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87화 (187/354)

187. 많이 가진 자들

“기어코 내가 내민 손을 잡지 않겠다는 겐가?”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협력을 제안해도 시원찮을 판에 추잡한 담합과 협박이라니요! 동업은 당치도 않습니다!”

부담스러운 장소였고 껄끄러운 상대였지만, 필상은 표현을 가리지 않고 생각한 그대로 표현했다.

고리타분하고 폐쇄적인, 때로는 폭력까지 동원하는 전근대적인 기업 운영으로는 영업 이익을 내기 힘들뿐더러 수많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업은 물론 그들이 방해한다면 일본에서의 사업을 걷어치우는 것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원하는 게 뭔가? 아니,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그냥 살던 대로 사십시오. 저는 제 길을 가겠습니다.”

“허허허. 이 늙은이를 너무 몰아세우는군. 내가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가!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 말을 해 봐.”

간단치 않은 과정이었으나 그래도 너무 쉽게 목표를 성취한 것 같아 필상은 쉬이 입을 열기 어려웠다. 상대에 대한 신뢰가 없는 가운데 괜히 속내만 드러내는 꼴이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제 뜻은 밝혔습니다. 어르신도 그만 포기하시죠.”

“자네는 지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회한 그의 눈빛이 묘한 빛을 발하는 걸 보며 의문이 솟구쳤다. 그 역시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다.

이미 오래전에 동일한 과정을 겪었다면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 수도 있다. 그게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염려가 피어오르는 순간, 필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굴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뵐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평안하십시오.”

고개 숙여 인사한 필상은 미련 없이 돌아 나왔다.

이해하기 힘든 미소를 입가에 담고 있던 사토시가 던진 마지막 말이 발걸음을 멈칫하게 했으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다시 찾아올 날이 있을 거라고?’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사토시는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했으나 이제 사업의 향방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지닌 힘은 동업이 아니면 일본에서의 사업에 사사건건 방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를 개인적으로 찾아올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설사 그의 경고처럼 불행한 일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이겨 낼 것이다.

같은 경험을 했지만 그걸 풀어 나가는 방식까지 똑같았을 리는 없다. 필상은 자신이 찾은 해법이 적절하며 이미 수차례 겪은 것처럼 위기를 돌파할 마음의 각오가 단단했다.

* * *

“일단 일본에서의 사업은 잠정 중단하겠습니다.”

필상은 이 대표와 미켈슨에게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폭력을 행사한 것은 뺏으나 상대의 무례함과 기업 운영 마인드에 대한 설명을 추가했다.

아직도 그런 행태를 보이는 작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란 미켈슨도 일단은 동의해 결론이 났다.

“그 대신 한국과 태국에서의 사업에 좀 더 박차를 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대표님, 정식 오픈 행사도 앞당기고요.”

“네. 빈틈없이 진행할게요. 다른 분들도 괜찮다면 미국을 다녀온 다음 주에 바로 개소식을 하면 어떨까요?”

드디어 JPK 컴퍼니가 정식 사업을 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정을 확인한 필상은 미켈슨에게 다른 얘기를 꺼냈다.

“필. 행사 참여차 한국을 다시 방문할 때, 마침 KPGA 챔피언십이 열리는데 명예회복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좋지!”

“그럼 결정된 거네요.”

“타이거의 의향도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출전을 결정했습니다. 열렬한 한국 팬들의 반응이 너무 좋고 다음에 오면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한국을 고루고루 다녀 보고 싶다더군요.”

“난 자네 어머님이 차려 주신 그 맛있는 음식들이 생각나던데, 그 뭐였지?”

미켈슨은 특이하게도 수육과 닭백숙을 엄청 좋아했다.

푹 삶아 내 입에서 살살 녹는 육질이 너무도 좋다고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원래 어른들은 음식을 복스럽게 먹는 걸 좋아해 엄마는 미켈슨을 엄청 칭찬했었다.

여하튼 일본에서의 어그러진 일정 때문에 께름칙했으나 본의 아니게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되면서 사업 개시는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으로 출국하기 위해 공항을 찾은 필상과 미켈슨은 또 한 번 기자들이 들이대는 마이크 앞에 서게 되었다.

필상은 말을 아꼈으나 미켈슨은 끝내 참지 못하고 몇 마디 던졌다.

“우리 TPK가 일본에서 사업을 하지 못하게 된 책임을 질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찾아가 물어보세요.”

그 한마디에 난리가 났다.

궁금증을 해소하려는 기자들의 질문이 폭주했지만 그는 한술 더 떴다.

