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81화 (181/354)

181. 사토시 나카모토

“하루에 받을 수 있는 손님이 한정적인데 물가가 비싸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빚만 없다면 적절한 비용을 산출할 수 있을 겁니다.”

필상이 생각하는 라운드 비용은 18홀 기준 15만 원이다.

물론 지방의 퍼블릭 코스들은 그보다 저렴한데도 손님을 유치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속적인 투자를 멈춘 코스는 아무리 저렴해도 다시 찾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회원제 골프장 못지않은 레이아웃과 코스 관리 수준을 유지한다면 합리적인 가격의 다양한 할인 상품 출시도 가능하다.

한국 골프장들은 대부분 카트를 의무화하고 있지만 그건 운동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바다도 가까운데 이렇게 아름다운 산까지 있다니 놀랍군.”

다음 날 일행을 데리고 찾아간 곳은 설악산이다.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한 한국의 산은 풍미가 남다르다.

게다가 한국을 대표하는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속초는 관광 인프라도 잘 갖춰져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골프 연계 상품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우리 코스도 좋지만 주변에 꽤 좋은 코스들이 여럿 있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 조성했지만 경영 상황은 어렵지요.”

“골프 저변도 넓고 골프와 관광 인프라도 잘 갖춰졌는데 수익성이 안 좋다니, 대체 왜 그런 거지?”

한국 골프 산업이 처한 특수한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미 수많은 골퍼들이 존재하는데 이상하게도 골프클럽은 고가의 스포츠로 자리매김을 하며 가진 자들만의 운동으로 치부된다.

때문에 수요와 공급이 불일치한 기이한 불황을 겪는다. 일본은 이미 오래 전에 동일한 현상을 겪었는데 그걸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시장을 통한 해법을 찾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필상은 보다 표준적인 답을 내놓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여행 내내 동업자들과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 * *

-프로암 대회인데도 엄청난 인파가 몰렸습니다.

-전일 입장권을 구매하신 분에 한해 프로암에 무료초청이 되었는데 그 수가 무려 4,000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럼 일단 16,000명은 확보한 셈이군요. 12만 원이면 저렴한 가격도 아닌데, 그만큼 한국 남자 골프의 인기가 높아졌다는 반증이로군요.

-그렇습니다. 한국 골프를 대표하는 대회로서 PGA챔피언십을 거머쥔 공필상 프로가 PGA의 거물 2명을 초청하면서 대회의 격이 한층 높아진 것도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TPK 사단이 합동 사인회도 열었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그밖에도 내일은 나이키가 주최하는 일반인을 위한 레슨 프로그램도 있어서 아예 일주일 휴가를 내고 이곳 천안에 내려오신 골프팬들이 많다고 합니다.

대회가 열리는 우정 힐스 CC는 물론 인근의 숙박 시설이 모두 동이 나 천안 시내의 호텔까지 방이 가득 찼다.

그동안 한국 오픈이 열려도 이런 호황은 처음이었기에 주최 측은 물론 천안의 상권까지 들썩여 추후 대회 유치 경쟁은 더 가속화될 조짐까지 보였다.

“한국은 처음이죠?”

“응. 이렇게 대회 분위기가 좋은 줄 알았으면 진즉에 왔을 텐데.”

미켈슨은 정말 많이 놀란 것 같았다.

한국보다 큰 시장으로 알려진 일본 대회는 여러 번 출전했지만 이 정도로 뜨겁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올해 갑자기 달아올랐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타이거는 지난달에도 방문했던 터라 그저 빙긋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한국을 방문한 기회에 가장 진도가 느린 미켈슨을 압박했다.

“필. 일본은 언제 들릴 생각입니까?”

“너희 둘이 워낙 진도를 많이 뺀 터라 나도 가급적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기는 해.”

“라일리가 사전 작업을 착실하게 해 둬서 크게 어려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라일리와 함께 이번 대회 끝나고 바로 일본으로 넘어가 볼게.”

2주 뒤에 굉장히 중요한 US오픈이 열린다.

다들 최고의 성적을 거두기 위해 칼을 갈 텐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필상도 마음이 놓였다.

원래 구상한 것보다 태국과 한국의 성과가 빠를 뿐, 그가 늦은 것이 아니다. 때문에 느긋해도 할 말은 없으나 다행히 동료들과 호흡을 맞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일세. 공 프로.”

프로암은 선택받은 일부 선수만 참가한다.

대회 직전에는 연습 라운드를 철저히 통제하기 때문에 한 번의 연습 라운드를 더 할 수 있는 기회는 모두들 원한다.

