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60화 (160/354)

160. 최고의 덕목

까앙!

10번 홀은 380m의 파 4홀이다.

그린이 15.5m 아래에 위치해 1번 홀처럼 과감한 공략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필상은 아예 드라이브를 잡지 않았다.

페어웨이우드도 아닌 5번 유틸리티를 잡더니 정확하게 250m만 공략했다. 탄도를 띄우지 않고 방향성에 집중했던 타구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런이 발생했다.

그리고는 남은 131m을 피칭을 잡더니 핀에 쩍 붙였다. 물론 1.5m 버디 퍼팅을 놓칠 필상이 아니었다.

-어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요.

-본색이라니요?

-저런 빡빡한 모습이야말로 공 프로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었던 최고의 공략입니다.

-포커페이스 말인가요?

-아닙니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공략! 전에는 드라이브 티샷을 했지만 지금은 유틸리티로 정확성을 더 높였을 뿐 정확한 아이언 샷으로 타수를 줄이는 전략, 저게 바로 동반자들을 질리게 만들었던 철의 장막이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익숙한 장면이긴 하네요. 장타를 날릴 수 있지만 굳이 그거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거군요.

-모든 집중력을 그린에 올리는 아이언 샷에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매번 좋은 샷을 날릴 수는 없는 법이거든요.

177m 파 3홀은 안전하게 그린 중앙을 공략해 2퍼팅으로 파를 지켰다. 하지만 뒤를 이은 12번 홀은 332m의 짧은 파 4홀이었다.

어제도 1온을 노리다 살짝 당겨져 좌측 벙커에 빠졌지만 오늘이라면 충분히 1온도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티 그라운드로 올라서는 필상의 손에는 아이언이 들려 있었다. 실망한 팬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다수의 팬들은 환호했다.

미스터 퍼펙트라는 이름이 장타자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곳에 이르기까지 그를 지탱해 준 근원은 바로 이처럼 냉정한 공략이었기 때문이다.

-와! 정말 대단하네요. 4번 아이언으로 대체 몇 미터를 보낸 건가요?

-정확한 임팩트! 풀스윙이었으니 223m가 그리 놀라운 거리는 아닙니다. 마음먹으면 240m 이상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1온을 할 수 있는 거리인데, 다시 한 번 참는 건가요?

그 대답은 최 프로가 대신했다.

-현명하고 냉철한 공략입니다. 1온을 못 해서가 아니라 확실하게 타수를 줄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봐야 합니다.

-1온 1퍼팅 이글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팬들도 그의 공략에 동의하는 것 같네요.

-당연합니다. 한 번 삐끗하면 돌이킬 수 없는 최종 라운드 인코스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정확히 90m를 샌드웨지로 공략해 다시 1타를 줄였다.

하지만 357m 파 4인 13번 홀에서는 비슷한 거리에서 버디를 잡지 못했다. 이단 그린의 경계선에 떨어진 타구가 스핀을 먹어 오히려 핀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파가 아쉬웠지만 필상의 진가는 14번 홀에서 빛났다.

445m로 세팅된 파 5홀인데 전체적으로 오르막이라서 정확한 거리에 신경을 써야 하는 홀이다.

하지만 후반 들어 안전한 샷을 고수해 왔기에 드라이브를 건네던 성호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벙커 구역만 살짝 넘길 겁니까?”

“아니. 장타는 뒀다 뭐에 쓰려고!”

“그렇죠? 역시!”

아무리 안전한 샷에 주안점을 둬도 롱 홀에서마저 참을 수는 없었다. 드라이브가 관광을 다닌다면 몰라도 필상의 페어웨이 안착률은 장타자라는 것이 무색할 만큼 정확했다.

팬들도 같은 바람이 있는지 필상이 강한 드라이브 연습 스윙을 선보이자 뜨거운 박수로 힘을 보탰다.

‘스트레이트!’

필상은 타구가 날아갈 방향과 궤적을 확정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원하는 랜딩 지역이 티 박스보다 20m가량 높아 런이 적을 것을 감안해야 하고 우측에서 삐쭉 튀어나온 나무를 넘기려면 캐리가 320m는 되어야 한다.

그렇더라도 85% 정도의 힘이면 넉넉했다.

쉬익!

다운 블로우 때부터 무시무시한 가속이 붙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무시무시했다. 그에 비해 타격음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타구는 엄청난 속도로 치솟아 구름 속으로 빨려 드는 것만 같았다. 하얀 뭉게구름이 공을 삼켜 버려 팬들은 공을 찾느라 두리번거려야만 했다.

-드디어 공 프로 특유의 장타가 터졌네요!

