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페블 비치
“프로님.”
“아! 내 차례인가?”
“네. 시합 시작부터 그렇게 정신 줄을 놓으면 어떡해요. 얼른 집중하세요.”
“알았어. 하하하.”
좀처럼 잔소리를 하지 않는 미사키가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 확실히 긴장할 필요가 있는 날이었다.
때문에 어제보다 더 조심스러운 경기를 펼쳤지만 좀처럼 스코어를 줄일 수 없었다. 종잡기 힘든 바람은 초감각을 사용하면 상당 부분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에 스스로 봉인하기로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후에는 연습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데 어제의 단독 선두, 미켈슨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이븐파면 아주 훌륭한 거지.”
“왜 이러십니까! 그 와중에도 버디를 5개나 잡았다던데요!”
“버디만 잡으면 뭐해! 보기도 4개나 기록했는데. 오늘의 데일리 베스트는 타이거잖아. 이런 바람에도 -3을 쳤어.”
“그럼 -2로 올라선 거네요! 순위가 어떻게 되죠?”
“언더파가 전부 10명이니까 우리 셋 다 톱 10에 들었지.”
-7 필 미켈슨
-4 제이슨 데이
-3 공필상, 토니 피나우, 브룩스 코엡카
-2 타이거 우즈, 패트릭 리드
-1 웹 심슨, 임성재, 저스틴 로즈
예선 통과 컷이 무려 7오버로 결정되었다.
심지어 이틀 동안 14오버를 기록한 선수도 나왔다. 3라운드 조 편성이 미켈슨과 함께 편성된 것은 다행이었다.
그의 노련한 플레이를 참조할 수 있기 때문이지만 미켈슨은 투덜거렸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며.
그런데 공동 8위에 반가운 이름이 보였다. 1998년생이며 작년에 투어에 데뷔한 임성재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안정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지난해 톱 10 피니시를 8번이나 기록해 페덱스 컵 포인트 25위에 랭크되어 있다.
곧 우승 소식이 들려올 것 같은 듬직한 그의 이름을 보자 한번쯤 만나 격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지 마침 임 프로가 연습장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성재야!”
한국어로 크게 외치는 소리를 들은 그가 얼른 달려왔다. 일전에 타 대회에서 인사한 적이 있지만 친해질 기회는 없었는데, 오면서 고개를 넙죽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안녕하셨습니까?”
“그래. 너 성적 좋던데?”
“US 오픈에서 톱 10에 드는 것이 목표였는데 지금까지는 선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프로님은 좀 부진하신 것 같던데,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하하하. -3이나 쳤는데 부진은 무슨! 그보다 이참에 이 형들한테 인사나 해.”
필상은 그에게 타이거와 미켈슨을 소개했다.
한국 선수들이 없지는 않지만 친해질 기회는 좀처럼 없다. 그런데 필상과 인연을 맺은 뒤로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진 탓에 둘은 성재를 아주 반갑게 맞아 줬다.
아직 모든 것이 낯선 성재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제법 두툼한 체격을 보자 미켈슨이 근육인지 확인하며 외쳤다.
“이 친구 몸이 아주 좋네.”
“필. 동양 선수들이 작다는 편견은 이제 버리십시오. 특히나 운동하는 선수들은 체격이나 체력이 서양 선수들에 비해 절대 뒤처지지 않습니다.”
“그런가?”
“이 친구도 그렇고 안병훈이라는 친구도 비슷합니다.”
“하기야 한국 선수들은 아주 독한 구석이 있더라고. 덩치만 보고 무시하다가 호되게 당한 사람이 여기 있잖아!”
미켈슨이 느닷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타이거를 지목했다.
역전 불가라는 타이거를 최종 라운드에서 추월하며 PGA 챔피언십을 거머쥐었던 사람이 바로 양용은 프로였기 때문이다.
그 뒤로 심한 내리막길을 걸었기에 타이거에게는 아주 각별한 기억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꼬집은 그나, 그냥 픽 웃고만 타이거나 참으로 대단한 인간들이었다.
“괜찮으면 멀리 가지 말고 여기서 연습해.”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TPK 사단이 연습하는 주변에는 다른 프로들이 잘 다가오지 않았다. 딱히 거부하지도 않는데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물론 임성재도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이렇게 허락이 떨어진다면 이보다 좋은 자리는 없었다.
그런데 얼른 가방을 풀고 냅다 어디론가 나가더니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한 아름 들고 왔다.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추후 계속 이렇게 같이 훈련을 해도 된다는 말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 정도 넉살과 눈치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토요일 무빙 데이가 되자 비로소 코스에 대한 적응이 되었는지 필상은 자신 있게 홀들을 공략해 나갔다.
