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팽팽한 승부
-와우! 저 샷은 너무 강하지 않나요?
프랭크는 깜짝 놀란 반응을 터트렸다.
하지만 해설자 챔블리는 즉각적인 대답을 회피했다. 방금 전에 미켈슨의 터무니없이 짧은 샷을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맞바람이 강해도 너무 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필상이었기에 일단은 지켜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실제 필상은 140야드를 염두에 두고 샷을 했다.
피부에 느껴지는 바람은 초감각을 사용하지 않아도 강력했기 때문이고 살짝 슬라이스 바람도 느껴져 살짝 좌측을 보기까지 했다.
“스톱!”
미사키도 불안했는지 서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냥 그린을 넘어 바다에 퐁당 빠질 것 같던 공이 생각만큼 뻗지 못하고 떨어진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린 후면에 떨어진 공이 조금만 더 굴러도 그린 뒤쪽의 깊은 벙커에 빠질 것 같았지만 이번에도 스핀이 살려 줬다.
떨어진 타구는 거의 제자리에 한 번 튀어 오른 뒤, 오히려 경사를 거슬러 오르다 멈추는 신기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덕분에 오르막 퍼팅을 남기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최상의 샷이 되었다. 가슴을 쓸어내린 팬들의 열렬한 박수에 미사키도 동참했다.
“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하하. 생각만큼 바람이 강하지는 않았네.”
솔직히 필상도 뜨끔했다.
기껏 미켈슨의 미스 샷이 나왔는데 자신도 함께 동참하면 기회는 멀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어 쓴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벙커에 빠진 미켈슨의 공이 놓인 위치가 아주 까다롭다는 점이었다. 겨우 굴러서 들어갔기 때문인지, 벙커 턱 바로 아래에 붙어 있었다.
거의 얼굴 높이의 턱을 넘기는 게 무척이나 어려워 보였다.
“행운의 여신이 우릴 보고 웃는 것 같아요.”
“여신도 잘생긴 남자는 알아보는 거겠지.”
“치! 유부남을 누가 좋다고!”
“유부남은 남자 아닌가?”
“됐고요. 저런 벙커 샷은 어떻게 치는 게 좋을까요?”
미사키도 정식 훈련을 받은 선수 출신이다.
총명한 그녀는 운동 능력이 따라 주지 못해 결국 프로 데뷔를 포기했지만 이론에 대해서는 누구 못지않다. 하지만 항상 더 많은 것들에 대해 탐구심을 갖고 있었다.
자신도 생각하는 바가 있지만 필상과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필상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행동이었다.
“생각할 게 뭐 있어. 그냥 푹 파내야지.”
“클럽 페이스를 완전히 열어야겠네요.”
“업힐 라이라서 체중을 오른발에 좀 더 두고 굳이 아웃인 스윙을 하려고 고집하지 말고 깔끔하게 퍼내야지.”
“아웃인 스윙을 하지 말라고요?”
“벙커 샷의 달인인 최경주 프로의 레슨을 보고 확인해 봤는데 정확하더라고. 이미 스탠스를 오픈했기 때문에 이미 아웃인이 된 거야. 아웃인 스윙을 의식해 너무 몸에서 떨어진 스윙 궤적을 그리다 미스가 나지. 게다가 거리가 잘 나질 않아.”
“아! 몸에 붙은 스윙을 해야 힘이 실려 멀리 보낼 수가 있겠네요.”
아마추어는 물론 프로들도 곧잘 벙커 샷 실수를 한다.
일부러 벙커에 빠뜨리고 싶은 사람은 없다. 벙커는 페널티로 주어지는 정상적이지 않은 샷 환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든 벙커에 빠질 수 있기에 벙커샷에 대한 자신감은 프로로서 필히 갖춰야 할 기본 기량이다. 연습도 많이 해야 하지만 확실한 이론적 근거와 몸에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피하고 싶을수록 더 빠지는 게 벙커고 어떤 날은 고약하게도 치는 샷마다 벙커에 기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물론 산전수전 다 겪은 미켈슨도 벙커샷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다. 수없이 많은 연습과 실전 경험까지 축적된 그였기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 벙커 탈출에 실패하다니요. 천하의 필 미켈슨이.
-까다로운 라이였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필이라면 충분히 꺼낼 수 있었는데, 거리를 조절하려고 피니시를 다 하지 않고 멈춘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경쟁자인 미스터 퍼펙트가 그만큼 부담스러웠던 건가요? 어떻게든 핀에 붙여 파로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군요.
-그렇게 생각됩니다. 버디는 좀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래도 파는 무난한 퍼팅을 남긴 것이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안전하게 꺼낼 생각을 해야 합니다.
-공의 라이는 아까보다 좀 더 좋아져 다행이네요.
