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공격 앞으로!
“허! 짧네!”
“샷을 끝까지 안 하셔서 그런 것 같아요.”
“맞아. 알면서도 그게 참!”
스핀이 걸리게 치면서도 그에 대한 확신이 적으면 이런 결과를 낳는다. 혹시 너무 길어 반대편 그린까지 굴러갈 것이라는 두려움이 휘둘러지는 클럽을 잡아당기는 것이다.
스스로 인정했지만 다른 요인도 작용한 결과다. 연속된 장타로 인해 그에 적응한 근육이 의도한 것보다 강하게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부담이 있었다.
이미 겪어 봤던 그런 부작용이 이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도 적잖은 소득이었다.
문제는 남은 5야드 퍼팅,
‘우측 한 컵 반!’
라이는 내리막 뒤에 오르막이라서 평지라고 생각해도 무방했지만 내리막에서는 라이가 먹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실제 퍼팅은 그렇지 않았다. 필상의 감각을 벗어난 공은 홀컵 왼쪽으로 빠질 듯이 굴러갔다.
아쉬움의 탄식이 나올 찰나, 좌측을 스칠 것 같던 공이 가장자리를 타고 270도 가량 빙그르르 돌더니 뚝 떨어졌다.
극적인 버디에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지만 쑥스러움을 감추기 힘들었던 필상은 그린을 벗어나며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전반을 훌륭한 성적으로 마친 기념이자 자신을 열렬히 응원한 팬들에 대한 예의였다.
“공 프로. 파이팅!”
“미스터 퍼펙트! 멋지다!”
한국말과 영어가 섞인 응원과 박수를 받으며 10번 홀로 이동한 필상은 역시 팬들의 마음은 순수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기득권이 애당초 없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골프를 멋지게 치는 선수에게 열광하고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 스타를 통해 만족감을 얻는다.
군계일학.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월등한 실력으로 무장한 동양의 한 선수를 지켜보며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생활에 지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우리 공 프로. 단단히 작정한 것 같지 않나요?
-PGA 챔피언십입니다. 거액의 상금이 걸린 WGC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이 대회는 감히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메이저 대회이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메이저 챔피언이라는 이름이 따라붙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더 마스터즈나 디 오픈과는 달리 US오픈은 내셔널 타이틀, 그리고 이 대회는 PGA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지니기 때문에 함부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 되는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불필요한 구설수에 오르내리지만 월요일부터는 최소한 실력을 의심하는 말을 하지는 못할 겁니다.
아직 우승한 게 아니다.
하지만 허 위원은 마치 우승을 맡아 놓은 것처럼 확정적으로 말했다. 물론 한국 팬들은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인코스는 아웃코스와 코스 세팅이 확연하게 달랐다.
10, 11, 12번 홀은 모두 430야드가 넘는 파 4홀이었기에 필상은 아예 3번 우드 티샷을 실행했다. 어차피 1온을 노릴 수 없다면 정확한 샷에 주안점을 두는 게 낫기 때문이다.
필상이 드라이브를 잡지 않자 아쉬워하는 팬들이 적지 않았으나 그들은 또 다른 전율에 탄성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3번 우드로도 300야드 안팎을 보낸 뒤, 깔끔한 아이언 샷으로 핀에 쩍 붙이는 세컨샷은 마치 안방을 휘젓고 다니는 호랑이처럼 당당했던 것이다.
-이거, 이러다 정말 큰일을 낼 것 같지 않나요?
-11번 홀에서 3m 버디 퍼팅을 놓친 게 아쉽지만 그래도 12번 홀까지 -11입니다. 전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사실 이제 어려운 홀은 16번 하나만 남지 않았나요? 그럼 더도 말고 4타만 더 줄였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제가 다 긴장이 되네요.
필상도 이렇게까지 훌륭한 스코어가 나올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명색이 메이저 대회인지라 -9만 쳐도 아주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몇 번의 행운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그러나 이제는 스코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사키. 남은 6개 홀, 어떡할까?”
미사키는 필상이 그런 질문을 던질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는지 흠칫했다. 그러나 대답을 망설이지는 않았다.
“공격하지 못할 이유가 있나요?”
“하하하. 좋아. 드라이브.”
13번 홀은 480야드 파 5홀이다.
티 박스에서 페어웨이까지 220야드의 골짜기를 건너야 하지만 그건 애당초 위험 요소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좁은 페어웨이다. 티 박스에서 그린이 저 멀리 보이는데 마치 밧줄을 늘어뜨린 것처럼 좁은 페어웨이는 장타를 치려는 선수에게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약한 마음이 찾아왔는데 미사키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공격 앞으로’를 외쳤다.
깡!
