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58화 (158/354)

158. 잃을 게 없다.

없는 사람 취급하며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태도에 최 회장의 얼굴은 똥이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늘 하던 대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 대리. 가자.”

“제가요?”

역시 당찬 고 대리였다.

올 때는 하는 수 없이 최 회장을 깍듯이 모셨지만 이젠 더 이상 직장 상사가 아니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다만 면전에서 맞받아칠 수는 없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지시에 대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터지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이제 자신의 직원이 된 그녀를 위해 필상이 나설 때였다.

“이보세요. 최득현 씨.”

“뭐?”

“고 대리는 당신의 부하 직원이 아닙니다. 짐은 원하는 곳으로 싸서 보내 줄 테니까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당신이 직접 운전해서 가세요. 남의 직원 함부로 부릴 생각하지 말고.”

“이런 X 같은 새끼가!”

필상은 대꾸하지 않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압도적인 덩치 뒤로 깜짝 놀란 고 대리가 얼른 돌아와 숨었다. 누구의 뒤에 붙어야 하는지 정확히 안 것이다.

필상의 표정은 싸늘하다 못해 차가웠다. 이 따위 망종에게 욕설을 들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 분노는 기세와 말투에 그대로 표현되었다.

“왜? 나랑 한판 붙자는 건가?”

정말 주먹질이라도 할 것만 같던 최득현은 포기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당할 상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양아치 특유의 뒤끝은 남겼다.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뭘 두고 봐. 양아치 짓거리 할 생각이 있다면 반드시 열 배 백배의 대가를 치를 각오부터 해. 네가 가진 패가 얼마나 든든한지도 잘 생각 좀 해 보고.”

결국 최득현은 계약서를 자신이 직접 챙겨 떠났다. 긴장된 분위기가 다 가시지 않았으나 그가 나간 뒤 필상은 아무렇지 않게 필요한 사항들을 언급하고 지시를 내렸다.

“형님. 드디어 인수한 건가요?”

“그래. 오늘 큰일 치렀다.”

“이제 이 대회만 우승하면 금상첨화네요. 하하하.”

필상은 타이거에게도 오늘 새로운 코스를 인수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와도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굿 뉴스네! 내일 태국으로 떠나기 전에 볼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공항에서 그리 멀지가 않아요.”

“이러면 미켈슨의 진도가 가장 느린 셈이네? 아무래도 내가 약을 좀 올려야겠어.”

“형 말은 효과가 확실하게 있을 겁니다. 하하하.”

사실 필상도 권하고는 싶었다.

하지만 너무 나대는 것 같아 참았는데, 타이거가 매경오픈 출전을 결정한 뒤에 미켈슨에게도 함께 가자고 제안을 했다.

흔쾌히 함께 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거절했다.

물론 그것만으로 그의 마음이 한가롭다는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태국도, 한국도 TPK의 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는 마당에 일본에서의 사업 진척이 가장 더뎠다.

평소 괄괄한 그의 성격에 비춰 보면 타이거의 한 마디가 강력한 촉매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은 필상이 나서야 할 일이고 아직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지만 그가 직접 일본을 찾는다면 일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오늘 컨디션은 어때?”

“전 괜찮습니다. 형은요?”

“나? 어제 확실하게 감을 잡았는데, 과연 오늘도 그 좋은 감각이 이어질지는 경기를 해 봐야지.”

“대충 하시면 안 될 겁니다.”

“어허! 의욕이 펄펄 날리는군. 하하하.”

“이를 악물고 칠겁니다. 메이저 대회 그랜드슬램은 절대 놓칠 수가 없거든요.”

“작년에 하나 잡았었지?”

“네. 그랜드슬램을 찍고 나면 밖으로 나돌아도 한결 편안해질 것 같아서요.”

“아무리 그래도 살살 칠 일은 없을 거야. 건투를 빌어.”

“형도요.”

이제 너무도 편하게 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퍽 마음에 드는지 엄지를 추켜세운 타이거는 다시 묵묵히 연습을 시작했다.

이에 질세라 필상도 클럽을 들고 연습 타석에 들어섰다.

‘강약의 부조화를 해결해야 하는데…….’

현재 필상이 겪고 있는 문제점이 바로 그거였다. 장타를 때리고 나면 다음 샷이 그 영향을 받는지 의도한 컨트롤 샷보다 더 강한 임팩트가 이뤄졌다.

아예 티샷도 차분하게 진행하면 이어진 스윙도 부드러운데, 그렇다고 장타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해법을 찾고자 했다.

* * *

-두 분은 누가 우승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세요?

-하하하.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군요. 아무래도 최 프로님이 먼저 점을 좀 쳐 주시죠.

캐스터의 짓궂은 질문에 허 위원은 일단 화살을 최 프로에게 넘겼다. 그 또한 쉽게 말하기 힘든 사안이지만 뜻밖에도 대답은 쉽게 나왔다.

-저는 타이거 우즈에게 걸고 싶습니다.

-타이거라는 말인가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근거는요?

