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65화 (165/354)

165. 우여곡절

“음. 샌드웨지.”

“네.”

필상은 많이 띄우지 않고 적당히 떨궈 굴리기로 결정했다. 제법 사나운 봄바람이 높게 치솟은 공을 어디로 데려갈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린은 낙타의 등처럼 좌측 중앙 후면부와 우측 중앙이 볼록 도드라진 경사이고 핀은 그 가운데 골짜기에 꽂혀 있었다.

방향이 정확하다면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최고점에 꽂힌 탓에 깃대 앞에 떨어뜨려 적당히 굴리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필상은 보란 듯이 의도했던 결과를 만들어 냈다.

“굿 샷!”

“인 더 홀!”

샷 이글을 원하는 팬들의 뜨거운 외침에 필상의 고개도 자연스럽게 그린을 향했다. 그리고 샷 감이 좋았던 타구가 홀컵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에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으하하하! 굳이 2온을 할 필요도 없군요.

-멋진 샷 이글입니다. 어떤 분들은 행운이 따랐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방향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겨우 10번 홀인데, 벌써 -10입니다. 이러다 본인이 세웠던 18홀 최저타 기록을 갱신하는 거 아닐까요?

-섣부른 판단이지만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죠! 하지만 아웃코스가 인코스보다 어렵다는 것을 고려하면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겁니다.

허 위원은 가급적 그 말을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괜히 말했다가 플레이가 꼬이면 입방아를 떨었다는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 캐스터가 물꼬를 트자 덩달아 합류하고 말았다.

50개의 조 편성 가운데 38번째로 출발했기 때문에 절반의 선수들은 이미 결과가 나온 상태였다. 허 위원은 그들의 성적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8 문경준

-6 정지웅, 김준성, 이기상…….

메이저 대회의 난해한 코스 설정을 감안하면 결코 나쁜 성적은 아니다. 또한 필상이 평범한 선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14를 깨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그런 정황을 모두 살핀 허 위원은 괜한 소리를 해서 부정을 타는 건 아닌지 슬슬 표정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쫄깃쫄깃한 샷 아니었나?”

“네? 아, 네. 저는 프로님이 앨버트로스를 기록해도 흥분하지 않기로 했어요.”

“왜?”

“저마저 흥분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저는 이미 이전에 충분히 많이 놀랐거든요.”

“젊은 여자가 너무 감정이 메마른 거 아냐?”

“놀리지 마세요. 사실은 저 지금 꾹 참고 있는 거라고요.”

필상은 미사키가 정말 많이 변했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전에는 다소 수다스럽고 때로 경기에 방해가 될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그래도 정성을 다하려는 마음이 고맙고 기본은 갖췄기에 다시 불렀는데, 그새 완벽에 가까운 프로캐디로 변모해 있었다. 놀랍고 감사한 일이었다.

“언제 봐도 아름답군!”

“네?”

11번 홀은 암벽 사이에 만들어진 티 박스에 오르면 서해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그림 같은 뷰가 아주 그만이다.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트렸는데 백을 메고 부지런히 따라오던 미사키는 아무래도 헷갈린 것 같았다.

절로 웃음이 터질 상황이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진지한 도우미 미사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5번 유틸리티로 정확한 티샷을 보낸 뒤 다시 클럽을 건네주던 필상은 친근한 어투로 사적인 화제를 꺼냈다.

“그새 남자 친구는 생겼나?”

“아뇨.”

“그럼 내가 한 명 소개해 줘야겠네.”

“됐거든요!”

와우! 이렇게 강한 거부감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열정은 알지만 일과 연애는 별개 아니던가. 귀여운 얼굴에 밝고 애교 많은 성격, 남자들이 호감을 느낄 만한 여자인데, 왜 질색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세컨샷 지점으로 이동하던 필상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끈질기게 밑밥을 던졌다.

“내가 아는 아주 좋은 동생 녀석이 있거든.”

“됐다니까요.”

“후회할 걸?”

“프로님. 다음 샷이나 신경 쓰시죠?”

“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혹돈, 성호가 진즉에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품성 괜찮고 곧 실력도 검증받으면 그만한 남자도 없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소개해 주려던 필상은 일단 물러서야 했다.

비교적 짧은 330m 파 4홀이지만 천연 암벽과 깊은 벙커로 인해 생각만큼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는 홀이다. 하지만 필상은 유틸리티로 252m만 공략한 뒤, 80m를 개 웨지로 쩍 붙여 또다시 한 타를 줄였다.

