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불량(不良)
“나이스 샷!”
“정확하지?”
“투어프로가 그 정도는 돼야죠! 그런데 손목은 정말 괜찮은 건가요?”
“보시다시피!”
필상은 미사키가 찍은 지점을 정확히 공략했다.
동반자들은 1온을 노리다 모두 낭패했다. 한 명은 좌측 비치 벙커에, 다른 한 명은 그린 앞의 깊은 벙커에 빠졌다.
물론 안전하게 끊어 간 필상은 샌드웨지로 101m를 정확히 공략했고 3m 버디 퍼팅을 가볍게 집어넣으며 잃었던 타수를 다시 회복했다.
-다시 11언더로 복귀했네요. 하지만 이제 남은 홀은 3개, 기록을 갱신하기는 어렵겠죠?
-메이저 대회입니다. 지금 성적으로도 충분히 좋습니다. 더욱이 손목이 시원찮다면 무리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아까와 달리 허 위원은 단칼에 잘랐다.
못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12번 홀에서 겪은 불운이 다시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1타만 더 줄여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81m 파3 홀인 16번 홀에서 기가 막힌 티샷이 나왔다. 6번 아이언으로 부드럽게 때린 것 같았으나 타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린에 떨어져 깃대를 향해 굴렀다.
-언제 봐도 멋진 스트레이트 구질입니다.
-저게 쉽지 않더라고요. 똑바로 치고 싶어도 자꾸 감기고, 그걸 의식하면 또 열리고. 많은 프로들의 샷을 봤지만 우리 공 프로처럼 저렇게 일직선으로 치는 선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건 사실입니다. 대다수의 선수들은 드로우나 페이드에 특화되어 있죠. 때때로 구질이 바뀌기도 하지만 드로우보다는 페이드가 정확성이 높아 상당수가 페이드를 즐겨 칩니다.
-네. 그런 것 같더라고요. 공 프로처럼 타구가 휘지 않게 날아가려면 어떻게 쳐야 하는 거죠?
-프로들처럼 스윙이 몸에 익은 경우는 약간 업라이트하게 테이크백을 가져가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 아웃 스윙을 하지 않는 거죠.
아마추어의 경우와는 다르다.
스윙의 일관성을 유지할 구력을 갖춘 아마추어 강자의 경우, 보통 인 아웃 스윙을 통한 드로우 구질이 훨씬 많다.
그러나 임팩트가 좋은 프로들은 미세한 차이로도 휘는 각도가 커지기 때문에 드로우 샷을 할 때는 항상 조심스럽다.
그래서 오히려 페이드 구질이 일관성을 유지하기 더 쉬운 것이다. 필상도 그 점을 잘 알고 있기에 처음부터 똑바로 치는 스윙을 먼저 몸에 확실하게 익혔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구태여 휘는 타구를 치지 않는다. 티샷부터 안전하게 보내 놓으면 그럴 이유는 더 줄어든다.
“이거 넣으면 -12가 되나?”
“네. 스코어는 신경 쓰지 마세요. -8이 한 명 있지만 그 밑으로는 -6이거든요.”
“알았어.”
미사키는 차분한 경기 운영을 주문했다.
필상이 퍼팅을 잘한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스코어를 의식하면 누구든 힘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물론 필상은 찾아온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차분하게 우측 반 컵을 본 필상은 정확한 힘 조절까지 선보이며 버디를 낚았다. -12가 되는 순간, 비명에 가까운 팬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시그너처 홀이에요.”
“예쁘네.”
“치! 주어를 분명히 하세요.”
“그걸 꼭 말을 해야만 아나? 거울은 볼 거 아냐!”
“에이 진짜! 여하튼 코스 내에 폭포를 만들어 놓은 것은 아주 절묘한 것 같아요.”
“바다와 호수, 암벽과 폭포, 그리고 선남선녀, 이만하면 그림이지 뭐. 하하하.”
그러나 필상은 직접 백에서 7번 유틸리티를 꺼냈다.
우측 벙커를 넘기는 거리는 캐리 230m에 불과하지만 우측 암벽과 좌측의 호수는 장타자에게 한 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선택이세요.”
“비치 벙커 앞까지만 보낼게.”
“툭 튀어나온 부분이 243m에요.”
“네에!”
7번 유틸리티 우드로 너무 먼 거리가 아니냐 싶지만 랜딩 지역까지의 내리막이 무려 15m이다. 런까지 고려하면 오히려 힘의 조절이 필요했다.
필상이 드라이브가 아닌 유틸리티를 들고 티 그라운드에 오르자 팬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시원한 장타를 바랐던 이들은 아쉬움을, 냉정한 팬들은 외레 박수를 보냈다.
누구의 판단이 옳은지는 오로지 샷의 결과에 달렸다.
까앙!
임팩트가 되는 순간, 아주 찜찜한 느낌이 전해졌다.