하지만 전체 참가자 150명 중에 단 52명만 선택받아 아마추어와 짝을 이뤄 자선 라운드에 참가한다.

대신 프로와 함께 라운드를 도는 일반인들은 거금을 희사해야 한다. 그 자금은 자원봉사자를 위해 쓰거나 일부는 기부함으로써 사회에 공헌하는 형태를 취한다.

그런데 필상과 2인 1조로 포섬 포볼 라운드를 함께 펼칠 상대는 오래 전에 안면이 있는 일본 노신사였다.

“어? 안녕하십니까?”

“날 기억하는군.”

“물론입니다. 사토시.”

“어허! 이름까지?”

“제가 아는 일본 어르신이 별로 많지 않아서요. 하하하.”

사전에 동반자 정보까지 살피지는 못했다.

어차피 자선 행사이기 때문에 그저 샷을 점검하고 코스를 살피는 것에 만족하고자 했는데 의외의 인물을 만난 것이다.

허옇게 센 머리칼과 얼굴에 그려진 깊은 주름을 보면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로 보였다. 건강해 보이지만 오늘 참가한 아마추어 중에 가장 노령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사토시는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클럽을 제법 휘두를 줄 아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스러운 표정 짓지 말게나.”

“하하하. 알겠습니다. 오늘 하루 즐겁게 라운드를 하시죠.”

아무리 생각해 봐도 특이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한국까지 와서 이런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는지, 한국 오픈 프로암에 일본인이 참가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대충 넘겨짚어 봐도 확실한 연줄이 있거나 남들보다 훨씬 거액을 희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면전에서 묻기에는 거북한 내용이라 일단 예의를 차린 필상은 다른 동반자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차분하게 경기를 시작했다.

까앙!

노인인 사토시의 실력은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드라이브 티샷 비거리가 265야드, 모든 힘을 다 쏟아부어도 그 나이의 노인이 낼 수 있는 거리로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방향도 좋아 페어웨이에 안착했다.

필상은 레귤러 티에서 무리하지 않고 3번 우드로 가볍게 티샷을 날렸다. 중요한 것은 코스를 파악하는 것이지 좋은 기록을 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토시가 99야드 세컨샷을 온 그린을 시켰을 뿐 아니라 핀에 바짝 붙여 버디 기회를 잡자 필상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오호! 멋진 샷이로세!”

“제가 경기를 망칠 수는 없죠. 하하하.”

프로암은 둘씩 조를 맞춰 포볼과 포섬으로 진행되며 경기 후에는 성적에 따른 시상도 이뤄진다.

만약 사토시가 좋은 샷을 하지 못한다면 필상도 부담 없이 코스 파악에 주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지한 자세와 정확한 결과는 필상으로 하여금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가 3m 퍼팅을 차분하게 버디로 연결하자 필상도 맞장구를 치며 유일한 쌍 버디 조가 탄생되었다.

프로암이라고 편하게 즐기러 왔던 갤러리들의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고 환호성이 싫을 사람은 없었다.

“올해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

“여든둘.”

“정말 대단하십니다. 여든이 넘으셨는데 웬만한 중년보다 더 멀리 치시다니,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나도 자네랑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거든. 허허허.”

워낙 의외의 말이었기에 순간적으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대체 어떤 경험을 공유했다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경기를 함께하면 틈이 날 때마다 대화를 나눴는데 놀랍게도 그와 공유한 경험은 바로 벼락을 맞은 것이었다.

“자넨 한 번도 아닌 두 번이잖은가!”

“하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그렇지. 나도 그날 이후 모든 일이 잘 풀렸으니까.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자넨 나보다 더 운이 좋은 친구지.”

그도 벼락을 맞은 뒤, 인생에 큰 변화를 겪은 것 같았다.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신원이 확실치 않은 그와 나누기에는 너무 부적절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대가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는데 자신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난감한 상황을 어찌 돌파해야 할지 답을 찾는 필상에게 그의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일단 우리 경기부터 끝내고 저녁을 먹으면서 얘기하세나.”

“네. 그러시죠.”

아무리 레귤러 티에서 쳤고 포섬이 포함된 경기라도 18홀 라운드에서 -10를 기록한 것은 놀라웠다.

13개 조에 26팀이 참가해 경기를 했지만 언더파는 오로지 필상 팀뿐이었기 때문이다. 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시상을 받았고 이어진 만찬에 참가한 필상은 급기야 오전 내내 번민에 빠지게 만들었던 화제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도 자네처럼 운동을 했으면 일본이 자랑스러워할 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오늘 실력을 보니까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하지만 워낙 가난하게 커서 그런지 난 돈에 대한 욕심이 컸네. 그게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사토시는 스스로 밝히길 부자라고 했다.