짧은 파 3, 7번 홀에서 티샷이 벙커에 빠져 더블보기를 적지 않았다면 단숨에 미켈슨을 따라갈 수 있었겠으나, 아쉽게도 4타를 줄이는 데 만족해야 했다.
-9 필 미켈슨
-7 공필상
-6 브룩스 코엡카
-5 제이슨 데이, 타이거 우즈, 임성재, 저스틴 로즈
선두와의 격차를 2타 차로 줄이자 언론들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다소 주춤하던 필상이 이번에는 우승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는데 끝내 추격해 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단한 선수라도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을 할 수는 없다. 확률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그런 통상적인 생각을 파괴하는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WGC 멕시코 챔피언십 우승을 필두로 더 플레이어스, 그리고 PGA 챔피언십까지 그 어느 하나 쉬운 대회가 아니었다.
중간에 매치플레이 대회에서 건강 문제로 기권한 것을 빼면 이전에도 이후로도 없을 어마어마한 기록을 달성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무거워.”
“뭐가요?”
“내 어깨가.”
“하하하! 필, 우승은 어차피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자신의 플레이에만 집중하면 되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게 할 거야. 하지만 네 대기록 달성을 간절히 바라는 많은 열성 팬들처럼 나도 네가 우승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거든. 하지만 또 일각에서는 내가 반드시 너를 막아야 한다고들 말한다는 거지.”
“독식은 그래서 위험한 것 같긴 합니다. 그러나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죠. 행여라도 개인적인 친분과 경쟁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US오픈이 지닌 무게감 때문일까?
필상의 우승에 대한 의견이 팽팽하게 갈렸다.
새로운 영웅의 등장을 바라는 이들이 더 많지만, 아직은 마음을 얻지 못한 반대편 이들에게는 필상이 너무 위험한 존재였다.
초인적인 노력과 어렵게 일군 각종 기록들을 필상이 너무도 쉽게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잘나서 환호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특히나 미국 선수도 아니고 동양의 작은 나라 출신이라는 것이 넘지 못한 벽이 존재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다. 이런 장벽을 넘어 위대한 승리를 이어 간다면 결국 모두에게 추앙받는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챔피언 조 선수들이 1번 홀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아! 기대하고 고대하던 시간이 되었군요. 전 골프 중계를 하면서 이렇게 산만했던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모든 선수들의 멋진 샷을 공평하게 중계해야 하는데 저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지라 우승 가시권에 있는 선수들의 플레이를 어서 보고 싶어 안달이 났었습니다. 하하하.
-다들 공 프로의 우승에만 관심을 보이는데, 사실 지금 성적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2명 중에 2등이면 정말 대단한 것이거든요. 아닙니까?
-물론 그렇죠. 상위권을 형성한 선수들 모두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정력을 쏟았는지를 안다면 박수를 보내야 합니다.
오직 우승자에게만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엄연한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겠나.
우승 확률이 가장 높은 필상과 미켈슨이 나란히 걸어가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팬들에게는 신기하게 보였다. 신경전을 펼쳐도 모자랄 판에 내내 수다스럽게 떠들고 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광경이 훈훈하다는 느낌도 선사했다. 적어도 서로에게 비겁하지 않고 당당히 겨룰 것 같았던 것이다.
결선 라운드는 2인 플레이로 이뤄지기 때문에 더 극적인 장면을 기대했는지 다른 날에 비해 많은 카메라가 보였다.
“파이팅!”
“좋아! 오늘 평생 기억에 남을 멋진 경기 해 보자고!”
먼저 티 그라운드로 올라가는 미켈슨에게 필상은 진심 어린 응원을 보탰다. 그 또한 최선을 다짐하며 US오픈 역사에 길이 남을 승부를 시작했다.
미켈슨은 377야드 파 4, 1번 홀에서 정확한 티샷을 구사했다. 우측 도그렉 홀의 모양을 그대로 타고 흐른 페이드 샷은 정확히 305야드를 찍었다.
필상도 무리수를 두지는 않았다.
그린을 곧장 질러가면 368야드밖에 되지 않는 것을 알지만 3번 우드로 미켈슨의 타구와 거의 비슷한 지점에 떨어뜨렸다.
“그냥 쏘지 그랬어?”
“누구 좋으라고요. 하하하.”
“아이언 샷으로 기선 제압을 하려고 그러나?”
“딩동! 너무 쩍 붙인다고 인상은 쓰지 마십시오. 카메라가 늘 보고 있으니까요.”
“별 걱정을 다하네. 너무 붙이려고 애쓰지 마. 그러다 꼭 미스 샷이 나오잖아.”
