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버바 왓슨
[꿈의 58타! 메이저 대회의 새 역사를 쓰다]
[상상하기 어려운 장타력, 거기에 정확성까지! 미스터 퍼펙트라는 닉네임은 과장이 아니었다]
[현재 2위와 더블 스코어. PGA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나?]
이제 겨우 첫 라운드를 끝냈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스포츠 언론들은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필상의 경기 내용과 기록을 앞다퉈 다뤘다. 기존의 입장 따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완전히 칭찬 일색인 곳도 보였다.
“공 프로님 의도대로 됐네요.”
“이게 다 대표님이 도와주신 덕분이죠.”
“그런 말씀 마세요. 전 전반이 끝날 때까지도 마음을 졸이면서 지켜봤어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운이 좋았습니다.”
“그건 아니죠. 오히려 몇몇 샷은 너무도 불운했지요. 그런데도 모두가 깜짝 놀랄 기록을 쓰다니, 정말 자랑스러워요.”
경기를 마치고 늦은 점심을 나누던 중이었다.
이 대표는 곧 다가오는 TPK 컴퍼니 오픈 일정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다. 하지만 필상의 경기는 빼놓을 수 없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했다.
직접 경기를 함께한 필상이나 미사키와 달리 갤러리들 사이에서 응원한 그녀는 마음을 졸였다고 고백했다.
“끝날 즈음에는 팬들의 반응이 처음과는 좀 달라진 것 같던데, 현장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말이 필요 없죠. 전 NBC 골프 중계를 함께 들었는데 갑론을박이 아주 극심했어요. 이전에는 대세에 눌려 말을 아끼던 사람들이 이제야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거죠.”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런데 설마 나흘 내내 오늘처럼 칠 건 아니죠?”
“물론입니다. 이제 타수를 벌려 놨으니 전략적인 공략을 해야죠. 어차피 저 때문에 코스 세팅이 바짝 어려워질 겁니다.”
“그럴 것 같아요. 언더파가 거의 나오지 않도록 심술궂은 아주 빡빡한 설정을 할 것 같아요.”
첫날 전체적으로 스코어들이 잘 나오기는 했다.
그래 봐야 평균 타수가 1타 차이도 나지 않는 수준이었으며 선두권의 성적은 평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로지 -14를 때린 필상만 고고한 위치에 올라섰을 뿐.
오후에 연습 라운지에서 내일을 위한 샷을 준비하는데, 상당한 선수들이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다가오는 이들은 없었다.
딱히 거부할 이유도 없는데 지레짐작 차갑다는 인상이 강한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뒤 미켈슨이 먼저 나타났다.
호탕한 성격의 그가 연습장에 도착한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방팔방 떠들썩하게 인사하며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가 향한 곳은 역시 필상의 곁이었다.
“오늘 아주 날을 잡았더군!”
“형은 오늘 어땠습니까?”
“-5면 괜찮았지. 물론 콩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하하하.”
그는 나름 만족한 것 같았다.
샷 교정을 받은 뒤, 아니 자신감을 회복한 뒤 이뤄진 실전 첫 라운드에서 원하는 대로 플레이가 잘 이뤄졌던 모양이다.
그전 같으면 필상의 성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을 텐데, 곧바로 연습을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를 통해 필상과 안면을 트려던 몇몇 선수들이 눈치만 보다가 그냥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30여 분이 지나자 타이거가 도착했다. 그 역시 표정을 보건데 오늘 경기가 잘 풀린 듯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살살 좀 해.”
“하하. 성적부터 알려주시죠.”
“-7. 공동 2위야. 괴물 같은 선두와 더블스코어라는 게 씁쓸하지만.”
“이제 겨우 하루를 쳤을 뿐인데요, 뭘.”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의외로 타이거는 담담했다.
필상의 기가 막힌 성적을 따라잡는 걸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남은 라운드에서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미켈슨처럼 그도 곧이어 연습을 시작했기에 뭔가 찜찜했지만 필상도 이내 잡념을 버리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2라운드에 임한 필상은 마치 어제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플레이했다. 빵빵 때리던 드라이브는 단 2개 홀에서만 잡았고 나머지는 3번 우드로 대치하며 정확한 샷을 구사했다.
그 이유는 악마의 코스 세팅도 영향을 미쳤지만 갑자기 거세진 바람도 한몫을 했다. 티 박스를 조금 옮기고 핀의 위치를 변경했을 뿐인데, 종잡을 수 없는 바람까지 합세하자 참가하는 선수들의 실전 감각은 현격한 차이가 났다.
물론 필상은 어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 크게 앞서가고 있는 입장이라서 구태여 무리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게 더 무서웠다.
-오늘 공 프로의 플레이를 보노라니,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사람 같습니다.
-하하하! 너무 냉정한 경기 운영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나 보군요. 하지만 그의 플레이를 꼼꼼하게 살펴보면 아마추어들도 크게 도움이 될 표준적인 플레이가 엿보입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시죠?
