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어게인 미사키
“라일리 아냐?”
“네. 귀한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나 보네요.”
클럽하우스에 도착하자 여러 직원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대주주의 한 명인 타이거가 클럽을 첫 방문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직원들의 반응은 필상에게 더 뜨거웠다.
필상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골프클럽이 파산해 다수의 직원들이 실업 위기에 몰렸을 것이라는 말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필상은 일일이 악수하며 감사를 표하는 직원들에게 함께 열심히 해 보자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제게는 고객보다 더 중요한 분들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고객이 왕 아닌가요?”
“고객을 왕처럼 모시려면 직원들이 안정된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고객을 정성껏 모시도록 경영진은 여러분을 최선의 다해 모실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인식의 차이다.
한국 재벌은 직원들을 위 아래로 옥죈다.
고객들을 왕처럼 모시라고 강요하면서 오너의 갑질을 멈추지 않는데, 그건 지극히 비인륜적 폭거이자 직원을 인격체로 보지 않는 전형적인 패악의 근원이다.
인간을 사회의 구성원이 아닌 조직의 부품으로 취급해 일을 통해 보람을 느낄 수 없는 노동자들의 삶은 결국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의 행복지수가 낮은 이유다.
“생각보다 훨씬 멋진 코스인데?”
“자세히 머리에 담아 두세요. 어차피 코스를 리노베이션 해야 하니까.”
“코스 리노베이션?”
“현재 27홀이지만 챔피언십 대회를 유치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하죠. 그래서 저기 큰 산을 인수할 생각입니다.”
“아! 그럼 36홀로 확장하는 건가?”
“네. 데이비드 데일이 조성한 기존 코스를 형이 다시 재구성을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코스 설계에 관심도 많고 유능하다는 거 다 압니다.”
일단 개장하고 영업을 시작하는 데 일정한 준비가 끝나면 18홀만 운영하면서 전체적으로 코스를 손볼 생각이다.
홀이 많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전통과 역사가 어린 클럽으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답답한 공간은 없애고 넉넉하고 자연친화적인 설계가 필수다.
메이저 대회를 유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스터즈가 열리는 오거스타처럼 이 코스에서만 개최되는 대회를 창설할 의사도 있다.
때문에 코스 설계에 관심이 많은 타이거에게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해 아름다운 코스 리노베이션을 제안한 것이다.
자신도 관여된 이 코스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의사를 분명히 한 타이거가 얼마나 집중하며 코스를 살피는지 하마터면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
“기존 코스 설계도와 항공사진, 그리고 현장 사진들을 다각도로 찍어 보내 드린다니까요.”
“아니야. 내가 자주 와서 봐야 할 것 같아. 가능하다면 작은 사무실이라도 하나 내 줘.”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가 한국에 자주 오면 그 일만 하겠나.
자연스럽게 코리안 투어에도 나갈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참으로 탁월한 결정을 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5시간이 더 걸리는 방콕까지의 비행에 한숨도 자지 않고 쉴 새 없이 뭔가를 하는 그를 보며 좀 심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 집착이 지금의 그를 만든 게 아닐지.
“오랜만입니다. 박 사장님. 서로 인사들 나누시죠.”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내 평생 타이거랑 이렇게 악수를 하고 함께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이! 이게 다 공 프로 덕분 아닌가 하하하.”
“제게 좋은 사업 제안을 해 주신 박 사장님의 탁월한 선견지명 때문이죠. 제 덕이라니요.”
“참. 이럴 게 아니라 VIP라운지로 가세나.”
“누가 기다리기라도 합니까?”
“그럼. 천하의 타이거 우즈가 오는데도 기자들이 한 명도 없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나?”
“아! 그러고 보니 썰렁하네요.”
태국 정부에서 고위 관료가 나와 있었다.
필상도 이제 인지도가 꽤 높지만 타이거 우즈가 방문한다는 사실에 관광청은 물론 체육 관련 인사도 함께 나와 여러 지원 방안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대단한 사업을 벌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TPK가 한국, 일본에 이어 태국에서 사업을 벌인다는 사실에 고무되었고 실제 사업 성공의 가능성과 파급효과를 고려하면 전혀 터무니없는 진행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콘라차시마의 주지사 쑤까팝 씨는 타이거를 만나자 헤어진 형제라도 만난 듯 들떠 직접 추가적인 여러 사업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러다 본의 아니게 은퇴해야 하는 거 아닌지 몰라.”
“하하하. 아직 시간 많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시작하셔도 됩니다.”
“카오야이. 이 지역 정말 여러 모로 괜찮네. 왜 많은 골퍼들이 이 먼 길을 찾아오는지 알겠어.”
“이 참에 어머님을 모실 집을 하나 장만하시죠?”
“그럴까?”
