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85화 (185/354)

185. 전략적 후퇴

“그럴게요. 일단 건너가서 얘기하죠.”

한 주의 여유가 있어 타이거를 먼저 보내고 며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자 했다. 특히 산달이 가까워진 모모코의 곁을 지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하루를 쉰 화요일, 이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일본에 좀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데, 미켈슨과 먼저 건너가 TPK 관련 계약을 하는 것이 여의치 않은 것 같았다.

어차피 US오픈 때문에 미국을 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사나흘 집밥을 먹인다고 생각하셨던 엄마의 서운한 표정은 쉽게 잊히지가 않았다.

“정말 같이 안 갈 거야?

“전 우리 집이 더 편하고 좋아요. 어차피 오빠가 미국으로 가면 저 혼자 비행기 타고 오기 싫어요.”

“그럼 내가 시간 내서 장인어른은 만나 뵐게.”

“요즘 뭐가 그리도 바쁜지 제 전화도 잘 안 받아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음…….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일본에 간다고 하면 무조건 따라 나설 줄 알았다.

그런데 여주 집이 더 편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그녀의 아픔을 짐작하게 되었다.

일찍 모친을 여윈 모모코는 일본에 가더라도 임신한 자신을 알뜰하게 챙겨 줄 적임자가 없었던 것이다.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엄마한테 해 달라고 하고 누나들한테도 당당하게 부탁해.”

“치!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요. 살이 쪄서 출산 후에도 돼지 엄마가 될 것 같아 걱정이니까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세요. 괜히 잘해 주시는 식구들 불편하게.”

“알았어. 곁에 좀 있어야 하는데…….”

말을 끝맺기도 전에 손사래를 친 모모코가 두 팔을 목에 두르고 안겨 왔다. 너무 비만해질까 봐 운동도 하지만 건강한 아이의 출산을 위해 다이어트는 접어 둔 것 같았다.

안는 느낌이 제법 묵직했으니까.

식구들 모두가 각별히 신경 쓴다는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너무도 행복했다.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지!’

꿈이 아니기를 바랄만큼 끔찍하게 좋은 이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미 평생 쓸 돈은 벌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대충 만족하며 안주할 수는 없다.

하나뿐인 아들이자 남동생을 위해 헌신한 가족들에게 폐인이 다 된 처량한 신세로 비쳤던 나날을 생각하면, 또 수많은 이들의 반대와 걱정을 불사하고 자신의 여자가 되어 준 모모코를 위해서도 자랑스럽고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야만 한다.

단기간에 정말 많은 것을 이뤘지만 궁극적인 목표에 비하면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 * *

“이미 서로 논의가 다 끝났는데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일본에 도착한 필상은 이 대표로부터 정말 어이가 없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찌감치 도쿄 인근에 적당한 매물을 확인했고 구체적인 인수 조건과 일정에 대한 합리적인 합의까지 도출했다.

그런데 미켈슨과 함께 계약서에 사인하기 위해 도착한 이 대표는 상대가 차일피일 만나기를 거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쉬운 입장은 분명 그들이었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직접 사무실에 쳐들어간 이 대표는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

계약을 백지화하겠다는 것인데,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걸 보면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의미였다.

“우리와 계약하기로 했던 이들은 물론이고 후보지로 꼽았던 골프클럽의 오너들도 이미 한통속이 된 것 같아요.”

“한통속이요?”

“하도 어이가 없어 그럼 좋다고 물러나 다른 곳에 연락을 해 봤는데, 이구동성이더라고요. 어이없게.”

“담합이로군요!”

중대한 기로에 섰음을 깨달았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서로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거래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공정한 거래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일단 미켈슨도 불러 상황을 설명했다. 물론 미국인인 그는 불같이 화를 내며 법적인 조치를 취하자고 역설했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지? 대체 어떤 놈들이야?”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현명한 판단?”

“전 아쉬운 건 오히려 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 골프 열기가 다소 올라왔지만 일본의 골프 시장은 정체기, 아니 퇴보하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자네와 모모코의 등장 때문에 확 떴던 것 아닌가?”

“저는 큰 변수가 되었다고 확언할 수 없지만 모모코는 분명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죠. 저희 TPK 컴퍼니의 사업은 뜸하던 골프계에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라고 판단한 이들이 많은데, 거기에 발을 담그고 싶은 자가 있는 것 같아요.”

