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70화 (170/354)

170. 크레이지 모드

“또다시 업그레이드가 됐네요.”

“업그레이드?”

“자신감이 넘치잖아요. 아무리 장타자라도 1, 2번 홀과 같은 도그렉 홀에서 어떻게 그린을 바로 노립니까!”

“380야드는 사정권에 있다는 말이잖아.”

“그러니까요! 전 요즘 330야드만 넘어도 불안한데, 공 프로는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언덕을 이미 넘은 것 같습니다.”

“으음……. 그렇게 봐야 하나?”

타이거도 더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직관적으로는 그런 결론에 이르렀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최근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평가를 받는 자신이 다른 레벨을 인정한다면 필상은 결국 독보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첫 홀 티샷도 하기 전에 기가 죽을 수는 없지. 저러다 말 거야. 아니면 된통 혼이 나든지!”

“그렇죠? 그도 인간인데!”

둘은 이 상황을 합리화시키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쉽사리 시합에 나설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반응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타이거. 차라리 모른 척하자고. 다른 선수들처럼. 그게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아.”

“공은 괴물입니다. 괴물!”

“다행이지 뭐. 우리랑 동세대는 아닌 게. 하하하.”

모른 척하고 싶지만 마음은 이미 크게 동요된 듯, 자신의 허탈한 웃음소리를 느낀 미켈슨은 주눅 들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연습은 하지 않고 3번 홀 티샷을 하려고 티 박스에 올라서는 필상의 모습을 실시간 중계를 통해 지켜봤다.

“158야드입니다.”

“그린이 좌우로 넓적해서 거리 조절이 쉽지 않을 거야. 뭘 잡을까?”

“피칭을 잡겠죠. 장타를 빵빵 날리다 갑자기 컨트롤 샷을 구사하는 건 쉽지가 않거든요.”

“그러고 보니 아이언 샷은 처음이로군. 3번 홀인데!”

하지만 타이거의 예상과 달리 필상은 갭 웨지를 잡았다.

그리고는 정말 가볍게 휘둘렀다.

158야드는 결코 쉬운 거리가 아닌데, 마치 70, 80야드 어프로치라도 하듯이 간결한 스윙을 해 턱없이 짧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높이 떠오른 타구는 쭉쭉 뻗어 나가더니 홀컵 바로 옆에 떨어져 크게 튄 공은 그 자리에 멈췄다.

“뭐야? 뒷바람이 있었나?”

“공 프로의 임팩트는 차원이 다른 것 같습니다. 심플해 보여도 임팩트 순간에 강력한 가속도가 붙는 게 분명합니다.”

“아! 바로 저건데. 내가 원하는 스윙이!”

방향은 좌로 2야드가량 벗어났지만 거리는 정확했다.

다시 한 번 버디 기회를 맞이한 숨 막히는 완벽함에 타이거와 미켈슨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그런데 그 멋진 샷을 만든 필상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감겼어!”

“저런 훌륭한 결과를 만들고도 그런 말을 하면 남들이 욕해요.”

“그건 그거고 잘못된 샷은 분석해야지. 난 우측에 떨어뜨려 오르막 퍼팅을 하고 싶었거든.”

“내리막이고 라이가 있지만 저 정도는 넣을 수 있잖아요.”

너무 엄살 부리지는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으나 미사키는 말을 아꼈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필상의 태도는 나무랄 게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샷이 본인의 의도를 벗어나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어느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음을 그녀도 알고 있다.

1번 홀에서도 정확한 퍼팅이 돌아 나왔기에 짧은 거리지만 내리막 퍼팅을 준비하는 필상은 진지했다. 그리고 홀컵 바로 앞에 미세하나마 공의 흐름을 방해할 흔적이 있음을 발견했다.

앞선 선수 누군가의 퍼터에 눌린 자국 같았다. 그 즉시 동반자를 불러 확인 후에 교정한 필상은 어김없이 버디를 잡아내며 기세를 이어갔다.

만약 그 자국을 교정하지 않고 퍼팅을 했다면 그냥 1타 이상의 아쉬움을 남길 것 같았기에 더욱 기분이 좋았다.

-가끔 보면 기본을 지키지 않는 선수들이 있더군요.

-그렇습니다. 홀컵에 들어간 공을 꺼낼 때가 가장 흔한데, 그냥 몸을 구부려 줍지 않고 꼭 퍼터를 지팡이처럼 사용하는 자들이 있죠. 체중에 눌린 자국이 선명한데도 그걸 보수하지 않고 그냥 가 버리는 아주 비양심적인 습관, 버려야 합니다.

-일부러 그러는 선수들도 있을까요?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나쁜 습관인 줄 알면서도 행하는 프로의 자질 문제입니다. 심판이 없는 유일한 스포츠로서 서로에 대한 신뢰, 동료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합니다.

