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59화 (159/354)

159. 정신이 번쩍

“진짜 기가 막혔습니다.”

“저기 일한이 표정 좀 봐라.”

“일한이요?”

성호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지만 필상은 확인했다.

자신의 첫 홀 이글에 가장 영향을 받을 선수들의 표정을.

“어라. 아주 잡아먹을 듯이 째려보는데요?”

“투지에 불타는 거지. 승부에 형 동생이 어디 있냐고! 난 타이거나 경태 형보다 일한이가 제일 부담스러워.”

“에이……. 설마요.”

자세한 언급은 자제했으나 필상도 허 위원처럼 일한의 굳건한 의지와 긍정적 마인드를 가장 경계의 대상이라고 봤다.

실제 결과도 다르지 않았다.

5m 퍼팅을 먼저 떨어뜨림으로써 비슷한 거리를 남긴 타이거나 가장 잘 붙인 김경태의 버디 사냥이 실패하게 만들었다.

-20으로 단독 선두에 나선 것이다.

줄을 이어 -19 타이거 우즈, -18 공필상, -17 김경태 순서가 되었다. 필상과 함께 플레이하는 막내 임성재도 버디로 박상현과 함께 공동 5위로 올라섰다.

파 4인 2번 홀은 안전한 공략으로 파를 지켰다. 어제 좌측 뒤에 붙여 놓은 핀을 바로 공략하다가 벙커에 빠져 보기를 기록했는데 오늘도 바로 그 지점에 깃대가 꽂혀 있었다.

-숨을 고르는 건가요? 어제 한 번 혼이 났으니 오늘은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도전할 만도 한데 그러지를 않네요?

-그건 실전 심리를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아! 최 프로님이 우매한 제게 설명을 좀 해 주십시오.

최경주 프로의 탱크라는 별명은 해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아까 공정한 중계를 설파한 것을 비롯해 캐스터나 소위 전문가인 해설위원의 말이라도 현장과 괴리가 있으면 곧바로 치고 들어왔다.

그게 팬들이 골프를 이해하는 데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중계의 중심은 중계진이 아닌 골프팬이라는 인식을 정확히 간파한 행동이기에 실시간 댓글에 응원이 줄을 이었다.

-방금 전에 이글을 기록해 선두권 압박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어제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히려 위축이 되나요?

-그렇습니다. 버디 뒤에 보기, 흥분해서 뜻하지 않은 실수가 나오는 것은 아마추어나 프로나 매일반입니다. 특히나 경기 초반에는 더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아! 어제의 실패를 참조할 수도 있지만 나쁜 기억이 좋게 작용하기보다는 긴장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아직 남은 홀들이 많은데 과욕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하하하.

하지만 다들 파로 지나친 그 홀에서도 일한은 다시 롱 퍼팅을 구겨 넣으며 -21로 성큼 달아났다.

서로 견제하고 경계하지만 잃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일한의 강한 집념이 만들어 낸 화려한 결실이었다.

타이거를 압도하는 젊은 선수에게 팬들의 열화와 같은 응원이 이어진 것은 당연했다. 뒤에서 들리는 함성 소리를 들은 필상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167m입니다. 그린 앞에 바짝 붙여 놨어요.”

“7번 아이언.”

“띄우려고요?”

“아니. 맞바람이 있어서 조금 낮게 칠거야. 대신 스핀을 강하게 먹어야겠지.”

앞에 놓인 벙커 때문에 펀치 샷을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맞바람의 세기를 정확히 모르는 입장에서 탄도를 놓여 세우는 것도 그다지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그래서 일단 탄도를 띄우지는 않겠다는데 문제는 그럴 경우 벙커와 그린 사이의 러프에 정확히 떨어뜨려 굴려야 한다.

하지만 탄도가 낮은 타구는 핀을 훌쩍 오버할 가능성이 높아 스핀을 건다는 말인데, 7번 아이언이었다,

‘그냥 넉넉히 보고 치시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참았다.

7번 아이언으로 스핀을 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우려를 하면서도 성호의 눈빛에는 기대가 잔뜩 어렸다.

필상이라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필상은 평소보다 공을 반 개 가량 우측에 뒀다. 클럽페이스가 가파르게 하강하는 궤적으로 임팩트를 가하기 위해서였다.

아마추어들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거리지만 필상에게는 얼마든지 컨트롤이 가능한 거리였기에 마치 태엽을 감듯이 천천히 당겨진 테이크백, 백스윙의 크기는 쓰리쿼터에 가까웠다.

따악!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임팩트가 이뤄졌다.

