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용납할 수 없다.
똑똑! 똑똑똑!
초특급 호텔 객실에 초인종이 없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번잡한 생각을 접고 잠자리에 들려는 찰나,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절제된 힘이 배분된 아주 안정된 리듬은 불필요한 긴장을 불러 일으켰다.
“뭐지?”
이 늦은 시간에 자신의 방을 찾을 사람은 없다. 이 대표나 미켈슨과는 저녁도 함께 먹었고 수더분한 수다까지 떨었다.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보자고 각기 객실로 들어갔는데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노크를 할 리는 없다.
게다가 느낌이 영 께름칙했다.
“누구십니까?”
“공 프로님. 저는 사쿠라 재단의 나가노라고 합니다. 잠시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문에 만들어진 구멍을 통해 확인해 보니 혼자가 아니었다.
대답한 사람은 사십 대의 깔끔한 인상이지만 그의 뒤에는 커다란 덩치가 2명 대기하고 있었다. 양복을 입었으나 운동을 한 것이 느껴지는 전문 경호 인력이 아닌가 싶었다.
돌연 기분이 싸해지기도 했지만 가슴 밑바닥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안전 관리가 철저한 호텔이라지만 전문가들이라면 함부로 문을 열어 주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낮에 약속을 잡으시고 찾아오십시오. 저는 오늘 피곤해서 누군가를 만날 여력이 없습니다.”
“사토시 회장님이 찾으십니다.”
“약속을 잡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번거롭게 하지 마시고 돌아가세요.”
단호하게 거절했다.
사토시가 이 모든 일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같이 동반 라운드를 할 때만 해도 그에 대한 이미지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동질감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런데 일을 하는 방식은 아주 지저분하다는 생각과 함께 일이 번거롭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정말 더럽게 번 게 맞나 보네!’
그가 스스로를 낮췄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일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동업을 제안하면 얼마든지 검토할 수 있고 서로 협의할 수도 있다. 물론 신뢰할 수 없는 이와는 같이 일을 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그의 일처리 방식은 한국의 재벌처럼 상대의 입장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오직 본인의 뜻대로 풀려야 성이 차는 스타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이 밤에 동의하지 않는 상대를 기꺼이 데려와 만나겠다고 사람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영향력이 커도 강제로 문을 부수고 들어올 수는 없다.
게다가 조금만 이상한 낌새가 들면 바로 프런트에 연락하거나 경찰을 부르면 그만이다.
‘이 인간들이 진짜 왜들 이러지?’
그냥은 찜찜해 다시 한 번 내다 봤는데 한동안 문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던 중년인이 일단 어딘가로 물러났다.
그런데 그만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 덩치 둘은 마치 필상의 방을 지키기라도 하듯이 양옆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사실 필상은 누군가와 싸워 진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을 만큼 다부지고 날랬다. 더욱이 기이한 능력을 얻은 뒤로는 이종격투대회에 나가도 우승할 것만 같은 자신감이 넘쳤다.
물론 그런 자신감을 확인해 볼 기회조차 없기는 했으나 분명한 것은 아무리 운동을 한 자들이라도 쉽게 당할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버티든 말든 침대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아! 이런 우라질 놈들!”
신경을 끄려 했지만 자신의 방 앞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기까지 하는 자들을 그냥 두고 잠을 잘 수는 없었다.
감각이 남다른 필상에게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고스란히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한 필상은 껐던 스마트폰의 전원부터 다시 켰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연락했던 미확인 번호를 찾아 발신 버튼을 눌렀다. 예상한 대로 벨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렸고 상대의 첫 음성에는 기분 좋은 색깔이 묻어났다.
‘아! 공 프로님.’
“지금 남의 객실 앞에 와서 뭐 하는 짓입니까? 바로 물러서지 않으면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음을 경고합니다!”
‘아이고 이런! 그러시면 곤란하지요.’
능글능글해진 그의 음성에는 예상하지 못한 자신감까지 느껴졌다. 대체 이런 작태를 벌이고도 어떻게 태연할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어진 그의 말에 참았던 분노가 터졌다.
‘이보영 대표라도 찾아가야 하나요? 1503호죠?’
“이런 쓰레기 같은 자식들이!”
하도 어이가 없어 욕설부터 튀어 나왔다.
‘허허. 이거 잘 나가시는 분이 이러면 곤란하실 텐데…….’
“잠깐만 기다려!”
