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점입가경
파 5홀의 기가 막힌 이글로 단독 선두에 나섰다.
얼마나 유지될지는 두고 봐야 하지만 311m에 불과한 파 4, 15번 홀에서 필상은 유혹을 참지 못하고 드라이브를 잡았다.
얼마든지 가능한 선택이나 지난 홀 티샷이 러프에 빠진 것은 바람의 심술이었다는 것을 확인시키려는 마음이 강했다.
18m의 오르막이 있어 330m를 날려야 하는데, 그 정도라면 80%의 힘 조절로도 온 그린을 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좌우의 벙커는 정확성으로, 앞을 가로막은 가드 벙커는 비거리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운명은 얄궂었다.
-뒷바람이 불었나요?
-탄도를 띄워 가드 벙커를 넘기려는 시도는 적절해 보입니다. 방향도 아주 좋았고요. 하지만 너무 높았던 타구가 저렇게 길게 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공을 찾을 수는 있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숲이 제법 우거졌지만 떨어진 지점을 뻔히 아는데 볼이 분실될 리는 없을 겁니다.
그 대목에 최 프로가 의견을 보탰다.
-언플레이어블을 선언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 저 지점의 라이가 그렇게 안 좋습니까?
-네. 확인이 필요하지만 나무뿌리도 튀어나와 있고 굵은 모래, 아니 돌덩이들이 꽤 있어서 무리하다가 불필요한 타수를 잃는 경우도 여러 번 봤습니다.
최 프로의 예상은 적중했다.
공은 하필 나무뿌리 뒤에 걸려 있었다. 샷을 못할 이유는 없지만 공을 때린 클럽페이스가 딱딱한 나무를 때린다는 걸 아는데 어찌 정상적인 스윙이 나오겠는가.
그래도 필상은 라이와 그린까지의 거리, 그리고 홀컵 주변의 경사까지 꼼꼼하게 살펴보며 종합적으로 판단했다. 다행히 동반자들이 먼저 세컨샷을 하는 바람에 제법 여유가 있었다.
“드롭 할 위치도 그렇게 좋지는 않아요.”
“음……. 그렇다면 일단 레이 업을 해야겠다.”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한 방에 이곳에 왔다.
실수는 분명하지만 리커버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낙심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드롭을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다운힐 라이 러프에 드롭을 하느니 헤드가 무거운 클럽으로 툭 때려 그린 주변에라도 올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필상은 9번 아이언을 잡았다. 연습 스윙을 하며 확인할 때만 해도 이상이 없었는데 실제 샷의 테이크백에서 클럽헤드가 나뭇가지에 걸렸다.
아니, 걸렸다기보다는 살짝 스친 것에 불과했지만 극도의 감각을 끌어올린 상태였기에 필상은 얼른 스윙을 멈추고 일단 물러섰다.
“클럽 바꿔 드려요?”
“응. 아예 갭 웨지를 줘.”
웨지의 길이라면 걸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샷을 멈췄다는 것이다. 뭔가 찜찜한데도 그냥 샷을 하는 경우가 흔한데, 결과는 십중팔구 좋지 못하다.
골프가 얼마나 예민한 운동인지를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다. 샷을 하려다 자세를 풀면 동반자들은 대부분 인상을 구기지만 고의적인 지연 플레이가 아니면 이해하는 것이 맞다.
서로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데 필상이 다시 어드레스를 취하는 순간,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틱!
하필이면 결과가 좋지 못했다.
동반자나 캐디들 중에 한 명이지만 누군지 따질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철딱서니 없는 행동에 영향을 받았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더 싫었다.
적어도 나무뿌리는 맞지 않게 쳤어야 하는데 약간 탑핑성으로 맞은 공이 나무뿌리를 맞고 기이하게 튀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끝이 아니었다.
딱!
좌측 10시 방향으로 날아간 공이 카트 도로에 다시 맞고 벙커로 들어가는 순간, 필상은 이를 악물지 않을 수 없었다.
혀를 차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많지 않다. 동반자들과 캐디들, 그리고 등을 돌리고 있던 진행 요원 중에 몇 명 있으려나.
“어떤 새끼가?”
다행히 갤러리들의 놀란 반응에 가려 잘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필상은 당사자를 향해 폭발하려던 성호를 잡아끌었다.
“됐어. 보지도 마.”
“해도 너무하잖아요!”
“그럴 거 없어. 수많은 소음 중에 하나였을 뿐이야. 그걸 따지는 사람이 더 옹졸해 보일 거다.”
“지켜야 할 매너라는 게 있는 겁니다. 형.”
“축제야. 이 좋은 분위기를 망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필상이라고 왜 화가 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샷이 좋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
-아! 정말 어려웠군요!
