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82화 (182/354)

182. 한국 오픈

“동업이라니요?”

“자신이 골프를 아주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게 자신의 비서를 보낸 거였던 거군요.”

“사토시가 대표님에게 사람을 보냈습니까?”

“네. 사업 제안서를 가지고 왔더라고요. 하지만 사토시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이건 아니다 싶어 일단 거부했어요.”

거부했다는 말을 꺼낸 이 대표의 표정에 그녀가 느낀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녀가 가진 선입견은 너무도 분명해 보였다.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사람.

“그 어떤 것도 확정된 것이 없는데 지나치게 부담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또한 사람은 겪어 봐야 아는 법이죠. 풍문이 좋지 않더라도 제가 느낀 사토시는 악인이라고 단정 짓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보다 자세하게 알아볼 게요. 편견일 수 있으니까.”

“네. 당장 무엇을 함께할 것도 아니고 당장 우리 일과 연관된 것도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시죠.”

“그럴게요. 하지만 그가 동업을 제안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일본에서 어떤 사업을 할지 알고 있는 것 같아 보다 면밀한 조사가 필요할 것 같아요.”

솔직히 사토시에 대한 반감은 없었다.

찜찜한 부분이 있지만 오히려 동질감을 느꼈고 그와 속 깊은 대화를 할 의사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 대표의 입을 통해 들은 내용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스스로를 비하하듯이 소개했던 겸손함과 전혀 다른 악명을 어찌 해석하는 게 옳은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만약 일본 재계에 큰 영향력을 지닌 게 사실이라면 사업 파트너로서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그에게 씌인 좋지 못한 이미지에 대한 답이 없다면 곁을 내줄 사람은 아니었다.

이 대표에게 당부했듯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취한 후에 판단해도 늦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빌리 호셀이 인터뷰를 했어요.”

다음 날도 이 대표가 천안까지 내려왔다.

그가 가져온 소식은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필상을 위시한 TPK 사단이 기대하던 내용이었다. 빌리가 경기를 마친 소감과 함께 필상에 대한 언급을 꺼낸 것이다.

‘Mr. 퍼펙트의 눈은 신비할 정도로 정확했습니다. 골프 경력이 길지 않다고 들었는데 타고난 것인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한 것인지 제 스윙의 부족한 부분을 단숨에 짚어 내더군요.’

그렇게 시작한 증언은 믿기 힘든 해결책까지 제시했다고 말했다. 비록 그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 조언으로 인해 자신이 경기를 끝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 도움이 좀 되겠네요.”

“조금이 아닌 것 같아요. 벌써부터 미국 현지 사무실과 우리 회사까지 관련된 문의가 쇄도하고 있거든요.”

“대체 뭘 문의한단 말입니까?”

“프로 지망생들이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현역 투어프로 중에도 공 프로님의 원 포인트 레슨이라도 받을 방법이 없는지 문의가 들어왔어요.”

“서둘러야겠군요. 하하하.”

서두른다고 될 일은 아니다.

훈련 프로그램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표준화된 커리큘럼이 필요하고 그걸 가르칠 레슨 코치들을 고용해 가르쳐야 한다.

몸이 하나인 필상이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결국은 올해 말 오프시즌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탄력을 받을 명분이 생긴 것은 분명했다. 결국 기본 골격은 자신이 잡아야 하기 때문에 바쁜 일정을 더 쪼갤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 *

-날씨도 한국 오픈 개막을 축하하는 것 같죠? 선선하게 느껴지는 바람, 화창한 날씨, 그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습니다.

-날씨도 좋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쟁쟁한 선수들이 다 모였고 기라성 같은 세계 최고의 프로들도 초청되어 역대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는 현장을 보면 정말 가슴이 뿌듯합니다.

-타이거 우즈가 7:25에 출발했고 필 미켈슨도 방금 전에 10번 홀에서 티샷을 마쳤네요. 우리 공 프로는 12:03에 출발하기 때문에 PGA를 대표하는 두 선수의 경기를 관전하면서 한국 오픈이 열리는 우정 힐스의 멋진 코스들을 미리 감상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드디어 한국 오픈이 개막되었다.

나름 착실하게 준비했고 요즘 샷 감이 좋았지만 1부 티오프를 했던 타이거와 미켈슨은 겨우 체면치레에 그쳤다.

나란히 1언더를 기록하며 72명 중에 공동 19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대목은 전통의 강자들보다 젊은 루키와 오랫동안 잠잠하던 무명의 선수들이 대거 선두권을 형성했다는 점이었다.

“주홍철, 이승택, 한창원이 -5로 선두에 나섰어요.”