“경쟁이 아니라 끼어들고 싶다는 건가?”

“네. 우리의 이름값에 덕을 보겠다는 것 같은데, 굉장한 오산이죠. 경영은 그렇게 보이는 것에 좌우되는 게 아니거든요.”

미켈슨은 상대가 누군지 알고 싶어 했다.

공정한 거래를 위해 법적인 조치를 취함은 물론 비합리적인 행태를 언론에 고발이라도 하겠다는 것인데, 필상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발표할 수는 없었다.

일단은 가상의 기득권 세력이 있다고 추정하고 그들이 가진 힘과 세력으로 새롭게 시장에 등장하는 소규모 사업체를 입맛에 맞게 길들이고 숟가락을 얹겠다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걸 용납하거나 굴복할 뜻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일본 시장 진출은 일단 포기하는 것으로 결정하죠.”

“포기?”

포기한다는 말이 굴욕적으로 느껴졌는지 미켈슨의 얼굴은 화를 참지 못해 붉으락푸르락 했다. 하지만 필상은 담담하게 자신의 구상을 밝혔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발표하지만 전략적 후퇴입니다. 우리 사업에 기대를 거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불순한 세력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으려면 호의적인 여론의 형성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냥 법적 조치를 취하는 게 편하지 않을까?”

“그렇게 만만한 세력이 아닐 겁니다. 증명하기도 쉽지 않을 거고 우리가 이긴다 한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가능성이 농후하죠. 어차피 우리는 외국인들이니까요.”

외국인이라는 말에 미켈슨도 일단 한숨 물러나 여러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담당한 지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크게 실망한 것 같았다.

하지만 사업을 감정으로 할 수는 없지 않겠나.

“사업을 포기하겠다는 발표를 하면 기자들은 당연히 그 이유를 캐물을 겁니다. 그때가 중요하죠.”

“아! 놈들의 존재를 그렇게 들춰내 망신을 주자는 건가?”

“아닙니다. 그래서는 정말 사업을 접어야 할 겁니다. 사업 포기 발표를 시작으로 추후 일본투어에 참가하지 못할 것 같다는 뉘앙스를 풍겨야 하지요. 그건 제가 적절히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하하.”

필 미켈슨과 필상이 TPK 컴퍼니와 관련된 기자회견을 한다는 연락에 수백 명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현재 개최되고 있는 투어 대회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비중이 크다고 판단했는지 준비했던 인터뷰 룸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언론들이 관심을 드러냈다.

필상과 미켈슨, 그리고 이 대표가 등장하자 엄청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대회 출전을 위한 것도 아닌데, 굉장히 이례적인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인지도도 높지만 TPK의 사업 개시에 거는 골프계의 기대치가 얼마나 높은지도 반영된 현상이라고 생각되었다. 그걸 감지한 필상의 뇌리는 더욱 냉철하게 빛났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실 줄 모르고 너무 초라한 장소를 택해 사과의 말씀부터 드립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짧게 끝낼 것이니 조금만 양해를 구합니다.”

-내용이 알차다면 좁은 건 괜찮습니다. 하하하!

어느 한 기자가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훈훈하게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이미 준비했던 선물을 하나씩 돌린 터라 더욱 분위기는 훈훈했다.

하지만 정색한 필상이 잠시 뜸을 들이고 꺼낸 첫 마디에 기자들은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많은 분들이 호응하고 응원해 주셨지만 아쉽게도 사과의 말씀부터 올려야 할 것 같아 송구합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시죠?

“여러 모로 노력을 기울였지만 저희는 골프장 인수에 실패했습니다. 임대해서 사업을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인수에 실패하다니요?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 것이다.

호기롭게 여러 사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TPK 컴퍼니가 자본력이 부실하다는 생각은 하기가 어려웠다.

그보다 먼저 든 생각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시장의 진입 장벽이 너무 높은 건 아닌지에 대한 추론이 가능했고 그것도 희박한 가능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골프 사업이 농수산물처럼 정치권이 법으로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어 규제하는 사업도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에 대해 너무도 잘 아는 몇몇 기자들은 서서히 감을 잡고 있었다. 또한 묘한 기류가 형성된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기자들도 있었다.

