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주최 측은 어차피 필상이 경기에 참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여론이 들끓자 일단 일정을 조정하기로 결정했다.
무리하게 악천후 경기를 강행한 것에 대한 팬들의 비판이 강해지자 현역 투어프로들도 각자의 입장을 밝혔는데, 대부분 타이거의 발언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러다 정말 선수 노조라도 결성되면 PGA 사무국은 사사건건 행정에 발목이 잡힐 것을 염려한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악천후 때문에 고공 행진하던 흥행에 빨간불이 들어온 마당에 악재가 겹친 것에 크게 당황한 듯 보였다.
“사무국에 연락해서 제 출전 사실을 알리세요. 이참에 점수를 좀 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아주 기뻐하겠네. 그런데 정말 아무 문제가 없겠어요?”
“역전당하지 않을 자신은 있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하하하.”
이 대표는 필상이 어떤 스케줄도 소화할 수 있다고 전했다. 뜻밖의 소식에 주최 측은 거듭 감사를 표하고 가장 난감한 상황이 풀리자 남은 대회 일정을 확정 고지했다.
오늘 오후 2시에 어제 잔여 경기를 치르고 날씨가 좋아지는 내일 마지막 라운드를 치르겠다는 한 발 물러선 결정이었다.
때문에 한결 여유가 생긴 필상은 클럽하우스에 도착해 미사키를 만나 함께 식사부터 했다.
“자라니까. 제대로 안 잤군.”
“잤어요. 자꾸 깨서 그렇지.”
“오늘은 5홀만 끝내면 되니까 일찍 푹 쉬어도 되겠네.”
“네. 그럴게요. 그리고 미안해요.”
“뭐가?”
“너무 놀라 발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벼락을 맞는 순간, 가장 가까이 있던 마사키가 얼어붙어 아무 것도 돕지 못한 것을 사과한 것이다.
필상은 이해하고도 남는다며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말라는 말을 건넸다. 무심코 지나갔지만 혼절한 필상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의문을 갖지는 않았다.
“정말 나타났네?”
“하하. 그 정도 벼락에 무너질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으! 독한 인간!”
“저는 러닝을 하며 몸부터 풀어야겠습니다. 같이 땀 좀 흘려 보시죠?”
“그럴까?”
미켈슨이 따라 나섰고 뒤늦게 타이거도 따라왔다.
셋이 나란히 비바람이 몰아치는 필드를 달리는데 점점 말수가 줄었다. 어제 입원했던 필상이 서서히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난 그만 포기!”
5km가량 뛰었을 때 미켈슨이 먼저 포기했고 1km를 더 속도를 높여 달리자 급기야 타이거도 허리를 숙이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하지만 미켈슨도, 타이거도 표정은 밝았다. 심각했던 필상이 정말로 건강을 회복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실로 믿기지 않는 기적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사실 처음에는 필상도 버거웠다.
진땀이 나며 어지러웠으나 고비를 넘기며 호흡에 집중하자 정신이 맑아지면서 새로운 힘이 솟구쳤다.
“갈아입을 옷 있지? 나 샤워 좀 하고 올게.”
“네. 고약한 냄새 없애고 오세요.”
땀을 통해 몸 안에 쌓인 노폐물이 배출된 것 같았다. 문제는 냄새가 하도 고약해 샤워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클럽하우스에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정해진 인터뷰 이외에는 사절한다는 걸 아는지 마이크를 들이대지는 못했지만 눈이 부실 정도로 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일시에 터졌다.
아마도 주최 측에서 필상이 건강하다는 사실을 언론에 알린 것 같았다. 씁쓸했지만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가볍게 시작해 볼까?”
연습하기 위해 타석에 들어섰다.
필상보다 더 관심을 보인 이들이 뒤에 버티고 앉았다.
타이거, 미켈슨, 그리고 이 대표와 미사키까지.
게다가 동료 선수들도 연습을 멈추고 필상의 상태를 확인코자 했다. 타인의 시선에 익숙한 필상이지만 그래도 좀 어색하기는 했다.
싸악!
60도 웨지를 잡은 필상은 부드럽게 로브 샷부터 연습하기 시작했다. 까마득하게 떠오른 공이 필드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들이 귓가에 울렸다.
“타이거. 정말 벼락을 맞기는 한 거야?”
“제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할 말이 없네요. 레이저 건에 맞아도 저렇게 멀쩡하기는 힘들 겁니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친구입니다.”
“저런 인간과 동시대에서 경쟁하는 우리가 불행한 건가?”
“그나마 많이 겹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요. 역대 최고의 골퍼, 그 말을 꼭 듣고 싶었는데 힘들 것 같습니다. 벼락을 맞고도 저렇게 쌩쌩한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필상을 좋아하고 같이 사업을 시작했지만 아직은 투어를 뛰고 있는 현역 프로이기 때문에 경기 시간이 다가오자 또다시 투쟁심이 불타올랐다.
