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89화 (189/354)

189. 하이에나

“158야드 남았어요. 이 홀 파 5인데.”

“피칭을 잡아야겠네.”

“그린의 경사가 뒤로 흐르기 때문에 갭 웨지를 잡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일단 가서 라이를 보고 결정하자고.”

미사키와 두런두런 흥겨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티 그라운드에 오른 루카스는 자신만의 안전한 스윙을 고수했다.

필상의 무시무시한 티샷을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평소보다 오히려 짧은 278야드를 보내 3온 작전에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카메론이 문제였다. 결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올라간 그는 필상이 바라본 방향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방향을 고수했다.

“어? 한 번 붙어 보겠다는 것 같은데요?”

“가능하지. 긴장하지만 않는다면.”

필상은 카메론도 충분히 자신과 같은 장타를 구사할 능력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타를 날리고도 좋은 방향을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처럼 잔뜩 몸에 힘이 들어가서는 헤드 스피드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뿐더러 방향을 유지하기는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확한 인지가 부족한 팬들은 강력한 연습 스윙을 하는 그에게 뜨거운 응원을 보탰다. 필상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신예 중에 가장 주목받던 선수가 바로 그였다.

시원시원한 스윙을 지닌 전형적인 미국 선수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의 강력한 티샷이 폭발했다.

-아! 제대로 맞은 것 같죠?

-아닌 것 같습니다. 깎여 맞았어요. 바람이 얼마나 도와줄지는 모르지만 너무 힘이 많이 들어가 버렸습니다.

타구가 출발할 때만 해도 필상의 궤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뻗어나가던 힘이 빠지자 그냥 일직선으로 나갔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타면 홀 안쪽으로 휘어져야 하는데 마치 바람이 갑자기 없어진 것처럼 바다를 향해 그냥 날아갔다.

-슬라이스가 먹은 건가요?

-네. 악성 슬라이스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결과를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당사자였다.

피니시를 다 끝내지도 않은 채 타구를 바라보는 카메론의 표정은 보기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들리지는 않지만 바람의 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 같았다.

그러게 정확성에 자신이 없다면 왜 무리를 하냔 말이다.

그의 이번 시즌 페어웨이 안착률은 54.8%에 불과하다. 투어 최하위권인 것을 스스로 안다면 이 홀에서 굳이 장타를 날릴 이유가 없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모를까, 정확성까지 겸비한 필상이 보란 듯이 멋진 장타를 날린 걸 보지 않았던가!

부질없는 오기를 부릴 게 아니라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거리와 방향을 설정했어야 옳다. 무조건 따라 할 게 아니라.

-으흐! 그냥 바다에 빠져 버리네요!

-바다로 들어간 지점이 200야드도 되지 않는 곳입니다. 3번째 샷으로도 그린에 올리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인 거죠. 나이는 미스터 퍼펙트보다 어리지만 투어 데뷔는 훨씬 빠른데, 경험이 무색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기야 누가 콩 프로를 루키라고 하겠습니까! 투어 내에 그를 당할 선수가 있기는 할까요?

-PGA 챔피언십 우승 경기를 보며 경탄을 금치 못했는데 그새 제가 까맣게 잊었습니다. 미스터 퍼펙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새삼 느끼게 되는 출중한 티샷이었습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장타를 뻥뻥 날리면서도 일관성을 유지하는 거, 정말 어려운 거 아닌가요?

-물론입니다. PGA가 이제 티샷 330야드 시대에 접어들었다고들 하지만 적어도 공 프로는 그보다 한발 더 앞서 나간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카메론의 어이없는 티샷을 통해 필상의 진가가 다시 한 번 확인된 셈이다. 오늘은 차분하게 진행하는 것 같더니 급기야 자신의 강점을 한 방에 드러내며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카메론은 남은 거리 302야드를 3번 우드로 공략하려다 이번에는 엄청난 드로우 샷이 걸리며 타구는 아예 8번 홀 러프로 들어가고 말았다.

홀의 경계에서 경기를 관전하던 갤러리들에게 날아가는 바람에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그렇게 무너진 카메론은 이날 8오버파를 기록하며 예선 통과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하지만 2온에 성공한 필상은 이글 퍼팅에는 실패했고 그래도 1타를 더 줄이며 스스로 만족스러운 경기를 이어 나갔다.

“더블보기를 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네. 뭔 놈의 바람이 갑자기 무식하게 부는지 타구가 그냥 확 감겨 버리더라고요.”

“17번 홀이 그렇다니까! 핀을 뒤에 꽂은 날은 그냥 그린에 오르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짧게 공략해야지.”

“연습라운드 때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바람이 방향이나 세기가 전혀 다르더라고요.”