“안타깝지만 저희들의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시장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 없이 경솔하게 사업을 하겠다고 발표한 것부터 사과를 드리며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한 기자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발표하기로 한국과 일본, 태국에서 사업을 개시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일본은 접고 태국과 한국에 집중하겠다는 것인데, 그건 모두의 기대와 한참 어긋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아시아 최고 시장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그들은 최근 코리안 투어의 급격한 성장을 보며 불안하던 차였다. 그런데 ‘일본 패싱’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게 만드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좀 더 구체적인 어려움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대체 왜 골프장 인수에 실패했고 사업을 포기하시는 것인지, TPK가 운영할 코스에 대해 크게 기대하던 골프팬들을 납득시킬 만한 사유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 들어왔다.

잠시 숨을 고른 필상은 이때야말로 공격의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방법이 최상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왜냐면 일본 시장을 포기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희의 역량 부족 때문입니다. 상세한 내용을 다 밝히지 못하는 것에 대해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이번 일로 인해 실망하는 분들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굳이 자신의 입을 통해 꺼낼 필요는 없었다. 그건 기자들이 알아서 취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일어서려던 찰나, 다른 화제가 불쑥 튀어나왔다.

-최근 JGTO 출전을 전혀 하지 않는데, 일본 투어도 같이 포기하신 겁니까?

질문한 기자의 얼굴을 확인한 필상은 굉장히 좋지 못한 느낌을 받았다. 호의적이지 않은 정도를 넘어 반감이 전해졌다.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고 판단한 필상이 그냥 나가려 하는 순간, 참고 참았던 미켈슨이 폭발했다.

이건 의도한 설정이 전혀 아니었다.

“뒤에서 되지도 않는 험담이나 늘어놓는 일본 투어에 미스터 퍼펙트가 왜 참가해야만 하는 겁니까! 도대체 일본 골프계는 누구를 위해 사업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내용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게 정제되었지만 침까지 튀기는 어투와 얼굴 표정은 굉장히 공격적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분노가 여과 없이 표출된 것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기자들 앞에서 흥분하는 것은 좋은 먹잇감이 되는지라 필상은 얼른 그를 만류하고 인터뷰 룸을 벗어났다.

그 정도 언급은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본인의 입으로 뱉었다면 여론이 나뉘겠지만 미켈슨이 말했기 때문에 이제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내가 혹시 너무 심했나?”

“아닙니다. 제 속이 다 후련 했습니다.”

“하하하! 기자들 표정을 보니까 우리가 의도한 방향대로 흐를 것 같던데?”

“그건 좀 더 두고 봐야 합니다. 우리 사업에 수저를 얹으려는 기득권 세력과 연계한 언론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골프팬들의 여론에 따라 움직일 기자들도 적지 않다는 것에 희망을 겁니다.”

TPK에 대해 아예 관심도 없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크든 작든 기사화되면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고 일부 열성팬들은 추적할 것이다.

게다가 필상의 경기 모습을 일본 필드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확정되지 않은 사실에 분노할 팬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네는 누가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알고 있지?”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아직 접근해 오지도 않았는데.”

“접근해 올 사람이 있다는 투로 말하는 것 보면 배후의 인물이 있다는 거잖아. 그러지 말고 나한테도 귀띔을 좀 해 줘. 어찌되었든 일본은 내가 사업을 할 영역이잖아.”

필상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구체적인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누군가 그런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설명을 보탰다.

어차피 다음 날 미국으로 함께 떠나면 당분간 일본에서의 일은 접어 둘 것이기 때문에 그의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 주려고 일본 시장의 특수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런데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 쉬려던 차에, 스마트폰이 울어 확인했는데 식별되지 않은 번호가 찍혔다.

“설마?”

그새 인터뷰 내용이 기사화된 것은 확인했다.

하지만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벨이 울리는 순간에 그와 관련된 일이라는 느낌이 전해졌다.

흥미로운 것은 스마트폰을 집어든 필상이 아예 전원을 꺼 버리고는 그냥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아무리 합리적인 타협을 가상한다고 하더라도 감정적인 충돌이 생길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일에 가장 큰 힘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여론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했다.

당장 바쁘게 움직일 이유가 하등 없고 먼저 움직이는 측이 아쉽다는 의미였다. 때문에 기다리면 더 좋은 거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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