휴대폰을 끈 필상은 옷부터 챙겨 입었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나섰다.
필상을 보자 화색이 된 나가노는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일단 한 방 처먹이고 싶었으나 복도에 설치된 CCTV가 가동되는 것을 확인한 필상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 늦은 시간에 남의 숙소에 불쑥 찾아와 함께 가자니, 대체 무슨 경우가 이렇습니까?”
“저희는 임무에 충실할 뿐입니다. 가시죠.”
“좋소. 일단 갑시다.”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다.
그걸 알지만 중요한 것은 사토시가 자신과 동업을 원한다면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그의 면전에서 경우를 따져 볼 요량이었다.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이들은 자신만 건드리는데서 끝나지 않고 이 대표를 겁박한다고 공언하지 않았던가!
도무지 그것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들과 함께 로비로 내려간 필상은 잠시 양해를 구하고 프런트에 들려 뭔가를 얘기한 뒤에 그들이 가져온 차에 올랐다.
다행히 목적지는 멀지 않았다. 도심 속에 이렇게 숲이 우거진 고급 주택이 있나 싶은 대저택에 도착한 필상은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내리시죠.”
“나가노. 넌 나랑 같이 좀 가지.”
“아!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현관에서 내린 필상은 나가노의 안내를 받아 저택으로 들어섰다. 돈을 처발랐다는 느낌이 확연한 화려한 인테리어를 보며 참으로 싸구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면에 위치한 넓고 완만한 계단을 걸어올라 2층으로 향했는데, 이 늦은 시간에도 저택 곳곳에 위치한 경비 인력의 상황도 확인했다.
자기 집에서도 이런 경호가 필요하다면 그는 결코 좋은 사람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명이 지키고 있는 서재의 문이 열렸고 안으로 들어선 필상은 마침내 사토시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서 오시오. 공 프로.”
“오랜만입니다. 고리대금업자 어르신.”
“허허허. 내게 많이 서운한가 보군.”
“서운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일본에서의 사업은 접기로 했으니까요.”
“오후에 있었던 자네 인터뷰는 잘 봤어. 하지만 나도 무척 서운한 걸 어쩌지?”
“왜 서운해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자업자득 아니겠습니까?”
“자업자득이라…….”
필상이 이렇게 당당하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잠시 필상을 뚫어져라 쳐다만 봤다. 마치 ‘네놈이 감히 이렇게 나와?’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태도에 고개를 숙일 것 같으면 경찰을 부르고 말지 구태여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마음에 뒀던 첫 번째 화두부터 꺼냈다.
“무슨 일을 이리도 거칠게 시키십니까?”
“거칠다니?”
“전 이 작자들의 건방진 태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허허허. 그리 굴러먹던 자들인데 어쩌겠나?”
“그럼 저도 굴러먹던 버릇대로 대해도 되겠습니까?”
“자신 있다면 맘껏 해 보시게.”
사토시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상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이해는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러나 빙긋 웃고 있던 그의 표정이 돌연 딱딱하게 굳었다.
사토시가 동의하는 찰나, 돌연 몸을 날린 필상이 둘의 중간 지점에 서 있던 나가노의 복부를 거세게 걷어찼기 때문이다.
‘컥!’
비명 소리가 터지지도 않았다.
그저 풍선의 바람이 빠지듯 기함을 토한 나가노는 한 방에 나가 떨어져 벽에 부딪치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입에서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졌지만 눈만 멀뚱멀뚱 뜬 그는 고통을 참지 못한 채 무언가를 얘기하고자 했다.
하지만 놈을 쓰러뜨린 필상은 곧바로 문가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 깜짝 놀란 두 덩치를 향해 돌아섰다. 자신들을 직접 관리하는 나가노가 졸지에 깨진 것을 보고 어찌 행동해야 할지 얼핏 판단이 서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오른손을 치켜든 필상은 집게손가락을 까딱까딱 거리며 놈들을 불렀다.
“어이! 너희 두 놈 이리 좀 와 봐.”
굉장히 심한 도발이었음에도 쉽게 움직이지 못한 그들은 사토시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서서히 다가왔다.
조폭 출신이거나 운동을 꽤나 한 듯, 간격을 벌리고 필상을 조이듯 다가오는 그들에게서 제법 강한 투지가 엿보였다.
주인이 싸움을 허락한 이상, 패배는 바로 실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 제법 신중했으나 정작 일을 벌인 필상은 여유 만만했다.
