아니다.

미켈슨을 응원하는 팬들보다는 적지만 필상의 열렬 팬들은 자신의 감정을 아낌없이 표현했다. 적어도 좋은 버디를 기회가 올 줄 알았기에 한숨 소리가 무거웠다.

-러프에 맞은 공도 저렇게 많이 굴러갈 수 있군요.

-보통 선수라면 힘들 겁니다. 미스터 퍼펙트의 임팩트는 평범함을 뛰어넘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특출한 능력이야 이미 여러 차례 증명이 되긴 했지요. 그나저나 이번 홀의 상황이 어떻게 될까요?

-미켈슨은 11야드 내리막 퍼팅, 미스터 퍼펙트는 7야드 오르막 퍼팅입니다. 페블 비치의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미켈슨이 유리할 것 같지만 콩 프로의 평균 퍼팅 수는 너무도 압도적입니다. 하지만 둘 다 버디를 잡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필상이 유리한 것은 틀림없지만 단번에 넣기 어렵다는 것을 감안하면 둘 다 파를 기록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했다.

그런데 먼저 버디 퍼팅을 시도한 미켈슨의 공이 신기한 장면을 연출했다. 내리막 중간에 멈춰서 버린 것이다.

내리막 경사만 태우면 자동으로 굴러가고 마크를 해도 공을 세우기 어려운 라이라고 봤는데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당사자도 하도 어이가 없어 한참 노려보다가 하는 수없이 마크를 할 정도였다. 필상이 판단컨대 PGA 그린 스피드는 절대 이런 경사에서 멈출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바람의 조화였다. 그 상황을 고려하면 오르막 퍼팅이라도 지나치게 과감하면 홀을 훌쩍 지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평소 거리보다 살짝 짧게 가도록 밀었다.

-어? 저건 너무 약하지 않나요?

챔블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결과는 드러났다.

멈출 것 같던 공이 꾸역꾸역 굴러 홀컵으로 쏙 빨려 들어간 것이다. 그 순간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전율이 돋았다.

관전하던 팬들의 비명 소리가 지축을 흔드는 것만 같았다.

“정말 환상적인 퍼팅이었어요!”

“짧은 줄 알았어.”

“바람을 의식해 그렇게 친 거 아닌가요?”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바람이 퍼팅에도 이렇게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 스트로크에서 그걸 적용한 필상의 재치가 빛나는 순간이었다.

졸지에 동타가 되었고 역전까지도 가능한 상황을 맞이한 미켈슨의 표정은 사뭇 서리가 풀풀 날렸다. 모르긴 몰라도 큰 절망을 느꼈으리라.

하지만 그는 내리막 퍼팅을 기가 막히게 넣어 버렸다.

그냥 퍼터페이스를 공에 슬쩍 갔다 댄 정도였으나 공은 비실비실 구르다 오히려 탄력을 받았고 정확한 라인을 타고 입이 쩍 벌어질 파 세이브에 성공했다.

“와! 정말 멋진 스트로크였습니다.”

“어디 자네만 하려고!”

“저야 운이 좋았지만 형의 퍼팅은 완벽히 감각적인 터치 아니었습니까!”

“결국 이제 다시 시작인가?”

“그렇지요. 마지막 홀에 승부를 걸겠습니다.”

그 말은 파 5홀에서 장타를 구사하겠다는 의미였다.

홀의 좌측을 타고 무시무시한 벼랑이 그린까지 이어지는 위험한 홀이지만 필상의 정확성이라면 충분히 가능해보였다.

그런데 막상 티잉 그라운드에 먼저 올라가는 필상의 손에는 드라이브가 아닌 18도 유틸리티우드가 들려 있었다.

-장타를 기대했던 팬들은 좀 아쉽겠네요.

-아닙니다. 저는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543야드 전장에 350야드 티샷을 날리면 아이언 2온도 가능하겠지만 필의 안전한 공략이 예상된다면 굳이 위험한 선택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아이언 정확도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장타를 정확히 페어웨이에 떨어뜨리면 더 쉽게 상대를 앞설 수 있을 텐데요?

-만약 다음 홀이 남았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거센 바람을 이기려다 까딱 실수라도 한다면 아예 우승 기회조차 함께 날아가기 때문에 지금 콩 프로의 선택은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드라이브 티샷의 정확성은 따라올 자가 없다.

하지만 승부를 제멋대로인 바람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유틸리티였다.

적어도 안전한 샷에 대한 확률이 월등하게 올라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낮은 탄도라도 얼마든지 장타를 날릴 수 있다.