-결과적으로 드롭을 하는 것이 나았다는 건가요?
중계진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최 프로가 사전에 했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샌드웨지를 들고 벙커로 들어가는 필상은 독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선수라면 나중에라도 한 마디 할 수 있을 것이나 캐디라는 것을 알기에 무조건 홀컵에 붙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스윙하는 것이 나아 보였으나 필상은 테이크백 궤도만 체크한 후에 과감하게 때렸다. 모래가 사방으로 비산하는 가운데 하얀 공이 멋들어진 궤적을 보이며 그린 위에 나타났다.
샷을 마친 필상은 바람 때문에 얼굴로 날아오는 모래를 피해 얼른 뒤로 물러서며 타구의 진행 방향을 확인했다.
-우우! 너무 길지 않나요?
-조금 얕게 들어간 것 같습니다.
중계진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이 우뚝 멈춰서 버렸다. 벙커샷이라고 스핀이 먹지 않는 건 아니지만 모래를 듬뿍 떠낸 지금 같은 샷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때문에 전문가인 최 프로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아주 특이한 움직임인 것은 분명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필상이 자신도 모르게 이능을 사용했던 것이다.
상당히 빨랐지만 가만 두면 홀컵에 빨려 들어갈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타구를 바라보던 필상은 염원을 풀었다. 우승에 눈이 멀어 정당하지 못한 승부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후우! 다행입니다.”
“뭐가?”
“스핀이 먹어서요.”
남의 속도 모르고 멈춘 것이 다행이라고 말하는 성호를 보며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3m 남짓한 퍼팅이 가장자리를 타고 흘러 파를 잡지 못한 것은 천추의 한이었다.
14번 홀에서 버디를 잡은 일한과 동타였는데 다시 2위로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더 보드를 확인한 필상은 타이거가 그 홀에서 이글을 잡았음을 확인했다.
-25 박일한
-24 공필상, 타이거 우즈
-22 김경태, 임성재, 박상현.
“3파전인데요?”
“타이거까지 힘을 내는 건가?”
일한의 기세가 높다는 것은 익히 안다. 하지만 타이거는 아직 스스로 써 내려가고 있는 전설이 끝나지 않은 선수다.
늘 그를 괴롭히던 부상에서 자유로워졌기에 언제 또 다시 복병을 나타날지 장담하기 어렵다. 그래도 이번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오판일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필상은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털어 버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남은 세 홀에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506m로 세팅이 됐습니다.”
“어느 쪽 벙커에 붙인 거지?”
“좌측이요.”
16번은 파 5홀이다.
내리막이 28m나 있어 실제 거리는 480m만 보면 된다.
그런데 핀의 위치가 쉽지 않았다. 2온을 노릴 경우 세컨샷 상황에 롱 아이언이나 유틸리티를 잡아야 하는데, 앞 핀이라면 붙이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물론 장타를 보유한 필상이라면 다르다. 330m가량 보내면 미들아이언을 잡을 수도 있기에 기대를 품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앞선 두 홀에서 드라이브 샷이 흔들렸다는 점이다. 게다가 더 결정적인 걸림돌도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커다란 벙커 2개에 의해 페어웨이가 중간에 잘렸다는 것이다. 장타자가 아닌 경우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 315m지점부터라는 것도 필상에게는 다소 부담이 된다.
“중간 벙커 구역을 넘기실 겁니까?”
“캐리가 얼마나 나와야 넘어가지?”
물론 필상은 정확히 안다. 하지만 재차 확인이 필요했는데 그 간단한 산수도 성호의 입에서는 곧바로 나오지 못했다.
실수하지 않으려는 노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으음……. 내리막까지 계산에 넣으면 327m입니다.”
“캐리만 327m라 이거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힘차게 때리면 그 정도 거리는 보낼 수 있지만 연이은 티샷 실수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1타 뒤진 상황이라서 도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쉭! 쉬익!
연습 스윙의 바람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이번에도 과감한 샷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발사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의 탁월한 장타 능력이라면 벙커를 충분히 넘길 수 있습니다. 오로지 공 프로만이 가능한 시도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하하하!
허 위원까지 합세해 장타에 대한 기대를 부풀렸다. 하지만 최 프로는 조심스러운 언급을 꺼냈다.
-앞 핀인데, 쓰리 온 작전이 더 낫지 않을까요?
-1타 뒤지고 있기 때문에 피치 못할 판단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이 긴장된 순간에 과도한 힘이 필요한 샷을 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럽니다.
그 역시 좋은 결과를 바란다는 말이었다.
