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화끈한 라운드
따악!
비교적 강한 스윙의 결과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 너무 높이 뜬 게 아닌가 싶었지만 남다른 장타력을 갖춘 필상의 샷이었기에 모두들 타구를 쫓느라 여념이 없었다.
앞뒤 폭이 좁은 까다로운 그린이지만 정확히 핀 하이로 날아가는 장면은 심장의 박동 수를 키웠고 감탄을 자아냈다.
워낙 높이 띄운 탓에 약간 긴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이미 수차례 보여 줬듯이 상당한 거리에서도 강력한 백스핀을 먹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구의 궤적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돌연 비명이 터졌고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쥐어뜯는 이들도 보였다.
타앙!
하필이면 타구가 깃대에 맞아 버렸던 것이다.
얼마나 정확하게 공략했는지 정면으로 튀어 나온 공은 그린 앞의 깊은 벙커로 기어들어 가고 말았다.
“어허!”
“이거 정말 너무하네요!”
“어쩔 수 없지 뭐. 일단 가서 보자고.”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만큼 샷 감이 좋았다.
하지만 그 먼 거리에서 깃대를 정면으로 맞추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와우!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죠?
-뭘 말입니까?
-18번이 파 5홀이기 때문에 이번 홀에서 버디를 잡는다면 18홀 최저타 기록 갱신이 가능했던 거 아닌가요?
-그래서 골프가 어렵다는 겁니다. 오늘 최고의 컨디션을 보이고 실제 마인드 컨트롤도 흠 잡을 데가 없지만 기록이라는 것은 본시 쉽게 깨지는 게 아닙니다. 저도 안타깝지만 운이 거기까지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래도 너무 아쉽네요.
캐스터 프랭크는 정말 안타까워했다.
스코어가 잘 나오지 않는 메이저 대회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역사에 남을 한 장면을 지켜보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기에 마치 자기 일처럼 아쉬워했다.
그래서인지 그 와중에도 자신을 납득시키려는 챔블리가 얄밉기까지 했다. 더 이상 뭘 어떻게 잘 칠 수 있단 말인가!
“벙커 턱이 제법 높아요.”
“응. 무리하지 말고 그냥 올려야겠네.”
깃대를 맞고 튀어나온 공은 하필 턱 바로 아래에 위치했다. 모래에 파묻히지는 않았지만 깃대의 위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어 핀에 붙이는 것은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웬만하면 공격적인 공략을 구상하는 필상이지만 일단 올리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이미지를 그린 필상은 과감한 벙커 샷을 구사했다.
클럽페이스를 완전히 열고 깊이 푹 담근 클럽페이스에 묵직한 느낌이 전해질 만큼 많은 양의 모래를 퍼 올렸다.
“굿 샷!”
“와아아아! 인 더 홀!”
불운을 딛고 멋진 샷을 만들어 낸 필상의 귀에 팬들의 뜨거운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런데 그 소음의 끝에 아주 미묘한 소리가 딸려 왔다.
팅!
그림처럼 떠오른 타구가 홀컵을 향할 때만 해도 또 다시 깃대를 맞춰 버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운이 좋았다면 그냥 홀컵에 빨려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런 행운은 따라오지 않았다.
-아! 진짜. 허 위원님. 이건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닌가요?
-저도 스핀이 걸려서 홀컵에 떨어질 줄 알았습니다. 하필 바운드가 떠올랐을 때 깃대에 맞는 바람에, 참 골프 뜻대로 안되는군요!
튀어나온 공은 제법 먼 퍼팅 거리를 남겼다. 오르막이지만 5.5야드의 애매한 거리에 라이도 복잡한 더블 브레이크였다.
연이은 불운을 겪은 필상도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벙커샷을 하면서 큰 욕심을 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샷을 마친 느낌은 아주 좋아 최소한 핀에 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약하게도 타수를 잃을 상황이 되어 버렸다. 동반자들이 어프로치를 하는 동안 깊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필상은 모든 감각을 끌어올려 라이를 살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퍼팅은 들어가지 않았다. 될 때는 보는 대로 착착 들어가던 것이 안 되려니 뻔한 경사를 무시하고 그냥 흘러 버렸다.
-제가 너무 오두방정을 떨었나요?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 공 프로는 최선을 다했지만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 걸 어떡하겠습니까.
-티샷도, 벙커샷도 아주 좋았잖습니까! 그런데도 타수를 줄이기는커녕 잃다니요! 이건 정말 너무 억울한 것 같습니다!
허 위원도 격하게 맞장구를 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어차피 벌어진 일, 한탄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고 아직 기회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12로 내려섰지만 마지막 홀은 필상이 충분히 2온을 노릴 수 파 5홀이다. 오늘같이 티샷 컨디션이 좋다면 얼마든지 이글을 기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힘내! 공 프로!”
“그래. 잘하고 있는 거야. 절대 기죽지 마!”
18번 홀로 이동하는 필상에게 한국어 응원이 쏟아졌다.
