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83화 (183/354)

183. 극과 극

프로들도 서로 친한 선수들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같은 대회에 출전하면 자신의 경기에 집중하느라 다른 선수의 성적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다. 또한 관여할 수도,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수도 없기에 남는 시간에는 주로 연습을 하지, 타 선수의 시합을 보러 가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나 얼굴이 잘 알려진 필상과 같은 선수는 팬들의 주목을 받기 때문에 좀처럼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걸 알지만 이대로 지켜볼 수는 없었다.

규정을 어기는 뭔가를 할 수는 없지만 이미 최악의 상황을 겪고 있는 그에게 작으나마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었다.

“뭐야? 레이 업을 안 한 거야?”

티샷이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들어가 2온을 노릴 수 없다고 들었다. 그런데 미켈슨은 반대편 벙커에 서 있었다.

이미 세컨샷을 했는데 드로우 샷을 구사하려다 나무 둥치에 맞은 타구가 거꾸로 튀어나와 페어웨이를 건너간 것이다.

“이제라도 그린에 올리면 좋을 텐데요.”

“쉽지 않아. 붙이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넉넉하게 쳐서 올리는 게 나아.”

“트러블 샷의 대가잖아요.”

“그게 지금은 함정이 될 수도 있지.”

그랬다.

이제라도 너무 잘 붙이려고 힘을 조절한 것이 문제였다.

그린에 올라갔더라면 많이 굴러도 오르막 퍼팅이 남을 텐데, 아쉽게도 공은 그린에 올라가지 못한 채 오히려 러프 아래로 굴러 내려왔다.

3온에도 실패한 미켈슨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주변을 둘러보지도 못했다. 필상이 일부러 훤히 보이는 곳에 서 있었는데도 아예 갤러리들에게 눈을 맞추지 않았다.

그나마 숏 게임의 달인답게 21야드 칩샷은 기가 막히게 붙였으나 이제라도 잘 막아 보기로 정리해야 하는데 1m 퍼팅을 놓치고 말았다.

“저걸 다 놓치네요!”

“그만 돌아가자.”

“네.”

차라리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그를 위해 좋을 것 같았다.

이 홀에서 더블보기를 기록한 메켈슨의 오늘 성적은 무려 6오버다. 예선전 합계 5오버이기 때문에 적어도 3타 이상을 줄여야 하는데 남은 홀은 4개, 그나마 쉽지도 않을뿐더러 이미 기세가 꺾였다고 판단한 것이다.

연습장에 돌아왔지만 괜히 신경이 쓰여 실시간 중계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지만 1타를 줄이는 것에 그쳐 결국 충격적인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잘됐어. 일본에 건너가 일이나 좀 하면 되지.”

“이 대표랑 통화했는데 내일 아침에 같이 움직일 수 있답니다.”

“아! 그래?”

안정된 플레이를 펼친 타이거는 오히려 4타를 줄여 톱 10에 진입했다. 하지만 호기를 부린 대가로 미켈슨은 한국까지 건너와 먼저 짐을 싸야 했다.

본인은 극구 괜찮다고 했지만 어색한 표정에 아쉬움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그래서 필상은 그날 저녁 함께 저녁을 먹으며 와인 잔을 같이 기울였다.

그 혼자 마시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잔만 하지?”

“아닙니다. 와인이 어디 술인가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술에 찌들었고 실직한 뒤에는 알코올 중독 증상까지 경험했던 필상의 주량은 평균을 훨씬 웃돈다.

때문에 편안하게 같이 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숙소로 돌아온 필상은 연습을 포기하고 일찍 잠을 청했다.

미켈슨을 위로하기 위해 마셨는데 모처럼 알딸딸한 기분이 가시지 않아 모모코와 한참 통화한 뒤에는 오랜만에 성호와도 통화를 했다.

예상과 달리 고전했던 녀석이 급기야 10차 대회에서 우승하며 일단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출발이 늦었기에 아직 코리안 투어에 직행할 수 있는 포인트가 많이 부족했다.

“더도 말고 2번만 더 우승해.”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고요.’

“누가 몰라! 하지만 그 정도도 못할 것 같으면 골프 때려치워야지!”

‘아! 진짜! 알았다고요. 연습해야 하니까 그만 끊어요.’

“어라? 이제 막 간다 이거지?”

‘필 형 짐 싸는 거 보셨죠? 형도 기회 놓치지 말고 마무리 잘하세요. 저도 이를 악 물고 칠 거니까.’

“알았어, 인마!”

성호의 단점은 두루뭉술한 성격이다. 지나치게 긍정적인 것이 승부에서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을 누차 강조했는데, 다행히 정신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복잡한 과정을 생략하기 위해서는 상금 순위 5위 안에 들어야 하는데 그 경쟁이 정말 치열했다. 그러나 필상은 녀석이 해낼 것이라고 믿었다.