기껏 5타를 줄이며 안정된 공략의 표본을 보이는 것 같던 필상이 아주 오랜만에 더블보기를 기록했다. 그것도 177야드에 불과한 파 3홀에서 아주 호되게 당했다.

그게 즐거운지 건지 신기한 건지 샤워를 마치고 나오던 필상을 허겁지겁 찾아온 미켈슨은 내내 신이 난 표정이었다.

“필. 오늘 얼마나 치셨습니까?”

“나?”

“네. 얼마나 잘 쳤기에 제 불행을 그렇게 즐기시냐고요?”

“에이, 그런 게 아니고 워낙 신기해서 그러지. 하하하.”

왜 대답을 회피하나 했더니 그는 -6을 쳐 단독 선두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3을 기록한 필상은 공동 5위였다.

문제는 이 코스에서 강력한 기록을 보였던 타이거가 +1로 공동 38위까지 밀려다는 사실이었다.

아침에 연습할 때만 해도 컨디션이 나빠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 티샷이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내내 애를 먹었단다.

“공 프로. 저녁 뭐 먹고 싶어?”

“밥 사시려고요?”

“1일 천하가 될지 몰라도 내가 1위잖아. 하하하.”

모처럼 기분이 좋은 미켈슨은 그날 저녁 한턱 제대로 쐈다. 스스로 1일 천하라는 말을 썼지만 자신에게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라고 생각하는지 평소 반주로 즐기던 와인도 사양한 채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연습장으로 가자고 졸랐다.

나란히 야간 연습을 시작했지만 필상은 타이거의 연습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티샷이 말썽을 부렸다는데 그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자신의 스윙을 봐달라고 했을 텐데 아무래도 대회 중이라서 자제하는 것 같아 필상이 먼저 다가갔다.

“백스윙은 문제가 없습니다.”

“아! 그래? 그런데 왜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테이핑을 푸세요.”

그 말에 타이거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왼쪽 팔꿈치에 엘보가 와 압박 붕대를 감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필상이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테이핑을 해야 불안하지 않거든.”

“이리 좀 와서 앉아 보세요.”

필상의 각별한 능력을 두 번이나 경험한 바 있는 타이거가 이번에는 부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필상의 강력한 경쟁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상은 온전한 그와 경쟁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고 지금 상태에서 그냥 경기를 속행하면 부상이 도져 치료를 위해 장기간의 휴식을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버틸 만해.”

“알겠고요. 이젠 부상을 감추고 경기를 임할 나이는 아니라는 것만 유념하세요. 이러다 필 형보다 먼저 은퇴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 그건 안 되지. 하하하.”

타이거와 알고 지낸 시간은 사실 길지 않다.

하지만 비밀을 공유한 사이라서 그런지 말이 필요 없는 친근감이 느껴졌고, 서로 언급한 적은 없지만 최고의 자리를 주고받을 선수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에 각별한 정을 느꼈다.

게다가 사업까지 함께하면서 여러 모로 공감할 수 있는 화제가 많았던 점도 서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한 것 같았다.

“손목 관절을 구부리는 힘줄들이 파열되면서 염증이 생기는 게 엘보라고 하더군요.”

“자넨 엘보 온 적 없어?”

“네. 건강은 타고난 것 같습니다. 물론 앞으로 계속 골프를 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필요한 근육들을 늘 관리하려고 노력은 하죠.”

“그렇게 파괴적인 임팩트를 가하는데도 참 부럽군.”

“형도 싱싱했던 적이 있잖아요. 하지만 사람의 몸은 결국 유한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쓰고 무리하면 고장이 나게 마련이죠.”

“아무래도 대회 출전 수를 줄여야 할 것 같아. 욕심만 많지 실질적인 결과는 늘 마음 같지 않더군. 하하하.”

그의 씁쓸한 웃음소리가 서글프게 들렸다.

어려서부터 오로지 골프 하나만을 보고 달려온 인생이다. 최고의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을 경주했을 것이다.

때문에 절정기를 넘어서면 닳고 닳은 부분은 자연스럽게 하나둘 삐거덕거릴 수밖에 없다. 자신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해야만 한다.

더 오래 더 안정적으로 골프를 마음껏 즐기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노력 외에 항상 건강관리에 유념할 필요를 절감했다.

이미 수차례 확인했지만 정확한 묘용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이 어루만지고 있는 타이거의 팔꿈치가 이전보다 훨씬 편안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둘이 뭐해?”

“타이거의 팔꿈치가 좋지 않은가 봐요.”

둘이 마주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미켈슨이 다가왔다.

셋이 붙어 다니면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 둘만 무슨 대화라도 나눌 성 싶으면 괜히 남은 한 사람이 서운해하는.