전 홀에서 보기를 기록하며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한 교민들의 따스한 격려였다. 손이라도 흔들어 보이고 싶었지만 최대한 자제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배려가 아니라 당당히 실력을 보여 주는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532야드에요.”
“3번 우드.”
“좋아요!”
드라이브를 요구하지 않는 필상을 보며 미사키는 미음이 아팠다. 만약 지난 홀에서 파라도 기록했다면 훨씬 편한 상태로 이 홀에 들어섰을 게 아닌가.
그랬다면 버디는 물론 이글도 충분히 낚을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속이 상했다. 괜히 자신이 제 역할을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전혀 근거가 없는 자책이다. 냉정하게 따져 보면 -12만 기록해도 월등한 단독 선두가 될 가능성은 농후했다.
마음이 불편한 이유도, 그런 기색을 드러내 필상에게 부담을 주는 것도 싫어 우드를 건네는 그녀는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다.
“왜 울상이야?”
“네? 웃는 건데요!”
“웃는 거라고? 하하하. 이만하면 우리 잘하고 있는 거잖아. 그니까 마음 편하게 먹어.”
“알았어요.”
“그럼 마음도 시원하게 비워.”
“알았다니까 왜 자꾸 그래요.”
“어째 나보다 더 긴장하는 것 같아서 그러지. 널 이렇게 구박하면서 긴장을 풀고 여유를 찾아보려고. 하하하.”
“그렇다면 계속 구박하셔도 괜찮아요.”
“농담이야. 이럴 때 농담을 해야지 언제 하겠어. 하하하!”
말은 그렇게 했지만 티 그라운드에 들어선 필상의 표정에는 찬 서리가 풀풀 날렸다. 미사키에게는 마음을 비우라고 했지만 자신은 절대 그럴 용의가 없었다.
독하게 마음먹고 공격적인 티샷을 구사했다. 3번 우드라고 방향성만 신경 쓴 것은 아니었다. 풀스윙을 강행했고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가용한 최대한의 힘을 타구에 실어 보냈다.
그리고 사람들은 또 한 번 경악했다. 평범한 우드 샷 궤적처럼 보였지만 쭉쭉 뻗어 나가는 타구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파 5홀치고 장타자에게 긴 전장은 아니지만 페어웨이의 폭이 20야드도 되지 않고 좌우의 러프가 무척 길고 거칠뿐더러 나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선택을 강요한다.
장타를 칠 것인지 정확한 샷을 구사할 것인지.
3번 우드를 들고 올라간 필상은 장타보다 방향에 주력한 것이라고 생각하던 팬들은 342야드를 보낸 필상의 타구가 페어웨이를 정확히 가르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하하.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전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우드를 잡아 안전하게 가려는 건 줄 알았는데, 역시 진격의 공 프로네요!
-저 정도면 굳이 드라이브를 갖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요? 앞선 선수가 드라이브로 보낸 거리보다 40야드를 더 보낸 걸 보면 클럽 하나 정도는 접어줘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자! 이제 남은 거리는 191야드, 멋지게 붙여 이글로 마무리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글이요? 아! 타이기록이라도 기대해 봐야겠네요.
파 5홀은 3온을 기본으로 세팅되는 홀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프로들의 비거리가 증가하고 실력도 상향평준화가 되어 난이도를 높이려고 페어웨이를 좁게 만들거나 장애물을 세팅한다.
그러나 필상의 3번 우드 샷은 그런 시도가 무색할 만큼 정확했고 또한 거리마저 입이 쩍 벌어질 만큼 무지막지했다.
“7번 아이언.”
“또 핀을 바로 노리려고요?”
“응. 또 한 번 깃대를 맞춰 보려고.”
“만약 맞추시면 제가 뭐든 다 해 드릴게요.”
“뭐든?”
“네. 뭐든.”
의욕을 불어넣는 것은 좋지만 너무 위험한 발언이다. 물론 그만큼 필상을 신뢰하기 때문이겠으나 필상의 입가에는 기묘한 미소가 걸렸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그만큼 어려운 도전이라는 말도 된다.
“좋아. 나중에 후회하기 없기다.”
“네. 멋지게 붙여 보세요.”
깃대가 우측 벙커에 바짝 붙었기 때문에 짧거나 길면 다시 벙커에 빠진다. 방금 전에 벙커 샷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어 심리적 압박감이 클 수밖에 없다.
때문에 캐디인 미사키는 그린 중앙을 보라고 권하는 것이 나름의 역할이다. 그러나 그녀도 누구 못지않게 -14를 보고 싶었다.
태국에서 1번, 한국에서도 1번 기록을 세웠지만 미국 땅에서 또다시 -14를 기록한다면 필상을 바라보는 전 세계 골프팬들의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페이드를 걸자!’
스트레이트로 쳐도 거리, 방향 모두 자신이 있다.
