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75화 (175/354)

175. 과욕이 부른 참사

타이거와 필상이 바짝 붙어 소곤소곤 얘기를 나눴다.

이미 각별한 친분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카메라에 잡힌 둘의 친근한 모습에 뿌듯해하는 팬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나 한국 골퍼들은 타이거를 대신할 새로운 황제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타이거가 지는 해라면 필상은 이제 찬연하게 떠오르는 태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갤러리들이 만들어 낸 소음 때문에 왓슨이 둘의 대화 내용을 알 수는 없을 텐데도 슬쩍 곁눈질을 하는 걸 보면 필상의 시선이 꽤나 의식된 듯 보였다.

쉬이익!

왓슨은 공이 깨져라 힘차게 드라이브를 휘둘렀다.

다행히 정타를 만들어 냈지만 필상은 이미 느낄 수 있었다. 비거리가 턱없이 모자랄 것이라고.

하지만 타이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긍정적인 말을 뱉었다.

“제법 많이 나가는데?”

“겨우 벙커에 들어가겠네요.”

“짧은가?”

“네. 페어웨이에 떨어졌다면 런까지 보태 370야드 정도 굴러갈 타구입니다.”

필상의 너무도 확정적인 말에 타이거는 일단 지켜봤다.

지금껏 수많은 스윙을 봐 왔기에 임팩트만 봐도 대충 비거리가 짐작된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여건까지 고려해야 할 상황이라서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일단 결과를 보고 지적할 생각이었으나 할 말을 잃었다. 힘차게 뻗어 나가던 타구가 급격하게 떨어지더니 겨우 나무를 건너 러프에 떨어졌고 결국 벙커에 기어들어 가고 말았다.

비가 오는 날의 벙커는 가급적 피해야 한다.

물기에 얼마나 젖었는지에 따라 샷의 결과가 제각각이라서 컨트롤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왓슨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지만 벌게진 얼굴이 속마음을 짐작케 했다.

“굿 샷!”

마지막으로 타석에 들어선 타이거는 3번 우드 티샷을 했다.

그런데 아주 묘하게도 필상의 공과 거의 근접한 위치였다. 마치 함께 움직이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친 것처럼.

“괜찮았나?”

“그렇기는 한데, 따라 하기 있습니까?”

“따라 하는 것도 재주잖아. 하하하.”

“일부러 오너를 넘길 수도 없고……. 너무 편안한 전략을 짜 오신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고. 벙커에 빠진 왓슨도 치기 불편한 위치는 아니잖아.”

“과연 그럴까요?”

남은 세컨샷 거리가 누가 짧은지 아주 애매했다.

때문에 필상이 먼저 피칭 웨지를 들었다. 같은 거리라면 후배인 자신이 먼저 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남은 거리는 152야드, 문제는 바람이나 비의 저항을 얼마나 봐야 하는지 참조할 수 있기 때문에 나중에 치는 선수가 유리한 것은 분명했다.

제법 강한 맞바람을 느낀 필상은 170야드를 상정하고 샷을 했다. 충분히 본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짧아 그린 앞부분에 떨어졌다.

예상보다 비거리가 적게 나간다는 것을 확인한 타이거는 씩 웃어 보이며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했다.

하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참! 길 안내를 해 줘도 집을 못 찾아가십니까?”

“그러게. 자네 임팩트가 나보다 좋다는 걸 깜빡했어.”

“퍼팅은 먼저 하십시오.”

“길고 짧은 건 재 봐야 알지.”

“제가 더 가까워요.”

“시력이 대체 얼마야?”

“벌써 노안이 온 겁니까? 제가 20cm 더 가까울 겁니다.”

이번 말도 쉽게 믿기지 않았다.

필상은 약간 좌측, 그리고 자신은 오른쪽으로 밀렸기 때문에 자신이 더 가까워 보였다. 물론 인간의 시력은 때로 자기 본위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허! 정말 치기 어려운 라이네.”

“비실비실 굴러 들어갔고 모래가 젖어 내리막에 멈춰 설 확률이 높았거든요.”

“벙커의 경사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첫날 1온을 하려고 유심히 봐 뒀죠.”

아무리 그래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통상 대부분의 선수들은 벙커의 상태까지는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왓슨의 벙커샷이 실행되었다.

그런데 모래를 깊게 파고들지 못한 클럽페이스가 공을 직접 강타하면서 벙커 턱에 맞은 공이 탈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모래가 생각보다 딱딱한 모양이네.”

“스윙이 너무 완만하게 들어가 의도한 지점보다 뒤에 떨어져 그런 겁니다.”

“그런가?”

똑같이 주의를 기울여 지켜봤다.