필이 필상을 의식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실수를 하자마자 곧바로 필상을 바라봤으니까. 하지만 계면쩍을 것 같아 필상은 시선을 회피하고 그린의 라이를 살폈다.
남의 불행이 곧 자신의 행복이 되는 게 골프라지만 생각처럼 마음이 기쁘지는 않았다. 상대의 실수보다는 자신의 앞선 기량으로 이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불운에 이어 실수까지 했던 미켈슨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3번째 샷도 핀에 붙이지는 못했다.
하필 런이 많았던 공은 필상이 마크한 방향으로 굴러 와 1m 뒤에 멈춰 섰다. 퍼팅도 먼저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제가 먼저 퍼팅해도 될까요?”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규정이 바뀌어 이젠 거리와 상관없이 준비된 선수가 먼저 샷이나 퍼팅을 해도 된다. 물론 상대의 양해를 구해야 하는데, 지금은 나름의 배려였다.
하지만 미켈슨은 거부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그의 높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필상의 퍼팅을 참조하면 훨씬 나을 텐데, 먼저 퍼팅을 고집한 그는 보기마저도 실패했다.
생각보다 라이가 없어 거의 홀컵 우측 안쪽만 보면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필상도 버디에 실패했다.
“봐주나?”
“뭘 봐줍니까! 아까워 죽겠구먼!”
“하하하. 이제 진정한 승부가 되겠네!”
“불운은 잊고 제대로 붙어 보자고요.”
“오케이!”
기세가 꺾였을 것이라고 봤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앞선 필상의 샷을 참조한 그는 거의 필상과 필적하는 정확한 샷으로 따라붙었다.
“이런!”
팽팽하게 이어지던 승부는 14번 홀에서 필상의 위기로 다시 반전을 맞이했다.
우측으로 휘는 560야드의 파 5홀로 승부처라고 판단한 필상은 강력한 티샷을 구사했다. 대략 350야드를 봤고 이후 상황에 따라 롱 아이언으로 2온을 염두에 뒀다.
우측의 나무들이 너무 높아 질러가는 것은 무리였기에 오랜만에 페이드 티샷을 구사했는데, 느낌은 아주 좋았다.
의도한 거리와 방향, 그리고 페이드도 제대로 걸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놈의 타구가 너무 많이 휘었다.
“볼! 뽀올!”
미사키와 진행요원들이 외침이 따가웠다. 너무 많이 휜 타구가 구름처럼 몰려든 갤러리들에게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이 홀은 바닷가 벼랑에 맞닿지 않아 바람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지상에서는 수많은 팬들과 시설물 때문에 가려져 그렇지, 하늘에 부는 바람은 5번 홀을 넘어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을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결과였다.
진행요원들이 소리를 질러 경고했지만 안타깝게도 타구는 누군가에게 맞은 것 같았다. 프로로서 이런 샷을 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괜찮을까?”
“공은 살아 있을 거예요.”
“공 말고 공에 맞은 사람.”
“아! 죄송해요.”
공의 상태를 생각하는 것은 캐디로서 당연한 책무다. 하지만 사람보다 우선일 수는 없다는 걸 깨달은 미사키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그 순수한 모습을 바라보던 필상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어이없는 실수가 더 무겁게 다가왔다.
“미안할 거 없어. 그게 캐디의 역할이잖아. 미안할 사람은 나지. 어떻게 바람을 생각하지 않은 거냐고!”
“갤러리들이 너무 많이 몰리다 보니 여기서는 바람을 다 막아 줘서 그런 것 같아요.”
핑계일 수밖에 없다.
바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공중에는 지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간과한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공이 기형적으로 휘는 것은 보고 나서야 그걸 깨달았다는 것이 속상하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와중에 미켈슨은 탄도가 낮은 3번 우드 샷으로 307야드를 날리는 기염을 토했다. 본인에게 찾아온 기회를 확실하게 주워 담기 위해 여차하면 3온 작전을 구사할 수도 있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세컨샷 지점으로 이동한 필상은 다시 한 번 씁쓸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이 왜 저렇게 박혀 있는 거죠?
-저는 갤러리들이 러프를 다 밟아 놓았기 때문에 남의 집 정원으로만 들어가지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 상황은 좀 이해가 되지 않네요.
-설마 누군가 고의적으로 밟은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워낙 특이한 상황이었기에 사실은 곧 확인되었다.
공 주변의 긴 러프가 사람들로 인해 숨이 죽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필상의 공은 풀 사이에 깊이 박혀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지점은 스폰서 광고판이 설치되었던 자리였다.
하지만 해풍 때문에 자꾸 타구가 우측으로 밀리자 광고판을 더 뒤로 뺐는데, 하필 박혔던 말뚝 자리를 완벽하게 보수하지 않은 흔적이었다.