게다가 필상이 타이거의 팔을 오랫동안 주물럭거리고 있었으니 그게 좀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타이거가 부상을 당한 것 같다는 말에 그 역시 걱정 어린 눈빛으로 타이거의 상태를 확인했다. 옆에 풀어놓은 압박 붕대만 봐도 대충 상태가 가늠이 되었다.

“심한가?”

“아니요. 공 프로가 마사지를 해 줘서 이제 아주 멀쩡해졌습니다.”

“그래도 엘보는 쉽게 보면 안 되는 거잖아. 늦었지만 주치의를 불러 검사라도 좀 해 봐.”

“괜찮다니까요.”

타이거는 붕대를 감지 않고 타석에 들어서더니 시원시원한 샷을 보여줬다. 그새 많이 좋아진 것이다.

미켈슨은 처음부터 엄살이었다며 꾀병을 나무랐지만 필상은 기겁하며 말렸다.

“오늘은 그만 푹 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연습을 꼭 해야겠다면 내일 아침에 일찍 나와 시작하죠.”

“그럴까?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

“아닙니다. 힘이 펄펄 나는 필 형은 연습이 더 필요한 것 같으니까 저랑 같이 들어가시죠.”

“에이 진짜! 나도 같이 들어가자.”

혼자 연습하는 것은 싫은지 미켈슨도 가방을 챙겨 셋이 나란히 숙소로 복귀했다.

잠을 청하기에는 너무 일러 모처럼 사업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필상이 며칠 전에 만났던 투자자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굳혔기 때문이다.

“전 큰손들이 관여하는 건 솔직히 별로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참여하면 단지 금전적인 도움만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염두에 둬야 하지 않을까?”

“일을 하는 건 훨씬 수월하겠지요. 하지만 원래 있는 사람들이 더 독한 법입니다. 그들은 하나를 투자하면 두셋을 원할 거고 그 요구를 맞추려면 우리가 본래 구상했던 일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어렵다는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 자금은 어떻게 충당하려고? 미국이나 유럽에서 사업을 하려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자금이 소요될 거야.”

타이거의 말은 정확했다.

셋이 자본금을 대고 은행융자를 받아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때문에 일단 아시아에서 성공을 거둔 뒤에 그 여력을 기반으로 천천히 생각하려고 했었다.

너무 일찍 하이에나들이 냄새를 맡아 버린 것이다. 그런데 잠자코 듣고만 있던 미켈슨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나도 목에 깁스를 한 놈들은 그다지 내키지 않아.”

“필. 이건 감정적으로 접근할 사안이 아닙니다. 미국 진출은 천천히 생각해도 되지만 여러 가지 대안을 준비하는 것은 꼭 필요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럼 우리가 고객으로 삼을 골퍼들에게 주식을 팔면 되지. 어차피 기틀이 잡히면 상장부터 해야 하잖아.”

뜻밖에도 미켈슨에게서 정답이 나왔다.

거대 자본가들이 참여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주식을 발행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생각보다 수월할 것이다.

JPK라는 위상이 주는 프리미엄은 분명히 존재하니까.

* * *

“오늘은 어제보다 세팅이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언더파가 21명이나 나와서 그런가?”

“버디나 이글이 많이 나와야 찾아온 팬들도 좋아할 텐데, 너무 고지식한 것 같아요.”

“맞아.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일등 국가 같지만 사실은 굉장히 보수적인 색채가 짙고 불필요한 자존심을 자랑처럼 여기는 동네지.”

“동양만 그런 줄 알았는데 선진국도 별 수 없군요.”

“선진국은 개뿔! 빈부 격차가 일본이나 한국보다 훨씬 더 심각한 나라야. 가진 자들, 선택받은 자들에 의해 모든 것이 돌아가는 구조이고 그런 미국인들은 유럽 사람들처럼 굉장히 격식을 따지기 좋아하고 배타적이지.”

2라운드를 시작하며 전혀 생각지 못했던 화제가 떠올랐다.

일본도 그렇거니와 미국도 한국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전통의 우방 국가라고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깡패처럼 휘두르는 권력에 늘 착취만 당한 것이 현실이다.

삼국의 동맹에서 가장 약하고 작다는 이유, 또 남북이 갈라져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현실 때문에 이리저리 치이는 게 일상처럼 굳어졌다.

성장의 동력을 잃은 구조적 경제난국을 해쳐 나가려면, 민족의 진정한 저력을 발휘하려면 남북이 하나처럼 교류하며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은 주판알을 튕기기 바쁘고 일본은 한국에 추월 당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이간질하기 바쁘다. 한마디로 일본이나 미국은 필상이 진심으로 좋아하기 힘든 대상이다.

하지만 친일, 친미 세력이 버젓이 기득권을 휘두르며 혹세무민하는 현실을 보노라면 서글픔은 쉬이 떨어지기 힘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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