그러나 모래 탓을 하는 타이거와는 달리 필상은 아주 정확한 해설을 내 놨다. 도무지 인간의 시력으로는 확인되지 않을 찰나였는데,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왓슨의 표정은 이미 누렇게 떴다. 기껏 1온을 시도했는데 잘라 간 것보다 더 아픈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저것도 대충 치면 안 되는데…….”

“왓슨이 저 정도는 꺼낼 수 있을 거야.”

“꺼내기만 하겠다면 상관없지만 자꾸 핀을 의식하잖습니까! 저래서는 좋은 스윙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필상의 예상이 적중하는 걸 보며 타이거는 잘 참았다고 생각했다. 나름 바짝 집중한 것처럼 보였으나 왓슨의 타구는 벙커 턱을 맞고 겨우 프린지에 올라섰을 뿐이다.

그런데 왓슨의 11야드 퍼팅은 또 다시 부담스러운 위치에 서 버렸다. 오후라서 잔디가 자라기도 했고 물기에 젖어 잘 구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린 스피드가 엉망이네!”

“운이 좋으십니다. 왓슨이 아니었다면 형도 짧았을 텐데요.”

“그럼 넌?”

“물론 저는 행복하죠. 2번이나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린에 올라서 보니 우길 수 없을 만큼 필상의 공이 더 가까웠다. 그걸 인정한 타이거의 6야드 퍼팅이 또 짧은 걸 보며 필상은 거리를 정확히 맞췄다.

하지만 생각보다 라이가 더 안 먹어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공이 까딱까딱 거리더니 지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첫 홀부터 기선 제압에 성공한 것이다.

-아! 저게 대체 뭐죠?

-과감하게 밀어야 하는데, 정신이 없나 봅니다.

-버바 왓슨. 저렇게 소심한 성격은 아니잖습니까!

-상대가 상대니 만큼, 또 장타를 자랑하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그 아쉬움을 아직도 떨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3야드가 조금 모자라는 거리이기 때문에 뒷벽을 맞춘다는 느낌으로 과감하게 밀었어야 하는데, 홀컵 앞에 그냥 서 버려 결국 더블보기를 기록하고 말았다.

프로들은 더블 이상의 스코어를 적는 걸 치욕이라고 생각하기에 그의 표정은 완전히 거무죽죽하게 죽고 말았다.

“남의 일 같지가 않군!”

“엄살은 그만 부리시죠. 아무리 그래도 흔들릴 제가 아니니까요.”

“그나저나 필은 잘하고 있나 모르겠네.”

“JPK 사단이 내일 함께 운동하려면 필 형보다 형이 더 분전해야 할 겁니다.”

“필 형의 샷이 그렇게 좋은가?”

“적어도 트러블 샷에는 일가견이 있잖습니까!”

“으음……. 알았어.”

1번 홀에서 호되게 당했으면 겉치레를 버렸어야 한다.

하지만 필상과 타이거가 안전하게 페어웨이를 공략한 반면 왓슨은 또 다시 1온을 노렸다.

“복구하려다 더 망가질 텐데 왜 저러죠?”

“이번에도 짧을까?”

“일단 1번 홀과 방향이 같습니다. 그린 뒤의 건물 때문에 세컨샷은 바람의 영향을 덜 받지만 티샷은 어림도 없습니다.”

작정하면 400야드 이상도 때릴 수 있는 왓슨이다.

그러나 비거리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본인도 더 강하게 칠 생각에 그만 몸이 먼저 돌아 악성 슬라이스 구질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의 캐디가 갤러리들에게 조심하라는 ‘볼!’을 외치는데, 차마 눈 뜨고 보기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챔블리. 지금 왓슨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좀 해 주시죠?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할 뿐, 아무 생각이 없을 겁니다. 나중에 녹화 영상을 보며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되겠지요.

-그래도 PGA를 대표하는 베테랑 선수 중에 한 명인데, 경험이 많은 선수도 저런다는 게 믿기지가 않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 저럴 수 있습니다. 저도 과거 투어프로 시절에 파 4홀을 9타 만에 벗어난 적도 있고 골프 황제라는 타이거 우즈라고 왜 그런 경험이 없겠습니까! 너무 과하게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 제가 좀 흥분을 했네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아마추어들이 자주 보이는 그런 저열한 실수를 목격하다 보니 순간적으로 너무 실망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인정하는 듯했으나 프랭크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아마추어’라는 표현으로 그를 2번 죽이고 말았다.

전문가인 챔블리는 객관적인 입장을 고수해야 하지만 자신은 일반 골프 팬과 크게 다르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이었다.

왓슨의 타구는 우측 나무숲으로 들어가 아예 3번 홀 골짜기까지 굴러갔다. OB나 해저드가 아니기 때문에 공을 찾은 그는 레이 업을 위한 공간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정면이나 좌측으로는 아예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7시 방향에 열린 공간이 보였지만 그는 샌드웨지를 들었다.

“어허!”