평소 18도 유틸리티의 비거리는 250야드지만 그건 80% 이하의 힘을 사용했을 때다. 정확성을 버리지 않는 범위에서 보다 강한 스윙을 한다면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티 그라운드에 올라선 필상은 몇 번의 연습 스윙을 통해 점차 가속을 붙여 나갔다.

쉬잉! 쉬이잉!

고구마를 닮은 클럽 헤드가 바람을 가르는 살벌한 소리가 그의 샷을 기다리는 갤러리들의 심장 박동을 더욱 키웠다.

-현장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굉장히 강한 임팩트를 구상하고 있는 것 같죠?

-그렇게 보입니다. 서서히 헤드 스피드를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평상시 그의 5번 유틸리티 비거리는 250야드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 에이밍은 그와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그러게요. 기왕 안전하게 갈 거면 조금 더 우측을 보는 게 어떨지 모르겠네요.

필상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바다 한가운데였다.

비록 해풍이 불어 타구가 슬라이스 구질처럼 휠 것이 예상되지만 250야드만 날린다면 바람이 무색한 방향이었다.

허풍을 떨었다고 생각한 미켈슨도 필상의 에이밍을 확인한 뒤로는 연이어 마른침을 삼켰다. 유틸리티로 평소와 다른 장타를 구상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방향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난히 샷 루틴이 길게 느껴졌던 필상이 마침내 어드레스를 했다. 보던 방향대로 그린 좌측의 기나긴 벙커 끝을 봤다.

미사키는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린 상태였다.

그 어떤 선수보다 신뢰하지만 지금의 긴박한 상황은 하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필상의 깔끔한 티샷이 터졌다.

까앙!

오로지 유틸리티우드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음향이다.

깔끔한 듯 보이지만 스윙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크기는 아낌없는 풀스윙이었고 전체적인 리듬이 평소보다 미세하나마 빨랐다.

결과는 알 수 없지만 타격이 이뤄지는 순간부터 귀를 아프게 할 만큼 엄청난 응원이 쏟아졌다.

-와우!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 같습니다. 낮게 깔렸던 공이 서서히 떠오르는데, 마치 중간에 다시 한 번 도약을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과연 18도 유틸리티로 얼마나 보낼 수 있을지 정말 궁금합니다.

중계진은 그 타구가 해저드에 빠질 것이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왜냐면 드라이브도 아닌 유틸리티를 잡았기 때문이다.

평소 정확한 샷이 요구될 때마다 유틸리티를 소환한 필상이 어이없는 실수를 한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까마득히 치솟은 공이 정점을 찍는 순간부터 휘기 시작했다. 그래도 파도가 아우성치는 바다를 건너 페어웨이로 들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잘하면 벼랑 법면에 맞는 정도나 되려나?

그런데 이번 타구는 하강하는 궤적이 통상적이지 않았다. 마치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쭉쭉 뻗어 나가더니 급기야 툭 튀어나온 304야드 지점을 아슬아슬하게 넘겼다.

“아! 정말 미치겠어요!”

소름이 돋았는지 오줌이라도 저렸는지 몸을 부르르 떤 미사키의 입에서 그런 탄식이 터져 나왔다.

물론 비명을 지르는 팬들의 함성에 가려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만 단 한 사람은 들은 것 같았다.

“뭘 이런 걸 가지고 미쳐!”

“지금 얼마나 나간 줄 아세요?”

“329야드?”

“그러니까요! 정말 사람도 아니에요. 프로님은.”

하지만 싱긋 웃은 필상은 오른손을 들어 하이파이브를 원할 뿐이었다. 경쟁자인 미켈슨도 타석에 교차해 오르면 한마디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매직! 매직 샷이었어!”

고마운 마음에 뭐라 대꾸하고 싶었으나 그는 이미 티 그라운드에 올라간 뒤였다.

흥미로운 것은 미켈슨도 드라이브가 아닌 3번 우드를 들고 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더도 말고 필상과 거의 똑같은 에이밍을 했다.

일전에 그런 행동을 취했던 누군가가 떠올랐지만 기분은 사뭇 달랐다. 미켈슨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될까요?”

“되고도 남지. 저 침착한 표정 좀 보라고.”

포커페이스.

일체의 감정이 보이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는 미켈슨은 수많은 관중들의 응원 소리나 시선과는 완벽히 차단된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한 것처럼 보였다.

누구라도 긴장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는 담담했으며 스윙도 군더더기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하지만 그의 타구를 확인하던 필상의 이마에 잔주름이 몇 가닥 잡혔다. 탄도가 높아 너무 많이 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 어! 괜찮을까요?

-정말 바람이 굉장하군요. 너무 많이 휘었지만 적어도 러프에는 걸릴 것 같습니다.