“그러니까요!”
잘 모르는 선수와는 절대 나눌 수 없는 대화였다.
또한 아무리 친해도 경쟁 중인 선수들이 이런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은근한 견제와 도발이 이뤄졌고 둘 다 아무렇지도 않게 버디가 가능한 거리에 붙였다. 하지만 미켈슨이 4m 버디 퍼팅을 놓치는 순간 기회가 찾아왔다.
그런데 필상도 3.5m 퍼팅을 넣지 못했다.
“으흐!”
들어가는 줄 알았다.
라이를 읽은 그대로 굴렀으나 홀컵 바로 앞에서 살짝 흐르는 바람에 홀컵을 반 바퀴 돌아 나와 심장에 비수를 박았다.
아예 방향이 틀렸던 미켈슨보다 심적 충격이 더 컸다. 그걸 잘 아는 미켈슨은 주어진 도발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정말 아까웠어.”
“그러니까요. 아예 라이를 읽지도 못한 사람과 똑같이 되어 버렸으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라이를 잘못 읽은 게 아니야. 퍼터가 좀 닫혔을 뿐이지.”
“그게 더 심각한 문제네요.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1번 홀과 같은 상황이 거의 반복되었다.
아무래도 샷의 정확성은 필상이 높았지만 미켈슨은 트러블 샷의 달인답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가 막힌 리커버리를 해 냈다. 문제는 필상의 아이언 샷이 생각만큼 쩍 붙지 않을뿐더러 퍼팅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필상이 타수를 줄이면 그도 버디를 잡아냈다.
그렇게 6번 홀까지 2타 차를 유지하며 역전의 단초를 마련하지 못한 가운데 기회는 의외로 파 3홀에서 찾아왔다.
오늘은 7번 홀의 전장은 108야드에 불과했다. 게다가 티 박스가 그린보다 높아 99야드만 보면 되는 홀이다.
하지만 이 홀이 어려운 점은 홀의 우측을 따라 아찔하게 형성된 벼랑이 그린을 감싸고 좌측으로 돌아 나간다는 것이다.
“파도가 미쳤나 봐요.”
“바람이 아주 심하게 분다는 거지.”
“앞서지 못한 게 이때는 오히려 다행이네요.”
“하하. 그런가?”
씁쓸한 말이었으나 적어도 미켈슨의 샷을 보고 참조할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워낙 짧은 홀이고 이 코스에서 라운드 경험이 풍부한 그이기에 큰 실수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평소 맞바람이 심해 10야드 이상을 더 보고 치는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린 너머에 위치한 사나운 바다가 시각적인 위협을 가하기 때문이다.
샤악!
임팩트 순간 느낌이 그러했다.
갭 웨지를 잡은 미켈슨은 나름의 노하우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 같았다. 거기다가 오늘따라 강한 바람까지 참조해 대략 115야드 정도의 샷을 날린 것 같았다.
그런데 치솟은 타구가 뻗어 나가지 못하고 갑자기 뚝 떨어졌다. 그나마 그린 앞부분에 떨어졌는데 스핀이 걸린 타구가 슬슬 우측으로 구르기 시작한 게 문제다.
-아! 저게 어떻게 떨어질 수가 있죠?
-스핀이 걸려 경사를 탔는데 그래도 좀 심하기는 하네요. 짐작컨대 그린의 표면에도 상당한 바람이 부는 것 같습니다.
그의 타구가 그린 주변의 러프를 지나쳐 벙커에 뚝 떨어졌던 것이다. 아무리 좁아도 구르는 공을 멈출 정도는 충분해 보였는데 구르던 타구가 가속이 붙어 버렸기 때문이다.
지독히 운이 없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웬만해서는 인상을 구기지 않는 미켈슨도 이번 광경은 어이가 없었는지 어금니를 악무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어허! 130야드는 봐야 할 것 같은데?”
“그건…….”
너무 길지 않느냐는 말을 하려던 미사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설픈 조언보다는 필상의 감각을 믿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람을 읽고 싶은 충동이 장난이 아니네!’
처음 그 신기한 능력을 자각했을 때는 시기적절한 타이밍에 활용해 적잖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생기는 법, 집중력이 떨어졌다.
그 이유를 굳이 따져 보자면 초감각을 사용하는 것이 정신력을 일시적이나마 소진하는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게다가 그 능력은 순수한 운동 능력과는 별개여서 떳떳하지 못하다고 판단해 사용을 자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 유혹이 간절했다. 하지만 차분하게 마음을 다잡은 필상은 핀을 향해 과감한 샷을 시도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