-페어웨이를 지켜야 하는데 드로우를 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무들을 넘겨야 하는데…….

뒤에서 타구의 궤적을 잡은 화면에 공이 우측으로 밀리는 모습이 관찰되었기 때문에 허 위원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실제 의도한 샷보다 밀린 것은 아니었다.

“슬라이스 바람?”

“네. 하지만 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바람이 제법 있었던 건가?”

분명히 연습 스윙을 하며 체크했었다.

하지만 타구의 궤적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는데 타구가 생각보다 많이 우측으로 밀렸다.

다행히 갤러리들이 서 있는 경계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러프에 떨어지고 말았다.

최종 비거리는 331m, 집중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였다. 하지만 필상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남은 거리는 126m, 오르막까지 감안하면 143m 정도 보면 될까?”

“이단 그린 뒤에 꽂혀서 145m는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문제될 게 없네.”

동반자들의 티샷을 지켜본 필상은 세컨샷 지점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같은 러프라도 공이 놓인 라이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퍼스트 컷이 아닌 세컨드 컷이었고 생각보다 깊이 잠겨 정확한 임팩트를 가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9번은 잡아야겠네.”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긴 러프에서의 샷은 주의할 것이 많다.

일단 정확한 임팩트부터 쉽지가 않다. 공이 지면에서 살짝 떠 있기 때문에 클럽페이스가 공의 아래를 훑고 지나가거나 탑핑을 때리는 경우가 흔하다.

때문에 스윙 궤적을 정확히 가늠하는 것이 우선이다.

또한 풀 때문에 정확한 샷을 해도 스핀이 생각만큼 걸리지 않아 런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동반자 중에 한 명인 임성재도 2온을 노렸다. 하지만 그린 앞에 놓인 W자형 커다란 벙커에 빠지면서 버디를 장담하기도 어려워졌다.

“짧으면 무조건 안 좋아요.”

“길면 내리막 퍼팅이나 칩샷을 해야 하는데?”

“벙커보다는 낫잖아요.”

“내가 누구지?”

“네?”

“걱정 붙들어 매!”

“네. 형님. 하하하.”

이번 샷이 중요하다는 걸 성호도 인지한 것이다.

선두와 1타 차까지 따라붙었기 때문에 만약 이글을 기록한다면 졸지에 역전이 된다. 물론 일한도 이 홀에서 버디 이상을 낚을 가능성이 높지만 앞서가는 자의 장점이 작용하면 그건 또 모를 일이었다.

파악!

테이크 백이 풀에 걸리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정확한 임팩트를 가하기 어렵다. 하지만 하체를 단단히 고정한 필상의 백스윙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드러웠으며 과감하게 공을 향해 뻗어 나왔다.

타구가 쏜살같이 튀어 나감과 동시에 잘린 풀들이 결혼식 화동이 뿌리는 꽃잎처럼 사방에 흩뿌려졌다.

끝까지 헤드업을 하지 않고 피니시를 마친 필상이 움직인 것은 타구가 정상에 이르렀을 때였다.

“좋아!”

“됐나요?”

“그래. 느낌이 아주 좋아.”

그 한 마디에 성호의 표정에 근심이 걷혔다.

스핀이 걸리지 않는 대신 탄도를 높였던 것이다. 슬라이스 바람이 분다는 것도 감안해 그린 좌측 끝을 본 것도 좋았다.

“나이스 샷!”

“이글! 이글! 이글!”

타구는 깃대 앞 5m 지점에 낙하했다.

크게 한 번 튄 공이 다시 내려선 지점은 더 가까워 3m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는 쉽지 않은데, 팬들에게 보인 것은 오로지 남은 거리일 뿐이었다.

물론 필상도 결과에 만족했다.

표정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날 자신의 경기를 보러 오신 엄마의 안도한 한숨을.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뜬금없이 최 프로가 탄식을 터트렸다.

분위기는 분명 필상의 멋진 샷을 칭찬해야 할 타이밍인데.

하지만 이 또한 아주 흥미로운 화제일 거라고 생각한 임한석 캐스터는 얼른 맞장구를 쳤다.

-전 사십여 년을 싸워 왔습니다. 오직 골프로 성공하기 위해서 밤잠도 아끼고 수없이 많은 번민을 이겨 내며 이 자리까지 온 겁니다.

-아! 최 프로님의 골프 인생은 익히 저희들도 알고 있지요.

-그런데 저 친구는 대체 어떻게 된 인사란 말입니까? 골프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우승을 했다지요? 그것도 JGTO 정규 투어에서 말입니다.

결론은 세상 참 불공평하다는 말이었다.