하지만 필상의 샷을 지켜보던 타이거와 미켈슨의 대화는 거의 넋두리로 끝을 맺었다.
“어제랑 똑같은 156야드에요.”
“9번 아이언.”
어제 벼락을 맞았던 바로 그 홀에 돌아왔다.
잔여 경기는 전날과 동일한 세팅을 유지해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벼락이 떨어진 지점의 반경 3m 공간의 잔디가 까맣게 죽어 정상적인 티샷이 불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티 라인도 핀의 위치도 일정하게 옮겼다.
최대한 비슷한 환경을 조성했지만 티 박스에 올라선 필상의 느낌은 아주 묘했다. 어제보다 바람이나 빗줄기가 잦아들어 유리한데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많은 연습 스윙을 했다.
-공 프로가 저렇게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어제 그 끔찍한 일을 당한 곳인데 어찌 떨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긴장한다기보다는 신중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저런 진지한 모습이야말로 공 프로의 진면목이죠.
-하기야 13타 차가 나는데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하하하!
하지만 필상은 뇌리에서 스코어를 싹 지웠다.
무슨 일이고 벌어질 수 있는 운동이 골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 샷 한 샷 최선을 다하는 것이 몸에 밴 것이다.
혹여 몸에 힘이 너무 들어갈까 싶어 스윙 플레인을 점검했고 웨글을 반복하며 그립의 힘을 뺐다.
쉬익!
평소보다 더 느린 테이크 백으로 천천히 힘을 비축했고 백스윙 탑에서 잠시 멈춘 듯 섰던 클럽 헤드가 공을 향해 다운 블로우가 이뤄질 때는 가차 없었다.
몇 홀 남지 않은 잔여 경기에 불과하고 날씨도 좋지 않아 어제보다는 팬들이 적었지만 환호성만큼은 뒤지지 않았다.
“굿 샷!”
“인 더 홀!”
필상은 슬라이스 바람이 분다고 판단해 핀보다 좌측을 에이밍 했다. 하지만 느낌대로라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해 조금 적게 봤는데 타구는 딱 그만큼 우측으로 떨어졌다.
자신의 예감이 정확했던 것이다.
‘초감각이 더 좋아진 건가?’
버디는 어려워도 파는 무난한 온 그린에 성공했지만 필상의 담담한 시선은 하늘을 우러르고 있을 뿐,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시간이 길어 미사키가 다가가 말을 걸어야 했다.
“프로님. 타이거가 기다려요.”
“아!”
그제야 티 박스에 올라온 타이거와 자리를 교환했다. 멋진 샷이라며 하이파이브를 청하는 그의 손을 마주친 필상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린 좌측 끝을 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하하하. 고마워.”
타이거도 좀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경쟁하는 동반자에게 바람의 양을 가르쳐 주는 경우는 팀플레이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필상의 샷을 보고 그런 생각은 들었겠지만 이렇게 직설적인 코멘트를 하리라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건넨 말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문제는 과연 그런 위험한 에이밍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일 뿐.
막상 코치를 한 필상도 다소의 후회는 밀려왔다. 괜한 말을 해 타이거에게 부담을 가중시킨 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이거는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필상이 권한 방향으로 시원하게 샷을 날렸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 말이 떠오르게 만드는 멋진 티샷이 그려졌다.
바람을 타고 정확히 깃대 앞에 떨어진 공이 홀컵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굴렀기 때문에, 팬들의 소스라친 비명은 물론 필상도 소름이 돋아 주먹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와우! 기가 막힌 샷이네요.
-슬라이스 바람이 강해 쉽게 날리기 어려운 샷인데 역시 노련한 실력자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앞선 공 프로의 샷을 참조한 거 아닐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런 과감한 샷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거죠. 그는 타이거 우즈였습니다!
필상은 버디를 놓쳤지만 타이거는 여지없었다.
깔끔하게 버디를 기록한 멋진 플레이에 박수가 쏟아졌다.
15번 홀은 430야드 파 4홀로 랜딩 지역에 벙커는 없지만 좁은 페어웨이를 지키지 못할 경우 러프에서 온 그린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 홀이다.
그런데 버디로 기세를 잡은 타이거는 3번 우드로 정확하고 충분한 티샷을 날렸다. 비거리는 무려 314야드, 예상보다 훨씬 멀리 날아가 본인도 놀란 것 같았다.
“뒷바람이 생각보다 강해.”
“그런 거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죽지 않았네요!”
“하하하. 다 자네 덕분이지.”
필상은 5번 유틸리티를 잡았다.
팬들은 장타를 기대했을지 모르겠지만 필상의 스윙은 간결했다. 크게 힘을 싣지 않고 정확하게 페어웨이만 지키려는 샷으로 보였다.
