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64화 (164/354)

164. 돌발 상황

4번 아이언으로 239m을 날린 것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비거리가 짧은 선수의 드라이버 거리에 버금가지만 미사키는 당연한 듯 결과를 정확히 분석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127m 남았어요.”

“그린 공략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전체적으로 그린 경사가 오목한 형태이고 뒤핀이라서 길게 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음. 중앙을 노리고 런이 약간 발생하면 되겠네.”

“네. 뭘 드릴까요?”

“피칭.”

미사키의 캐디 능력은 이전보다 월등히 좋아졌다.

꼭 필요한 말만 던지는 그녀는 클럽을 건넨 뒤 묵묵히 에이밍을 체크하고는 멀찍이 물러났다. 이제부터는 온전히 선수의 몫이라는 의미였다.

선수 출신이라고 다 모든 것을 갖춘 것은 아니다. 개인 특성에 따라 다르지만 이전의 미사키는 이렇게 세밀하지 못했다.

성호에게 밀려 필상의 캐디를 그만두면서 그녀는 개인적인 친분 때문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제 역할을 다했다면 더 많은 기회가 주어졌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때문에 미사키는 아쉬움을 곱씹으며 전문성을 갖추려는 노력했다. 그 의지가 헛되지 않았는지, 실질적 성장이 이뤄졌고 연습 라운드를 함께한 필상은 그녀의 변화를 직접 실감했다.

샷을 점검하고 스윙의 단점을 찾는 것은 성호보다 못할지 모르지만 경기에 임하는 캐디로서의 능력과 심리적인 안정감을 부여하는 태도는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 같았다.

-공 프로의 캐디가 바뀌었다지요?

-네. 김성호 프로는 이번 주말부터 챌린지투어에 출전한다고 합니다. 공 프로가 적극 추천한 걸 보면 상당한 기량의 소유자로 보입니다.

-아! 그런가요? 매경오픈에서 준우승을 했던 박일한 프로와 친구라던데 앞으로 좋은 모습이 기대되네요. 그나저나 이번에 바뀐 여자 캐디가 일본에서 첫 승을 함께했던 전문캐디라던데, 생각보다 외모는 왜소하군요.

-국가대표 출신의 프로 지망생이었답니다. 작아 보여도 캐디 업무를 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공 프로가 아무에게나 자신의 백을 맡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귀여운 외모에 항상 밝은 표정은 다소 삭막한 남자 투어에 신선한 향기를 제공할 것 같기는 하네요. 하하하.

긍정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던진 말이나 뜻밖에도 부정적인 댓글들이 많았다. 일단 성차별적이라는 언급, 그건 그나마 힘을 얻지 못했으나 당사자인 임 캐스터는 뜨끔했다.

워낙 젠더 이슈에 민감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지적한 지점은 왜 한국 출신을 쓰지 않느냐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찾아보면 얼마든지 좋은 캐디가 있을 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허 위원이 적절히 대처했다.

-공 프로는 KPGA만 뛰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코리안 투어의 중요한 대회는 모두 참가하겠다고 했지만 그래 봐야 6, 7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주간에 일본 투어의 굵직한 대회들을 소화하려면 일본 출신 캐디를 쓰는 것도 전 나쁘지 않다고 판단됩니다.

-아! 그런 점도 고려해야 하는 거군요.

-물론 남녀의 구분이나 국적을 따지기보다는 캐디로서의 능력을 우선시해야겠지요. 그 점을 공 프로가 간과하지 않았을 겁니다.

잠시 대화가 길어진 사이, 필상의 세컨샷이 그린의 정중앙에 떨어졌다. 보통의 피칭 샷보다 탄도가 낮았던 타구는 크게 바운드가 된 뒤 핀을 향해 쪼르르 굴러갔다.

오르막이 아니었다면 들어갈 수도 있을 힘이었기에 초반부터 갤러리들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경사를 타고 오르던 공은 홀컵 1m 근방에 멈춰 섰다.

그 정도는 거의 버디로 연결하는 필상이기에 덥혀졌던 팬들의 열기는 환호성으로 이어졌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세컨샷을 시도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 응원의 소리가 길어진 탓에 필상이 직접 손을 들어 만류해야만 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응?”

“동반자들의 편의를 봐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뜻하지 않은 행동으로 인해 경기 페이스를 놓칠 수도 있거든요.”

“하하하. 그럴 수도 있겠군.”

“경기위원이나 진행요원들의 몫이죠. 또한 배려를 받은 동반자들도 그리 기꺼운 기분은 아닐 것 같아요.”

“오케이!”

틀리지 않은 말이다.

만약 따지듯 채근했다면 반론을 제기했을 것이나 미사키는 그 말을 하는 내내 아주 차분했다. 냉정하게 자신의 경기에만 집중하는 것이 마땅한 본분이기도 했다.