-마크는 바짝 붙여 놓고 뚝 떨어진 곳에 공을 놓는 것도 모자라 아예 옆에다 마크하는 선수를 보면 정말 얄밉죠. 너무 명백해 갤러리들에게 발각되어 벌타를 받고도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느니 떠드는 선수,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아요.

실제 그 사실이 발각되어 문제화된 경우가 있다.

평소에 그런 행위를 당연시하는 그녀의 주장은 남들도 그런다는 것인데, 그건 어불성설이며 구차한 변명이다.

팬들이 보고 지적하기 이전에 스스로 양심의 문제라고 받아들여 당당한 플레이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프로들의 그런 플레이를 보고 팬들이 뭘 배울 수 있겠는가!

물론 아마추어들의 경우는 더 심한 케이스가 허다하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동반자에게는 가차 없이 규정을 들이대는 자들,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 꺼리는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이용하는 저열한 인품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이 꼭 기를 쓰고 늦장 플레이를 하곤 하죠.

-지난번 동창 모임 라운드에서 그런 친구가 있었죠. 그린에서 마크한 뒤에 공의 색깔이 확인되지 않을 만큼 많은 줄을 그은 공으로 교체해 퍼팅을 하더라고요.

-규정에 어긋나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요?

-당연히 알겁니다. 자칭 고수니까! 하지만 그걸 지적하면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게 싫어 그냥 놔뒀는데, 퍼팅이 안 들어가니까 퍼터를 집어 던지더라고요.

-정말 파렴치한 골퍼로군요!

-그런 짓을 하면서도 너무도 당당해 어이가 없었죠. 운영한다는 회사 직원들에게도 그럴 것 같아 걱정될 정도였습니다.

인상이 절로 구겨지게 만드는 극소수의 아마추어 골퍼, 동남아 같은 외국 골프 투어에 나가면 그 행패가 더 극심하다.

여자 캐디를 희롱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욕설도 서슴지 않으며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마저 남기는 그들은 돈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물질 만능주의자들이다.

세계인을 열광시키는 문화적 우수성, 구호 받던 나라에서 구호 활동을 가장 왕성하게 하는 나라로 돌아선 좋은 이미지에 먹칠하는 그런 자들의 의식구조야말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경제 성장의 그늘이 아닌가 싶다.

주체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채, 무조건 미국에 기대는 외줄 타기 외교를 벗어난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갖춘 나라에 합당한 자의식과 행동이 절실한 시기다.

“3번 우드.”

“흐흐흐. 3번 우드요?”

4번 홀은 461야드 파 5홀이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2온을 노리지만 좁은 페어웨이와 다닥다닥 붙은 대형 벙커로 인해 희비가 극명하게 갈리는 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이글도 나오고 버디를 잡는 선수도 많아 대부분 강력한 티샷을 시도한다.

페어웨이 크기에 버금가는 초대형 벙커가 페어웨이를 크게 둘로 나누고 있었고 그 지점에 도달하는 거리는 340야드였다.

때문에 다들 평소보다 강한 스윙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필상은 오히려 3번 우드를 소환한 것이다. 미사키는 본인이 그런 희귀한 골퍼의 캐디라는 것이 짜릿한 것 같았다.

“좌측 벙커 정중앙을 가르면 될 것 같아요.”

“오케이! 거리는 얼마나 보내면 될까?”

“안전하게 330야드만 보내죠.”

“좋아!”

누군가는 드라이버를 잡고 용을 써도 330야드를 보내기 어렵다. 하지만 3번 우드를 잡은 필상은 정확한 거리를 위해 오히려 조절을 하고 있었다.

홀의 좌우에 위협적인 높이로 치솟은 나무들이 되레 편안하게 느껴진 필상은 또다시 스리쿼터 스윙으로 원하는 거리를 확보했다.

약간 당겨지기는 했지만 엄연한 페어웨이에 안착했는데 이번에도 필상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웃어요.”

“응?”

“잘 갔잖아요.”

“왜 살짝 살짝 당겨지지?”

“손에 익지 않은 클럽이라서 그럴지도 모르죠. 아무래도 그립감이 쩍쩍 붙을 테니까요!”

“아!”

미사키의 말을 들은 필상은 전율을 느꼈다. 아직 자신의 경험이 일천하다는 것을 재확인한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립은 생각보다 굉장히 중요하다.

같은 메이커에 정성 들여 체크한 클럽을 받았지만 똑같은 그립을 잡아도 밀착된 느낌이 더 강한 나머지 평소와 달리 드로우 구질이 본의 아니게 걸린 것이다.

“어머!”

“예뻐서 그래. 예뻐서!”

세컨샷 지점으로 이동하다 말고 갑자기 필상이 곁을 따르던 미사키의 챙이 넓은 모자를 밑으로 쿡 눌렀던 것이다.

그녀가 준 팁이 너무도 고맙고 소중해 그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달리 방법이 없어 그냥 짓궂은 장난을 친 것이다.