하지만 우측으로 흐르는 그린 경사를 감안해 보다 안전한 공략을 고려하던 필상이 좀처럼 쓰지 않는 페이드 샷을 연상하자 뜻밖에도 아주 선명한 이미지가 맺혔다.
너무 뚜렷해 오히려 슬쩍 의심이 들 정도였으나 침착하게 스윙 루틴을 밟은 7번 아이언 샷의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처음에는 머금은 힘을 주체하기 힘들었는지 타구가 일직선으로 쭉쭉 뻗어 나가는 듯했으나 하강하면서부터 멋들어지게 휘기 시작했다.
-우우! 페이드를 걸었나 봅니다.
-네. 공 프로의 아이언 샷은 좌우 스핀이 거의 없는 거로 유명해 어떤 자들에게는 혹평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못하는 게 아니라 아꼈던 것 같습니다.
-아이고! 저게 그냥 들어갔어야 하는데!
갑자기 임 캐스터가 탄성을 터트린 이유는 그린에 떨어진 타구가 홀컵 바로 옆을 스치며 지나갔기 때문이다.
조금만 약했으면 떨어질 뻔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이 구른 타구는 또다시 애매한 6야드 퍼팅을 남기게 되었다.
그것도 오르막 뒤에 내리막 경사라서 힘 조절이 쉽지 않고 부담스러운 슬라이스 라이를 2컵 이상 봐야 할 것 같았다.
화려한 구질에 비해 샷의 결과는 썩 만족스럽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NBC 중계진도 이 장면에 대해 말이 많았다.
-만약 미스터 퍼펙트가 이걸 넣으면 PGA에서는 2번째로 나오는 -14 타이기록이 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무려 23년 만에 나오는 겁니다.
-최초 -14 기록은 메이저 대회가 아니었지요?
-그렇습니다. 모든 결과가 나온 뒤에 봐야겠지만 베스페이지 블랙코스가 세팅에 따라 난이도가 다양한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은 오늘 코스 세팅이 쉬워 이런 스코어가 나왔다는 말씀 같은데, 그건 아니죠. 만약 타이거나 존슨 같은 미국 선수가 이런 상황을 맞이했어도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프랭크!
본인 스스로도 적절치 않은 말이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중계방송의 오랜 짝꿍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반론을 제기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당황한 챔블리의 음성에는 은은한 분노마저 비쳤다.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라고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감정이 앞선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프랭크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누가 봐도 대단한 실력자를 두고 시시때때로 바뀌는 입장, 대체 누구의 무엇을 위해 그러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 말이 과연 틀렸나요? 챔블리도 잘 알고 있잖습니까! 작년에 프로 무대에 데뷔한 미스터 퍼펙트가 그동안 어떤 여정을 걸어왔는지 말입니다.
-으음! 뛰어난 선수라는 것은 저도 인정했잖습니까!
-제 귀에는 마지못해 그런 것처럼 들렸습니다. 국적, 인종을 떠나 시드를 받은 선수라면 루키든, 베테랑이든 똑같은 잣대로 평가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프랭크의 정확한 지적에 얼굴을 붉힌 챔블리의 모습이 화면에 잡히지 않도록 PD가 각별히 신경써야 할 타이밍이었다.
어찌 되었든 더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아니, 대답을 하다 보면 더 궁지에 몰릴 것 같다는 생각에 입을 닫고 말았다.
무심코 코스 세팅에 대해 언급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다른 선수들의 성적이 어떤지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다.
메이저 대회를 유치하기 위해서 주최 측은 여러 가지 테스트를 진행했고 턱없이 낮은 스코어가 나오지 않도록 조정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정말 아름다운 페이드 샷이었어요!”
“생각보다 많이 구르네. 좌우 스핀을 먹이면 그만큼 백스핀은 먹지 않는다는 걸 깜빡했어.”
“저 정도면 아주 훌륭하거든요! 자기 자랑은 그만하고 이제는 이글 퍼팅이나 생각하세요.”
“윽!”
칭찬이 과하다는 생각에 겸손 모드를 취하다가 도리어 한 방 제대로 먹었다. 추측컨대 너무 흥분하는 것 같아 마지막 퍼팅에 신경 쓰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래서 쓴웃음을 지은 필상은 치미는 전투 의지를 삭이고 이글 퍼팅에 대해 집중하기로 생각을 바꿨다.
‘최고점까지만 올리면 되나?’
투어 대회 그린은 엄청나게 빠르다.
특히나 해가 쨍쨍 뜬 정오가 다가올 무렵에는 내리막 경사는 극히 조심해야만 한다. 까딱 강하면 그냥 줄줄 흐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적이 감도는 그린에 홀로 서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필상은 침착하게 오르막까지 보낸다는 느낌으로 부드럽게 밀었다.
-됐죠? 됐죠?
-으음……. 네. 라이를 제대로 타기 시작했습니다.
-아아! 들어갔어요. 저 어려운 이글 퍼팅이 들어갔습니다! 자그마치 PGA챔피언십입니다. 허접한 대회가 아니고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