서드 샷으로 핀에 붙여 버디를 잡고 다시 기회를 엿봐도 된다는 의미일 뿐, 그는 너무 과도한 압박감을 느끼는 상황에 몰리는 것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갤러리들이 벙커 구역을 넘은 지점에 몰려 있었다. 팬들도 필상이 장타를 때릴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기대와 염려를 한 몸에 받은 필상이 마침내 어드레스를 했다. 그런데 에이밍이 우측이었다. 거리를 확실하게 늘리기 위해 드로우 구질까지 동원한 것이다.
까앙!
풀스윙이었다.
다른 선수들에게는 흔한 광경이지만 필상에게는 전력을 싣는다는 또 다른 의미였다.
일단 임팩트는 제대로 이뤄졌다.
시야에서 사라진 타구가 자취를 드러낸 지점은 우측 카트 도로를 넘어선 우측이었다. 그곳에는 수천 명의 갤러리들이 운집해 있어 행여 드로우가 걸리지 않는다면 ‘볼’이라고 경고해야 하건만 캐디는 물론 아무도 외치지는 않았다.
“고! 드로우 샷!”
“넘어! 넘어가라고!”
체공 시간이 길었기 때문인지 사방에서 외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들은 모두 필상을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이거가 작년 마스터즈 그린재킷을 5번째로 입은 그 당시, 혼연일체가 되었던 팬들의 간절한 외침도 이처럼 강력했다.
-미국에 타이거 우즈가 있다면 우리 한국에는 우리 공필상 프로가 있는 겁니다!
-하하하. 현역이신 최 프로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좀 더 각별하게 들리는군요. 하지만 편파 방송 아닌가요?
-제 말이 틀렸나요? 공 프로는 한국인이고 지금 코리안 투어를 뛰고 있으니 팩트 체크를 해 보셔도 됩니다. 하하하!
-아! 팩트에 틀림이 없군요.
그 말이 떨어질 무렵 급기야 드로우가 걸리기 시작했다.
높고 우거진 나무들과 그 아래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는 팬들의 머리를 지나 하강 궤도에서 페어웨이로 진입했다.
이미 벙커 지역은 훌쩍 지난 지점이었다.
비명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페어웨이를 지킨 것은 물론 무려 캐리만 339m를 찍은 타구가 하염없이 굴려 372m 지점에 멈췄기 때문이다.
“와아아아! 나이스 샷!”
“공 필상! 공 필상!”
마치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뜨거운 환호성이 끝 모르게 이어졌다. 임성재가 타석에 들어섰지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팬들 때문에 연습 스윙을 길게 가져가야만 했다.
-정말 대단합니다. 372m라니요!
-남은 거리가 138m, 그런데 내리막을 감안하면 130m만 쳐도 됩니다. 웨지로도 가능하겠네요!
-내년부터 전장을 더 늘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처럼 억울한 선수가 한둘이 아닌데, 참 걱정스럽네요. 하하하!
최 프로의 엄살 섞인 해설에 다들 크게 웃었다. 진심일지도 모르는데, 이 상황에서는 그렇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장타 대회를 보면 그 정도 거리를 쉽게 보내는 선수가 많다. 하지만 이건 10번을 쳐서 페어웨이를 지킨 가장 먼 타구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한 번의 샷으로 벙커 지역을 넘겨야 하기 때문에 살이 떨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난 두 홀에서 다소 불안했던 티샷이 이번에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거리와 라이를 만들었다. 감탄 외에는 그 어떤 말도 필요치 않았다.
“우우우우!”
세컨샷은 완벽했다.
벙커가 위협적이지만 그걸 넘겨 깃대 바로 앞에 떨궜다. 하지만 백스핀이 먹은 공은 뒤로 끌려와 그린과 에이프런의 경계선에 정확히 멈췄다.
하지만 필상은 5m 이글 퍼팅을 과감하게 밀어 구겨 넣었다.
-26, 단독 선두로 다시 올라선 순간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나 이어진 209m 파 3홀에서는 버디를 잡지 못했다. 오후 5시를 넘어서면서 보다 강해진 바람이 타구를 우측으로 밀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차분하게 파를 기록한 필상은 마지막 홀에서는 다시 안정적인 티샷에 이어 3.5m 남짓한 버디 기회를 남겼다.
“고고! 미스터 퍼펙트!”
“이겨라! 공 프로!”
그린으로 올라서는 필상의 당당한 모습에 팬들의 사랑 고백이 끊이질 않았다. 17번 홀을 마친 상황에 필상은 일한, 타이거와 동타였다.
이런 기세면 기가 죽을 만도 한데, 상황은 점입가경이었다. 일한이 16번 홀에서 버디를 잡아 따라왔고 타이거는 16, 17번 홀에서 연속 버디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 와중에도 먼저 마지막 홀에 들어선 필상이 깔끔한 샷으로 버디 기회를 맞았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26 타이거 우즈, 박일한, 공필상.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