타구는 필상이 의도한 대로 높이 치솟지는 않았다. 통상적인 궤적이라면 터무니없이 짧을 궤적인 것은 분명했으나 쭉쭉 뻗어 나가는 타구에 실린 힘을 보며 다들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도 뭔가 찜찜했다. 타구가 그린 앞 벙커에 빠질 듯 말 듯 위험천만한 위치로 향했기 때문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짧다면 벙커 턱에 맞고 모래에 파묻힐 것이고 러프에 맞아도 너무 강해 그린을 확 오버할 것만 같은 강한 힘이 실린 듯 보였던 것이다.

퍽!

아쉽게도 타구는 벙커 턱에 맞았다.

절로 인상이 구겨지는 그 순간, 기가 막힌 장면이 연출되었다. 모래에 박힐 것 같던 타구가 턱을 맞고 러프로 튀어 올라갔던 것이다.

게다가 꾸역꾸역 러프를 지나 그린에 기어 올라갔다.

곧 멈출 것 같았던 공은 쉬지 않고 굴러 핀을 향했다.

“인 더 홀!”

“홀인원!”

“들어가! 제발!”

사방에서 염원이 담긴 외침이 작렬하는 가운데 공은 신기하게도 멈췄다. 홀컵 바로 앞에서.

-안 떨어지나요?

-반 바퀴! 딱 반 바퀴만 굴러도 되는데…….

누가 봐도 아까웠다.

수많은 갤러리들이 몸을 구부리며 마지막 힘을 짜냈고 어떤 이들은 입김을 불기도 했으며 발을 구르기도 했다.

들어가라고.

압권은 뒤늦게 터진 최경주 프로의 한 마디였다.

“이런 쓰브럴!”

아쉬움에 고개를 떨궜던 팬들은 구성진 그 표현에 터지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생생한 마음의 소리였던 듯.

마이크가 커져 있음을 깜빡한 그는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황급히 진화에 나섰다. 물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지만.

-제 말이 좀 심했나요? 하지만 제가 저런 상황이었다면 더 심한 욕이 튀어나왔을 겁니다. 안 그래요?

-맞습니다. 얼마나 멋진 공략이었습니까! 저런 샷은 홀인원을 인정해 -2를 줘야 합니다. 심판이 있다면. 하하하.

설마 그렇게 벙커 턱을 맞춰 공략했다고 볼 수는 없다. 차기 골프 황제 자리를 예약한 신기록의 사나이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지금 분위기는 그걸 논하면 천하의 역적이 될 것 같았다. 가장 냉정한 해설을 하던 최 프로가 흥분한 마당에, 어떤 팬이 이견을 달 수 있을까?

방송 화면 실시간 댓글 창에도 최 프로의 시원한 반응을 칭송하는 팬들의 성원의 글이 우수수 달렸다.

[역시 탱크!]

[사랑해요. KJ. 어서 돌아오세요.]

[이참에 전문해설위원으로 초빙 강추!]

[구수합니다……. ㅋㅋ]

[제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KJ 파이팅!]

방송 용어로 부적합하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예의를 강요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중적인 잣대가 적용되고 겉과 속이 다른 대형 방송사의 행태에 많은 이들이 염증을 느낀다.

때문에 솔직한 몇몇이 진행하는 작은 방송들이 인기를 구가하는 시대가 도래 했다. 물론 그게 현상의 전부는 아니다.

정언 유착,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권력 지향적인 골통들이 민중이 우매하다고 오판하고 마구 휘두르는 헛발질에 더는 참지 않은 필연적 귀착이다.

땡그랑!

가볍게 밀어 버디를 잡은 필상은 좋은 예감을 느꼈다.

하지만 일한의 멈출 줄 모르는 기세와 맞서기 위해서는, 또 언제 치고 나올지 모를 타이거를 제치기 위해서는 더욱 분발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필상은 전반에 5타를 줄이는 데 그쳤다. 전력을 다해 몰아붙였지만 남서울 코스는 쉬운 공략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웃코스로 이동하는 필상에게 팬들의 뜨거운 격려가 쏟아졌지만 리더 보드를 바라보는 마음은 편치 못했다.

-23 박일한

-21 공필상, 타이거 우즈

-20 김경태, 박상현, 임성재

일한이 4타, 김경태도 3타를 줄였고 타이거도 필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아직 승부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렸다.

게다가 임성재가 필상과 똑같이 5타를 줄이며 우승 경쟁에 뛰어들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우승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감에 몸이 굳어 왔다.

“오랜만에 짜릿짜릿한 시합을 하네요.”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거, 나쁘지 않아.”

“형 긴장한 건 아니죠?”

“쓸데없는 소리!”

