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88화 (188/354)

188. 카메론 챔프

US오픈의 상징성은 상상 이상이다.

4대 메이저 대회 중에 마스터즈와 디 오픈이 나름의 독특한 전통을 자랑하는 것에 비하면 필상이 제패한 PGA 챔피언십이 가장 뒤처지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엄연한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한 필상을 애써 무시하려는 경향을 보인 전문가들이 적지 않았다. 열광적인 일반 골프팬들과 그들의 견해 차이는 의외로 상당했다.

하지만 미국을 상징하는 프로투어인 US오픈을 앞둔 상황에 여러 베팅 업체들이 내놓은 배당표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미스터 퍼펙트의 배당이 무려 1/7인 것은 저도 봤습니다.

-1달러를 걸면 7달러를 준다는 건데, 얼핏 보면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이건 타이거 우즈의 최고 전성기 때나 가능했던 배당이라더군요.

-이번 대회에 142명이 출전하기 때문에 평균 우승 확률은 1/142입니다. 그에 비하면 굉장한 평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좀 찾아 봤는데 아무리 기세가 좋아도 1/10을 넘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더라고요. 세계 랭킹 1위인 더스틴이 1/11, 요즘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타이거도 1/12이거든요.

-하지만 실제 베팅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그건 좀 궁금하네요. 하하하!

챔블리는 여전히 필상에 대한 평가가 인색했다.

PGA 챔피언십 우승을 지켜보며 상당한 판단의 수정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또 다시 회귀 본능이 작용한 듯.

하지만 실제 필상에게 베팅한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평균을 훨씬 웃돈 원인은 아무래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의 바람이 반영된 것과 무관치 않았다.

그러나 강풍과 난해한 코스로 악명이 높은 페블비치는 의외의 변수가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연륜이 중요하다는 것이 통상적인 평가였다.

“기분 좋겠어.”

“뭐가요?”

“네 우승 가능성이 가장 높다잖아.”

“아! 그거요?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어허! 이젠 아주 노골적으로 나오네. 타이거, 이 친구의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콧대를 좀 꺾어 놔야 하지 않을까?”

나란히 오후 티오프가 잡힌 JPK는 아침 일찍 함께 연습장에 나와 여유롭게 출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던 사이, 미켈슨이 꺼낸 화제는 역시 스포츠 베팅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미켈슨의 제안을 받은 타이거는 평소와 달리 강한 투지를 드러냈다.

“물론입니다. 저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 필도 한국에서 당한 망신을 회복해야죠?”

“아! 또 그 얘기? 어디 두고 보자고.”

필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컨디션이 좋았다.

같이 연습하는 두 사람이 그걸 모를 리 없지만 그들이 그런 대화를 버젓이 꺼낼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페블비치 링크스 코스는 그들에게 아주 익숙하지만 라운드 경험이 적은 이들에게는 아주 인색한 코스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습 라운드를 2번 했는데, 필상의 성적이 기대에 훨씬 못 미쳤기 때문에 그런 예상은 거의 확증 편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제게도 이번 대회가 중요합니다. 비록 만만치 않은 코스지만 차분하게 언더파를 목표로 공략할 테니까 두 분도 챔피언 조에서 만날 수 있게 집중하세요.”

“이거 봐! 이번에는 아주 본때를 보여 주자고!”

사실 필상은 요 며칠 동안 여러 생각이 뇌리를 뒤흔들었다. 사업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걸 꿋꿋하게 진행할 때만 해도 이렇게 복잡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돌연 사토시가 나타났고 또한 미국의 큰손들이 접근하자 새로운 상황에 대한 적응이 필요했다. 흔히 돈이 돈을 버는 특별한 단계에 진입했음을 절감한 것이다.

‘가본 적이 없는 세상, 적응하기 어려울 것 같은 상황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지 정리가 필요해!’

아무리 유명해져도 잘난 척하거나 돈이 넉넉해도 흥청망청 쓸 생각은 없지만 그건 프로 골퍼로서의 마음가짐이고, 사업하는 입장에서는 달라진 자신의 위상에 적응할 필요를 느꼈다.

부정할 수 없는 세계에 이미 발을 들여놨기 때문이다.

실리와 명분을 분리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기득권과의 관계를 언제까지고 무시할 수는 없다.

적당한 타협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게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반갑습니다. 카메론.”

“함께 플레이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스터 퍼펙트.”

“오늘 당신의 시원한 장타를 보게 될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멋진 대결이 기대됩니다. 하하하.”

무서운 아이, 카메론 챔프와 한 조가 된 것은 주최 측의 흥행 카드로 보였다. 1995년생인 카메론은 이제 PGA가 330야드 티샷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알려 준 대표적인 젊은 신예다.