“프로님! 일어나세요.”

누군가 흔들어 깨워 겨우 정신을 차렸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7시가 넘었다. 평소 6시만 되면 알람 없이도 저절로 눈이 떠지는데 기다리다 못한 미사키가 직접 들어와 깨운 것이다.

“샤워하고 내려갈 테니까 식당에서 보자.”

“근데 혈색이 별로 안 좋아요.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야. 먼저 내려가서 식사 주문해. 난 해장국.”

아닌 게 아니라 머리가 찌근거렸다.

와인 몇 잔 마셨다고 이런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차가운 물로 샤워하며 숙취를 떨치고자 했다. 하지만 해장국을 먹어도 시원찮아 아침 연습을 생략한 필상은 숙소로 돌아와 토납을 해야만 했다.

-오늘 공 프로가 유난히 안전한 공략을 하는 것 같지 않나요?

-그런 것 같습니다. 무빙 데이라고 딱히 세팅을 어렵게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아무래도 컨디션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공 프로를 걱정하는 것은 사치겠죠?

-하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토납을 했음에도 컨디션은 회복되지 않았다.

술이 자신에게는 아주 치명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반을 겨우 이븐 파로 마친 필상은 후반에 2타를 잃으며 정말 오랜만에 18홀 2오버파를 기록했다.

-9 공필상

-8 박상현, 문경주, 김경태

-7 타이거 우즈, 김우현, 김시우, 최민철

쟁쟁한 선수들이 바짝 추격했다.

3라운드처럼 플레이를 하면 무조건 역전될 것 같은 심각한 경기력을 보였기에 저녁도 생략한 채 다시 숙소로 향했다.

연습보다 중요한 것이 불완전한 내력을 온전히 다스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통해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건 앞으로 술을 입에 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금주(禁酒)는 큰 핸디캡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쉬워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펼쳐졌다.

“오빠!”

너무도 귀에 익은 음성, 모모코가 나타난 것이다.

아마도 식구들과 3라운드 경기를 보며 걱정스러워 찾아온 것 같다. 그녀도 필상이 컨디션을 되찾기 위해서는 명상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일단 인사는 나눠야 했다.

“몸도 무거운데 뭐 하러 왔어?”

“그럼 저 그냥 갈까요?”

“아니야. 내가 명상을 하면 혼자 심심할 거 같아서 그러지.”

“뽀뽀 한 번 해 주면 군소리 없이 있을게요.”

혹시 왜 왔느냐는 말에 삐치지 않을까, 그 말을 뱉은 후 뜨끔했는데 모모코는 산달이 다가와도 여전히 성격이 좋았다.

덕분에 그녀와 사랑이 담뿍 담긴 애정 행각을 잠시 즐기고는 편안하게 토납에 집중할 수 있었다.

“공 프로, 이제 괜찮아?”

“네.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침 일찍 연습장으로 나섰다.

모모코와 함께 여는 아침이 그 어느 날보다 싱그러웠다. 그런데 타이거는 벌써 연습에 매진했는지 땀방울이 맺혔다.

모모코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그는 아직도 걱정이 가시지 않았는지 컨디션부터 확인했다. 물론 필상은 하루 꼬박 고생했던 위기에서 벗어난 뒤였다.

“그저께 밤에 필과 같이 마신 술 때문이지?”

“아닙니다. 최근에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많았나 봅니다.”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왠지 거북해 그렇게 둘러댔다.

물론 필상이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잘 알고 있는 타이거는 아무리 바빠도 쉬엄쉬엄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마침내 최종 라운드가 열렸다.

필상은 관록의 강자 박상현과 예상을 벗어난 선수, 문경주와 동반 라운드를 펼쳤다. 박상현 프로는 말이 필요 없는 8승의 강자로 체격은 작지만 정교한 샷과 영리한 코스 공략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문경주 프로는 신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선수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박상현 프로보다도 선배였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공 프로. 우리 오늘 즐겁게 칩시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박 프로와는 안면이 있었지만 초면인 문 프로는 전혀 정보가 없는 것이 미안해 더 깍듯이 대했다.

그런데 그는 상당히 유쾌한 사람이었다.

182cm, 77kg.

대기 중에 얼른 검색해 기본 정보부터 확인했다.

신체 조건이 탁월해 보였고 파이팅이 넘치는 모습은 쟁쟁한 선수들과 챔피언 조에서 경쟁을 하면서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용호상박이네요. 하하하!

-네. 공 프로야 너무 당연해 보이지만 그런 위상을 지닌 선수와 플레이를 하면서도 자신의 플레이에 집중하는 모습, 정말 보기 좋습니다.

