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62화 (162/354)

162. 명승부

“신중한 모습 보기 좋네.”

“그럼요. 한 타에 몇천이 오가는데 당연하죠.”

“말을 해도 꼭!”

동반자들은 이미 우승 경쟁에서 멀어졌다.

순위 하나에 좌우되는 것이 많지만 그걸 떠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은 프로의 당연한 자세다. 혹시 성호의 언급처럼 돈을 생각하면 좋은 플레이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여하튼 그린 플레이가 이어지는 동안 어느새 경쟁자들이 18번 홀 티샷을 하고 있었다. 보고 싶지만 참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의 퍼팅이기 때문이다.

‘라이가 거의 없네!’

살짝 우측이 낮은 경사라고 알려진 지점인데, 집중한 필상의 감각에는 거의 경사가 느껴지지 않았다.

기껏 본다고 하더라도 좌측 홀컵 안쪽 정도, 만약 체크한 대로 조금 더 본다면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아 깃대 주변을 한 바퀴 크게 돌며 꼼꼼하게 라이를 살폈다.

또한 마지막으로 라인의 양쪽에 발을 디뎌 확인까지 했다. 그러면서 잔디가 역결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걸 넣어야 최소한 연장전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 연습 스트로크를 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너무도 쉽게 우승을 뚝딱뚝딱 해냈던 공 프로도 지금은 상당히 긴장한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왜 떨리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 저 심정, 직접 서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죠.

-네. 저도 제법 많은 우승을 했지만 어떨 때는 갤러리들의 응원 소리에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그럽니다. 하하하!

-타이거는 안정된 티샷을 했는데, 박일한 프로의 타구는 좌측 러프에 들어가고 말았네요. 아무래도 우승 경험이 없다는 점이 영향을 미친 걸까요?

-임한석 캐스터. 이만큼만 해도 잘했다는 표현은 하면 안 됩니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아! 네. 그래야지요. 하하하.

최 프로의 말에 단정적인 해설은 자제되었다.

타이거나 필상에 비하면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그라고 왜 노력하지 않았겠는가!

어려서부터 오직 하나의 목표를 보고 달려왔다. 필상에 비하면 더 오랜 염원이 담긴 필사의 샷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필상의 퍼팅 순서가 돌아왔다.

시끌벅적하던 갤러리들의 소란이 자제되었고 빈 스트로크를 2번 행한 필상은 차분하게 어드레스를 취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테이크백에 이어 생각보다 과감한 스트로크가 이뤄졌다. 그 시간이 찰나처럼 짧게 느껴졌기에 몇몇은 너무 좌측이라고 생각했지만 말할 겨를은 없었다.

터엉!

필상의 집중력은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자신의 감각은 틀리지 않았고 정확히 홀컵 한가운데로 쑥 들어가 청명한 소리를 냈다.

“와아아아! 나이스 터치!”

“공필상! 공필상!”

좀처럼 필상의 이름이 연호된 적은 없다.

대부분 미스터 퍼펙트라는 닉네임을 외쳤는데 누군가 한 명이 선창하자 연이어 다수의 갤러리들이 본명을 소리쳤다.

그렇다. 여긴 한국인 것이다.

“멋졌습니다!”

“어서 비켜 주자.”

“아, 네.”

이제 공은 일한과 타이거에게로 넘어갔다.

18번 홀은 378m에 오르막도 25m나 되는 전장이 상당히 긴 홀이다. 필상은 317m를 보내 버디가 쉬운 세컨샷 지점을 확보했지만 장타자가 아닌 경우, 과도한 힘이 들어가 파를 지키기도 버거운 홀이다.

타이거는 298m를 안전하게 보내 나름 세컨샷 공략이 쉽지만 일한은 페어웨이 우측에 심어 둔 4그루의 나무가 부담스러운 나머지 티샷이 당겨지고 만 것이다.

때문에 남은 거리는 134m, 오르막까지 감안하면 148m를 쳐야만 한다. 게다가 러프라서 거리 조절도 쉽지 않았다.

“저 꺽다리가 잘 칠까요?”

“응. 거리도 제법 있는 러프지만 잘 칠 것 같아.”

“어? 정말이십니까?”

성호는 필상이 좀처럼 타인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은 걸 안다. 하지만 일단 뱉으면 예상이 틀린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분명 긴장이 고조된 극한의 상황이고 공의 라이도 좋지 않은데, 잘 칠 것 같다는 필상의 말은 그린에 올릴뿐더러 버디 기회를 의미하는 것이라 고개를 기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법 거리가 멀지만 일한의 태도가 아주 진지하고 결의에 차 있다는 것은 느껴지지만 그래도 쉽지 않다고 봤다.

“굿 샷!”

“어우!”

아주 제대로 맞았다는 느낌에 필상이 먼저 굿 샷을 외치자 성호는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의 감정은 아주 복잡 미묘했던 것이다.