-확실하지 않으면 모험을 하지 않습니다. 어제는 온 그린이 어렵고 실수하면 치명적인 손해를 보는데도 그걸 무시하는 듯 공격적인 공략을 했습니다만, 오늘은 아예 꼬투리가 잡히지 않을 안전한 공략만 시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타수를 잃는데, 그렇게 공략하기 때문에 2위와의 간격을 더 벌리는 거군요.
-당연히 투어프로라면 코스 세팅에 따라 변화무쌍한 적응을 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공 프로의 플레이는 절대 루키라고 볼 수 없는 거죠.
버디를 잡기 위해서는 티샷부터가 중요했다.
그저 페어웨이를 지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세컨샷을 날리기 좋은 위치로 보내면 그때는 핀을 노렸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실수할 가능성이 있으면 그냥 안전하게 공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상은 버디 6개, 보기 1개로 5타를 줄였다. 코스를 어렵게 세팅한 이유가 바로 자신 때문인데, 그로 인해 손해를 보지 않은 사람은 오로지 필상뿐인 것 같았다.
2라운드에 임한 149명의 선수 중에 언더파가 단 9명만 나왔는데, -2가 3명이고 -1이 5명이었던 것이다.
-왜 타이거 우즈가 극구 그를 자꾸 칭찬하는지 이제는 확실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제 겨우 절반을 지났는데 너무 이른 평가 아닌가요?
-어허! 이제 그만하시죠, 프랭크. 어제 하루 제가 평생 들었던 지탄보다 더 많은 비판을 받은 것 같습니다.
-팬들의 반응이 너무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전문가로서 자신의 견해를 밝혔을 뿐인데,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절대 좋아 보이지 않았거든요.
-편견을 가졌던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실이었고요 그가 앞으로 얼마나 성장하는지 긍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생각입니다.
-19 공필상
-8 타이거 우즈, 버바 왓슨
-7 조던 스피스, 필 미켈슨, 브룩스 코엡카
타이거가 1타를 줄였고 미켈슨은 2타를 줄였지만 공동 2와 필상의 타수 차이는 무려 11타였다. 역대 메이저 대회 예선을 마친 결과 중에 가장 큰 타수라는 진기록도 작성했다.
날씨가 좋지 않다는 일기예보가 나온 마당이지만 역전에 대한 언급이 그 어느 곳에도 없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2라운드에서 보여 준 필상의 완벽한 플레이는 그런 상상조차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일부터는 스케줄이 비슷해 좋네요.”
“그게 참 난감하네.”
타이거는 말없이 씩 웃었지만 대답은 앞 조에서 출발하는 미켈슨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왜요? 제가 어떻게라도 할까 봐 그러십니까!”
“그게 아니라 최종 라운드에서는 나랑 만날 것 같아서 그러지. 하하하!”
“자랑 같기도 하고 은근한 도발처럼 들리기도 하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말을 하는 필상의 시선은 타이거에게 꽂혀 있었다. 미켈슨이 필상과 동반 라운드를 하는 타이거나 왓슨이 애를 먹을 것이라고 역설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타이거의 입에서는 엉뚱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필. 내일 저는 내 플레이에만 신경 쓸 겁니다. 애당초 이 친구는 제켜 뒀기 때문에 영향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처음 만나는 왓슨은 혹시 모르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될까? 예선 컷 탈락을 당한 매킬로이처럼 길고 어두운 터널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냐고!”
“매킬로이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우리는 이미 적응되어 있잖습니까! 알면서도 당할 수는 없지요. 그래도 제가 명색이 현역 최다승 프로인데!”
“아이고 잘나셨어. 최다승을 못한 나를 또 그렇게 패나?”
“하하하. 그런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볼 때 저보다 필이 더 잘 버텨낼 것 같습니다. 대범한 성격상.”
“뭐야?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필상은 잠자코 들었다. 두 사람이 이미 자신에 대한 많은 대화를 나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적어도 비겁한 뒷담화는 아닌지라 더는 듣지 않고 타석에 들어서 먼저 연습을 시작했다. 물론 귀는 열려 있었던 터라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접했다.
가급적 우승하기 위해서는 필상의 대회 출전 스케줄을 미리 파악해야 한다는 말을 나눴는데, 그 느낌이 아주 묘했다.
필상과 함께 출전하면 우승할 가능성이 뚝 떨어진다는 말을 타이거가 그렇게 쉽게 꺼내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
타이거와 필, 누가 뭐래도 현역 최고의 선수들이 아니겠는가! 그런 그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 * *
“어딜 갔다 오는 거야?”
“장비를 좀 더 챙겼어요.”
“장비?”
“일기예보가 틀릴 것 같아서요.”