“아! 그래?”

미사키만 모르는 이름이 아니었다.

필상도 생소한 프로들인데, 그게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이후 어떤 경기를 펼치든 일단 리더 보드에 이름을 놀림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첫날부터 코스가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최근 몇 년 동안의 성적을 보면 두 자릿수 언더가 서너 명에 불과했던 코스니까 절대 방심할 수 없죠.”

“그럼 오늘은 안정되게 가나요?”

“일단은.”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그러나 한국 오픈이 지닌 무게감을 알기에 필상은 가장 안정적인 방법으로 우승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완벽한 경기력은 결국 일관되고 정확한 샷에서부터 출발한다. 때문에 경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모든 상념을 버리고 오로지 한 샷 한 샷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1번 홀은 오늘 428야드로 세팅되었어요.”

“드라이브.”

비교적 전장이 길지만 230야드를 지나면서부터 쭉 내리막이 이어지는 좌측으로 휘어진 도그 렉 홀이다.

평탄한 랜딩 에어리어를 노린 안정된 티샷을 구사하면 세컨샷 거리가 너무 길게 남아 어차피 장타를 때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언듈레이션이 극심한 다운 힐 라이에서 그린을 노려야 한다는 것인데, 드라이브를 잡은 이유는 그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티 그라운드에 오른 필상이 드라이브를 들어 좌측 나무숲을 가리키는 순간, 팬들의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어허! 바로 그린을 노리나요?

-저는 공 프로가 오늘 상당히 안정된 경기를 펼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곳은 낯선 미국이 아닌 그에게 열광하는 팬들이 많은 안방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런 공략을 즐겼었지요. 한 타 한 타 줄여 경쟁자들을 결국 숨이 막히게 만들어 압사시키는 전략, 동반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건 한 편의 예술처럼 느껴졌지요.

-그런데 이 홀의 레이아웃을 고려할 때, 장타를 갖춘 그라면 차라리 내리막이 끝나는 지점까지 보내는 것이 더 안정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리막이 대략 24야드, 그래도 결국 400야드는 보내야 하는데 첫 홀부터 저희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네요. 하하하.

정확한 허 위원의 분석이었다.

안전하게 가려고 230야드를 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어정쩡하게 330야드 가량 보낼 경우 라이가 좋다는 보장이 없다.

얼마나 구를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이상, 보다 가능성이 높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티 그라운드에서 가장 넓은 폭의 페어웨이를 제공하는 방향을 택했다.

400야드 지점, 온 그린을 노리는 과욕을 부리지 않은 이유는 필요 이상으로 잘 맞아 그린을 오버할 경우 벙커와 워터해저드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들 파 4홀 1온을 노리는 줄 알았다.

“와아아아! 굿 샷!”

정확한 임팩트를 동반한 스윙이 작렬했다.

맞는 순간, 보는 이들이 탄성을 터트릴 만큼 깔끔한 샷이 만들어졌다. 위험천만한 나무숲을 지나 쭉쭉 뻗어 나가는 타구를 보노라면 속이 다 시원했다.

하지만 기대한 만큼 장타가 터지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내리막 경사에 떨어진 공은 하염없이 굴렀다. 그제야 내리막 경사를 이용했음을 깨달은 팬들은 그린 우측을 향한 공의 방향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다.

이대로 구르면 그린이 아닌 벙커로 기어들어 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묘하게도 타구는 그린 앞 페어웨이 끝자락에 멈췄다.

-샷이 밀린 건가요?

-아닙니다. 제가 볼 때는 처음부터 그 방향과 저만큼의 거리를 본 것 같습니다.

-1온이 아니라면 굳이 장타를 때릴 필요가 있었나요?

-물론입니다. 아마추어 골퍼들만 다운 힐 라이를 어려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스탠스가 편치 못하면 뒤땅을 때릴 확률이 올라가고 탄도도 잘 뜨지 않아 거리를 조절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칩샷 어드레스가 편한 저 지점을 선택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너무 결과론적인 해설 아닌가요?

-기회가 되면 공 프로에게 직접 물어보시죠. 무리한 샷을 하는 것 같았지만 실은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던 겁니다.

허 위원의 강한 주장에 사족을 다는 이들은 없었다.

작정하면 1온을 못할 것도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확성까지 겸비한 필상이 애초에 안전한 샷을 하리라 예상했기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또한 29야드를 남긴 최적의 지점에 공이 멈춘 것도 그 해설에 힘을 보탰다. 1온을 해도 핀에 붙이기는 어려운 세팅이라서 버디만 낚는다면 이게 더 안전하다는 것에 동의했다.

