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달라진 위상
“긴장 좀 해.”
“하하하. 최소한 두 자릿수까지는 쫓아오고 그런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필상이 첫 4개 홀에 1타를 줄이는 사이에 공동 2위가 나란히 1타를 추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타 차였다.
그러니 긴장하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켈슨은 필상이 미처 생각지 못한 차원의 언급을 꺼냈다. 감히 부정하거나 무시하기 힘든.
“널 보러 온 팬들에게 최소한의 서비스는 해야 하잖아.”
“아!”
이미 첫 라운드에서 주목받는 데 성공했다.
벼락을 맞으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필상이 무사히 필드에 복귀하면서 얻은 극적인 반전은 악천후로 인한 흥행 실패를 덮고도 남을 만한 엄청난 인파를 이날 끌어 모았다.
더 이상 무리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앞으로 실력에 대한 의문을 표할 이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팬들의 성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더도 말고 딱 4번 드라이브를 잡았는데 어김없이 파 5홀이고 필상은 보란 듯이 4개 홀 모두 2온에 성공했다.
눈부신 장타에 이어 굳이 우드를 잡지도 않고 정확한 아이언 샷으로 너무도 쉽게 이글 찬스를 만든 장면은 압권이었다.
그중에 2번이나 이글을 잡은 필상은 최종라운드 -7를 기록하면서 무려 25언더 우승을 거머쥐었다. 우승을 의심한 자는 없었으나 무시무시한 기록으로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에 성공하는 순간, 필상의 위상은 단번에 최정상급으로 급상승했다.
[미스터 퍼펙트! -25 압도적인 기량을 증명한 우승.]
[벼락의 신, 토르의 강림! 판타지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4번 출전에 3승! 이런 선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언론은 필상이 절대 강자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벼락을 맞는 모습이 생생하게 찍혔는데, 아무렇지 않게 다음 날 경기에 나선 신비로운 이력에 대해 구구한 말보다 찬사가 쏟아진 것은 긍정적 이미지 조성에 성공한 덕분이었다.
경기 후 진행된 우승 인터뷰 분위기는 이전과 사뭇 달랐다. 편견이나 차별적인 질문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적극적으로 PGA 대회에 출전하기를 바란다는 희망도 언급되었다.
하지만 필상은 그에 대한 정확한 언급을 회피했다.
- 설마 4주 뒤에 열리는 US오픈도 거르실 겁니까?
“아직 확정하지 못했을 뿐, 참가하고 싶습니다. 다만, 다음 주에 코리아오픈이 열리기 때문에 내일 한국에 들어갑니다.”
- 한국과 일본투어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고 관련 사업이 곧 개시되는 것도 알지만 전 세계 골프 팬들을 위해 US오픈 출전은 꼭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음…….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들 필상의 출전 결정에 크게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왜냐면 PGA 챔피언십 우승으로 달궈진 분위기가 다시 식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이거와 미켈슨도 같이 한국에 간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심하게 술렁였다. 같은 기간 큰 대회가 줄줄이 개최되는데 PGA 챔피언십 3위 안에 든 선수가 모두 빠지면 흥행에 빨간불이 들어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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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A 사무국도 이번 기회에 정신을 좀 차려야 해.”
“그건 맞습니다. 그동안 너무 방만하게 운영이 되었지요. 이젠 선수들이 주인공이 되어야 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타이거. 그럼 이참에 중지를 모아 선수들을 위한 노조를 결성해 볼까?”
“저희들이 나서는 것은 그림이 별로 안 좋을 것 같습니다. 동업하기 때문에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는 말이 나올 겁니다.”
“그럼 명망이 있는 선수들을 내세워야겠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추후 PGA를 좌지우지할 거대한 계획이 움트고 있었다. 가장 각광받는 루키지만 아직은 이방인에 불과한 필상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하지만 실로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프로 골프는 타 스포츠와는 달리 거대한 자본을 가진 구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한결 수월하게 결성될 것 같았다.
그나마 조직력을 갖춘 협회가 대항 조직이지만 현역 선수들의 영향력은 PGA의 일방적 운영에 제동을 걸기에 충분했다.
대회 개최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상당 부분을 조직의 안정과 확장에 사용해 왔지만, 앞으로는 선수 복지와 사회 공헌에 사용하도록 조정할 필요가 있다.
“기득권을 지닌 이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기득권?”
“네. 어느 조직이든 이권이 있는 곳에는 권력이 있지요. 그 권력을 잃는 것이 두려운 자들, 갖은 수단을 다 강구할 거라고 봅니다.”
필상은 본질을 꿰뚫는 지적을 더했다.
