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명과 암
두 선수를 먼저 내보냈다.
필상이 멀쩡하게 깨어난 것이 기뻤으나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을 확인했기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내일 아침 연습장에서 보자고 너무도 당당하게 말을 하는 필상의 자신감을 믿고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필상은 미사키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하고 숙소로 먼저 돌아가라고 했다. 꼼짝하지 않았으나 그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에 글썽이던 눈물이 뚝뚝 흘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말 내일 연습장에서 볼 수 있는 거죠?”
“걱정 말라니까. 그리고 잠 푹 자고 최고의 컨디션으로 만나. 알았지?”
“네.”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퉁퉁 부은 눈에 봐도 그녀가 오늘 밤 쉽게 잠들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병실에 있게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을 쳐다보느라 한숨도 못잘 것 같아 내일 자신을 도우려면 푹 자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미사키가 나가자 이제 이 대표와 둘만 남았고 그녀는 자신도 쫓아낼 것 같았는지 먼저 선수를 쳤다.
“누구 한 사람은 환자 곁을 지켜야 할 것 같은데?”
“네. 힘들겠지만 오늘은 저 소파에서 주무셔야 할 것 같아요.”
“오케이. 그런데 정말 내일 경기를 할 수 있겠어?”
“최선을 다해 봐야지요.”
필상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이 대표가 얼른 다가와 부축하려 했지만 한사코 만류한 필상은 조용히 눈을 감고 정좌한 채 토납을 시작했다.
필상이 뭔가 스스로 하려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이 대표는 차분하게 소파에 앉아 필상을 지켜봤다.
지루한 시간이었으나 창백했던 혈색이 돌아오고 호흡이 한결 안정되는 것을 보며 비로소 자신도 편안히 쉬기 시작했다.
“악천후에 경기를 강요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입니다!”
숙소에 돌아간 줄 알았던 타이거와 미켈슨은 필상이 만류한 인터뷰를 진행 중이었다. 아무 걱정 말라고 했지만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단지 필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프로 골퍼들의 경기 환경에 대해 이제는 말을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를 비롯한 대부분의 프로 스포츠는 선수 노조가 존재한다. 거대 자본을 가진 구단의 횡포에 맞서 마땅한 권리를 주장하고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함께 논의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프로 골프는 선수 노조가 없어 주최 측의 일방적인 행정에 늘 끌려다녔다. 각 개인이 소속 없이 활동하기 때문에 협회가 갑이 된 다소 기형적인 상황이었다.
-미스터 퍼펙트의 건강상태는 어떻습니까?
“다행히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했습니다. 저희더러 내일 경기장에서 만나자고 하더군요.”
첫 마디에 매우 중요한 사안을 언급했지만 기자들의 관심은 일단 필상의 건강상태에 모두 쏠려 있었다.
필상이 깨어났다는 말에 다들 일제히 환호하는 것을 보며 지금이야말로 이런 대화를 나누기 가장 적절한 시기라는 것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회복했는지, 정말 시합에 나갈 수 있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타이거는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연결 지었다.
“실수로 넘어지기만 해도 그날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하물며 벼락을 맞고 혼절했는데 어찌 정상적인 플레이가 가능하겠습니까!”
-그럼 내일 미스터 콩은 경기장에 나올 수 없는 겁니까?
“아니요. 저는 반드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온당한 일입니까?”
강한 어조로 온당하냐고 묻는 타이거의 말에 기자들은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갑작스러운 사건에 주목했을 뿐,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기회를 잡은 타이거는 본질을 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공 프로는 3일 내내 우리가 모두 감탄할 만큼 좋은 경기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대체 누가 그런 위험에 그를 내몬 것입니까?”
기자들은 그 말에도 답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누가 내몰아 경기를 했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런 반응이 타이거를 더 분노케 했는지 보다 강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날씨는 정상적인 경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공 프로는 홀로 빛났지만 실력이 아니라 운이 작용하는 경기, 팬들이 과연 그런 경기를 원한 겁니까?”
-주최 측이 너무 무리했다는 말씀인가요?
비로소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는 질문이 나왔다.
대다수의 팬들이나 기자들은 프로 골퍼를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승하는 선수에게 주어지는 부와 명예에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다.
“이건 단지 제 의견이 아닙니다. 또한 골프를 통해 많은 것을 얻은 저와 같은 사람이 언급할 내용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제 입에서 나오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관심을 가지는 것 아닙니까!”