“써제임스 골프클럽 내에 부지가 많으니까 새로 하나 지으셔도 되죠.”
“문만 열면 코스가 훤히 보이는 곳이면 더 좋겠지. 하하하.”
“저도 그 옆에 하나 지어야겠습니다.”
“좋지.”
결국 써 제임스 골프클럽을 장기 임대하기로 결정했다.
놀라운 것은 임대 기간이었다.
한 사람의 일생보다도 긴 무려 100년, 무엇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을 충분한 기간이며 그 임대 조건은 주지사의 지분을 25%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돈 한 푼도 들이지 않고 권리를 이양 받은 필상은 타이거와 TPK 카오야이 골프클럽으로 명명될 이곳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차피 태국에서의 사업은 그의 몫이기 때문에 떠나기를 거부한 그를 두고 필상은 홀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 * *
“연습해.”
“저도요?”
“그래. 너도 알다시피 이번 대회 끝나면 당분간 일본으로 미국으로 나돌 텐데, 이제 3부 투어라도 참가해야 할 것 아냐.”
“알았어요.”
성호는 서운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결의를 다지고 연습하는 모습에 필상도 안심했다. 그동안에도 꾸준히 샷을 가다듬어 당장 투어에 나가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연습과 실전은 다르기 때문에 필상은 성호의 샷을 수시로 점검해 줬다. 그 가치를 너무도 잘 아는 성호는 흘려듣지 않고 연습에 몰두했고 급기야 틀이 잡혔다.
“미사키가 오늘 올 거야.”
“네? 걔가 왜요?”
“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얼른 짐 싸서 군산으로 내려가.”
“7차 대회부터 나가도 된다니까요.”
“아니야. 지금 네 스윙이 너무 아까워서 그래. 이 대표에게 말을 해 놨으니까 바로 대회에 출전해.”
성호는 프로 자격은 취득했지만 아직 투어프로 자격은 갖추지 못했다. 게다가 대회에 출전하지 않아 누적된 포인트가 없기 때문에 챌린지 투어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번 대회까지 필상의 곁을 지키게 하고 싶었으나 월요일 연습 라운드를 마친 뒤, 필상은 이 대표에게 전화했다.
미리 출전 신청을 하지 않아도 출전이 가능한지. 마침 불참자가 있어 가능하다는 말을 전해들은 필상은 당장 내려가라고 권했다. 어차피 2라운드 36홀로 치러지는 대회라서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무조건 우승해.”
“알았어요. 저도 연승할 겁니다.”
“일단 1승부터 하고!”
“크크크. 알았다고요. 형도 꼭 우승하십시오.”
“내 걱정은 붙들어 매고 우승하기 전에는 내 얼굴 보러 오지도 마.”
“아! 진짜!”
성호가 떠난 뒤, 필상은 이 대표와 다시 통화했다.
성호가 지금 군산으로 출발했으니 미사키를 부를 수 있는지 확인한 것이다. 만약 성호가 고집을 부리면 어쩔 수 없을 것 같아 이제야 연락한 것이다.
* * *
-2020시즌 두 번째 메이저 대회인 SK 텔레콤오픈 중계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허덕호 해설위원께서 시청자 여러분들에게 도움 말씀을 주시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바람이 제법 불지만 파릇파릇한 잔디가 돋아나 골프를 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가까이 계시는 분들은 이곳 스카이72를 찾아오셔서 직접 프로 선수들의 멋진 샷을 보는 것도 유익하리라 생각됩니다.
-한 주 쉰 공 프로가 다시 이번 대회에 출전하면서 또 다시 흥행 기록이 깨질 것이라는 예상하던데, 과연 그럴까요?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비록 이번 대회에 타이거와 같은 거물은 참가하지 않았지만 보다 문호를 개방한 주최 측이 일본 투어와 아시안 투어에 상당한 시드를 제공했기 때문에 더욱 더 흥미진진한 대결을 지켜보실 수 있을 겁니다.
지난 주 필상이 참가하지 않았던 대회의 흥행은 시원치 않았다. 전년도보다 나아졌다는 것에 자위했지만 다시 한 주 뒤에 열린 SK오픈 분위기는 최절정에 이르렀다.
규모가 다른 메이저 대회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필상의 출전 여부였다.
‘한국 축구에 손흥민이 있다면 한국 골프에는 공필상이 있다.’
처음 어느 골프 전문기자가 그 표현을 사용할 때만 해도 여론의 뭇매를 감수해야 했다. 해를 거듭하며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월드클래스라고 평가받는 손흥민에게 어딜 감히 비벼 대느냐는 투였다.
하지만 이젠 골프를 모르는 이들도, 오로지 축구에만 열광하는 팬들도 그런 태클은 걸지 않는다. 하루가 멀다 않고 나오는 필상의 눈부신 활약은 누가 봐도 대단했기 때문이다.