“라이는 제가 관여하지 않아도 되죠?”

“응. 내가 특별히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면.”

실제 캐디의 역할에 대한 규정 변화가 이뤄졌다. 그 근간은 기본적으로 경기의 지연을 막기 위해서다.

캐디와 오래 상의하는 과정에서 경기가 지체되고 선수가 지나치게 캐디에게 의존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 필상은 여지없이 버디를 잡아내며 첫 홀부터 기세를 올렸다. 특히나 전반에 위치한 파 5홀 2개를 모두 이글로 장식하며 장타자의 위엄을 당당히 보여 줬다.

-걸리면 빠져나갈 수가 없군요!

-그전보다 한 단계 높아진 기량에 따른 최적의 전략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전략 변화라니요?

-버디를 잡을 수 있는 홀은 굳이 장타를 날리지 않고 정확하게 공략해 타수를 줄입니다. 1, 2, 5번 홀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7, 9번 홀처럼 전장이 길고 위험 요소가 많은 홀은 확실하게 잘라서 2온 2퍼팅이나 3온 1퍼팅 작전을 펼칩니다.

-아! 그럼 파 5홀에서도 안전하게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바로 그 점이 투어 데뷔 초창기와 달라진 점입니다. 당시 기억하길 공 프로는 장타자는커녕 풀스윙을 하지 못하는 반쪽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은 행태였지요. 나가는 대회마다 족족 우승했는데도, 지나치게 그걸 강조했었지요.

-하지만 그는 지금 장타자들이 즐비한 PGA에 내놔도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장타를 때려냅니다. 그것도 굉장히 높은 페어웨이 적중률을 보이면서 말입니다.

골자는 필상이 장타자임에도 정확성을 갖췄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그걸 믿다가 가끔 보기를 기록하기도 했는데 이젠 그런 과욕을 부리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루에 2자릿수 언더가 팍팍 나오지는 않지만 굉장히 안정적이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바로 파 5홀에서는 자신의 강점인 장타를 마음껏 발휘하기로 스스로 타협한 것이다. 결점을 찾아보기 힘든 경기 내용에 오늘처럼 장타가 효과를 발휘할 때면 정말 무서운 선수로 돌변하는 것이다.

버디 3개, 이글 2개에 파 3인 8번 홀에서도 1타를 줄인 필상의 아웃코스 성적은 무려 -8이었다.

“후반에 어려운 홀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응. 특히나 파 3홀들이 어렵지.”

“무리하지 않는다면 걱정할 일은 없지만 시작과 끝이 롱 홀인 것이 상당히 특이한 것 같아요.”

“음……. 일단 10번 홀 공략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굳이 장타를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아요. 캐리를 340m 이상 보낼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차라리 세컨샷에 승부를 거는 게 2온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해요.”

“좋아. 5번 유틸리티.”

10번 홀은 501m의 파 5홀이다.

티 박스 앞에 넓은 호수가 자리했지만 물과 벙커, 숲을 건너는 것은 어렵지가 않다. 하지만 우측의 거대한 벙커와 페어웨이까지 파고든 좌측 2개의 벙커는 빠지는 순간, 2온은 어림도 없다.

그 점을 충분히 고려한 미사키는 안전한 티샷을 날린 뒤, 세컨샷으로 그린을 공략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필상도 그게 옳다고 판단했다.

뒤늦게 합류했지만 한정된 시간에 그녀가 얼마나 야디지 북과 씨름했는지 짐작이 되는 대목이었다. 필상의 기량을 충분히 감안한 그녀의 판단에 따라 20도 유틸리티를 잡았다.

어느 클럽이고 자신은 있지만 필상에게 유틸리티우드는 정확한 방향성을 가장 확실하게 담보하는 무기였다.

쩌어엉!

유틸리티가 공을 부술 듯 때린 타격음이 집중하지 못했던 이들의 시선까지도 불러 모았다. 나이키 특유의 금속판이 쪼개지는 것 같은 음향은 보통 사람들의 인상을 구기게 만들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누가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 도구의 가치가 일변하는 것이다. 만약 이번 샷이 의도한 대로 정확히 들어간다면 적어도 같은 클럽이 수십, 아니 수백 개가 팔릴 것이라는 것은 이미 실적으로 증명되었다.

필상이 우승할 때마다 사용한 클럽의 판매량이 급증하고 하다못해 입었던 골프웨어도 스폰서 측은 미리 재고를 확보해야만 폭발한 수요를 맞출 수가 있었다.

-우우! 엄청나네요. 20도 유틸리티 아니었나요?

-네. 그렇습니다. 보통 공 프로가 정확한 방향으로 때리고자 할 때 사용하는 클럽입니다. 탄도가 낮아 거리가 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공 프로의 폭발적인 임팩트에 정말 무시무시한 거리가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268m라는 기록이 떴네요. 보통 선수들의 드라이버 거리나 진배가 없지만 남은 거리 241m가 문제로군요.