-선수들이 악천후에서 경기를 펼치는 것도 사실 우승을 위한 의지의 표명이 아닌가요?
“그것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험한 환경에서 선수들에게 경기를 강요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입니다. 오늘 같은 비극이 또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합니까!”
-악천후에서는 경기를 중단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공 프로처럼 벼락을 맞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비에 젖은 차가운 몸으로 강한 스윙을 하다 보면 원치 않는 부상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컨디션이 떨어진 선수가 많을 겁니다. 그런데도 내일 또 경기를 하러 나오라고 하네요. 병원에 입원해 있는 공 프로에게도.”
이제는 보다 명확해졌다.
누가 봐도 우승 자격이 넘치는 필상이 내일 경기에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가 없었다. 자신의 잘못은 일체 없음에도 노력한 결과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규정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판단 착오로 커다란 피해를 입은 선수가 있는데, 사무국은 아무런 반성이나 고민 없이 그냥 규정대로 한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최 측에서는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 거죠?
“예비일 규정이 있습니다. 적어도 선수들의 안전과 건강을 고려한다면 악천후가 예고된 내일 경기에 대해서 보다 폭넓은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경기를 강요할 게 아니라 예비일까지 고려해 종합적인 판단을 내려 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만약 자신의 입장만 고집한 것이라면 반향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필상이 경기에 나서지 못하면 유리한 그가 이타적인 의견을 제시했기에 그 말에 힘이 더 크게 실렸다.
거의 매주 경기가 열리고 이동 거리도 멀어 가급적 주최 측은 4일 안에 경기를 끝내고자 한다. 하지만 이번 경우처럼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면 선수의 입장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은 합리적일뿐더러 당연한 주장이었다.
어차피 한 선수가 모든 대회에 다 참가할 수는 없다. 출전 여부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모든 대회가 굳이 다음 주에 열릴 경기를 고려해 빡빡한 일정을 강요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선수를 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행정편의를 위한 주최 측의 일방적인 횡포라는 의견에 더 많은 힘이 실렸다.
[미스터 퍼펙트. 내일 경기에 나설 수 있나?]
[벼락 맞은 선수에게 우승 포기를 강요하는 PGA 사무국.]
[악천후 경기 시, 부상 선수 속출. 통계가 말한다.]
[13타 차 단독 선두. 접기에는 너무 억울한 스코어.]
[선수를 위험에 내몬 주최 측, 과연 경기 속개를 결정할 권한이 있는가!]
[경기 중단 규정. 이대로 괜찮은가?]
[프로 골퍼의 명과 암. 1%도 안 되는 우승 확률에 목맨 선수들, 화려함 뒤에 감춰진 처절한 현실.]
[필드에서의 공평과 정의. 골프 선수 노조 과연 필요한가?]
그날 저녁 모든 스포츠 언론들이 일제히 타이거가 제기한 선수들의 안전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통계, 바람직한 개선 방향에 대해 논평을 냈다.
경기 중에 벼락을 맞은 워낙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한 뒤라서 위험에 노출된 선수들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편견 없는 조명이 이뤄진 것이 주효했다.
어느 선수가 다치고 싶겠는가!
주최 측이 통보하지 않으면 벼락을 맞더라도 그냥 필드에서 경기를 진행해야 한다는 규정은 인권침해 요소가 강했다.
물론 안전을 걱정하는 선수 스스로가 포기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지만 그렇게 막무가내로 볼 사안이 아니다.
‘경기를 포기한 비겁한 선수!’
피하고 싶어도 경쟁에 내몰린 선수들은 오로지 우승 하나만을 보고 달려가기 때문에 경기를 포기하는 선수는 오히려 팬들의 이런 지탄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비근한 예시가 바로 오늘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필상이다. 실제 경기를 진행할 수 없는 비참한 지경이었으나 엉뚱하게도 큰 비난을 받지 않았던가.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필상이 경기 중에 벼락을 맞아 쓰러진 것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불운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필상이 입은 피해가 너무 크고 확연했다.
더 중요한 것은 선수가 부상을 입어도 아무도 책임져 주기 않기 때문에 그걸 방지해야 할 의무가 바로 PGA 사무국에 있는데, 지금까지의 행태를 보면 거꾸로 가는 셈이었다.
* * *
“이 대표님.”
모르긴 몰라도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든 것 같았다.