전반 홀에서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황당한 일이 다시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에 얼른 날아가는 타구를 직시했다.
“어?”
“저게 뭐야?”
공이 쭉쭉 뻗어 나가다 말고 갑자기 팽그르르 돌면서 우측으로 날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비거리가 확 줄어든 타구는 어이없게도 페어웨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암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문제는 바위에 맞은 공이 2개로 깨져 하나는 바위 우측에, 하나는 바위 너머 카트 도로에 떨어져 다시 러프로 기어들어 가고 말았다.
-어? 저게 대체 무슨 일이죠?
-공이 깨지는 바람에 기이하게 휘었는데 암벽에 부딪쳐 둘로 쪼개졌습니다.
-그럼 어떤 것으로 플레이를 해야 하는 거죠?
-제가 아는 바로는 둘 중에 큰 덩어리로 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게 암벽 뒤로 넘어간 것인지, 러프에 떨어진 것인지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는 거죠?
어이없기는 필상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받은 공에 불량이 있다는 것은 진즉에 짐작했지만 앞에서는 행운이 따랐다. 그런데 하필이면 티샷에서 다시 이런 끔찍한 상황이 펼쳐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러프에 떨어진 조각이 더 큰 거 같았어요.”
“아니야.”
“정말이세요?”
“응.”
차라리 보지 못했다면 기대라도 했을까?
시각이 남다른 필상은 엇비슷하게 쪼개졌지만 우측으로 튄 조각이 더 크다는 느낌을 확연하게 받았다.
동반자들까지 티샷을 마치고 세컨샷 지점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이미 경기위원이 근방에 가 있었다. 필상이 워낙 인지도가 높은 탓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상이 다가가자 그의 불편한 표정이 보였다.
“수고 많으십니다.”
“네. 제가 미리 체크해 봤는데 저쪽 조각이 더 큽니다.”
“아! 그래요?”
알고 봤더니 큰 조각은 다시 바닥에 떨어지면서 또 다른 충격을 받아 또 쪼개졌던 것이다.
“러프에 있는 조각에 마크부터 하고 치운 뒤에 플레이를 하면 됩니다.”
“네. 고맙습니다.”
바위 뒤였다면 언플레이어블을 선언할 위치였다. 그건 다행이었으나 러프에 놓인 공의 위치도 썩 좋지는 못했다.
“드롭을 최대한 가볍게 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게 어디 뜻대로 되겠나?”
카트 도로와 페어웨이 사이에 낀 좁은 러프였다.
하지만 풀이 제법 길어 너무 깊이 박히면 풀의 저항 때문에 임팩트가 어려워 가급적 살살 내려놓으라는 의미였다.
다행이라면 드롭 위치가 이젠 무릎 높이라는 것이다. 필상은 규정대로 드롭을 했고 미사키의 탄식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대변했다.
살짝 놨지만 공이 러프에 잠긴 것이다.
남은 거리는 209m, 공이 페어웨이에 놓였다고 하더라도 온 그린이 쉽지 않을 거리에 풀에 잠겼으니 인내가 필요했다.
“피칭 줘.”
“네.”
미사키의 음성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3온 1퍼팅하면 되지. 무벌타 드롭이 어디야.”
“네. 죄송해요.”
“경기 중인 캐디는 플레이어와 한 몸이야. 미사키가 기운을 내야 나도 힘을 내지.”
“파이팅!”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파이팅을 외치는 그녀를 보며 찜찜했던 기분이 싹 풀렸다. 지켜보던 갤러리들도 힘을 보탰다.
“공 프로. 파이팅!”
“힘내요. 퍼펙트!”
미처 의식하지 못했지만 수없이 많은 팬들이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필상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팬들이 지금 자신의 플레이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샷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 했다.
일단 안전하게 페어웨이에 보내고자 했기에 간결하지만 정확한 임팩트를 만들어 냈다. 타구는 힘차게 떠올라 145m 비거리를 기록하며 페어웨이 정중앙에 떨어졌다.
혹시 또 공이 깨지는 게 아닌지 염려되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유틸리티를 칠 때는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이번에 받은 공이 전체적으로 안 좋은 것 같아. 반납할 필요도 없이 다 버려야지.”
“네. 그럴게요.”
“모르긴 몰라도 이젠 확실하게 점검한 뒤에 가져올 것 같은데?”
“이참에 메이커를 바꾸는 것도 고려해 보세요.”
“내가 바꾸면 회사 문 닫지 않을까?”
“그렇기는 하네요. 하지만 너무 어이없잖아요.”
“그래도 한두 해 장사한 회사가 아닌데, 좀 아쉽기는 하네. 하하하.”
이미 벌어진 일, 화를 낸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또한 신뢰가 떨어졌다고 골프공 후원사를 바꾸면 필상과 계약해서 그들이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는커녕 심각한 타격을 입을 확률이 높다.