-11이 되는 순간, 필상도 자신의 성적이 보기 드문 기록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아직도 6개 홀이 남았으니 4타를 줄일 수 있다면 자신이 기록한 18홀 최저타도 갈아치운다는 생각을 하자 의욕이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결코 바람직한 심리상태가 아니었다.

“어허!”

193m 파 3홀에 들어선 필상은 5번 아이언을 호출했다.

티 박스보다 그린이 높아 아마추어에게는 아득한 거리지만 투어프로에게는 그다지 길다는 느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버디가 2명밖에 나오지 않은 이유는 분명했다.

그린의 좌측 절반을 가리고 있는 가드 벙커의 뒤에 깃대가 꽂혀 있기 때문이다. 그린 경사가 전체적으로 우에서 좌로 흐르고 뒤가 높아 그린 중앙을 보면 되는데 필상은 조금 더 좌측을 봤다.

옆 라이에 걸리면 버디가 어렵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인데 힘이 들어간 탓인지 샷이 살짝 감기고 말았다. 그런데 샷의 결과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보다 훨씬 큰 악몽을 선사했다.

그린 좌측 앞부분에 떨어진 공이 계속 구르더니 좁고 깊은 벙커로 향했던 것이다.

“일부러 집어넣으려고 해도 힘들 텐데!”

“잘 꺼낼 수 있을 거예요.”

“일단 가 보자.”

좁고 깊어도 꺼내려고만 마음먹으면 그까짓 탈출을 못할 리는 없다. 꼭 타수를 줄이겠다는 욕심이 평정심을 건드린 대가치고는 쓰라리다는 생각을 하며 그린 주변에 도착했다.

그런데 중계 카메라가 필상의 공 위치를 이미 화면에 담고 있었다. 여러 각도를 비추는 걸 보며 예감이 좋지 않았다.

-어우! 이건 정말 최악인데요?

-수직 벽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저렇게 바짝 붙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무리 깊이 퍼내도 쉽게 나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어쩌죠?

-억울하겠지만 좌측으로 꺼내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냥 1타를 허비하라는 말인가요?

-허비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됩니다. 이미 상황은 벌어졌기 때문에 냉정하게 3온 1퍼팅이라도 하는 게 최선입니다.

“어떡할까?”

“대략 65도에요. 판단은 프로님이 하시겠지만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각도보다는 여유가 있는 것은 분명해요.”

미사키는 뒤로 물러나 벙커 턱과 공이 놓인 지점을 손가락으로 이으며 정확한 발사각을 계산해 냈다.

인간의 감각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처하면 감정이 주입되어 오류를 범하게 된다. 실제 필상도 80도는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만 했을 뿐, 정확하게 재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사키의 말을 듣고 뒤로 물러나 확인해 보니 발사각 67도가 요구되었다. 그녀보다 훨씬 정확한 계산을 해낸 필상은 선 자리에서 빈 스윙을 해보며 잠시 이미지를 그려봤다.

‘어? 왜 안 나오지?’

몇 번을 시도해도 나오지 않는 것이 기이했지만 그렇다고 타수를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샌드웨지”

“60도가 낫지 않을까요?”

“아! 맞다.”

바로 그거였다.

벙커라고 무조건 샌드웨지를 떠올린 것이 문제였다. 60도를 잡고 벙커에 들어선 필상은 이제야 정확한 이미지가 그려지는 것에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어물쩍거릴 틈이 없어 어드레스에 들어섰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이미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인지 경기위원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파악!

깊지만 충분히 강하게 퍼 올렸다.

클럽헤드가 벙커 벽면에 턱하니 막혔지만 그걸 염려해 끊어 치는 순간, 타구는 턱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아아아!”

“나이스 벙커 샷!”

누런 모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는 가운데 하얀 공이 그린을 향해 예쁘게 날아올랐다. 다들 멋진 벙커 샷에 기함을 했지만 미사키는 얼른 다가와 필상의 손을 잡아 끌어올렸다.

“괜찮으세요?”

“응.”

“아닌 것 같은데…….”

“괜찮다니까.”

벙커에서 나온 필상은 타구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팬들의 뜨거운 반응과는 달리 6m 옆 라이 파 퍼팅을 남겼다.

결코 쉽지 않은 퍼팅인 것을 확인한 필상은 머리가 복잡했다. 그걸 넣지 못할 것 같으면 무리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계속 문지르는 이유는 벙커 벽면에 부딪치는 순간, 손목에 전해진 충격이 아직도 남아 욱신거렸던 것이다.

“어지 좀 봐요!”

“왜 이래.”

말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미사키는 필상의 왼손을 잡아채 더듬더듬 만지며 부상 여부를 확인했다.