아무리 깨워도 깨어나지 않아 필상은 샤워까지 끝냈고 옷도 갈아입었다. 그리고 걱정하고 있을 식구들과 통화했다.
모모코는 물론 엄마와도 화상 통화를 하면서 건강한 모습과 활짝 웃는 모습을 보여 주고 나서야 겨우 마음이 놓였다.
산달이 가까워진 모모코가 가장 염려되었지만 의외로 그녀는 담담했다는 엄마의 말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쑥스러워 평소에 거의 하지 않던 말도 해야만 했다.
사랑한다고.
“이보영 씨!”
이 대표를 혼자 두고 나갈 수도 없어 결국 흔들어 깨웠다.
악몽이라도 꿨는지 고운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자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는 바람에 필상도 깜짝 놀랐다.
“공 프로님!”
“왜 인상을 쓰고 주무세요?”
“저요?”
정신이 없을 상황이지만 필상이 마주 앉자 얼굴에 홍조를 띤 그녀는 얼른 화장실로 도망쳤다.
10분 뒤에 나타난 그녀는 곱게 단장한 모습이었다. 하고 많은 말 중에 가장 먼저 꺼낸 말이 웃음을 자아냈다.
“제가 자는 거 지켜본 거 아니죠?”
“네. 하도 안 깨어나서 한참을 부르고 기다렸습니다.”
“그럼 코 고는 소리도 들었나요?”
“아뇨. 희한한 신음 소리를 내던데요?”
“어머! 나 미쳤나 봐!”
“농담입니다. 하하하. 아기처럼 쌔근쌔근 자는 모습이 귀여웠습니다.”
그제야 표정이 풀린 그녀는 필상의 안위를 물었다.
물론 필상은 알통을 만들어 보이며 건강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 와중에 문이 열렸고 의료진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옷까지 갈아입은 모습을 확인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주치의인 듯.
“미, 미스터 퍼펙트. 이게 대체!”
“퇴원 수속을 밟아 주십시오.”
“네? 괜찮으십니까?”
“보시다시피.”
번거로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 필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왔다 갔다 건강함을 과시했다.
그래도 여전히 커다래진 눈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버리지 않자 급기야 이 대표에게 의견을 전달해야 했다.
“대표님. 지금 시간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어서 퇴원 수속을 밟아 주세요.”
“아. 네. 다들 나가시죠.”
그냥 먼저 움직이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병원을 나서는 순간, 진치고 있을 기자들의 번잡한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어제 벌어졌을 상황을 체크하던 필상은 타이거와 미켈슨이 벌려 놓은 사태의 전말을 확인하게 되었다.
여론의 반응은 필상에게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필상이 시합을 재개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가 긍정적으로 작용한 듯.
49개의 홀을 끝낸 필상에게 남은 홀은 23개 홀이다. 3분의 2를 월등한 성적으로 마친 필상이 주최 측의 부주의한 조치로 인해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오늘 경기를 속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규정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했다. 하지만 적어도 필상이 경기에 나설 수 없다면 응분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명예 우승?”
가장 눈에 띠는 의견이 그것이다.
실질적인 소득은 없어도 적어도 우승자의 예우를 해 주자는 독특한 의견인데, 예상보다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고마운 일이지만 상금을 포기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 밤새 토납에 집중했지만 컨디션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 같다는 희망적인 느낌도 들었지만 워낙 벼락으로 인한 충격이 거대했기 때문에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일단 경기에 나설 여력은 갖췄다고 판단해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이다.
“수속은 끝났나요?”
“네. 몰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구급차를 제공받기로 했어요.”
“절묘한 한 수군요. 하하하.”
병실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몰래 후문으로 빠져나와 대기하던 구급차에 오른 필상은 심상치 않은 날씨를 확인했다.
벼락은 칠 것 같지 않지만 비바람이 전혀 잦아들지 않아 과연 경기가 속개될 수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 대표는 즉시 대회 주최 측에 전화를 넣었고 참으로 애매한 대답을 전해 듣고는 필상에게 건넸다.
“일단 오전에는 경기를 하지 않고 기다려 본다고 하네요.”
“어제의 잔여 경기를 치르지 않고 말입니까?”
“네. 어제 타이거가 지핀 불길이 꽤나 뜨거웠던 모양이에요. 아참, 그 내용을 모르죠?”
“아닙니다. 방금 전에 관련 기사를 확인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