데뷔 후 매년 1승을 거두며 차세대 에이스가 될 것이라고 평가받는 카메론은 130마일의 클럽 스피드와 200마일의 볼 스피드를 꾸준히 기록하는 안정감을 보여 주고 있다.

평균 드라이브 비거리는 316야드지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350야드를 날릴 수 있기 때문에 필상과의 맞대결에 팬들의 관심이 잔뜩 쏠렸다.

“장타 대결을 기대하나 봐요.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아니야. 나도 샷 감이 좋을 때는 한두 번 붙어 줘야지.”

사실 필상의 1라운드 전략은 코스 적응이었다. 연습 라운드 때도 나름 정확한 공략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완전하다는 느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페블비치는 난해한 코스다. 백여 년에 이르는 전통과 해변에 위치한 독특한 링크스 지형은 마치 철옹성을 연상시켰다.

누구에게든 쉽게 정복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에 무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오랜만이군요. 미스터 공.”

“아! 반갑습니다. 루카스.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그럭저럭. 하지만 공 프로는 늘 최고더군요. 하하하.”

다른 동반자는 일전에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베테랑 루카스 글로버였다. 마흔이 된 그는 2009년 이 대회 우승자다.

PGA 통산 3승에 빛나는 플레이는 아니지만 늘 꾸준한 선수로 알려진 인상이 퍽 좋은 선수다. 성적 부진으로 아내에게 폭행을 당한 선수로 시끄러웠지만 그건 그의 온화한 성품을 증명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필상과 비슷한 체구를 지니고도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은 것만 봐도 평상시 그의 인간 됨됨이를 알 수 있다.

-카메론은 최고의 장타자이고 루카스는 정교한 플레이어라고 봐야죠? 아주 재미있는 매치업인 것 같은데, 만약 미스터 퍼펙트가 장타 대결을 펼친다면 카메론이 불리할까요? 아니면 루카스가 불리할까요?

-그건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미스터 콩의 장타가 정확하다면 카메론이 먼저 무너질 가능성이 높지만 페블비치의 마법에 빠진다면 오히려 루카스만 신이 날 수 있습니다.

-카메론이 유리한 상황은 없는 건가요?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객관적인 데이터는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장타자라도 둘의 페어웨이 적중률은 천양지차입니다.

-아! 89%로 최상위권인 미스터 콩과 55%로 최하위권인 카메론은 비교가 어렵기는 하군요.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현실은 냉혹했다.

통계가 모든 것을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것을 통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상하는 것은 무리수가 아니다.

하지만 실제 경기 내용은 모두의 예측을 벗어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장타 대결에 불을 지핀 카메론은 의외로 정확한 티샷을 선보이며 페어웨이에 볼을 안착시켰다.

하지만 필상은 아예 드라이브를 잡지 않고 우드와 유틸리티를 번갈아 잡으며 마치 루카스와 호흡을 맞추는 것 같은 플레이를 이어갔다.

흥미롭게도 티샷을 40야드 이상 더 보내 놓고도 카메론의 5번 홀까지 성적은 +1에 불과했다. 버디를 하나 잡았지만 보기를 2개나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과 루카스는 -1이었다. 보기 없이 버디만 하나씩 잡아내며 US오픈의 시작을 차분하게 열었다.

“드라이브.”

“드라이브요?”

“응. 한 번 보여 줄 때가 된 것 같아.”

4, 5, 6번 홀로 이어진 해변에 조성된 코스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물론 우측으로 넘어가면 공을 찾을 수 없는 벼랑이지만 연이은 두 홀에서 인내한 필상은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정확히 읽었고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었다.

필상이 드라이브를 들고 티 그라운드에 오르자 팬들의 요란한 응원의 함성이 터졌다. 그들은 드디어 장타자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흥분에 사로잡힌 것이다.

티를 꼽고 공을 얹힌 필상은 뒤로 물러나 빈 스윙을 하며 방향을 가늠했다. 목표한 방향은 놀랍게도 우측 벼랑이었다.

-지금 어디를 보는 거죠?

-아예 바다를 보는 것 같습니다. 바람이 바다에서 내륙으로 부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장타를 고려하면 다소 위험한 결정이 아닌지 걱정됩니다.

-만약 저 방향대로 친다면 얼마까지 유효한가요?

-340야드만 넘어도 벼랑으로 떨어질 겁니다. 하지만 훅 바람이 얼마나 부는지에 따라 다르겠죠.

-그럼 안전하게 드로우 샷을 구사하면 되겠네요.

평소 필상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스트레이트 구질을 구사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때문에 지금 에이밍이 너무 위험해 보였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이런 극적인 에이밍을 하는 필상을 보며 오히려 흥분하기 시작했다. 모처럼 꺼내든 강력한 무기에 대한 기대감이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까앙!