최 프로 입장에서 보자면 전혀 납득하지 못할 말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상이 거둔 전설적인 업적에 열광하지만 같은 길을 걷는 동료라면 충분히 그런 인식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 탄식에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기껏 한 마디 보태자면 타고난 것을 어쩌느냐고 할 테지.

그러나 그 말도 쉽게 꺼낼 수는 없다. 최 프로처럼 삶 전체를 골프에 투신한 이들이 느낄 상실감의 부피는 감히 재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임 캐스터나 허 위원이 감히 대꾸하지 못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 프로가 호탕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제가 그냥 옹졸한 넋두리를 해 본 겁니다. 학교에 일찍 간다고 다 1등 하면 누가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도 최 프로님의 의견이 공감합니다. 혜성처럼 나타난 공 프로의 성적은 저도 무력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가 골프를 대하는 태도, 그거 하나는 우리도 인정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정말 타고난 승부사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선수죠. 그도 인간인데 왜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매번 그걸 이겨 내고 자신의 샷을 꿋꿋하게 이어 가는 것, 그런 정신력은 연습으로 가능한 게 아닙니다.

-기량이 아니라 정신력의 문제라는 거군요?

겨우 임 캐스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최 프로는 물론 허 위원도 선수 출신이기 때문에 필상의 믿기 힘든 성적이 더 마음에 와닿은 것이다.

흔히 스포츠가 육체적인 능력에 좌우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최고의 반열에 오른 극한 경쟁에서는 승부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정신력이라는 결론이었다.

물론 터무니없는 자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영역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이들이야말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자격을 갖추는데, 그 와중에도 전설적인 선수가 되려면 남들과는 구분되는 특별한 인성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언제나 동반자들을 숨 막히게 만드는 필상은 최고의 덕목을 갖춘 선수인 셈이었다.

“나이스 터치!”

“이글!”

공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열렬한 소망이 담긴 함성이 그린 주변을 휘감았다. 필상도 이 퍼팅의 중요성을 알기에 확신을 가지고 정확하게 퍼팅하려고 눈과 귀를 막았다.

그런데 공의 흐름이 생각보다 약했다.

모든 그린의 빠르기가 동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홀컵을 살짝 지날 정도의 힘은 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린 지면에 흐르는 바람이 공의 진로를 막는 것만 같았다.

또한 오후로 접어들면서 그새 잔디가 생장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제발 구르라고 주문이라도 넣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까딱!

다행히 공은 홀컵 바로 앞까지 굴렀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고 멈출 것 같았는데, 슬금슬금 굴러간 공이 홀컵으로 뚝 떨어졌다. 여태까지 자신이 했던 그 어떤 퍼팅보다도 아슬아슬한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이글에 성공한 기쁨 또한 차고 넘쳤지만 필상은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고 홀컵으로 걸어가 들어간 공을 꺼냈다.

아무 표정도 없이 삭막한 기색을 유지하던 필상은 이글에 성공한 그 공을 뒤에 있던 여자아이의 손에 쥐어 줬다.

부모를 따라온 예닐곱 살 아이가 골프의 룰을 정확히 안다고 볼 수 없음에도 필상의 퍼팅이 들어가자 두 팔을 치켜들고 필상의 닉네임을 연호했기 때문이다.

“사인도 해 주세요.”

“그래. 네 이름이 뭐야?”

“저 태희예요. 김태희.”

“이름만큼이나 정말 예쁘게 생겼구나.”

필상은 공에 여자애의 이름과 사인을 같이 넣어 줬다.

그런데 공을 받은 아이의 반응이 아주 흥미로웠다.

“저도 나중에 우승하면 아저씨한테 제 사인볼 드릴게요.”

“태희 너 골프 칠 줄 알아?”

“네. 저 아주 잘 쳐요.”

얼마나 앙증맞은지 엄마가 손자를 원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런 예쁜 딸을 낳고 싶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그래서 파악하고 있지만 애써 시선을 두지 않았던 가족들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마침 이 장면을 지켜보던 그들과 시선이 맞닿았다.

‘오빠!’

모모코의 입모양만 봐도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옆에 서 계신 엄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상이 방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치를 채신 것인지, 마치 다 안다는 듯 엄청난 신기(神氣)를 보인 것이다. 필상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아들 딸 구별하는 세상이 아니다.

물론 엄마는 아들을 고집하는 자신의 생각을 고치거나 뜻을 굽힐 사람은 아니다. 모모코가 딸을 낳아도 기뻐해 주실 것이나 마음속으로는 수없이 한숨을 내쉴 분이다.

모모코가 그걸 알 도리는 분명 없을 테고.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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