하지만 240야드 안팎에 떨어진 타구는 미친 듯이 굴렀다. 무려 50야드 이상을 굴러 296야드를 찍었다.
“공에 회전이라도 먹인 건가?”
“비에 젖은 잔디가 도와준 거죠. 결도 순방향이었던 것 같습니다.”
“설마 결까지 보고 친 거란 말이야?”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하하하.”
페어웨이의 잔디는 기계를 이용해 오가며 깎는데 현재 이 코스의 결은 폭이 2야드 남짓에 불과했다.
때문에 운이 좋았다는 필상의 말을 믿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는지 타이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샷은 138야드 세컨샷이었다.
피칭 웨지를 잡은 필상은 부드럽게 띄웠을 뿐이다. 아니, 그렇게 보였는데 타구는 의외로 뒷바람을 타고 덩실덩실 날아가더니 깃대 바로 앞에 떨어졌다.
한 번 크게 튀었지만 스핀을 먹은 공은 더 나아가지 않고 홀컵 바로 앞 1.5m 지점에 우뚝 멈춰 섰다. 완벽한 버디 찬스에 뜨거운 환호성이 작렬했다.
“나이스 샷!”
“좀 짧았습니다.”
“샷 이글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건가?”
“하하. 노릴 만하지 않았나요?”
“항복!”
농담으로 받아넘겼지만 타이거는 필상이 정말 홀컵을 노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문제는 수시로 바뀌는 뒷바람의 양을 어떻게 감지하느냐는 것인데, 앞선 필상의 샷을 보고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만약 자신이 필상처럼 부드럽게 띄우면 과연 비슷한 결과가 나올지 감히 자신하기 힘들지만, 전 홀의 좋은 기억을 되새긴 타이거는 같은 조건을 상정한 샷을 날렸다.
“어허!”
피니시를 마친 타이거는 타구를 바라보다 말고 뒤에서 들린 필상의 탄식에 뜨끔했다. 결코 좋은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 타구는 예상보다 훨씬 짧아 벙커 턱을 맞고 겨우 러프에 올라섰을 뿐이었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그에게 필상의 진단이 들렸다.
“탄도가 좀 낮았습니다. 조금만 더 띄웠으면 그냥 바람이 날라다 줬을 텐데 아쉽네요.”
“저 위에는 더 강한 바람이 분다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필상은 자신의 느낌을 말했을 뿐인데, 막상 뱉고 보니 너무 비현실적인 발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틀리지 않은 감각이지만 그걸 드러내는 것에 더욱 조심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컨디션이 최고조가 아닌데도 좋은 샷을 할 수 있었던 기반은 역시 더 강력해진 초감각으로 인해 바람의 방향이나 양까지 간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남들이 추종하기 힘든 탁월한 재능을 갖췄는데 더 확장된 신기한 능력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골퍼에게 주변 상황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결정적인 미스를 줄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벼락을 맞으면 능력이 생긴다니…….’
너무 위험한 발상이지만 벼락을 맞을 때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재능을 얻은 게 사실이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지, 자신에게 생긴 변화가 과연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 아직 확실한 것은 없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비춰 보면 자신은 오히려 벼락을 기다려야 한다.
남다른 운동 능력과 일관성, 거기에 보태 동물적인 감각까지 얻었으니 남은 것은 오로지 모든 것을 제패하는 것이었다.
필상은 5개 홀에서 2타를 줄여 다시 -19로 복귀했다.
부상의 후유증을 염려하던 이들의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 일화로 남게 되었다.
“4홀에 4타를 줄였다고요?”
필상보다 더 파격적인 성적을 거둔 선수가 있었다. 미켈슨이 4홀에 4타를 줄이며 타이거와 함께 공동 2위에 올라탔다.
필상과는 14타 차로 역전이 불가한 성적이지만 그들의 면면이 필상과 무관치 않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어느 한 기사의 타이틀이 그걸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TPK 사단. PGA 챔피언십 접수.]
28명이 어제 못 다한 잔여 경기를 치렀다. 비바람이 거센 탓에 단 3명만 언더파를 기록했는데, 하필이면 함께 사업을 벌인 당사자들이었던 것이다.
“내가 뭐랬어?”
“하하하. 그렇게 같이 놀고 싶으셨습니까?”
“그럼! 나만 빠질 수는 없지. 안 그래?”
미켈슨의 그 말은 타이거를 향한 것이었다. 그의 타이거에 대한 경쟁심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줄어들 것 같지 않았다.
필상도 자신이 좋아하는 그 두 명과 함께 마지막 라운드를 치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늦은 시간까지 연습장에 머물렀는데, 그날 저녁 다소 특이한 논조의 분석 기사가 하나 실렸다.
내용을 가장 먼저 확인한 이 대표가 직접 그걸 들고 찾아왔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표정이 필상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