결선 3라운드에 비가 흩뿌리는 궂은 날씨라는 예보가 있었다. 바람은 영향을 미치겠지만 강우량은 상관이 없을 것 같았는데 정오가 가까워지자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졌다.
그래서 미사키는 갈아입을 바람막이와 장갑, 그리고 마른 수건을 여유 있게 마련하러 다녀왔던 것이다.
그 얘기를 들은 필상도 잠시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며 하늘을 한참 쳐다봤다. 그저 막연하나마 뭔가 느낌을 얻기 위해서였는데, 기이하게도 갑자기 등에 소름이 돋았다.
‘번개?’
우중 경기는 여러 번 경험했다.
충분하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조심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기이한 느낌이 들어 확인이 필요했다.
“미사키. 아니야. 이건 이 대표한테 확인해야 할 것 같아.”
“뭔데요?”
“혹시 오늘 뇌우경보가 있는지 기상예보를 정확히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
“제가 연락드릴 게요. 연습하세요.”
“시시각각 변할 수도 있으니까 정기적으로 체크하라고 해. 30분 간격으로.”
“네.”
필상이 너무 과민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미사키는 고분고분 따랐다. 아무 이유도 없는 그런 지시를 내릴 필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시 후에 들어온 정보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번개만 치지 않는다면 아무리 굵은 비가 내려도 그 정도는 이미 극복할 자신과 요령을 갖췄기 때문에 일단은 안심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께름칙했지만 드디어 티오프 시간이 되었고 타이거와 함께 1번 홀로 향한 필상은 그 유명한 버바 왓슨과 안면을 텄다.
1978년생인 그의 이름 앞에 항상 붙는 표현은 ‘장타자’다. 평균 드라이브 비거리 310야드를 넘기며 더스틴 존슨, JB 홈스와 함께 PGA 3대 장타자로 인정받던 선수다.
카메론 챔프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지만 거리에 마음을 비운 더스틴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장타를 뽐내고 있다.
“정식 인사는 처음이군요. 반갑습니다. 왓슨.”
“미스터 퍼펙트. 당신의 경기는 정말 대단하더군요. 특히나 그저께 보여 준 엄청난 퍼포먼스는 아주 감명 깊게 봤습니다.”
“그렇게 봐 주셨다니 영광입니다.”
191cm의 큰 키를 자랑하는 전형적인 거구의 백인 프로다. 평소 표정이 밝은 선수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선 그의 인상은 의외로 차갑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필상이 등장하면서 그의 수식어와 같은 장타자의 유명세가 자취를 감춘 것과 무관치 않은 듯 보였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묘한 승부욕이 엿보였다.
필상은 구태여 그 점을 주목하지 않았으나 보기에 딱했는지 타이거가 장타에 관련된 이야기를 은근슬쩍 꺼냈다.
“왓슨. 자네가 가장 성적이 좋았던 시기에는 오히려 티샷 비거리가 줄었던데, 그렇지 않던가?”
“하하하.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지만 저도 PGA 13승을 거둔 나름 베테랑입니다.”
“아! 내가 실례를 했나 보네. 나도 한때는 장타자로 알려졌던 선수인데 괴물 같은 자네들과 함께 시합할 생각을 하다 보니 거리로 승부를 해서는 안 되겠더라고.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잘해 보자는 의미였어. 흘려듣게.”
“어차피 날씨가 좋지 못해 무리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타이거의 마지막 말에 그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정말 장타로 승부하지 말라는 것인지, 그런 말을 듣고도 장타를 때리지 않는다면 실망스럽다는 것인지 순간 헷갈렸다.
그러나 그의 본심이 어땠는지는 금방 드러났다.
아너로 나선 필상은 드라이브는커녕 5번 유틸리티를 잡고 정확히 270야드만 공략했다. 물론 페어웨이를 정확히 지킨 안전한 공략이었다.
그런데 2번째 주자로 나선 왓슨은 필상이 첫날 봤던 그 방향대로 어드레스를 했다. 직선거리는 381야드, 물론 그가 작정하고 때린다면 못 올릴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날과 지금 상황은 많이 다르다.
빗줄기가 타구를 무겁게 만들고 바람의 방향도 수시로 바뀌는데 대체 뭘 믿고 그러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공. 나도 한 번 1온을 노려볼까?”
“하하.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1달러 걸겠습니다.”
“에헤! 겨우 1달러?”
“얼마를 걸든 1온 시도를 하지 않을 텐데, 제가 모르는 다른 의미라도 있나요?”
“아니야. 내가 저 친구 꼭 저럴 것 같아서 끼어든 건데……. 자네한테 잠재울 수 없는 호승심이 느껴지나 봐.”
“깨져 봐야 느끼겠지요. 굉장히 아플 텐데! 여하튼 저도 이런 상황에서는 절대 1온 시도는 하지 않을 겁니다. 비바람이 없다면 혹시 모를까!”
“그러니까 말이야.”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