다행이라면 첫날 컨디션이 좋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만약 팽팽한 승부처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그건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세 번째 샷을 하러 이동하는 사이, 이미 방송사 실시간 댓글에는 골프공 후원사에 대한 팬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걸 지켜보면서도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언급할 수 없는 중계진의 난처함도 입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대신 다른 언급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홀이 파 5홀이잖습니까?
-그렇죠. 평균 타수 4.95가 나오는 홀이지만 장타에 특화된 공 프로라면 적어도 버디는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만약 이 홀에서 타수를 줄였다면 18홀 최저타 기록 타이가 나왔을 텐데, 좀 많이 아쉽네요.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그래도 한 번은 넘길 수 있지만 두 번이나 공이 깨지는 불량이 나온 것은 불운인 것 같아요.
-최근 골프 장비들의 현격한 발전이 이뤄져 경기 중에 장비를 교체하는 일은 극히 드문데 이번 계기로 골프공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질 것 같습니다.
-하기야 우리 공 프로의 파워가 웬만해야지요. 특히나 유틸리티 우드처럼 길고 강한 타격이 이뤄지는 경우에는 공이 깨질 만도 한 거죠!
다행히 필상은 60도 웨지를 잡아 남은 거리 65m를 핀에 바짝 붙이는데 성공했다. 자신을 위해서도 후원사를 위해서도 최고의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18번 홀로 이동하던 필상은 새 공으로 바꾼 뒤, 그걸 들고 한참 만지작거렸다. 미사키의 눈에는 주문이라도 외우는 것 같았지만 필상도 뾰족한 수단은 없었다.
581m의 전장을 지닌 결코 짧지 않은 홀을 남긴 상황이기에 드라이브를 잡을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어웨이를 가로지르는 카트 도로가 있어 그걸 넘길지 말지 고심해야만 했다.
“카트 도로까지 얼마나 되지?”
“342m에요. 설마 그걸 넘기시려고요?”
“캐리로 그냥 넘기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거리이기는 하네.”
“좌측 2번째 페어웨이 벙커 초입이 정확히 301m에요.”
“그러니까!”
티 박스 앞에 자리한 커다란 호수가 좌측을 타고 흐른다. 페어웨이와는 제법 떨어져 있지만 그 사이에 2개의 작은 벙커가 위치하고 우측에는 엄청 큰 벙커가 똬리를 틀고 있다.
대부분 선수들의 티샷 비거리을 감안하면 우측의 벙커는 랜딩 지역에 해당된다. 그래서 당길 경우에는 더 안 좋다.
그렇기 때문에 필상은 아예 그런 위험 요소를 모두 넘겨 버릴 생각을 한 것이다.
“카트 도로에서 그린까지가 다시 250m 안팎이에요.”
“유틸리티를 쳐야 한다 이거군!”
“네. 2온은 너무 무리수 같아요.”
“일단 티샷을 하고 난 뒤에 다시 판단하자고.”
“네.”
그린 앞부분이 굉장히 지저분하다.
그래서 장타자들도 이 홀에서는 2온 엄두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필상의 연습 스윙은 귀가 울릴 정도의 강한 바람소리를 만들어 냈다. 보기 드문 장타를 날리겠다는 시위였다.
-장타인가요?
-네. 스윙의 크기를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2온을 할 수만 있다면 아주 좋겠지만 결코 쉽지는 않은 도전입니다.
-도전! 저는 그 도전 정말 기대가 됩니다. 어차피 지금 4타 차 선두인데 걱정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거기에다가 공 프로가 설마 티샷 미스를 할까요?
-저도 14언더를 기록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이 기록했던 것인데 갱신하는 것도 아니고요. 실질적인 소득이 없는 도전이라면 차라리 안전하게 1타를 줄이는 작전도 괜찮습니다.
-자. 드디어 스탠스를 잡았습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어드레스를 한 상태에서 래깅(lagging-백스윙 톱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샤프트와 오른팔 각도, 손목 코킹을 다운스윙 때 그대로 끌고 내려오는 동작)을 두 차례 실행한 필상의 드라이브 헤드가 서서히 이륙을 시작했다.
낮게 깔려 후진한 헤드가 커다란 아크를 그리며 백스윙 탑까지 올라왔고 그 지루해 보이던 동작이 끝나기 무섭게 엄청난 속도의 다운스윙이 이뤄졌다.
하지만 임팩트가 이뤄지는 순간의 타격음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아니, 너무 커서 청각을 마비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와우! 엄청난 티샷입니다!
-제대로 걸린 느낌이 왔습니다. 저 공이 땅에 떨어지려면 한참 걸리겠네요. 하하하!
까마득한 창공에 치솟은 타구가 환상적인 궤적을 보이며 날아가는 걸 보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피니시를 마친 필상은 타구는 보지 않고 자신이 들고 있던 드라이브의 헤드를 체크하고 있었다.
“맛이 갔네!”
“왜요?”
“깨졌어!”
“드라이브 헤드가요?”
“응.”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