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페블 비치의 지존
-와우! 아주 멋진 샷입니다!
-거친 러프에서의 샷인데도 임팩트가 아주 제대로 들어갔습니다. 저 먼 거리에서 그린에 올릴 것 같습니다.
-미스터 퍼펙트. 그의 탁월한 기량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네요. 항간에 타이거의 뒤를 이을 황제의 자격을 갖췄다고들 하는데, 이번 대회마저 우승한다면 이제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겠지요?
-음……. 그렇습니다. 더 플레이어스, PGA 챔피언십에 US 오픈마저 거머쥔다면 커리어 면에서도 최고의 스타 대열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1년도 되지 않아 벌써 4승째 도전이다.
설사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이미 출중한 기량은 충분히 증명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심혈을 기울인 208야드 세컨샷이 그린에 올라서는 순간, 뜨거운 함성이 터졌다. 불운한 라이에서 드롭을 했으나 이후 한 번도 보이지 않던 엄청난 실수, 탑핑을 때렸기 때문에 드디어 필상도 흔들리는 게 아닌지 우려했었다.
남극의 거대한 빙하처럼 탄탄하게만 보이던 미스터 퍼펙트도 US 오픈 우승을 목전에 두자 긴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모든 우려를 말끔하게 씻는 멋진 샷이었다.
“나이스 샷!”
“굿 샷을 외치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굿 샷이요!”
“하하. 따라잡기 쉽지 않겠어.”
“아직 4홀이나 남았잖아요.”
둘이 기분 좋게 일본어로 대화를 나눴지만 그 내용이 대략 짐작이 되었는지 미켈슨이 끼어들었다.
“우승하려면 최소한 3타는 더 줄여야 할 거야.”
“정말입니까?”
“내가 이 홀에서 최소한 버디를 잡을 거고 남은 홀에서 1타 이상 줄일 거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3타 이상 줄여 보죠. 하하하!”
타수를 예단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은 없다.
최선을 다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게 골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너무 앞서 나가면 실수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한 샷 한 샷에 집중한다.
하지만 노련한 미켈슨은 그런 얘기를 꺼내면 노회한 자신이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애초 자신은 그런 목표보다는 매 샷마다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쉽지 않은 미켈슨의 8야드 퍼팅이 홀컵으로 쏙 빨려 들어가는 순간, 필상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두 팔을 높이 들고 환호하는 미켈슨에게서 승리의 강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4야드 버디 퍼팅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나이스 터치! 정말 기가 막히네요.
-필이 먼저 이글을 기록했기 때문에 심리적인 부담이 상당했을 텐데, 멘탈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역시 페블 비치의 지존인 필 미켈슨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정말 이 코스에 강합니다. AT&T 페블 비치 프로암에서만 벌써 5번의 우승과 1번의 준우승을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번 US 오픈이 페블 비치에서 열리기 때문에 그의 그랜드슬램 달성에 대한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컸습니다.
-메이저 대회 최고령 우승 기록도 함께 달성되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마스터즈는 3번, PGA 챔피언십, 디 오픈은 일찌감치 우승했지만 US 오픈은 준우승만 이미 6차례나 기록하며 대기록 달성에 번번이 실패했는데 드디어 평생의 숙원을 이루나 봅니다.
US 오픈이 페블 비치에서 열리기로 결정되면서 필 미켈슨을 위한 대회라는 말까지 나왔었다. 그가 유독 페블 비치에서 호성적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첫날 단독 선두에 오른 이후 3일 내내 선두를 유지하자 그를 좋아하는 골프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미스터 퍼펙트라는 초유의 신인이 경쟁자로 나섰지만 어림도 없다고 생각했다. 코스의 유불리는 거센 도전도 얼마든지 넘어설 것이라고 내다보고 엄청난 팬들이 이곳을 찾았다.
그러나 공동 선두를 허용하는 순간,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쉰에 가까워진 그가 무서운 신예의 도전을 감당하기 쉽지 않다는 생각과 더불어 운도 따라 주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켈슨은 철벽처럼 탄탄한 경기 운영을 보였고 오히려 필상이 먼저 실수를 하자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먼 퍼팅을 어떻게 집어넣으셨습니까?”
“행운이 따랐지. 하하하.”
이글 퍼팅에 대해 행운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의 집념과 집중력이 만들어 낸 보석 같은 결실이었다. 상승세를 타면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살짝 도발해 보려다 포기했다.
그에게 이번 US 오픈이 가지는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헐렁한 경기를 펼칠 의사는 전혀 없었다.
당당하게 실력으로 쟁취한다면 그든 필상이든 결과에 승복해야 하는 것이다. 멋진 승부, 최선을 다한 경기,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어휴!”
15번 홀은 377야드의 비교적 쉬운 홀이다.