그나마 스리쿼터 스윙으로 방향성에 주목한 샷을 시행했지만 늘 좋은 결과만 나오지는 않았다. 75%의 힘을 가해 더도 말고 340야드 정도만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실수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너무 강했던지 체중 이동이 거의 되지 않는 뻣뻣한 스윙이 이뤄졌다. 그 결과 타구는 심하게 당겨지고 말았다.
그나마 280야드부터 시작되는 좌측 크로스 벙커에 빠질 것 같았으나 타구가 머금은 힘은 죽지 않아 벙커를 넘어 갤러리들이 운집한 곳으로 튀어 나갔다.
“볼!”
미사키의 경고성 외침이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필상은 등에 진땀이 흐르고 있음을 감지했다.
-드디어 실수가 나옵니다!
-그린이 보이지 않는 위치인가요?
-네. 2온은 절대 불가하며 레이 업도 쉽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 저 지점은 풀이 길게 우거져 언플레이어블을 선언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드롭 위치가 중요하겠군요.
-드롭을 해도 레이 업을 해야 할 겁니다.
챔블리는 이때다 싶었는지 악담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어느새 타구가 멈춘 지점을 찾은 카메라가 필상보다 먼저 공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런데 챔블리의 예상은 절반만 맞았다.
레이 업을 해야 할 위치는 맞지만 몰려든 갤러리들이 밟아 놓은 지점인 탓에 드롭이 필요치는 않았던 것이다.
필상과 미사키가 그곳에 도착했다.
“일단 페어웨이로 꺼내야 할 것 같아요.”
“잠깐만.”
적잖은 사람들이 눌러놨지만 그래도 정확한 임팩트를 보장하기 힘든 라이인데, 그 와중에도 필상은 그린을 향한 공간이 없는지부터 살폈다.
가능하다면 온 그린은 아니더라도 어프로치 거리에 보내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포기하고 레이 업을 고려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미사키도 얼른 필상의 곁에 다가와 남은 거리와 탄도를 감안한 빈틈을 찾았다.
“남은 거리는 183야드에요.”
“피칭으로 띄우면 가능하지 않을까?”
“……3온 가시죠.”
183야드를 피칭웨지로 띄워서 그린에 보낸다는 말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그녀는 한 마디 보탰을 것이다. 하지만 필상이기에 사족을 달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고분고분 말했다.
실제 나무 사이를 뚫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나마 파격적으로 띄우면 나무줄기에 부딪칠 가능성은 현저히 떨어지지만 잎사귀에 부딪치는 위험부담은 감수해야만 한다.
제 아무리 비범한 필상이라도 그런 모험을 감행할 이유가 없다고 미사키는 판단한 것이다.
“으음!”
이미 티샷 미스가 있었던 터라 이번 샷마저 흔들린다면 그 파장은 이번 홀에 그치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 문제였다. 스스로 발목을 잡는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시 대답을 미루던 필상이 직접 백에서 피칭웨지를 꺼내는 걸 보는 순간, 미사키의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말리고 싶었으나 공격적인 주문을 했던 기억이 있었기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 필상이 연습 스윙도 없이 어드레스를 하는 걸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따악!
필상은 가볍게 터치해 레이 업을 했던 것이다.
미사키의 당혹스러운 마음을 알고 있었는지 페어웨이에 안착한 공에서 시선을 뗀 그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비쳤다.
“네 말을 잘 듣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미스 샷이 나온 거잖아요.”
“아니야. 내가 소심했기 때문이지 네 탓이 아니야. 흉이나 보지 마.”
“그럼 이제 핀에 바짝 붙여 주세요. 정말로.”
“얼마나 남았는데?”
“168야드요.”
“9번.”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린 것을 알고 있었다.
파격적인 샷을 이어오던 필상이 드디어 위기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번 샷을 붙이지 못하면 어렵게 쌓아올린 이미지가 한 방에 실추될 가능성이 높았다.
때문에 필상은 아주 신중했다.
그린의 경사가 만만치 않기에 필상은 핀을 바로 노리기로 작정했다. 그린이 전체적으로 뒤로 흐르기 때문에 스핀도 걸 생각이었다.
한계까지 끌어올린 집중력은 지루할 만큼 느린 테이크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다운스윙은 여지없이 강력했다.
팍!
공이 맞아 나가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짜릿한 타격이 이뤄졌고 움푹 떨어진 잔디가 폭발이 만든 파편처럼 좌측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타구는 미친 듯이 치솟았다.
남은 거리가 짧지는 않았기에 탄도만 본다면 다시 미스 샷이 나온 것처럼 보였다.
-어허! 너무 높이 뜬 거 아닌가요? 170야드 정도 되는데!
-하하. 어디 한 번 지켜보죠.
