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84화 (184/354)

184.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이런 개망신이 있나!”

“흥분을 좀 가라앉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괜찮아.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곁을 지나가던 문 프로는 멋쩍은지 괜히 투덜거렸다.

본성이 맑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긴말을 던지면 오히려 기분이 상할 수도 있어 걱정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필상의 3번 우드 티샷은 정확히 페어웨이를 갈랐다. 298야드의 거리는 팬들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남은 거리는 내리막을 감안해 188야드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필상은 넉넉하게 6번 아이언을 잡았다.

샤아악!

타구음이 없을 리 만무하지만 느낌이 그랬다.

정확한 임팩트가 가해진 타구는 컨트롤 샷의 진가를 극명하게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그린을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다소 긴 것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홀컵 바로 앞 3m 우측에 떨어진 타구는 크게 한 번 튕긴 뒤, 경사를 타고 슬슬 홀컵 방향으로 굴렀다.

-이야! 지금 저 백스핀 먹는 거 보셨죠?

-네. 저런 먼 거리에서 공을 쩍 세우는 것은 보통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스핀 때문에 제자리에 멈추듯 튕긴 겁니다. 물론 관성에 따라 구를 수밖에 없지만……. 어! 어!

-이야! 진짜 아깝네요.

보기보다 라이가 심한지 끝에서 너무 심하게 도는 바람에 아깝게 홀컵 옆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관전하던 모든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자신도 모르게 열렬한 물개 박수를 쏟아 냈다. ‘이래서 공 프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기가 막힌 샷이었다.

“들어갔으면 게임 오버인데, 아쉽네요.”

“버디만 잡아도 충분한 홀이야. 더도 말고 1타만 더 줄여도 안정권이라고 봐야지.”

“그렇기는 하네요.”

10번 홀까지 완벽하게 따라잡았던 문 프로가 결국 드롭을 하고 4번째 샷으로 그린에 올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라이가 쉽지 않아 결국은 더블보기를 하며 자멸했다.

-문경주 프로, 정말 아쉽게 됐네요.

-기량이 부족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이번 홀 플레이는 정말 아쉽습니다.

-파만 기록해도 괜찮은 홀인데, 머릿속에 이미 버디를 그렸던 것 같죠?

-프로라면 최고의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든 실수할 수 있는데 이후의 대처가 어설펐습니다.

-2004년에 데뷔해 투어 15년차인데도 역시 우승경험이 한 번뿐인 것이 약점으로 작용한 것 같군요. 그러고 보면 공 프로의 승부사 기질은 타고난 것 같습니다.

-성격부터 골프를 잘 칠 수 있는 기질인 것 같습니다. 흥분하거나 무리한 샷을 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으니까요.

간절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지만 골프투어의 경쟁은 어디든 숨이 막힐 정도로 치열해서 절실함만으로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톱 10에 든 횟수를 비롯해 다양한 지표로 평가를 하지만 거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우승자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험난한 과정을 버티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10년 이상 발버둥을 쳐도 우승 한 번 못 해 보고 은퇴하는 선수들이 부지기수다. 대회도 많지 않지만 매년 다승을 하는 선수들이 있어서 직업으로 삼기 위한 생활비조차 충당하지 못하는데 어찌 버틸 수 있겠는가!

-공 프로를 제외하면 다들 타수를 지키기에도 버거워하는 것 같습니다.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는데요.

-그렇습니다. PGA 챔피언십을 거머쥔 공 프로가 출전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스러웠고 실제 첫 라운드가 끝난 뒤에는 우승을 꿈꾸는 선수들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기회가 생긴 거군요. 뜻하지 않은.

-네. 그도 인간인지라 좋은 날도, 컨디션이 아주 나쁜 날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두와 다닥다닥 붙으면서 한 번 해볼 만하다는 분위기였습니다.

-그게 되는 것 같기도 했죠?

-네. 이러다 정말 공 프로가 우승을 놓치는 건 아닌지, 저부터도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필상의 실력은 이제 아시아를 넘어 최고의 무대인 PGA 전문가들도 엄지를 추켜세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문에 한국 오픈을 우승함으로써 코리안 투어 메이저 연승을 이어가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엄청난 흥행과 더불어 골프가 다시 한 번 큰 붐이 일 것이라는 기대도 생겼다.

그런데 만약 다른 선수들이 역전을 한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했다. 그만큼 한국 남자 골프의 잠재력이 높게 증명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은 결코 녹록한 선수가 아니었다.

PGA 챔피언십에서처럼 월등한 기량으로 상대를 압도하지는 못했으나 묵묵히 자신의 샷을 하는 모습에 경쟁자들이 제풀에 꺾이는 모습은 진정한 강자의 면모였던 것이다.