필상도 미켈슨도 3m 안팎의 멋진 온 그린에 성공했지만 둘 다 버디 사냥에 실패했다. 특히나 추격하는 필상의 퍼팅은 홀컵 위를 지나가고도 떨어지지 않는 기이한 현상을 보였다.
동타가 될 줄 알았던 팬들의 한숨이 바닥을 짓눌렀다.
그리고 맞이한 16번 홀, 401야드의 파 4지만 페어웨이가 넓어 관건은 세컨샷이었다. 시각적으로는 그린 주변에 바짝 붙은 나무들이 방해가 될 것 같지만 사실은 둘 다 웨지를 잡기 때문에 또다시 퍼팅 싸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유틸리티로 280야드만 공략한 필상은 100야드 남은 샌드웨지 샷이 생각보다 짧아 그린 앞쪽 에이프런에 그냥 멈춰서고 말았다.
“맙소사! 맞바람이 생각보다 강했어요.”
“그러네.”
“티샷을 좀 더 멀리 칠 걸 그랬나 봐요.”
“세컨샷을 먼저 하는 게 유리할 것이라고 봤는데, 작전 미스로군!”
평상시 필상의 전략이 그러했다. 아예 장타를 치지 않을 거면 티샷을 짧게 치고 세컨샷을 쩍 붙여 상대가 절로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특히나 팽팽한 승부가 이뤄지는 상황이기에 충분한 압박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이 홀은 바다와는 한참 떨어진 위치라서 바람의 영향을 덜 받을 것이라고 봤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샷 좋은데?”
“네.”
미켈슨의 세컨샷에 굿 샷을 불렀지만 마음은 편치 못했다. 필상의 샷을 참조해 생각보다 강한 스윙을 가했던 것이다.
하지만 필상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다.
“역시 페블 비치의 지존이로군!”
“으! 붙였어요!”
미켈슨의 타구는 거의 칩인 버디에 가까운 지점에 떨어졌다. 만약 스핀이 강하게 걸리지 않았다면 30cm도 되지 않았을 테지만 스핀 때문에 빨려 와 2m 근방에 멈춰 섰다.
그래도 9m와 2m는 누가 봐도 비교되는 현격한 결과였다.
“멋진 샷이었습니다.”
“이 코스는 항상 바람을 신경 써야 해. 오후가 되면 바다에서 멀어도 늘 바람이 작용하거든.”
“안방은 안방이네요. 하지만 제가 저걸 넣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긴장 놓지 마세요.”
“하하하. 물론이지.”
정말 꼼꼼하게 라이를 살폈다.
확실한 결론을 내리고 퍼팅을 했지만 이번에도 홀컵은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홀컵 우측 옆을 떨어질 듯 스쳐 가는 아슬아슬한 장면에 또다시 팬들의 탄식이 그린을 무겁게 짓눌렀다.
-정말 아깝네요. 조금 약했더라면 들어갔을 것 같았는데.
-탭인 거리에 보냈으면 힘 조절 문제는 아닙니다. 또한 저렇게 과감하게 치는 것이 추격하는 입장에서는 바람직합니다.
-행운의 여신이 그의 연승을 질투하는 걸까요?
-이런 상황이 닥치면 누구라도 신을 의지하게 되지만 당사자는 그러면 안 됩니다. 결과를 신에게 맡기는 것은 자칫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강한 인간의 의지만이 답이란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정말 미세한 차이지만 얼마나 끝까지 집중할 수 있느냐의 싸움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미켈슨의 버디는 성공할 줄 알았다.
이제 2홀이 남은 상황이기에 우승은 어려워졌다고 봐도 괜찮은 스코어다. 물론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지만 역전은 어렵고 보는 것이 합당했다.
그런데 홀컵에 들어갔던 미켈슨의 퍼팅한 공이 도로 튀어 나왔다. 퍼팅 스트로크가 너무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선수들은 그렇게 친다. 가까울수록 힘 조절에 신경을 쓰면 방향이 틀어지기 때문에 뒷벽을 땅 때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강하게 민다.
보통은 튀어나오는 경우가 극히 드문데, 마치 홀컵이 공을 토해 내는 것처럼 튀어나오는 바람에 공을 줍기 위해 다가가던 미켈슨의 동작은 우뚝 멎었다.
-우후! 저게 왜 튀어나오죠?
-너무 스트로크가 강했습니다. 하지만 튀어나올 것 같지는 않았는데, 참 기이한 일입니다.
-그나저나 한쪽으로 기울 것 같던 경기의 긴장감은 더 강해지게 되었네요. 경기를 관전하는 팬들의 입장에서는 더욱 흥미로워진 경기를 마지막까지 즐기게 된 셈이니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겠네요.
-두 선수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입니다. 과연 US 오픈 우승 트로피는 누구에게 주어질까요?