허 위원도 필상의 샷이 정확하다는 확신은 갖지 못했다. 자로 잰 듯 정확한 아이언 샷 구사 능력은 알지만 남은 거리에 비해 너무 탄도가 높았고 당사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도 인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중한 태도를 믿고 지켜보고자 했던 것이다.
“와우! 나이스 샷!”
짧을 줄 알았던 타구는 오히려 길었다.
그린 후면에 핀이 꽂혔고 뒤가 낮아 그린을 오버할 것이라고 봤지만 한 번 크게 튄 공이 에이프런에 떨어지고도 쭉 빨려 오는 장면은 비명 없이 지켜보기 힘들었다.
-백스핀! 와우! 엄청나네요.
-아이언 컨트롤 능력이 환상적입니다. 파워가 받쳐 주기 때문에 보다 다양한 기술을 펼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챔블리도 미스터 퍼펙트의 매력에 빠지는군요!
-실수한 뒤에 꾹 참고 레이 업을 하는 걸 보면서 그가 왜 강자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장타자들은 그런 유혹을 쉽게 이기지 못하거든요.
-도저히 2온은 불가능했던 것 아닌가요?
-객관적인 사실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힘이 있고 기술이 갖춰진 선수들은 자신이 마술을 부릴 수 있다고 착각하거든요. 그런데 그 참기 힘든 유혹을 꾹 누르고 서드 샷에 승부를 거는 모습을 보는 순간, 제가 너무 경솔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좀 묘한 포인트에서 챔블리의 예상 못한 해설이 터졌다.
모두가 입이 쩍 벌어질 기적 같은 샷을 할 때는 인색하더니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에서 필상을 높이 치켜세웠다.
그러나 그게 바로 전문가의 눈이었다.
누구든 신들린 듯이 잘 치는 날이 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덤비는 순간, 골프는 내렸던 축복을 고리의 이자까지 덧붙여 회수한다.
‘샷 오브 더 데이’에 나올 명장면을 만들었을 수도 있으나 챔블리는 필상이 무리한 세컨샷을 했더라면 버디는커녕 파를 기록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팬들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미 눈꺼풀이 핑크빛에 물들었기 때문에 이번 샷을 통해 더 큰 감동을 받았을 뿐이다.
“이거 넣으면 스코어가 어떻게 되지?”
“12언더요.”
“이제는 참아야겠지?”
“다음 홀 짧은 파 3홀이거든요!”
“하하하. 그런가?”
152야드 파 3홀에서 다시 가볍게 버디를 기록한 필상은 18홀 최저타 기록에 성큼 다가섰다. 아직 4개 홀이 남았고 그중에 만만한 홀이 없지만, 그래도 기세를 떨치고 있던 터라 한두 타는 무조건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430야드 파 4홀에서, 457야드 파 4홀에서 연이어 2온 2퍼팅으로 파를 기록하자 지켜보는 이들의 입가는 바짝 말랐다.
-이번 파 3홀이 승부처인가요?
-이미 PGA 챔피업십 18홀 최저타 기록은 갱신했습니다. 본인이 세운 기록을 갱신하기 위해 무리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부디 차분하게 타수를 잃지만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버디, 버디를 하면 -15잖아요?
-물론 저도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기도하는 것일 뿐, 지나친 바람은 오히려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하하! 여긴 한국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을 공 프로가 어떻게 듣는단 말인가요?
-남은 두 홀이 절대 녹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홀도 온 그린이 쉽지 않습니다. 좌우 45야드라서 커 보이지만 앞뒤 폭은 16야드밖에 되지 않아요. 기록을 의식하는 순간, 공은 엉뚱하게 날아갑니다.
허 위원이라고 왜 그런 말을 하고 싶겠는가!
필상이 위축된 한국 남자 골프를 세계에 알릴 최고의 기량을 갖췄다고 확신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한 성격을 가졌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응원하는 이들의 바람이 필상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은 원지 않았다. 너무 빼어나서 오히려 시기와 질투,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국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이 되레 편 가르기가 되는 것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최고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데, 모난 돌이 정을 맞는 그런 고약한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과민 반응이었다.
“195야드라 이거지.”
거리에 대한 부담은 없다.
하지만 그린 크기에 버금가는 커다란 가드 벙커 5개가 그린을 물샐 틈 없이 경호하는 듯 빡빡한 레이이웃이었다.
그나마 핀이 그린 한가운데 꽂혀 방향과 거리만 조절된다면 버디를 잡을 수도 있는 세팅이었다.
평소 같으면 6번 아이언을 잡고 컨트롤 샷을 하지만 필상은 7번 아이언을 들고 티 그라운드에 올라갔다.
그리고 차분하게 루틴을 밟고 어드레스에 들어선 필상은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는 아주 간결한 스윙을 감행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