어려서 같이 운동을 한 일한은 정상 과정을 착착 밟아 프로에 입문했지만 자신은 실패해 고향에서 티칭프로로 생활했다.

물론 다시 재도전에 나섰지만 투어프로인 일한이 부럽다는 생각은 크지 않았다. 어딜 가나 프로님, 프로님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우승 없는 프로의 고달픈 삶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천 명의 이목을 집중시킨 멋진 샷을 날리고 팬들의 뜨거운 환호성을 받자 격세지감이 느껴진 것이다.

-와우! 붙였습니다. 저 어려운 샷을 그냥 붙여 버리네요!

-담대한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아직 승부가 끝나지 않았음을, 자신의 존재감을 만방에 알릴 상징적인 샷이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네. 그를 모르던 팬들도 이제 박일한이라는 이름 석 자를 확실하게 기억하게 될 것 같네요.

문제는 타이거였다.

누가 봐도 필상의 경쟁 대상은 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일한이 어려운 라이에서 멋진 샷을 터트리자 천하의 타이거가 곧바로 스윙을 하지 못하고 연습 스윙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타이거답지 않은데요?”

“예상을 뛰어넘는 일한의 분전에 석이 죽었네!”

“석이 죽었다고요?”

“응. 언제 그가 샷을 앞두고 망설이는 거 봤냐?”

“그러니까요…….”

강력한 경쟁자 타이거는 일한이 그렇게 한 방에 물리쳤다.

타이거의 세컨샷은 지나치게 높이 솟구쳐 그린 앞 러프에 떨어지고 말았다. 필상과의 팽팽한 승부를 기대했던 일부 팬들의 탄식이 그를 더 난감하게 만들었다.

칩샷이 남았지만 그것마저도 홀컵 근처에 이르지 못했다.

-하하하. 이런 상황이 다 벌어지네요.

-지난해 마스터즈를 거머쥐며 황제의 귀환을 알렸고 올해도 개인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우며 건재를 알렸지만 한국 선수의 기량에 밀렸다고 밖에는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지금 상황은 너무도 분명하죠.

-과거 역전이 불가하다는 굳건한 명성을 깬 선수도 바로 우리 양용은 프로가 아닙니까?

-그 뒤로 내리막을 탔는데, 그런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처음 나선 외국 코스에서 이만하면 아주 훌륭한 결과입니다.

-아이고. 이만하면 훌륭하다는 말을 제가 타이거 우즈에게 사용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네요. 하하하!

최고의 선수라고 항상 우승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1년에 꼬박꼬박 1승만 해도 대단하고 다승하는 해에는 엄청난 인기와 현실적인 이득이 발생하는 게 현실이다.

1년에, 그것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10승을 달성한 필상이야말로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한 것이다. 설사 전성기의 타이거라도 같은 대회에 참가해 그만한 결과를 만들 수 있다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최고의 무대라는 PGA 2승도 추가하지 않았던가!

일한은 2m 남짓한 퍼팅을 앞두고 적잖이 흥분된 것 같았다. 불굴의 의지로 이 자리까지 왔지만 막상 타이거가 엄한 샷을 하는 것을 봤고 또 그린에 올라서며 자신을 향한 팬들의 열렬한 응원을 대하자 어깨가 무거웠던 것이다.

“설마 꺽다리 저 자식…….”

너무 긴장한 모습이 역력해 보였는지 성호는 걱정 아닌 걱정을 늘여 놓으려다 말고 말을 꾹 삼켰다.

친구의 좋지 않은 상황을 입에 담는 것이 기껍지 않았던 것이다. 필상의 캐디지만 그렇다고 불운을 빌 수는 없다.

그 마음을 아는지 필상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이오프. 준비해.”

“잠깐만요.”

라이도 없는 오르막 퍼팅이기 때문에 그냥 쭉 밀면 그만이다. 그래도 신중하게 루틴을 밟은 일한은 자신에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집중했다.

“아!”

들어가는 줄 알았다.

딱히 스트로크에 문제가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빨려 들어갈 것 같던 공이 홀컵 바로 앞에서 살짝 꺾이더니 그냥 흐르고 말았다.

갤러리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일한이 받았을 충격을 이해한 굉장히 신중한 태도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필상의 근처에 있던 이들은 우승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필상은 손을 흔들어 주면서 그린으로 향했다.

“수고했어.”

“아! 형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축하드리고요.”

“이리 와. 같이 인사하자.”

필상은 타이거에게도 손짓을 해 다 같이 손을 잡고 팬들에게 두루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동료들이 샴페인을 들고 나와 격렬한 우승 축하 세리머니를 가했다.

또한 모모코가 엄마를 모시고 나와 함께 기쁨을 나눴다.

뜨거운 박수를 받는 아들이 자랑스러우셨는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분이 눈가에 가득 물기가 고이셨다.

새롭게 태어난 매경오픈에서 필상은 가까스로 그렇게 우승을 거뒀고 마치 첫 우승인 양 감격에 겨운 시상식에 참가했다.