현대를 살며 이런 폭력을 직접 경험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상명하복이 몸에 익은 자들이라면 싸움에서 졌다고 고소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 아래 놈들의 움직임을 직시했다.
그리고 판단을 내림과 동시에 또다시 날았다.
쉭!
얼마나 기민한지 마치 전력으로 달리는 것처럼 빠르게 우측에 섰던 자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상대는 익숙하게 몸을 피했고 반격을 하려는 듯했으나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헛방을 때린 주먹에 이어 몸을 회전한 필상의 뒤돌려 차기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필상을 쉽게 보다가 깜짝 놀란 놈이 미처 피할 틈이 없다고 판단하고 얼른 두 팔을 들어 막았다.
그러나 필상의 발차기는 치명적이었다.
빠악!
두 팔은 묵직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재차 강타했으며 그 한 방에 그냥 저 홀로 나뒹굴고 말았다.
얼른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 했지만 그건 마음뿐, 두 팔이 모두 심하게 부러진 놈은 다시 뒹굴고 말았다.
그러나 필상은 이미 다른 한 놈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어딜 감히!”
실전 경험이 많은지 놈이 먼저 선방을 날렸다.
하지만 상체를 옆으로 기울이며 회피한 필상은 크로스 펀치를 놈의 턱에 작렬시켰다. 맞는 순간 뭔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고 놈 또한 단 한 방에 나뒹굴어 아예 기절해 버렸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문이 열렸고 밖에 있던 가드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그래 봐야 3명, 자신의 실력에 만족감을 얻은 필상은 재차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사토시의 음성이 터졌다.
“그만!”
누군가를 보호하려는 의지보다 제 수하들이 너무도 쉽게 깨지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웠는지 일단 싸움을 멈추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의 한 마디에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자들도 얼른 공격을 멈추고는 사토시의 앞을 철통같이 막아섰다.
하지만 몸을 틀어 사토시를 직시한 필상은 다시 한 번 그에게 강한 경고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사토시. 당신과 나 이외에 그 누구도 이 서재에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둘이 푸는 거 어떻습니까?”
자신의 제안을 이리도 쉽게 받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저 기선 제압을 위해 적절한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잠시 굳었던 표정을 풀며 특유의 가래 끓는 음성을 뱉었다.
“그게 좋겠군. 다들 나가.”
“회장님!”
“이런 쓸모없는 놈들! 당장 나가!”
음성의 톤이 변하지 않으면서도 내용은 강렬했다.
네깟 놈들은 있으나마나 하다는 자신감이 그대로 표출된 태도에 필상도 그가 결코 녹록한 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쭈뼛쭈뼛 수하들이 모두 서재를 나가자 그는 소파에 앉으며 맞은편 자리를 필상에게 권했다. 마주 보고 앉자 한동안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애들의 일처리가 너무 미숙했나 보군!”
“미숙한 게 아니라 모자란 거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 것 아닙니까?”
“허허허. 내가 오늘 자네한테 아주 호되게 당하는군.”
“그럴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좀 더 떳떳하고 투명한 기업 운영을 하시죠.”
입장을 바꿔 놓고 보면 이런 당돌한 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필상은 하나도 꺼릴 게 없었다.
자신과의 일도 그러하지만 그의 사업 방식은 수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 줬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물론 그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한참 뜸을 들인 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세상이 많이 변했지. 난 그걸 쫓아갈 자신이 없어.”
내용도 충격이지만 그 말이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라는 것이 더 놀라웠다. 억양이 다소 이상했지만 그는 정확히 자신의 감정을 한국어로 표현한 것이다.
“한국 사람입니까?”
“아버지가 한국인이었으니까 나도 한국인이라고 해야겠지.”
필상이 알기로 그는 1939년생 토끼띠였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재일교포 2세인 것이다. 하지만 일찌감치 귀화한 그의 부친은 자신의 국적을 완벽하게 세탁했다.
물론 사토시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밝히길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드러낸 게 처음이라고 했다.
“당신이 한국인의 핏줄을 타고난 것과 사업 방식은 하등 연관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끄럽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에게서 발산된 분노의 기운은 심지가 굳은 필상을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어찌되었든 동의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그는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사연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되지만 그걸 들어 줄 용의도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길어졌지만 필상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신의 뜻은 이미 밝혔던 바, 그의 결정을 들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