“드라이브.”

“바로 가려고요?”

“응. 이제 다들 놔주려고.”

까다롭게 설정된 12, 13, 14번 홀을 차분하게 파로 마무리하는 동안 경쟁자들은 오히려 타수를 잃었다.

공동 2위인 박상현과 김경태, 최민철이 3타 차로 멀어졌지만 드라이브를 잡은 필상은 쇄기를 박기로 작정한 것이다.

414야드의 파 4홀이지만 내리막이라서 거리에 대한 부담은 없다. 더욱이 랜딩 에어리어 페어웨이가 제법 넓어 티샷 실수만 없으면 세컨샷을 과감하게 붙여 버디를 잡는 선수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드라이브를 들고 티 그라운드에 올라선 필상의 에이밍을 본 갤러리들은 갑자기 환호하기 시작했다.

-어허! 1온을 노리는 건가요?

-완전히 핀 방향으로 서지는 않았습니다. 장타를 날리면 적어도 그린 앞의 페어에 떨어지지 않을까 싶은 방향입니다.

-듬성듬성 솟은 나무를 피하기 위해 페이드 샷을 준비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4개 홀이 남은 지금 상황에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적절한 해설이었으나 그 말이 무색한 티샷이 날았다.

행여 부딪칠지도 모를 나뭇가지들을 피한 방향으로 치솟은 타구는 홀의 생김새 그대로 페이드를 먹기 시작했다.

풀스윙을 했지만 그다지 강하게 때린 것 같지는 않았으나 하염없이 솟구친 타구는 어마어마한 거리를 날아 결국 그린 앞 페어웨이 정중앙에 떨어졌다.

“고! 고!”

쉽게 그린까지 올라갈 것 같지는 않았으나 지면을 때린 공은 예상을 깨고 힘차게 구르더니 급기야 그린에 올라섰다.

“휘어야 하는데!”

“휠 거야.”

그린의 경사는 중앙이 높게 솟구친 형태였고 최고점을 넘으면 좌측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구조였다. 때문에 겨우 그린에 오른 공은 미처 고지를 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휠 거라는 필상의 대답을 들은 미사키는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믿기 어렵지만 그럴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중독된 건가?’

미사키는 필상을 처음 만난 뒤로 늘 흠모하고 존경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그의 행동, 언사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신을 느끼며 이건 마약보다 강한 중독 증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싫지 않다.

왜냐면 그 자랑스러운 필상의 곁에는 늘 자신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비록 남녀 관계는 아닐지라도 그보다 더 위대한 골프 선수로서 세상에 우뚝 솟을 때 자신이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 뿌듯했다.

팅!

-아이고! 저게 그냥 콱 들어갔어야 하는데!

-하하하. 앨버트로스를 볼 뻔했습니다. 조금만 약했더라면 쏙 들어갔을 수도 있는데 정말 아깝습니다.

-힘이 약하면 아예 언덕을 오르지도 못했을 것 같은데요? 경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나요?

-그게 맞지만 너무 아쉬워서 그러죠. 하하하.

한국 오픈에서는 거의 장타를 날리지 않았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장타를 날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고 2, 3라운드에서 넉넉하게 앞서지 못해 차마 그럴 기회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응원하러 찾아온 열성팬들을 위해 적당한 기회를 엿보던 필상은 3타 차로 앞선 상황이 되자 팬 서비스를 감행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피곤하지 않아?”

“왜요?”

“난 피곤이 몰려오는 것 같아서.”

“안 돼요. 아직 3홀이 더 남았단 말이에요. 일단 마지막 퍼팅까지 집어넣고 쉬든지 말든지 힘을 내라고요.”

“알았어. 이제 승부는 끝났다는 의미였어.”

“그래도 집중하셔야 해요. 골프와 선거는 끝나 봐야 안다잖아요.”

“선거?”

“몰라요. 그렇게들 말하더라고요. 정치인들이.”

“일본도 그런가?”

마지막 홀이 다가올수록 긴장은 더 고조된다.

하지만 이글 기회를 만든 필상은 이제 마음이 놓였다. 매번 쉬운 대회는 없지만 이번 대회는 아주 각별한 경험을 했다.

의도치 않게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더라도 우승할 수 있는 해법을 찾을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고, 대회 중에는 절대 술을 입에 대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래 가급적 음주는 삼갔지만 인생의 큰 즐거움 하나를 잃은 기분이었다. 물론 대회 기간이 아닐 때는 상관이 없어 그건 다행이었다.