하지만 타이거와 미켈슨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자신들이 가진 영향력에 대한 오판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적어도 미국 사회는 한국과는 달리 노조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공필상 프로. PGA 챔피언십 우승을 축하합니다!]
[환영! 타이거 우즈 & 필 미켈슨]
인천공항 출국장은 미어터졌다.
인기 아이돌도 아닌 스포츠 스타가 이렇게 환대를 받은 경우는 군부독재 시절 강제 동원을 연상케 할 만큼 대단했다.
전에도 열렬한 환영을 받아 봤지만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은 처음이다. 아무래도 PGA 메이저 대회 우승이 가지는 의미가 크고 부상을 이겨 낸 부분이 극적이었던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타이거와 미켈슨을 환영하는 피켓도 적잖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귀여운 캐릭터까지 그려진 피켓에 활짝 웃는 동료들과 함께 즐거운 귀국 인터뷰에 임했다.
“오빠!”
“몸도 무거운데 뭐 하러 나왔어?”
“치. 배부른 아내는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다는 거죠?”
“아니야, 아니야. 누가 그런 큰일 날 소리를 해.”
“그럼 키스해 줘요.”
“여기서?”
인터뷰를 마치고 나왔지만 아직 수많은 팬들에 둘러싸인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도발적인 자세를 취한 모모코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인증이라도 받고 싶은 듯.
쪽!
볼에 뽀뽀를 하려다 아예 입을 맞췄다.
괜히 어설프게 행동하다 구박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에서 진한 키스는 겁이 나 그냥 살짝 입을 맞췄는데, 그 순간 모모코가 두 팔을 벌려 필상의 목을 끌어안았다.
엉겁결에 포옹한 필상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예 모모코를 번쩍 안아 두 팔에 감싸 들고 차량이 대기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아내를 위해 야유가 쏟아져도 어쩔 수 없다는 각오였지만 뜻밖에도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멋지다. 공 프로!”
“키스해! 키스해!”
확실히 한국 사회는 변하고 있었다. 공인이 대중 앞에서 애정을 드러내는 것이 더는 흠이 아닌 사회가 된 것이다.
밴에 오르자 모모코의 인기는 정점에 달했다.
미켈슨은 물론 타이거까지 엄지를 치켜세우며 아름답다고 거듭 칭찬에 가세하자 그런 것에 익숙한 모모코도 얼굴에 홍조가 떴다.
출산이 다가오며 외모에 대해 한껏 자신감이 떨어졌는데 필상은 물론 다들 진심으로 자신을 아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공 프로.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여행이요?”
타이거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물론 한국 오픈까지는 제법 여유가 있지만 그 외에도 할 일이 꽤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이거는 거부하기 힘든 이유를 밝혔다.
“한국의 아름다운 명소를 우리가 언제 가 보겠어. 자네 때문에 애를 태운 모모코를 위해서 사흘 정도는 뺄 수 있잖아.”
“그래요. 일정 잡아 보겠습니다.”
일단 여주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과수원을 사들여 새로 짓고 있는 집이 아직 완공되지 않은 것이 좀 아쉬웠다. 손님을 따로 호텔로 모시는 것보다 집에서 함께 지내는 것을 더 바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몸은 정말 괜찮은 거지?”
“네. 거뜬하게 시합도 치렀는걸요.”
“일단 밥부터 먹고 쉬어야지. 비행기 타고 오느라 지쳤을 텐데.”
타이거와 미켈슨도 전통 가옥에 가까운 필상의 집과 어마어마한 식구 수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이 들어오자 휘둥그레진 눈을 연신 껌뻑거렸다. 차린 게 별로 없다는 말이 통상적인 겸허한 인사라는 것을 몰라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적당히 벌어서는 어림도 없겠네!”
“우리 집이 엥겔 지수가 좀 높기는 하죠. 하하하.”
필상의 집을 처음 찾은 미켈슨은 입에서 살살 녹는 갈비찜이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쉬지 않고 먹었다.
그에 비하면 전에 한 번 온 적이 있는 타이거는 모든 음식을 골고루 먹었고 특히나 나물을 비롯해 팬이 보내 준 송이버섯의 가치를 아는지 천천히 음미했다.
다음 날 아침 필상의 집 마당에는 고급 밴이 대기했고 필상과 모모코를 태운 밴은 페럼 CC 리조트에 들려 타이거와 미켈슨, 그리고 미사키를 태워 동해안으로 달렸다.
“한국의 바다는 굉장히 시원해 보이네.”
“태평양입니다. 저희는 이 바다를 동해라고 부르죠.”