-비거리가 미스터 퍼펙트보다 더 나간 것 같죠?

그 멘트를 하는 사이, 엄청난 거리를 비행한 타구가 급기야 멈췄다. 필상의 타구보다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많이 휜 공은 페어웨이를 가로질러 퍼스트 컷의 경계에 걸쳤다.

차라리 러프에 다 들어가는 것보다 애매한 위치인 것을 확인했지만 마사키는 물론 당사자인 미켈슨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티 그라운드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먼저 떠나지 않고 기다리던 필상에게 물었다.

“러프에 들어간 건가?”

“아니요. 경계선에 걸린 것 같습니다.”

“남은 거리는?”

“하하. 그건 형 캐디인 팀에게 물어보시죠.”

“아! 그럴게. 하하하!”

필상을 마치 자신의 캐디처럼 여긴 행동에 본인도 놀랐는지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면 필상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팬들로서는 참으로 보기 좋은 장면으로 비쳤다.

승부는 승부이고 개인적인 친분은 또 다른 것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줬기 때문이다. 보통 이 정도의 극심한 경쟁 상태라면 해당 선수들은 눈조차 마주치기를 꺼린다.

하지만 마치 친한 친구처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세컨샷 지점으로 향하는 두 선수에게 박수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저희가 좀 더 짧아요.”

“그러네. 필은 현재 216야드, 난 208야드가 남았네.”

“야디지 북을 보지 않고도 그걸 어떻게 정확히 아세요?”

“난 저 벙커 입구까지만 잰 거야.”

거리가 단축된 이유는 전장의 길이는 페어웨이 중앙을 기준으로 잰 것이고 필상은 최단거리를 잘라 갔기 때문이다.

필상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조건들을 꼼꼼하게 따졌으나 클럽을 미리 선택하지는 않았다. 미켈슨의 샷을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기 때문이다.

“3번 우드를 들었지만 필이 프로님보다 더 멀리 보내고 나중에 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의 현 위치가 페어웨이라고 가정하면 티샷 비거리는 무려 337야드야. 방향이 좋았다면 그렇게 되었겠지.”

“어떤 선수는 죽어라고 때려도 보낼 수 없는 거리인데, 필도 결국 장타자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네요.”

그사이, 준비를 마친 미켈슨의 과감한 샷이 감행되었다.

테이크백 출발 시에 클럽이 러프 때문에 방해가 될 텐데도, 그의 타구는 그린을 향해 힘차게 날았다. 지금의 방향과 세기라면 충분히 그린에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 필상의 입에서는 걱정이 묻어나는 독백이 흘러나왔다.

“밀릴 텐데…….”

무심코 나온 그 독백에 미사키의 잔잔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번 샷도 비거리가 짧지 않아 바람을 고려해야 하는데, 차마 바다를 보고 쏠 수는 없었던지 좌측 벙커를 향했다.

-우우우! 저 미친 바람은 어쩌죠?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4번 아이언 샷이 조금이라도 감기면 영락없이 바다에 빠지기 때문에 그로서는 안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래도 좀 아쉽네요.

타구는 안타깝게도 그린 우측 벙커로 기어 들어갔다.

파 5홀에서 그만하면 괜찮다고 할 수 있지만 문제는 경쟁자인 필상은 라이가 좋은 페어웨이에 공이 놓여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린에 올려 핀에 붙여 버리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벙커 샷의 결과는 무의미해질 수도 있기에 그의 시선은 샷 루틴을 밟아 나가는 필상에게 떠날 수가 없었다.

5번 아이언을 잡은 필상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이 샷 하나로 US 오픈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몸에 힘을 빼려고 애썼다.

‘내 인생 샷이 되게 만들어야 해!’

유명 골퍼들은 그를 규정짓는 멋진 샷이 존재한다.

이미 여러 장면을 제공했지만 지금보다 긴장감이 강했던 적은 단연코 없다. 때문에 그런 부담스러운 생각을 잊기 위해 루틴을 밟는 와중에도 토납을 통해 평정심을 유지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골프팬들이 자신의 이 샷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두 잊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생각을 지우자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그리운 아내 모모코가 알면 무척 서운하겠지만 그 대상은 자신을 위해 헌신하신 엄마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방해물이 아니라 힘이 되었다.

“인 더 홀!”

수많은 외침이 동시에 터졌다. 그냥 샷 이글이 되라는 필상이 들어도 너무 과도한 희망 사항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스윙 피니시를 마친 필상의 시선은 공을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면 바람을 의식한 필상이 과감하게 좌측 벼랑 끝보다 더 왼쪽을 향해 샷을 때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연 등줄기에 서늘한 땀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괘심하게도 타구가 예상한 만큼 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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