필상은 모처럼 시원한 풀스윙을 했다.

커다란 스윙 아크에 폭발적인 임팩트는 그가 유감없이 장타를 날린다는 생각에 완전히 부합했으며 실제 스윙을 한 필상도 속이 후련한 기분을 느꼈다.

컨트롤 샷은 안전한 결과는 물론 마음의 평화를 주지만 차곡차곡 쌓인 장타에 대한 불만을 완전히 해소한 티샷이었다.

그런데 힘차게 치솟은 타구가 너무 우측으로 치우쳐 보였다. 이대로 날아가 떨어지면 벼랑의 경계가 아닌 그냥 바다 한가운데 퐁당 빠질 것 같았다.

“너무 바람을 과신한 거 아닌가요?”

얼른 다가와 클럽을 받아 드는 미사키도 걱정이 잔뜩 쌓인 눈빛으로 다급하게 필상의 의도를 체크했다.

아무리 해풍이 도와줘도 380야드 지점에 움푹 들어온 벼랑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의 대답은 차원이 달랐다.

“내가 본 지점은 저 벼랑을 넘기는 거야.”

“네? 거긴 405야드인데요?”

캐리로 405야드를 넘기는 것은 아무리 필상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치솟은 타구가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걸 보며 미사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와! 와우! 대체 얼마나 날아가는 거죠?

-미스터 퍼펙트는 아예 저 움푹 파인 벼랑을 넘기는 샷을 구사한 것 같습니다.

-혹시 뒷바람이 부나요?

얼른 바람의 지표를 확인한 캐스터 프랭크는 고개를 꺄웃거렸다. 뒷바람이 있기는 하지만 비거리 향상에 큰 영향을 미칠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로소 하강을 시작한 타구는 급기야 해풍을 타고 휘기 시작했다. 그런데 떨어지면서도 쭉쭉 뻗어 나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와아아아!”

급기야 타구가 떨어졌다.

바다에 빠질까, 거리가 짧을까 모두 우려했지만 실제 타구가 떨어진 지점은 벼랑에서 10야드 가량 떨어진 지점이었다.

게다가 러프에 랜딩한 타구가 힘차게 튀더니 급기야 페어웨이까지 굴러가 멈췄다.

갤러리들의 비명이 페블비치를 무너뜨릴 것처럼 진동했지만 중계진은 잠시 해설을 멈춘 채 말이 없었다.

정확한 드라이브 비거리가 측정되는 것을 확인하고 말을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공이 멈춤과 거의 동시에 수치가 표기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기계가 오작동이라도 하는 듯 2, 3초간 머뭇거리다가 439라는 숫자를 드러냈다.

-으! 이게 정말 가능한 숫자인가요?

-이번 시즌 최장타가 터진 순간입니다. 무려 439야드입니다. 내리막 경사도 아니에요!

-미쳤습니다! 어찌 인간이 이런 타구를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입니까! 전 미스터 퍼펙트의 드라이브와 이번에 친 공을 정밀 검사해 봐야 한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하하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2017년 더스틴 존슨도 WGC 브리지스톤 인비테이셔널 1라운드에서 439야드 드라이버 티샷을 기록한 적이 있습니다.

-아! 그럼 그 대기록과 타이가 되나요?

-하지만 439야드가 최장타 기록은 아닙니다. 2013년 WGC 캐딜락 챔피언십에서 필 미켈슨은 450야드를 날린 적도 있죠.

깜짝 놀랄 기록들이 언급되었다.

PGA 투어 최장 드라이브 비거리 공식 기록은 데이비스 러브 3세가 2004년에 기록한 476야드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알려진 세계 최장타 기록은 2007년 마이크 도빈이 WLDC에서 기록한 551야드다. 물론 뒷바람이나 내리막 경사의 도움을 받은 결과지만 필상이 날린 이 거리보다 더 먼 기록이 있다는 사실에 시청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물론 현장에서 이 어마어마한 타구를 지켜본 이들에게 그런 기록은 무의미했다. 자신이 직접 보고 전율한 이 장타야말로 세상 그 어떤 기록보다 위대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좀 해 봐요.”

“내가?”

“다들 프로님의 인사를 기다리잖아요.”

루카스가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섰지만 팬들의 환호성은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경기 진행 요원들이 진정해 달라는 피켓을 들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환상적인 기록을 달성한 주인공이 직접 나와 인사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필상은 본인의 경기에만 몰두해 그걸 미처 파악하지 못했으나 뒤늦게 깨닫고 나섰다.

계면쩍었으나 하는 수없이 앞으로 나서 팬들을 향해 돌아선 필상은 모자를 벗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도 10여 초 동안 필상의 닉네임을 목청 높여 외친 팬들이 필상이 그만해 달라는 손짓을 보고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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