직접 기업체를 운영하지는 않지만 그가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기업이 없을 만큼 많은 돈을 굴린다고 했다. 탄식과 함께 고백하기를 스스로 ‘고리대금업자’라고 칭했다.

유일하게 대외적으로 드러난 사업이 있다면 그건 바로 골프장 개발 사업이었고 일본 전역에 무려 30개의 코스를 직영한다는 말에 더 이상 다른 말은 필요치 않았다.

물론 쉽게 믿기지는 않았다.

나름 골프 관련 사업을 위해 일본 골프장 실태를 파악한 적이 있지만 사토시라는 이름은 접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난 자네랑 일을 함께 해 보고 싶어.”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긴. 골프장 사업이지. 하기야 내 말이 믿기지 않겠지. 일단 오늘은 안면을 튼 것으로 만족하고 천천히 생각해 보게.”

그는 필상이 자신에 대해 알아볼 시간을 주는 것 같았다. 자신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는 필상과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저녁을 먹고 웃으며 헤어졌지만 연락처를 전한 그에 대한 인상은 아주 깊었다. 그는 벼락을 맞은 뒤,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재주를 얻었다고 말했다.

‘초감각이 그렇게 쓰일 수도 있구나!’

이미 50년 전에 벼락을 맞았던 그의 능력은 필상이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희미하나마 동질성을 느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근거 없는 신뢰감과 이해하기 힘든 편안함은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가족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정을 자아냈다.

평소 같으면 연습장으로 향해야 했지만 머리를 식히려 일단 숙소로 돌아온 필상을 기다린 사람이 있었다.

“대표님이 이 시간에 어찌?”

“긴히 의논할 게 있어서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이 대표의 태도는 평소와 달랐다.

늘 여유롭고 위트가 넘치는 그녀가 연락도 없이 달려온 것만 봐도 사안이 중요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소파에 마주앉자마자 꺼낸 첫 마디부터 놀라웠다.

“오늘 사토시 회장과 라운드를 하셨죠?”

“이 대표님이 사토시를 어떻게 아십니까?”

“일본 ‘지하경제의 천황’이라고 불리는 사람이거든요.”

“하하하. 제게는 고리대금업자라고 하던데 비슷하네요.”

“고리대금업자요? 절대 그렇게 치부할 수 없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에요. 그런데 사토시 회장과는 초면이 아니었나요?”

“전에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의도적인 만남이었다는 생각은 드네요.”

이 대표의 입을 통해 접한 사토시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고리대금업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기반을 닦기 전 젊은 시절의 일이었고 그는 타고난 사업 감각으로 수많은 기업을 상대로 거래를 해 왔다.

현대적인 의미로 정의한다면 그는 적대적 M&A를 일찍이 실천한 ‘기업 사냥꾼’이었다. 그 과정에서 합법과 불법을 오가며 폭력적인 수단도 가리지 않아 악명도 떨쳤다.

때문에 웬만한 기업인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떤다고 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 뒤에 숨은 차갑고 잔인한 품성은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의 제국을 건설하게 만들었단다.

“사쿠라 재단이 바로 그의 사업 모체에요.”

“사쿠라 재단은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복지 재단 아닌가요?”

“물론 복지 사업도 하죠.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절대 그렇지가 않아요. 수많은 기업체로부터 기부를 받아 활동하는데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일도 많다고 들었어요. 특히 일본 우익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죠.”

“일본 꼴통 우익 말입니까?”

“자세한 것은 더 알아봐야 하지만 그렇다고 알고 있어요.”

소름이 돋았다.

설마 그런 짓을 하는 단체의 수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치의 우경화는 도를 넘은지 오래였고 그들이 조장하는 사회적 병폐는 한국에게 특히 치명적이다.

“그런 자가 내 앞에 나타나 감히 동업을 운운하다니!”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자신이 느낀 동질감은 싸구려 감정이었고 그런 자와 호흡을 맞춰 한 팀으로 라운드를 즐겼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한일 관계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인 아내를 맞이했기에 더더욱 바라는 바가 명확하지만 상대인 일본의 정치는 민주적 양식을 갖춘 한국에 한참 모자란다.

경제는 앞서 나갔을지 몰라도 정치는 물론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심각하게 우경화되었다. 정의와 공정을 외치는 이들의 음성은 역사를 왜곡하고 민족 이기주의적 사고를 지닌 이들에게 밀려 정상적인 국가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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