“띄울 수 있지 않을까?”

“공을 정확히 맞추기도 힘들 텐데요!”

그의 공은 러프도 아닌 갈대 사이에 끼어 있어 클럽페이스가 얇으면 제대로 임팩트를 가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가까이 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을 마치 본 것처럼 언급하는 필상을 보며 타이거는 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것은 알고 있지만 인간의 시력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왓슨은 거의 헛스윙에 가까운 허무한 샷을 하며 갤러리들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다.

“충격이 오래갈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일단 꺼내고 4온이라고 해야죠.”

“4온? 제2의 매킬로이가 나오겠군!”

“왓슨의 경우는 저와 무관합니다. 과욕이 부른 참사지요.”

“그 말이 옳지만 과연 그도 그렇게 생각할까?”

“참 답답하네요.”

타이거의 말이 맞다.

스스로 무너진 경우지만 그런 황당한 시도를 하게 된 이유가 필상의 첫 라운드를 지켜보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다닥!

그냥 7시 방향으로 치면 될 걸, 조금이라도 그린에 가깝게 보내 1퍼팅 보기를 의식한 것 같다. 그래서 10시 방향으로 때렸는데, 나뭇가지에 맞고 말았다.

특이한 것은 무려 3번이나 나무를 연속으로 맞춘 공이 희한하게도 3번 홀 레이디 티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그곳으로 치라면 절대 불가능했을 아주 기이한 방향이 나온 것이다.

“공간이 열렸네요.”

“저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본인을 위해서도 좋죠. 사실이기도 하고요.”

뒤를 이어 타이거와 필상의 순서로 세컨샷이 진행되었다.

핀이 우측의 거대한 벙커에 바짝 붙어 있고 맞바람까지 있어 홀컵에 붙일 엄두는 두 명 모두 내지 못했다.

파라도 기록하면 만족할 홀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문제는 치마도 입지 않은 왓슨이 레이디 티에서 쳐낸 73야드 칩샷이 또다시 벙커에 들어가고 말았다는 점이다.

마치 프로암에 참가한 아마추어와 같은 연속된 실수에 그의 얼굴이 벌겋다 못해 거멓게 변해 갔다.

그래도 진정해야 하지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봐도 이성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냥 경기를 포기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파악!

이번 벙커샷도 공의 위치는 좋지 못했다.

하지만 분노의 샷이었던가, 프로의 자존심이었던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린 타구는 홀컵을 향했고 안전하게 넣을 수 있을 가까운 지점에 붙었다.

안타까웠던 갤러리들의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지만 그의 굳어진 표정은 좀처럼 풀릴 것 같지 않았다.

5온 1퍼팅. 2개 홀에서 4타를 잃은 왓슨은 졸지에 리더 보드에서 이름이 사라졌다.

그나마 파 3인 3번 홀에서 파를 적어 낸 그가 다시는 무리한 시도를 감행하지 않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네요. 먹구름이 짙어 어둑어둑한 이런 상황에서 경기를 지속하는 게 가능할까요?

-너무 지나치면 불공평한 상황이라서 주최 측이 고민에 들어갔을 것 같습니다. 다만 내일도 날씨가 좋다는 보장이 없어 그게 문제로군요.

-예비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비나 바람 때문에 경기를 중단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뇌우경보라도 내린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소식은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방금 전에 우리 공 프로 세컨샷을 보면 정말 터무니가 없었잖습니까!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요?

필상의 조가 이제 겨우 6번 홀을 끝낸 상황이다.

첫 팀은 이미 경기를 끝냈고 그들의 성적이 딱히 좋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부정하기 힘든 것은 지금 경기를 하고 있는 선수들에게는 불리한 환경이라는 것이다.

완벽한 아이언샷을 구사하는 필상의 148야드 컨트롤 샷이 갑자기 불어온 돌풍의 영향을 받아 벙커에 빠져 버렸다.

하필 라이도 엉망이라서 겨우 꺼내 보기를 적어 내는 장면은 바람이 부린 심술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별다른 공지가 없었기에 경기는 지속되었다.

“아! 이거 정말!”

아너로 나선 타이거의 3번 우드 티샷은 나무랄 데가 없는 최선의 스윙이었다. 하지만 멀쩡히 잘 날아가던 공이 탄도가 낮았음에도 우측으로 휙 밀려 나무숲에 기어들어 가고 말았다.

어이가 없다고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는 결과였다.

물론 좌측으로는 여유가 꽤 많지만 그 방향을 유지하면 502야드에 불과한 파 5홀에서 2온을 노릴 수 없어 지난 이틀 동안 필상도 지금 타이거의 샷처럼 최대한 우측의 나무 경계선에 바짝 붙는 공략을 해 왔다.

하지만 지금 벌어진 그 참혹한 결과를 보고도 차마 그런 시도를 할 수는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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