-저건 구제받을 수 없나요?
-‘박혀 있는 볼’에 대한 구제는 자체의 피치마크에 들어가 박힌 상태를 의미합니다. 과거에는 쓰루 더 그린(through the green-티 그라운드, 해저드, 퍼팅그린을 제외한 코스의 모든 구역) 내에서 잔디가 페어웨이보다 짧은 지점에서만 구제 받았지만 지금은 잔디 길이와 상관없이 구제가 가능하도록 로컬룰을 제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저 상황도 해당되는 것 아닌가요?
-만약 광고판이 그대로 있었다면 당연히 구제가 되겠지요. 하지만 지금 공이 박힌 저 상황을 피치마크라고 볼 수 있을지 애매합니다. 물론 공이 지면에 박힌 것은 분명하니까 구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피치마크가 만든 자국이 아니고 말뚝을 박았던 인공적인 흔적이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그렇게 박힐 일도 없다.
플레이와 무관하게 억울한 상황이기 때문에 구제를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의도한 방해가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상황을 확인하는 상황에 경기 위원이 나타나 함께 살폈고 어느새 곁에 다가온 미켈슨도 구제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건 코스 상태의 미비로 벌어진 상황이니까 구제가 당연해. 직후방 한 클럽 내 반경에서 드롭해.”
“동의합니다.”
둘 다 구제를 언급했고 실제 드롭을 했지만 찜찜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그 자리에 박히지 않고 크게 튀었다면 공은 홀에 바짝 붙어 있는 남의 집 정원으로 들어갔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위험한 방향이었는데, 오히려 그로 인해 덕을 본다는 생각을 하자 운이 좋다는 느낌보다는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껴졌다.
게다가 타구에 맞은 갤러리는 벌써 카트를 타고 의료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는데, 그가 괜찮은지도 걱정되었다.
그러니 구제를 받은 공을 때리는 심리 상태가 온전할 리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대충 샷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탑핑?
-어! 저 샷은 좀 이상합니다. 왜 저렇게 서둘러 쳤을까요?
-연습 스윙도 하지 않고 그냥 때려 버린 이유가 혹시 창피했기 때문일까요?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만 구제를 받은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말뚝 자리가 아니었다면 해저드 지역으로 들어가 벌타를 면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워낙 무성의한 샷이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들지만 그렇다고 확언할 수는 없었다. 1타가 중요한 이런 상황에서 지금은 무조건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프로님! 왜 그래요?”
“뭐가?”
답답했는지 미사키가 제법 매섭게 물었다.
하지만 오히려 당당하게 대꾸하는 필상에게 더는 채근할 수 없었다. 지금은 지난 샷보다 다음 샷에 집중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향이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남은 거리는 208야드고 보시다시피 러프에요.”
“5번 아이언.”
“필이 먼저 샷을 한대요. 잠시 숨을 고르세요. 그리고 환자 생각은 그만하세요. 의도한 것도 아니고 이미 의료진한테 갔다잖아요.”
“알았어.”
미켈슨은 258야드 남은 상황에서 3번 우드를 잡았다. 충분히 온 그린을 노릴 수 있는 거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린 앞의 좌우로 커다란 벙커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어 어차피 우드로 띄워서 올리는 것은 불가했고 타구를 그린 앞에 떨어뜨려 굴려야 하는데, 허락된 폭은 10m 안팎에 불과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 그는 다소 위험하지만 최선의 도전을 시도했다.
중요한 것은 거리가 아니라 정확한 방향이었다. 그 상황을 지켜보는 필상도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집중력을 발휘한 그의 타구가 정확히 그린 방향으로 향했고 급기야 그린에 굴러 올라가는 모습에 전율을 느꼈다.
“굿 샷!”
“그런 말이 입에서 쉽게 나오세요?”
“그럼 굿 샷을 굿 샷이라고 하지 뭐라고 해?”
“저도 조금 뒤에 굿 샷 소리 하고 싶어요.”
“오케이!”
왜 미사키의 마음을 모르겠나.
그녀는 5개 홀밖에 남지 않은 이 중요한 순간에 필상이 너무 감정적인 대처를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미스 샷을 하긴 했지만 그건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다.
평소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실수를 했기 때문에 흔들릴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평소의 냉철함까지 잃은 모습은 감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집중하자! 찜찜함은 이미 털었잖아!’
무성의한 샷을 한 것은 후회할 의사가 없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필상은 1벌타를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 오히려 다음 샷을 위해 낫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집중할 수 있었고 완벽한 이미지를 그리는 데 성공한 필상은 제법 긴 러프에서 아주 강력한 샷을 만들어 냈다.
잘린 러프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가운데 힘차게 솟구친 타구가 그린을 향해 멋들어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