평소 헤어스타일과 화장에 엄청 공을 들이는 그녀가 필상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기겁할 것이라는 생각을 못한 것은 아니지만 반응은 생각보다 더 컸다.

“화장품이 묻잖아요. 모자에.”

“뭐 하러 화장을 그렇게 많이 해. 원래 피부가 깨끗하고 뽀송뽀송하잖아.”

“말씀은 고맙지만 전 그래도 싫어요. 하지 마세요. 네?”

“알았어. 하하하.”

여자 캐디와 함께 지내면 이런 불편함은 어쩔 수 없다.

그냥 여동생처럼 편하게 느끼기 때문에 장난을 쳤지만 그것도 당사자가 허용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면 안 된다.

실수하면 안 되는 유부남이고 상대의 감정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도 서운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슨 흑심을 품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갑자기 모모코가 보고 싶어졌다.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하지만 자그마한 체구의 미사키는 상당히 귀엽고 똑똑한 스타일이기 때문에 행동에 더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머쓱해하는 필상을 곁눈질한 미사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달린 이유는 드러낸 감정과는 다른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함께 다닐수록 점점 더 끌리는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라도 다잡아야만 했던 것이다.

‘내 스타일이 아니야!’

끊임없이 그렇게 자신에게 외쳤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필상의 거침없는 성격과 탁월한 실력에 강한 끌림을 느꼈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상대였다.

필상의 곁에는 모모코가 있었고 좋아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선을 그었다. 그러나 차가운 이성과는 달리 홀로 달리는 감정은 추스르기 어려웠다.

진로를 프로캐디로 변경한 것도 사실은 필상과의 인연과 무관치 않다. 자신이 좀 더 확실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강했고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그게 정말 이뤄진 것이다.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여인으로서 느껴지는 감정은 최대한 자제해야만 했다.

“185야드에요.”

“음……. 7번 아이언. 핀이 앞에서 몇 야드지?”

“6야드요.”

“띄워야 하나?”

“네. 런이 적을수록 좋을 것 같아요.”

필상은 7번 아이언을 잡은 그립의 감각을 확인했다.

역시 끈끈이가 붙은 것처럼 손에 잘 붙는 것을 확인한 필상은 드로우 구질을 감안해 그린 우측 끝을 에이밍 했고 스트레이트 구질을 변경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방향을 맞춘 대신, 거리 조절에 실패했다.

너무 높이 떠오른 타구가 그린 앞부분에 떨어졌고 황당하게도 백스핀이 걸려 오히려 러프까지 굴러 내려왔다.

“맞바람이 불었나요?”

“아니야. 샷이 의도한 것보다 깊이 들어가 탄도가 너무 높이 떴어.”

“두껍게 맞았는데도 백스핀이 걸리다니, 정말 아깝네요.”

“네가 구박해서 그러잖아.”

“…….”

그냥 툭 던진 농담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미사키는 얼어붙었다. 캐디인 자신 때문에 샷 미스가 났다는 말은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런 반응을 예상치 못한 필상은 얼른 사태를 수습해야만 했다.

“농담이야. 농담!”

“아니에요. 앞으로는 대꾸하지 않을게요.”

“정말 농담이라니까!”

재차 얘기했지만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미사키는 시선조차 맞추지 못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불필요한 부분에 신경을 분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확고하게 말했다.

“난 미사키 네가 정말 좋은 캐디로 성장한 게 너무 반갑고 고마워. 그래서 괜한 농담을 한 거야. 경기 중에 다시는 장난이나 농담하지 않을 거니까 진정해.”

“알았어요.”

이글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사키와의 문제는 차후에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필상은 정신을 가다듬고 12야드 칩샷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라이는 우측으로 휘고 오르막에 이은 평지였다. 퍼팅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상태였지만 미사키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서라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확하게 떨어뜨릴 지점을 찍은 필상은 갭 웨지로 가볍게 임팩트를 가했다. 사뿐하게 떠오른 공이 자신이 찍은 지점에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필상은 숨까지 멈추고 바라봤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휜 공이 홀컵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나이스 어프로치!”

“이글! 샷 이글!”

-저걸 그냥 넣어 버리네요. 세컨샷이 짧아 많이 아쉬웠는데.

-이번 어프로치는 넣으려고 작정한 것 같았습니다. 붙여도 버디는 가능한 상황인데, 봐줄 용의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러면 4개 홀을 지나며 5언더가 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자그마치 PGA 챔피언십인데, SK텔레콤 오픈에서 보여 줬던 크레이지 모드보다도 훨씬 빠른 페이스입니다.

-아! 그러면 새로운 기록 갱신을 기대해 봐도 될까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말을 좀 아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공 프로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집념을 보여 주고 있는 지금, 이럴 때일수록 한 타 한 타 줄여 나가는 과정을 시청자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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