경포 바닷가에 내릴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몰려들 인파 때문에 비교적 한가한 작은 해변에 차를 대고 내렸는데, 5월 말의 푸른 바다는 쌓인 스트레스를 모두 날리고 남을 만큼 시리도록 시원한 뷰를 선보였다.
“TPK 동해 CC가 여기서 가깝습니다.”
“이 바다가 보이는 곳인가?”
“물론이죠. 아직 리노베이션이 끝나지 않았지만 기념 라운드는 가능할 겁니다.”
“기념 라운드?”
“네. 광고 효과를 위해 사진이 좀 필요하거든요.”
“하하하. 그러자고.”
2박 3일 짧은 여행에 비행기가 아닌 차를 타고 출발할 때만 해도 실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2시간여 만에 도착한 시원한 바다를 보자 다들 환호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생각보다 작다는 것에 놀랐다.
한국이 이룬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데, 여러 스포츠는 물론 골프에서도 걸출한 스타들을 배출했고 이제 필상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나온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픈 역사, 일본의 압제에 수탈당하고 모든 것이 부서지는 전쟁을 겪은 이 작은 나라가 보여 준 저력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이 평화 모드로 돌입했고, 결국 통일을 이룬다면 많은 석학들의 예상대로 아시아를 이끌 진정한 리더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와우! 좋은데?”
“한국 지형에서는 보기 드문 링크스 코스죠. 그 장점을 더 극대화시키기 위해 단계적인 리노베이션을 할 생각입니다.”
“지금도 충분히 멋진데, 기대가 되네. 하하하.”
TPK 동해 CC는 아름다운 코스 조성으로 일반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뿐더러 한국 프로 지망생들의 훈련의 요람으로 성장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코스든 처음 개장할 때는 나름의 특징을 가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대동소이하게 수렴하는데, 필상은 링크스 코스의 특징을 더욱 강화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 가지 않아도 동일한 환경에서 경기를 펼치는 것과 다름없는 이색적인 챔피언십 코스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허어! 바람이 장난이 아닌데?”
“공 프로가 비바람에 강한 이유가 다 있었던 거군.”
기념 라운드를 시작했다.
이 대표가 미리 도착해 만반의 준비를 해 둔 탓에 멋진 그림이 차곡차곡 쌓였다. 필상과 타이거, 미켈슨의 동반 라운드는 무엇을 찍어도 상품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막상 라운드가 시작되자 환상적인 뷰에 못지않은 코스의 난이도가 발견되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저 멀리 대관령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이 시시각각 바뀌는 특이한 코스 환경에 타이거와 미켈슨은 격한 반응을 드러냈다.
보기와는 달리 다양한 플레이가 가능한 코스였던 것이다.
“이곳 동해안의 특이한 지형 때문입니다. 사계절이 확연해 계절마다 바뀌는 코스의 변화를 경험하면 아주 매력적이죠.”
“관리하는 데 어려움이 많겠어.”
“돈이 좀 많이 들겠지요. 하지만 지닌 장점을 십분 살리기 위해서라도 관리에 돈을 아끼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태국은 정말 좋은 환경인 것 같아.”
“태국 전역이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코랏이 고지대라서 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이 큰 장점이죠. 하지만 한국의 코스에서 느낄 수 있는 풍미는 그와 다릅니다. 이곳은 눈이 쌓인 겨울 골프도 가능하다는 거 아닙니까!”
“눈? 축복받은 코스로군. 하하하.”
사계절 내내 푸른 잔디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수도 있지만 바꿔 생각하면 한국만의 장점일 수도 있다.
아주 추운 겨울에는 라운드를 할 수 없지만 극한 상황에서도 골프를 즐길 수 있는 제반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지속적인 투자를 할 요량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골프가 지닌 다양한 라운드 경험은 그 어떤 난관도 해쳐 나갈 수 있는 저력을 제공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사실 골프 비용입니다.”
“아! 한국의 물가가 상당히 비싸다고 하던데, 특히 골프 라운드 비용은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하더군!”
“덕분에 경제성은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눈앞의 이익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합리적인 비용을 제시할 생각입니다.”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그것이다.
제법 이름이 알려진 수도권 명품 코스에서 18홀 라운드를 하려면 비회원의 경우, 수십만 원을 호가한다.
넷이 라운드를 하려면 웬만한 노동자의 한 달 급여를 훌쩍 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연간 수만 명의 골퍼들이 해외로 골프 투어를 나가는 실정이다.
구조적으로 잘못된 골프 문화가 자리를 잡았고 그 여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결과는 극히 비정상적인 시장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손님이 없어 도산하는 코스가 비일비재한 데도 새로운 코스가 전국 곳곳에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