오히려 성호는 필상의 우승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필상은 오랜만에 긴장했다.

대체적으로 넉넉한 우승을 거둬 왔고 자신의 실력에 의심을 가졌던 적이 없다. 하지만 오늘은 존재하지만 한 번도 활용한 적이 없는 신비한 능력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토납이 일정 경지를 넘어서 이젠 언제라도 원하기만 하면 우승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 상황을 해석할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다.

최근 다양한 일에 신경을 분산시킨 나머지 정작 가장 중요한 시합에서 최적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추론이 첫 번째인데 동의하기 어려웠다.

‘이 어려운 코스에서 20언더면 우승은 당연한 거잖아!’

오늘만 해도 주최 측이 의도적으로 어렵게 코스를 세팅했다. 운 좋게 첫 홀에서 이글을 했지만 매 홀 티 그라운드에 들어서면 가벼운 공략은 삼가야 한다는 경고가 울렸다.

그래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공략한 결과 5타를 줄였다. 아쉬움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만하면 아주 훌륭한 결과라고 자부했다.

자신의 기량이 부족해서 벌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선수들의 기량이 갑자기 향상되었다는 말인데, 그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지금 신들린 샷을 보이는 선수는 자신과 상관도 없는 선수들도 있다.

-저는 이번 대회에 출전해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선수들을 보며 코리안 투어의 미래가 아주 밝다고 생각합니다.

-허 위원님의 말이 저도 아주 공감이 가요. 솔직히 저는 우리나라 남자 프로들의 기량이 세계적인 선수들에 비하면 한 수 떨어진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 순간 경기에만 집중하던 최 프로가 돌연 끼어들었다. 중계진이 보는 것보다 훨씬 정확한 견해가 나올 법 했다.

그런데 그 시작은 공감이었다.

-임 캐스터의 시각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실제 우리 선수들의 기량은 최고 수준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저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고요.

-저는 그 말씀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아! 허 위원님이 무슨 지적을 하실지 이해는 됩니다. 실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면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 보겠습니다.

한국 남자 골프가 세계무대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많은 고민이 있었는지 허 위원과 최 프로의 대화는 상당히 조심스러웠고 또한 진지했다.

일단 허 위원은 최 프로의 견해를 경청했는데, 결국 이견이 아닌 같은 견해였다. 보는 방향에 따른 해석의 차이일 뿐.

투어를 뛰는 선수의 선결 조건은 경쟁력 있는 실력을 갖추는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실력을 유지하는 일관성이다.

그런데 타국에서 고된 투어를 뛰다 보면 성적이 오르락내리락 뒤죽박죽이 된다고 한다. 우승한 다음 주에 컷 탈락을 할 정도로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는다.

때문에 자국 투어의 활성화는 모든 선수들의 간절한 바람이다. 보다 안정된 기량을 유지하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코리안 투어의 흥행에 고무된 현상이라고 봐야 하나요?

-그게 전부는 아니고 다른 요소도 작용한 것 같습니다. 공 프로가 한국 골프의 장점을 만방에 알려 자신감을 부여한 것이 주효했고, 더는 이방인이 아닌 자국 선수로 타이거와 같은 세계적인 선수와도 겨룰 수 있다는 점이 가진 기량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매경오픈에서 이렇게 풍성한 결과들이 쏟아지는 것이로군요.

-믿기 힘든 우승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공필상 프로가 PGA 투어시드를 확보하고도 마스터즈와 같은 모두가 바라는 대회 출전을 삼가고 있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정말 크다고 생각합니다.

뜬금없이 베일에 가려졌던 화제가 나왔다.

한국 언론에 알려진 바와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 언론에 알려진 바가 확연하게 달라 해석이 분분했다.

그런데 최 프로는 필상이 코리안 투어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논조를 제시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스스로 팬들에게 한국 투어에 열중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니까.

정확한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최 프로가 보기에 필상은 PGA 투어를 뛰면 우승은 차치하더라도 이미 엄청난 거금을 벌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전하지 않는 것이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해석은 어불성설이라는 말이다. 애초에 2번의 우승을 거둘 때도 언제 기량을 인정했었던가?

“잡생각은 버리자!”

“네?”

“아니야. 내가 쓸데없이 너무 많은 걸 걱정하는 것 같아서.”

“그건 맞는 것 같아요. 표정부터 달라졌거든요.”

“내 표정이 달라졌어?”

“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면 마치 화난 사람처럼 차가워 보였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그냥 멍 때리는 사람 같아요.”

충격적인 말이었다.

경기 중에 자신의 변한 태도를 인지하지 못했는데, 성호의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정신 상태가 해이해졌던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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