그런데 그냥 봐도 확연하게 보였다.

벌겋게 부어올랐던 것이다.

“왜 이래요?”

“괜찮다니까!”

괜찮다며 지압하는 필상을 보며 근심이 가득 찬 표정을 짓던 그녀는 백에서 뭔가를 꺼내 다가왔다. 지압 붕대였다.

무쇠 같은 신체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성호는 그런 아이템을 가지고 다닐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미사키가 이번에 추가한 것 같았다.

“일단 퍼트부터 하고.”

“네. 넣으려고 무리하지 말고 붙이세요.”

“하하. 알았어.”

퍼팅을 하면서도 욱신거릴 줄은 몰랐다.

정확한 라이를 읽어 냈지만 찌릿한 느낌에 다 밀지 못한 공은 홀컵 앞에 멈춰서고 말았다.

하지만 탭인 처리한 필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보기를 기록하고 뒤로 물러났다. 약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필상이 그린을 물러나자 팔을 잡아 끈 미사키는 왼손을 붙잡더니 압박 붕대를 강하게 감아 고정시켰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부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어허! 우리 공 프로 왼쪽 손목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네. 방금 전 벙커 샷을 할 때, 충격이 가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레이 업을 권했던 것인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샷을 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요?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죠. 하다못해 양말 안에 모래 한 알만 들어가도 정상적인 스윙이 안되는 게 골프인데, 붕대를 감고 어떻게 정상 스윙이 되겠습니까!

-제가 괜히 오두방정을 떨어서 그런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덩달아 최저타 기록을 운운했으니 전문가라는 제가 더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필상은 13, 14번 홀을 안전하게 파로 넘어갔다.

다들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그의 샷에는 아무런 이상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정상적인 스윙이 어렵다던 허 위원의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러더니 15번 홀로 이동하면서 급기야 손목에 감았던 붕대를 스스로 풀어냈다. 뒤따르던 미사키가 기겁하고 다가왔지만 필상은 붕대를 깔끔하게 정리해 그녀에게 건넸다.

“프로님…….”

“괜찮다고 했잖아.”

그 말과 함께 필상은 자신의 왼손 팔뚝을 쑥 걷어 올리더니 그녀에게 보여 줬다. 그런데 아까까지 선명했던 붓기는 이미 씻은 듯이 가라앉았다.

“아직도 벌겋잖아요.”

“그건 부끄러워서 그런 거야. 가족들 말고 내 몸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사람이 없거든!”

“치! 난 전에 다 봤거든요!”

“아!”

기억을 더듬어 보니 사실이었다.

미사키가 여자로 보였던 적이 있다. 물론 흑심을 품었던 것은 아니지만 흔하게 겪을 수 있는 경험을 아닌지라 졸지에 낯빛이 왼손처럼 붉게 물들었다.

살짝 당황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미사키였다.

“뭘 드려요?”

“마음 같아서는 드라이브 잡고 싶지만 3번 우드.”

“네?”

드라이브가 아닌 3번 우드를 호출했음에도 놀란 이유는 15번 홀이 아주 특이한 레이아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티 박스와 페어웨이, 그리고 그린 주변이 레터럴 워터해저드(Lateral water hazard-병행 워터해저드)로 인해서 동떨어진 3개의 구역으로 나눠진 설계였다.

때문에 장타자라면 충분히 1온을 노릴 수 있다.

346m의 전장은 우측 페어웨이를 찍고 넘어갈 경우의 거리였고 실제 곧바로 그린을 노릴 경우 310m에 불과했다.

때문에 필상이 드라이브를 잡을 경우, 정확도에 집중해도 될 정도의 가뿐한 거리였다. 때문에 3번 우드를 달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손목이 금방 좋아졌다지만 그 손목으로 강한 타구를 때리는 것은 오히려 드라이브를 잡는 것보다 못한 선택인 것이다.

“3번 우드 치면 안 될까?”

그 말에 미사키는 필상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챘다.

웃음 한 점 없이 농담을 던진 것이다.

입술을 슬쩍 깨문 그녀도 더한 농담으로 받아치고 싶었으나 애써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 대신 행동으로 말했다.

“비치벙커 우측에 붙은 페어웨이로 200m를 보내면 100m가 남아요. 가능하시죠?”

“네. 그리 거행하겠습니다. 하하하.”

필상도 무리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1온을 노리다 함정에 빠질 바에는 차라리 세컨샷에 승부를 거는 것이 낫다.

차라리 안전하게 칠 이유가 있는 것이 홀가분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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