-우승 소감부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다들 보셨다시피 정말 어려운 우승이었습니다. 첫날부터 좋은 플레이를 함께 한 모든 참가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마지막까지 팽팽한 승부를 이어 갔던 타이거, 그리고 박일한 프로와 우승의 기쁨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우승은 본인이 하시고 기쁨만 함께 나누자는 것은 너무 욕심 많은 발언 아니십니까? 하하하.

다들 이해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대회에 출전하는 프로에게 양보란 있을 수 없는 일, 오히려 다시 보기 힘든 명승부를 펼쳐 준 것에 대해 다들 기뻐했다.

게다가 한국 골프의 희망으로 떠오른 필상이 우승했고 아직은 젊은 박일한이 타이거를 당황시킨 장면은 압권이었다.

바로 그 얘기가 나왔다.

-타이거를 대신 물리쳐 준 박일한 프로에게는 한턱 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더 멋진 승부를 만들 수 있었는데 두고두고 아쉽습니다. 셋이 나란히 플레이오프에 갔더라면 더 극적인 그림이 그려졌을 텐데, 마지막 퍼팅이 떨어지지 않은 것에 너무 마음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박 프로는 이미 제 아우입니다. 하하하.”

-아! 프로님의 캐디와 친구라는 말이 있던데 사실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같은 속초 출신이고 골프도 같이 배운 친구입니다. 제 캐디 김성호도 곧 투어에 참가할 것입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뜬금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필상은 멀리 서 있는 흑돈에게 들으라는 듯 그걸 언급했다.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일한의 진격을 보며 성호의 마음은 흔들리다 못해 이미 콩밭에 가 있었다.

그런데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자 아예 못을 박은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제한된 탓에 기자들은 얼른 화제를 바꿨다.

-동해오픈에 이어 메이저 2연승이신데, 이러다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것 아닐까요?

“일단 2주 후에 펼쳐지는 SK telecom OPEN의 결과를 보고 말씀드리겠지만 작년에 우승한 것을 포함시키면 진정한 의미의 캘린더 그랜드슬램이 아니지요.”

-어? 정말 그걸 목표로 삼고 계시는 건가요?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을 도맡아 하는 필상이다 보니 전혀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냥 툭 던진 말인데, 진지하게 대꾸하자 오히려 질문을 던졌던 기자가 당황했다.

메이저 대회 우승은 그 자체로 감격스럽다.

다승을 해도 메이저 대회에만 유독 약한 선수들도 있고. 루키에 해당되는 필상에게 커리어 그랜드슬램은 언급하기 거북한 내용이다. 더욱이 한 해에 메이저 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캘린더 그랜드슬램이라니!

세계 골프 역사상 그 기록을 가진 선수는 바비 존스, 단 한 명뿐이다. 지금처럼 경쟁이 뜨겁지 않던 1930년에 작성했다.

전성기의 타이거도 아쉽게 놓친 적이 있다.

코리안 투어라고 평가절하할 수도 있지만 그 역시 한국 골프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역사가 될 수 있기에 모였던 기자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제 목표는 분명합니다. 약속드렸다시피 올 한 해는 한국과 일본 투어의 메이저 대회들에 최대한 집중할 생각입니다. 그랜드슬램은 그에 따른 부수적인 것이고 참가하는 대회마다 확실한 결과를 얻고 싶을 뿐입니다.”

필상의 그 대답은 곧 메이저 대회 전승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터무니없는 목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목표 아니던가!

다른 선수도 아닌 차기 골프 황제라고 추앙받는 필상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 * *

“인터뷰 내용이 너무 파격적인 거 아냐?”

“어제 제 인터뷰 내용을 들으셨습니까?”

“응. 미국 스포츠 매체들도 큰 관심을 보이더군.”

“하하하. 관심이 아니라 비판이겠지요. 하지만 남자는 모름지기 그 정도 목표는 가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음 날 아침, 필상은 타이거와 함께 새로 인수한 스코틀랜드 CC로 향하는 중이었다. 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그에게 구경시켜 주고 싶었고 자신도 주인이 바뀐 직원들이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가는 길에 타이거는 우호적이지 못한 미국 언론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에 대한 염려의 말을 전했다. 실제 목표가 그렇더라도 굳이 속내를 밝힐 이유는 없지 않았냐는 의미다.

“아쉬울 게 없습니다.”

“정말 PGA 출전은 포기한 건가?”

“어렵게 따낸 시드가 있는데 왜 포기합니까. 다만 제가 나가고 싶을 때, 나가고 싶은 대회만 나갈 겁니다.”

“하기야 그건 자네의 권리지.”

타이거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PGA의 권위에 대한 필상의 태도다. 미국인인 타이거는 당연히 모든 사고가 그 안에서 이뤄지지만 필상은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다.

PGA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자신을 원하고 꿈을 펼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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