“사업만 못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일본 투어에 올 일도 없을 겁니다. 난 일본이 이렇게 후진 나라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 말을 던진 미켈슨은 이후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입국장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물론 필상도 말을 아낀 채 뒤따라갔다.

JGTO 출전까지 거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또한 좋은 압박 카드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웃 한국 투어에는 연속해서 출전하는데 일본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면 팬들의 질타가 쏟아지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사업과 투어는 구분을 해야죠. 하지만 저도 가슴은 아주 후련했습니다. 하하하.”

미켈슨의 인터뷰는 예상보다 훨씬 강한 파장을 낳았다. 당장 TPK 일본 진출을 막은 책임 소재를 찾기 위한 기자들의 취재 경쟁의 불이 붙었다.

물론 그들은 거대한 벽을 만나게 될 것이고 어떤 반응이 나올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후진적인 기업 문화에 대한 변화의 요구는 뒤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 *

“자네를 LA에서 만나니 느낌이 또 새롭군.”

“헤어진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요. 그런데 샌프란시스코가 더 가깝던데 왜 여기로 오라고 하셨습니까?”

“다 이유가 있지. 일단 움직이자고.”

공항에까지 마중을 나온 타이거와 함께 럭셔리 세단을 타고 이동한 곳은 영화나 그림에서나 봤던 해변에 위치한 럭셔리 리조트였다.

대충 설명을 들었는데 별장 하나에 수백억을 하는 곳도 있단다. 그야말로 부촌을 찾은 필상은 곧 어마어마한 저택에 들어섰다.

“투자자들을 만날 거야.”

“투자자요?”

“응. 그들은 우리 TPK의 미국 진출과 유럽 진출까지 염두에 두고 있더군.”

“아직 아시아 사업소 오픈도 안했는데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닙니까?”

“그냥 만나나 보자고. 그렇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어.”

“겁은 무슨!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어디 보자고요.”

부동산 가격에 어울릴 만한 멋진 주택은 인테리어도 고급스러웠다. 솔직히 시골 출신인 필상은 사람이 사는데 이렇게까지 많은 돈을 들일 필요가 있나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현관을 들어선 일행은 집을 관통해 뒤뜰에 있는 수영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파티가 한창이었다.

“먼저들 시작한 모양이네.”

“대략 몇 명이나 모였습니까?”

“대략 스무 명? 이들은 이게 일상이지. 오늘은 특별히 우리랑 약속이 잡혔고 중요한 것은 저들이 모두 자네의 열성 팬이라는 거야.”

“골프를 즐기는군요.”

미국에서 골프는 한국처럼 고급 스포츠가 아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럭셔리한 최고 상류층을 위한 시장은 따로 굴러가고 있다.

이번 US오픈이 열리는 페블비치도 그중에 하나였고 그들은 그들만의 강한 유대감으로 결속되어 외부인들의 진입은 꺼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필상이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지 못했다면 언감생심, 이곳에 초대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좀 씁쓸했다.

“표정이 왜 그래?”

“자본주의가 새로운 신분 질서를 정립한 사실을 오늘 제가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건가요?”

“하하하! 어째서 삐딱하게 들릴까? 자네 정도라면 얼마든지 이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기분 좋은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제가 남들의 위에 군림하는 신분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생각은 제 삶을 부정하는 것이고 저들에게 오히려 얕잡혀 보일 겁니다.”

그 말에 타이거의 표정도 일시에 굳었다.

그는 이런 사회에 진출한 지 오래다. 성공의 증거이자 이제는 이너서클의 멤버가 되었다고 굴뚝같이 믿지만, 스스로 돌아봐도 여전히 기존 멤버들과의 괴리는 외면하기 어려웠다.

“미스터 퍼펙트! 자, 여기 누가 왔는지 좀 봐.”

젊은 친구가 파티가 한창인 수영장으로 들어서는 필상 일행을 발견하고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먼저 달려와 인사할 것까지는 없지만 왠지 그의 행동이 거슬렸다. 또한 우르르 몰려 다가오는 필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마치 동물원에 새로 들어온 귀한 동물을 구경이라도 하는 눈빛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괜한 자괴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필상은 일단 차분하게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반갑습니다. 공필상이라고 합니다.”

“아! 미스터 콩. 반가워요.”

“난 미스터 콩의 열열 팬입니다.”

“대선수를 만나 영광입니다. 하하하.”

돌아가며 인사말을 던지는데 묘하게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다. 어차피 다수라서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필상은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통성명을 했다.

그리고 정확히 기억해 대화를 나눌 때마다 이름을 직접 부르며 인사가 겉치레가 되지 않게 집중력을 발휘했다.