-이러다 공 프로가 역전당하는 것은 아니겠죠?

-누가 우승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PGA 경기라면 모를까, 적어도 코리안 투어 중계에서는 공평한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제가 자꾸 그걸 잊어버리네요. 시청자 여러분이 이해해 주시면 좋겠고 다들 멋진 경기를 펼치며 선의의 경쟁을 하면 좋겠네요.

그도 그럴 것이 필상은 6번 홀까지 3타를 줄였다.

하지만 박 프로는 똑같이 따라왔고 버디 2개 이후 주춤했던 문 프로가 7번 홀에서 기적 같은 샷을 보여 줬다.

214야드 파 3홀인데, 그린까지 가는 길이 험악하다. 일단 커다란 호수가 우측을 가득 메웠고 앞에서 우측으로 돌아 나가는 가드 벙커는 턱이 높아 티 박스에서 보면 핀에 붙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어려운 홀에서 문 프로의 티샷이 그냥 홀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입이 쩍 벌어질 홀인원을 기록한 것이다.

고급 승용차가 걸린 탓에 핀의 위치도 만만치 않았건만, 자신 있게 날린 타구가 환상적인 런을 보이며 그린 위에서 사라지는 순간, 갤러리들만 함성을 지른 것은 아니었다.

“좋아! 해냈어! 하하하…….”

“나이스 샷!”

겨우 그린에 올린 필상은 티 박스에서 내려오는 그를 기다렸다가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필상도 공식 경기에서 홀인원을 기록한 적은 있지만 이런 길고 부담스러운 홀에서는 핀을 바로 노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문 프로는 승부를 걸고자 했는지 혼신의 힘을 담았고 그 집념은 어마어마한 기록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필상이 일부러 기다려 축하를 건네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진짜 고맙네. 공 프로.”

“아주 과감하고 멋진 샷이었습니다.”

“소 뒷발질에 쥐 잡은 거지, 뭐.”

“홀인원에 각별한 재주가 있나 봅니다. 이틀 간격으로 홀인원을 하신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연습 라운드였어. 지금처럼 실전에서 터져야 좋은데 말이야. 하하하.”

버디를 잡지 못한 필상은 졸지에 공동 선두를 허락하고 말았다. 정상 컨디션이 아닌 탓이지만 이렇게 최종 라운드에서 바짝 쫓아온 선수들이 없었기에 격한 흥분이 고조되었다.

보란 듯이 맞불을 놓고 싶지만 꾹 누를 타이밍이라고 판단한 필상은 모처럼 팽팽한 승부를 즐기면서 무리한 스윙은 삼가 했다.

-드디어 첫 번째 승부처에 도착한 건가요?

-502야드의 파 4홀은 장타자에게 유리하지만 도처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어서 장타가 능사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전체적으로 홀이 내리막 경사라서 정확하게 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거군요.

-물론입니다. 평상시에 아마추어들은 파 5로 플레이를 하는 홀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거리를 의식해 힘이 들어가면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누가 더 잘 참는지, 누가 더 정확하게 보내는지 두고 보면 알 수 있겠네요. 하하하.

늘 결과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홀이다.

티샷이 정확해도 그린을 노리려면 커다란 호수를 지나야 하고, 해저드와 깊고 작은 벙커에 포위된 탓에 정확한 거리 컨트롤이라는 두 번째 난관을 넘어야 한다.

“어어! 너무 당겨진 거 같아요.”

“벙커에 잡히겠네.”

아너로 나선 문 프로의 티샷이 확 감기며 페어웨이 좌측 벙커에 빠졌다. 벙커가 없었다면 해저드에 들어갔을 방향이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벙커에 빠졌지만 샷을 한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같은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그는 인지하지 못했다.

팍!

넘치는 파이팅과 집중력으로 잘 버티며 필상과 어깨를 나란히 해 왔건만, 표정이 급변한 문 프로의 벙커에서 2온을 노리던 타구가 턱에 맞고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필상이 판단컨대 214야드 벙커에서 얼마든지 4번 아이언으로 그린을 노릴 수 있다. 하지만 살짝 뒤땅이 나면서 공이 뜨지를 못했다.

문제는 엉뚱한 방향이 호수 쪽이라는 점이다.

눈이 좋은 필상도 물방울이 튀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러프에 잡혀도 정상적인 스탠스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물 쪽으로 굴러 내려갔죠?”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드롭해야 할 거야.”

“그게 그거네요.”

애초에 티샷이 감겼을 때,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마지막 홀이 다가올수록 긴장감이 고조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승하려면 상황을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가 중요했다.

남이 대신 쳐 준 샷도 아닌데, 자신이 만든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좋은 스윙은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침착하게 집중했더라면 그린에 올릴 수도 있었는데 진한 아쉬움이 남는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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