-하하하. 문제는 무슨 문제입니까! 방금 20도 유틸리티로 268m를 보냈는데 그 정도 거리라면 이제 24도 유틸리티 정도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3번 우드도 아니고 7번 유틸리티를 잡는다는 말이군요. 하하하. 정말 인간 같지가 않네요.

티샷을 마치고 세컨샷 지점으로 이동하던 필상은 자신의 공 주변에 있는 팬들의 반응이 좀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자꾸 공을 손짓하며 떠들고 웃는데 그 이유는 타구가 놓인 지점에 거의 도달했을 때 확인이 되었다.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미사키였다.

“공이 깨졌어요.”

“깨졌다고? 새 공이잖아?”

“네.”

필상도 공 상태가 훤히 보였다. 하지만 믿기지 않았다.

흠집이 나는 경우는 있어도 이렇게 쩍 벌어진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상태로 여기까지 날아온 게 다행인 것 같아요.”

“운이 좋았네.”

다른 프로들처럼 필상도 통상 3개 홀마다 새 공으로 교체한다. 스크래치가 나면 정상 궤적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태껏 강한 임팩트를 가해도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 홀에서 새 공을 사용했음에도 공이 깨지는 바람에 가슴이 철렁했다.

미사키의 말처럼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날아가던 도중에 벌어졌다면 당연히 공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거나 도중에 뚝 떨어졌을 수도 있다.

유난히 강한 임팩트를 가하긴 했어도 이렇게 경기 중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마음 놓고 샷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공 바꾸셔도 됩니다.”

“아. 네.”

사실을 확인한 동반자의 동의하에 필상은 새 공으로 바꿨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생각할 여지를 남겼다.

필상이 사용하는 공에 대한 골프팬들의 신뢰가 한 방에 무너질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본인도 괜히 찜찜했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 이 공을 사용해 수많은 격전을 치렀기 때문에 지나친 걱정일 수도 있다. 번잡한 마음을 버리는 것이 먼저인데, 미사키의 풀죽은 음성이 들려왔다.

“프로님. 죄송해요. 제가 미리 확인했어야 하는데.”

“무슨 소리야? 이게 어떻게 확인이 되겠어. 미리 때려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난 괜찮은데, 문제는 공급사지.”

“아마 담당자가 부리나케 달려올 것 같아요.”

“당분간 공은 팔리지 않겠네. 하하하.”

남은 거리는 241m, 2온을 노리려던 필상은 5번 아이언을 잡았다. 미세하나마 샷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부정적인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정확히 191m를 공략해 50m를 남겼다.

-2온을 노릴 줄 알았는데, 잘라 가네요?

-아무래도 방금 전에 벌어진 돌발 상황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공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지는 않았겠으나 아마 오늘 공 프로가 가져온 공은 같은 박스에 포장된 공이었을 겁니다.

-아! 불량품일 확률이 있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적어도 몇 번의 샷은 안전하게 가는 것이 제가 볼 때도 올바른 선택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경기 외적인 부분 때문에 선수가 손해 보는 아주 이상한 상황이 아닌가요?

-경기를 하다 보면 수많은 방해 요소들이 발생합니다. 그걸 다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선수 본인만 손해죠. 억울해도 일단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공 프로의 대처는 상당히 바람직한 겁니다.

-저 브랜드 공, 당분간 팔리지 않겠네요!

그 말에 대해서 허 위원도 사족을 달지 않았다.

훤히 전망되는 사실이었고 필상은 그 공을 사용하는 조건으로 적잖은 스폰서를 받았기 때문에 가급적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판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한다.

더욱이 한국에서 생산된 제품이기 때문에 필상으로서도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멋지게 띄워 볼까?”

“스폰서까지 생각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하하하. 속일 수가 없네.”

필상은 높이 띄워 강하게 스핀이 걸리는 장면을 팬들에게 보여 주려고 했다. 하지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단번에 꿰뚫어 본 미사키의 지적에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필상이 높은 탄도의 샷을 날린다고 했지만 아직 클럽을 건넬 의사가 없어 보였다. 물론 동반자가 샷을 하고 있어 여유는 있지만 클럽을 주면 연습할 수 있는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의미였다.

“범 앤 런이 최적일까?”

“아니요. 프로님이 생각하시는 최적의 샷이라면 전 뭐든 좋다고 생각해요. 다만, 불필요한 부담을 느끼시는 것 같아서 주제넘게 말씀드렸어요. 죄송해요.”

참으로 마음에 드는 태도였다.

자신의 선수를 굳게 믿는 사고방식이 가장 마음에 들었고 필상이 시시각각 느낄 수 있는 감정까지도 들여다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혹여 그런 행동이 부담으로 작용할까 염려해 미안한 마음까지 전하는 모습은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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