-단독 3위로 올라선 임성재 프로도 한국 선수인데, 배상문과 안병훈 프로도 순위가 수직상승해 20위권에 들어선 걸 보면 아시아 출신 중에서 한국 선수들의 분전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최근 타이거와 필이 코리안 투어에 출전해서 그 경기를 살펴봤는데, 다들 기량이 녹록치가 않더군요. 미스터 퍼펙트가 우승했지만 다른 선수들도 굉장히 위협적이더군요.
프랭크는 PGA를 제외한 타 투어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나마 유러피언 투어 정도만 들여다봤는데, 한국 오픈에 참가한 미켈슨이 컷을 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이미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여자 골프에 이어 남자 골프도 곧 한국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낼 거라고 봤는데, 벌써 그런 결과가 눈에 들어왔다.
브룩스 코엡카와 제이슨 데이, 저스틴 로즈, 그리고 타이거 우즈까지 제치고 올라선 것은 필상의 등장으로 인한 자신감의 증진과도 무관치 않아 보였다.
물론 필상은 다른 선수들의 성적까지 살필 겨를은 없었다. 또다시 바다를 향해 티샷을 쏴야 하는 난해한 파 3홀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오늘은 184야드에요. 맞바람이 강한 홀인데, 깃발을 뒤에 꽂아 놨어요.”
“아너가 아닌 게 다행인가?”
“흐흐흐……. 클럽은 필의 샷을 보고 나서 결정해도 되겠네요.”
기이한 웃음소리를 내는 미사키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그녀의 모습이 늘 자신의 곁에 머물던 모모코와 일순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진한 그리움이 물씬 밀려왔다.
그런데 아내와 미사키의 특성은 많이 다르다. 깜찍한 모모코는 외모와는 달리 숙녀다운 웃음소리와는 거리가 한참 멀지만 미사키는 늘 요조숙녀처럼 호호거리며 웃는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헤픈 웃음을 흘리는 이유는 엉뚱한 장면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미켈슨의 샷을 참조하는 상황에 대한 기대보다는 다시 한 번 큰 미스 샷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 같았다.
“와! 정말 강하게 때리네.”
“족히 210야드 샷은 되는 것 같아요.”
“아니야. 230야드는 되지.”
내리막은 있지만 무시해도 될 정도인데 멀리 바다가 보여 내리막의 효과는 샷을 하는 사람에게 더 강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린 앞에는 거의 그린의 크기에 맞먹는 엄청나게 큰 기형적인 형태의 벙커가 도사리고 있다. 조금이라도 위협을 느끼면 여지없이 그 벙커에 발을 들여야 한다.
그런데 맞바람까지 강하게 불기 때문에 터무니없이 짧은 샷도 여러 번 나왔다. 물론 그린 너머 바다로 빠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벙커에서 길게 치는 것이 절대 쉽지 않다.
가까운 벙커샷은 쉽지만 길이가 40야드를 넘는 벙커에서 거리를 조절하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워 벙커를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으흐!”
미사키의 입에서 탄식에 가까운 음향이 터진 이유는 그 강한 샷이 기어코 그린에 무사히 올라섰기 때문이다.
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짧아 겨우 그린에 올라서는 장면을 봤기 때문에 그녀의 탄식이 더 강렬하고 깊었다.
“더 봐야겠네.”
“그렇다고 유틸리티를 잡을 수는 없잖아요. 너무 위험해요.”
“런이 생길 테니 당연하지. 4번 아이언.”
240야드를 4번 아이언으로 공략하는 것은 평소보다 강한 샷을 때려야 한다는 의미다. 아무래도 힘이 들어가면 샷의 안정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걸 알지만 마시키는 부정적인 언급은 일절 하지 않았다.
쩍!
풀스윙을 예상했지만 필상은 스리쿼터를 조금 넘는 스윙을 했다. 하지만 임팩트 순간의 느낌은 타구음이 들리지 않을 만큼 강한 임팩트가 이뤄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얼핏 봐서는 그래도 짧을 것 같았으나 타구를 확인한 미사키는 필상의 공략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인지했다.
-탄도가 너무 낮지 않나요?
-바람의 영향을 덜 받기 위한 시도가 아닌가 합니다. 일종의 변형 펀치 샷인데, 그래도 좀 짧을 것 같기는 합니다.
-제 느낌은 필의 샷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런데 탄도마저 낮다면…….
프랭크는 차마 뒷말을 뱉지는 못했다.
멋진 샷을 기대하는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또한 왠지 모를 필상에 대한 각별한 기대도 작용했다.
그 와중에도 타구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쭉쭉 뻗어 나갔다. 확실히 바람의 영향을 덜 받은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타구가 떨어진 지점은 애매하게 그린과 벙커 사이의 러프였다.
자칫 재수가 없으면 위로 크게 튀어 오른 뒤에 벙커로 떨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러프를 때리고 크게 튄 타구는 그린 앞부분에 떨어졌고 신기하게도 홀컵을 향해 힘차게 구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