“드라이브 티샷을 프로님처럼 이렇게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선수가 또 있을까요?”

“있어. 다만 장타 능력이 부족한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수단인 경우가 더 많기는 하겠지.”

“결국 제 자랑이시네요?”

“하하하. 그렇게 되나? 하지만 나 공필상이라고.”

미사키는 필상이 그런 말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의 세계에 입문한 지 이제 갓 1년이 지난 햇병아리라고 말할 수 있는 선수는 분명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확한 칩샷으로 버디를 엮어 낸 필상은 2번 홀부터는 안정된 경기 운영으로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다.

하지만 초반의 좋았던 기세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는 찰나, 연이은 3개 홀에서 파를 지키던 필상이 첫 파 5홀에서 또다시 375야드의 장타를 선보였다.

남은 거리 177야드를 7번 아이언으로 깨끗하게 그린에 올려 버리자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4야드 남짓한 퍼팅이 내리막에 더블 브레이크인데도 과감하게 홀컵에 쑤셔 넣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었다.

-안전한 공략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속은 다 챙기네요.

-하하하. 그렇습니다. 우정 힐스는 결코 만만하게 덤빌 코스가 아니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공 프로의 취사선택은 아주 정확한 것 같습니다.

-버릴 홀과 취할 홀을 구분한다는 말씀인가요?

-네. 예전 대회들의 기록과 비교해 보면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핸디캡이 아래인 홀은 여지없이 공격적인 공략을 가해 타수를 줄입니다.

-예외는 있네요. 파 5홀.

-아! 그건 그렇죠. 대부분의 롱홀은 기회임과 동시에 위기가 될 수도 있는데, 핸디캡이 높아도 장타를 갖춘 공 프로에게는 좋은 먹잇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 팬들은 아쉬워했다.

PGA 챔피언십에서 보여 준 어마어마한 장타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프에 대한 이해가 높은 이들은 아주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남겼다.

-8은 결코 가벼운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보다 더 좋은 기록을 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무리수를 둬야 할 입장이 아닌 것을 이해한 것이다.

오히려 안정적인 플레이를 하면서 착실하게 강자의 이미지를 굳히는 모습이 더 든든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너무하는 거 아냐?”

“너무한 사람은 두 분이죠. 성적이 대체 왜 그런 겁니까?”

“윽!”

저녁을 나누는 자리였다.

타이거는 잠잠했지만 미켈슨은 3타 차 단독 선두에 오른 필상의 독주가 배가 아프다며 노골적으로 싸움을 걸어왔다.

물론 저변에 깔린 감정은 호의이고 농담이라는 것을 알지만 필상이 역공을 가하자 미켈슨은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그 대목에서 타이거의 점잖은 고백이 나왔다.

“코스를 너무 만만히 본 것 같아.”

“연습 라운드 때 누차 강조했는데, 조절이 잘 안 되었군요.”

“변명의 여지가 없지.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내일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 같아.”

타이거는 오늘 이글 1개, 버디 4개를 엮어 냈다.

절대 부족한 성적이 아니지만 보기 2개, 더블보기도 1개 기록하며 롤러코스터 라운드라고 볼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침착하고 안정된 공략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고 피력했다.

그러나 미켈슨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아직 한국의 오밀조밀한 코스와 잔디에 적응되지 않았을 뿐이지, 얼마든지 더 공격적인 공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홀의 전장이 대체적으로 그에게는 만만하게 보인 것 같았다. 게다가 트러블 샷에는 일가견이 있기 때문에 고저가 심한 레이아웃과 위험한 함정들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도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점점 더 적응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하하하.”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 경고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가 필상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만 이미 밝힌 생각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언급을 재차 강조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 어쩌면 나쁜 결과보다도 더 아픈 상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라운드를 오전에 시작한 필상은 어제 미켈슨이 한 말이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코스 세팅이 어제보다 훨씬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에 임했기 때문에 잡념은 떨치고 집중했다. 그런데도 성적은 -3, 이글을 하나도 잡지 못한 것이 컸지만 보기를 하나 기록한 것도 씁쓸했다.

“프로님.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요.”

필상은 오후 내내 오늘 미진했던 퍼팅 연습에 매진했다.

그런데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 미사키의 말을 듣는 순간, 그 내용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되었다.

“필이 무너지고 있지?”

“네. 오늘만 벌써 4타를 잃었어요. 게다가 지금 14번 홀 티샷을 마쳤는데 타구가 감겨 그린을 바로 노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컷오프가 어느 정도나 될 것 같은데?”

“2오버요. 그러니까 지금 아슬아슬한 상황이죠.”

“안 되겠다. 가 보자.”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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