“꿈만 같아요!”
“뭐가?”
“제가 다시 프로님의 캐디를 한다는 게요.”
“첫 우승 때 함께였잖아?”
“그랬죠. 하지만 성호 씨가 온 뒤로 제가 다시 프로님의 캐디를 볼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친구는 프로캐디보다는 선수로 뛰는 것이 더 나아. 물론 미사키를 무시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고.”
“알아요. 하지만 전 프로님 백을 메는 것이 제가 우승하는 것보다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전 진즉에 파악했거든요. 제 재능의 한계를.”
“그런데 담당했던 선수를 팽개치고 이렇게 막 달려와도 되는 건가? 내가 괜히 미안해지잖아.”
“상관없어요. 이 일이 제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거든요.”
무슨 말인고 하니, 필상의 캐디를 본 이후 미사키는 아예 전문 프로캐디로 나섰다. 필상과 함께 우승하며 캐디 일에 강한 매력을 느꼈고 이후 JLPGA 선수 몇몇의 우승을 도왔다.
필상과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친 탓에 전문성을 갖추려 부단히 노력하고 준비한 그녀를 원하는 선수가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 대표가 연락하자 모든 것을 떨치고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던 것이다. 필상의 캐디를 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우선순위라는 말을 듣고 필상은 한숨을 돌렸다.
골프에 대한 재능은 부족했지만 똑똑한 머리를 지닌 탓에 대인관계가 좋고, 일본인치고는 영어 실력도 상당한 편이라 차후 일정을 함께 소화하는 것도 희망적이었다.
그런 미사키와 함께 1번 홀로 들어섰다.
“자. 우리 다시 한 번 시작해 볼까?”
“네. 드라이브 드릴까요?”
미사키의 일하는 태도는 한층 더 완숙해졌다. 갑자기 한국에 와서 필상의 캐디를 보게 된 사실이 흥분될 것이나 경기에 들어서자 차분한 자세를 견지했다.
이전보다 더 프로페셔널 한 모습은 익숙하던 성호와 느낌이 전혀 달라 오히려 산뜻한 기분으로 경기에 임하게 되었다.
스카이72 하늘코스.
공항을 드나들 때마다 시선을 끌었던 이 코스에서 이미 4회째 대회가 치러지지만 2년차인 필상은 처음이다. 하지만 어디든 그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아니. 4번 아이언.”
“네. 좋은 선택인 것 같아요.”
1번 홀은 365m의 파 4홀로 돌고래 형상의 넓은 호수를 우측으로 끼고 도는 도그렉 홀이다.
평평하고 넓은 페어웨이가 펼쳐져 있지만 우측 호수변의 비치 벙커에 티샷을 빠뜨리는 선수가 의외로 많다. 첫 홀부터 너무 강하게 때리려다 밀리는 샷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고 좌측이 편한 것은 아니다. 200m부터 290m 구간까지 주르르 이어진 크로스 벙커는 호수를 지나치게 의식한 자들에게 어김없이 찾아오는 함정이다.
물론 필상은 원 샷 온 그린도 가능하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도 아닌 바, 대회 첫 홀부터 무리할 이유는 없었다.
따악!
-공 프로가 아예 아이언을 잡았네요!
-지금 같은 강하고 정확한 임팩트라면 족히 220m는 나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220m요? 그러면 남은 거리가 150m 안팎일 텐데, 유틸리티라도 잡지 너무 긴 거리를 남긴 건 아닐까요?
-아마추어들에게는 150m가 부담스러운 거리지만 아마 공 프로에게 그 거리는 임 캐스터의 100m 느낌일 겁니다.
-아! 그렇게 설명해 주시니 아주 이해하기 쉽네요. 얼마든지 컨트롤할 수 있는 유효 거리라는 말이군요?
-하하하. 설마 임 캐스터가 100m 거리를 공 프로처럼 컨트롤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시죠?
-아! 저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십니까? 지난 주말 라운드에서 저 아주 잘 쳤습니다. 몇 타인지 말씀드릴 수 없지만.
허 위원은 그가 보기 플레이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한참 자신감이 넘치는 시기지만 보기 플레이어의 100m 샷 온 그린 확률은 사실 반반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자신이 잘 쳤던 기억만 오래 남을 뿐, 이런 저런 미스가 한참 많은 시기인 엄연한 현실이다. 더는 추궁하지 않았지만.
필상의 4번 아이언 샷은 예상보다 훨씬 멀리 안착했다.
“나이스 샷!”
“이번 샷, 얼마나 날아간 것 같아?”
“239m요.”
“와우! 제법 정확한데?”
“2번째 벙커 초입부가 235m이잖아요.”
“그렇지. 비거리는 그렇게 재는 게 현명한 방법이지.”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