그린에 도착한 필상은 라이를 살필 여유가 많았다. 동반자들이 2온에 성공했지만 필상보다 더 멀기 때문이다.

“와아아아!”

“이글! 이글!”

“공필상 파이팅! 최고다!”

2.3m 이글 퍼팅에 성공하는 순간, 마치 우승한 것처럼 팬들의 비명 섞인 환호성이 그린 주변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건 곧 현실로 바뀌었다.

김경태, 최민철이 4타 차로 추격했지만 16, 17번 홀을 파로 막아 내는 순간, 우승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왜냐면 570야드의 파 5, 마지막 홀마저 유틸리티로 264야드, 7번 아이언으로 187야드를 보낸 필상은 120야드를 갭 웨지 컨트롤 샷으로 또 한 번 버디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차례를 기다렸다가 챔피언 퍼팅을 성공한 필상은 정말 많은 선수들의 요란한 축하 인사를 받아야만 했다.

“미사키. 바람막이 좀 주세요.”

“아. 네.”

얼마나 많은 샴페인을 퍼부었는지 필상은 쫄딱 젖었다.

배가 부른 모모코를 보호하느라 사양치 않고 고스란히 맞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필상을 염려한 모모코가 얼른 얇은 점퍼를 부탁해 걸치고 나서야 팬들에게 인사할 수 있었다.

모모코, 미사키와 나란히 손을 잡고 돌아가면서 좌중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은 좀 특이하기는 했다.

좌우에 일본 여자가 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은 물론 팬들도 그것까지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런데 시상식을 마치고 집으로 복귀할 때 모모코가 기사 하나를 보여 줬다.

“일본 골프 채널 기사?”

“네. 말도 되지 않지만 이런 기사도 있다는 것은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일단 읽어 볼게.”

기사 타이틀부터 거슬렸다.

[개막전 우승 이후 일본을 찾지 않는 미스터 퍼펙트.]

사실이지만 상당한 왜곡이 담겨 있었다.

필상에게 기회를 준 일본투어를 너무 소홀히 한다는 서운한 감정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거기서 한참 더 나갔다.

한국에서 인기를 얻고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한 필상이 일본을 철저히 이용했다는 씁쓸한 내용을 여과 없이 전했다.

특히나 일본 골프계의 여신을 몰래 훔쳐 가 골프 열기를 시들게 만든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언급도 서슴지 않았다.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글이에요.”

“과연 그럴까?”

“그럼요. 상식을 가진 대다수의 골프팬들은 이런 편파적인 보도에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겠지.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앞에 나서서 선동하는 자들이잖아.”

필상이 주목한 것은 그것이다.

일본 내에서의 혐한 분위기가 날로 고조되고 있는 와중에 그나마 스포츠에서는 인종이나 국적에 따른 차별을 철저히 배재하려는 노력이 존재한다.

하지만 비뚤어진 시각을 가진 기득권 세력이라면 없는 꼬투리도 만들어 수작을 부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사토시. 그 양반이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사실 2개월 전에 있었던 JGTO 개막전 우승 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자신에게 열광하는 팬들에게 고마워 늦은 시간까지 사인회를 열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기사가 뜨는 것을 보면 누군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숲을 보지 않고 나무만 보고 놀란 것일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일단 상황을 유보하는 것이 적절했다.

어차피 일본도 TPK 컴퍼니의 주요 사업처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불필요한 잡음을 내지 않고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바랐다.

[메이저 4연승. 공필상 프로, 새로운 시대를 열다.]\

신한동해오픈, 매경오픈, SK텔레콤 오픈에 이어 내셔널 골프 대회인 한국오픈까지 거머쥐자 그 가치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 언론이 없었다.

일부 채널은 특별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해 그랜드슬램을 위해 하나 남은 KPGA 선수권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물론 커리어 그랜드슬램이다.

신한동해오픈은 지난해에 우승했기 때문이다. 만약 KPGA 선수권에 이어 다시 한 번 동해오픈을 우승한다면 프로투어 역사상 최초로 캘린더 그랜드슬램이 작성되기 때문에 벌써부터 군불을 지폈다.

“오빠가 KPGA 선수권이 끝나면 멀리 도망갈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출전 횟수가 줄기는 하겠지. 미국을 오가는 시간도 아깝지만 체력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으니까.”

“그리고 일본투어도 좀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아요. 난 오빠가 일본사람들한테 조금만 더 배려해 줬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골프와는 별개로 역사적인 앙금이 남아 있고 최근 우경화가 가속되고 있는 일본 정치계는 치가 떨릴 지경이다.

하지만 모모코와 결혼한 이상, 더 많이 배려하고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아이는 외가가 일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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