이 자리에 초대된 수많은 사람을 봤지만 필상처럼 당당하고 똑똑한 사람은 없었다는 평가를 듣고야 말았다.

“우리가 콩 프로를 만나고 싶은 이유는 들었지요?”

사십 대 중반의 스미스라는 사람이다.

스스로 부동산 투자 관련 사업을 한다고 소개했던 자다. 분위기를 보건데 사업적인 일에는 그가 주로 나서는 것 같았다.

자신들의 투자 소식에 크게 기뻐할 줄 알았는지 본론이 언급되자 다들 상체가 뒤로 제켜지는 반응을 보였다.

“들었습니다. 투자를 하고 싶다고요?”

“JPK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도 투자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우리는 판단했습니다.”

“아! 확인되지도 않은 것에 너무 큰 것을 베팅하시네요.”

“클지 작을지는 이제부터 따져 봐야지. 하하하.”

자신들의 재력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 다소 거만해진 어투에 슬며시 짜증이 일었다. 하지만 밝은 표정을 잃지 않은 필상의 대답은 의외였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크든 작든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호!”

“그냥 이렇게 좋은 분들과 안면을 튼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만족합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곧 아주 중요한 대회가 있어서 사업적인 대화는 JPK 경영 총괄 매니저와 나누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라일리?”

“다행히 아시는군요. 그녀가 여러분들과 더 호흡이 잘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골 출신인 저는 이런 사교적인 모임에 익숙하지가 못해서요.”

투자받는 이들은 이곳에 오면 대부분 고개를 숙인다. ‘돈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적나라하게 구현되는 장소였다.

하지만 필상은 솔직했고 당당했다. 시골 출신이라 익숙하지 못하다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아무렇지도 않게 밝히는 모습에 오히려 다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결국 사양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재한 타이거도 납득하기 어려웠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JPK에 지분을 가지고 있지만 처음부터 모든 중요한 결정은 필상에게 일임한 상황이기 때문에 할 말은 없었다.

찜찜한 느낌에 분위기가 가라앉으려는 찰나, 필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타이거와 미켈슨에게 가자고 손짓했다.

“전 얼른 페블비치가 보고 싶습니다.”

“어? 그래 가야지.”

“이곳에 계신 분들은 자주 가는 곳이지만 저는 세상 모든 골퍼들의 로망이라는 페블비치 링크스를 보고 싶어 미칠 지경입니다. 다들 이해하시죠?”

“아. 네.”

스미스가 마지못해 대답했지만 누구 하나 이해하는 듯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언제든 어디든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을 테니까.

그나마 한 명 한 명 감사하다며 악수를 나눈 필상은 채 1시간도 머물지 않고 대저택을 빠져 나왔다.

“왜 좋은 기회를 걷어찬 거지?”

타이거는 차에 오르자 불만을 표출했다.

쉽지 않은 자리를 마련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하지만 필상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어차피 저들은 하고 싶은 건 반드시 하는 자들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그럼 아쉬울 게 없죠. 지금 덥석 무는 것보다 뜸을 들이는 게 우리에게 득이 될 겁니다.”

“혹시 기분이 상해 포기하면 어쩌고?”

“그럴 리가 있나요! 우린 이제 곧 큰 성공을 거둘 텐데.”

“아!”

그 말에는 동의했다. 자신이 주도하고 있는 태국도 기대 이상의 성과가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 작은 숫자 하나가 나중에는 엄청난 가치가 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린 사업은 물론 이번 US오픈도 압도해야만 합니다.”

“그건 공의 말이 맞네.”

그때까지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던 미켈슨이 비로소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도 타이거 못지않은 큰 성공을 거둔 골퍼지만 이번 자리는 영 불편했던 것 같다.

그냥 묵묵히 자리만 지켰으나 냉철하다 못해 너무도 계산적인 필상의 행동을 보며 많은 것을 깨달았다. 특히나 자신이 필상과 함께 사업을 도모하기로 결정한 것은 지극히 현명한 판단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이제 곧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에서 열리는 아메리칸 내셔널 대회 US오픈이 시작됩니다.

-US오픈이 오랜만에 페블비치로 돌아왔습니다. 환상적인 뷰와 최고의 선수들이 펼치는 멋진 샷을 함께 볼 수 있게 되어 너무도 즐거운 날입니다.

-챔블리. 혹시 스포츠 베팅 업체들의 이번 대회 우승 배당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하하. 시작부터 스포츠 베팅인가요?

-좀 묘하기는 하지만 너무도 놀랍지 않나요? 가장 높은 배당을 받는 선수가 세계 랭킹 1위도, 지난 대회 우승자도 아닌 미스터 퍼펙트라고 합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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