-서서히 페이스를 끌어올린 그가 어제 최저타를 쳤기 때문입니다. 날씨나 세팅이 어제와 비슷하다는 점, 또한 관록과 임기응변도 탁월하기 때문에 김 프로나 공 프로보다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타이거가 지닌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 않지만 사실 이번 대회 우승 후보로 가장 많이 거론된 선수는 필상이다.

희박한 확률을 연거푸 뚫고 연승을 이어 왔으며 올 시즌도 기량의 변화가 없음을 JGTO 개막전에서 보여 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불꽃 쇼를 펼쳤지만 타이거의 -8에 가려 빛을 잃었다. 더군다나 3타 차였기 때문에 역전은 어렵다고 봤다.

그런데 잠시 고심하던 허 위원이 다른 예상을 했다.

-저는 박일한 프로를 눈여겨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 프로 말입니까? 아직 우승이 없는데요?

임 캐스터는 허 위원은 필상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타수 차는 있지만 필상은 하루에 -14를 친 적도 있지 않던가?

게다가 두 자릿수 언더파를 친 적도 여러 번이다.

다부진 성격과 한 번 불이 붙으면 끌 수 없는 엄청난 기세는 충분히 역전하고도 남는다고 볼 수 있는데, 우승 경험이 없는 박일한을 지목한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하지만 허 위원은 근거를 밝혔다.

- -5, -10, -4를 쳤습니다. 매경오픈 18홀 최저타 기록도 갈아치웠지요. 일단 기세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잃을 게 없다는 겁니다.

잃을 게 없다?

중요한 포인트였다.

가진 게 많고 생각이 많을수록 승부에서는 불리하다.

혹자는 우승 경험이 없어 과도한 긴장할 것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박일한의 성격은 굉장히 긍정적이고 도전적이다.

지금까지 우승하지 못한 것을 이상하게 봐야 하며 오히려 이번이 그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이 많고 팬들의 기대가 큰 선수들이 서로를 의식해 조심하는 사이, 잃을 게 없는 그가 과감한 경기를 운영한다면 얼마든지 신데렐라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전 우리 공 프로에게 한 표를 던지겠습니다. 누가 뭐래도 저는 그가 타이거 우즈를 능가하는 지상 최고의 골퍼가 될 것이라고 믿으니까요.

-가장 달콤한 패를 취하는 임 캐스터의 바람이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저 또한 공 프로가 타이거를 누르고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는 것이 우리 한국 골프를 위해 최선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허 위원이 속내를 살짝 드러냈다.

필상의 성공이 가져올 파급 효과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다수가 공감할 그 말에 최 프로가 이의를 제기했다.

-어폐가 있는 말씀입니다. 공 프로의 등장이 한국 골프에 큰 희망이 된 것은 인정하지만 경기는 참가하는 모든 선수에게 공정해야 합니다. 개인의 의견은 있을 수 있으나 팬들이 지켜보는 중계방송에서 전문가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자칫 편파적이라는 인상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옳은 말이지만 정면으로 반박하는 의견을 곧바로 제시했기에 허 위원은 물론 캐스터의 얼굴도 붉어졌다.

최 프로는 한국 골프를 대변하는 핵심 인사였기에 그 말의 무게는 더 육중했다. 오히려 방송인이 아닌 현역 투어프로이기에 가식 없이 솔직한 표현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놀라운 것은 허 위원이 곧바로 실수를 인정한 점이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공정한 기회, 그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제 발언에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솔직한 사과에 싸해졌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렸다.

캐스터의 적절한 지원도 뒤따랐다.

-저희가 해외에서 진행된 경기를 자주 중계하다 보니 다소 편파적인 습관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매경오픈은 한국을 대표하는 프로들이 자웅을 겨루는 장인데 몇몇 선수들에게 편중된 중계를 한 것은 제 엉뚱한 제안에서 비롯되었고 그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각별히 조심하겠습니다.

-우승자를 예측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죠. 방송이니까. 다만 화면에 한 번 나오지 못하는 대다수의 선수들도 우승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시청자 여러분께서도 알아주셨으면 하는 제 작은 바람이었습니다.

과아앙!

성호의 귀에는 평소와 다르게 그런 음향으로 들렸다.

1번 홀 드라이브 티샷에 필상이 90% 이상의 힘을 실었기 때문이다. 368m의 파 4홀이지만 오르막을 감안하면 387m다.

게다가 그린에 가까워지면서 오르막 경사가 커지기 때문에 1온은 어림도 없는 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상은 강력한 티샷에 드로우 구질까지 집어넣었다.

우측 러프 뒤를 타고 깔아 놓은 카트 도로를 향해 출발한 어마어마한 장타에 팬들의 비명이 섞인 뜨거운 함성이 터졌다.

온 그린이 되든 말든 일단 가슴이 뻥 뚫리는 샷이었기 때문이다.

“아저씨. 장타 대회에 나오셨습니까?”

“올라갈 것 같지 않냐?”

“돌아 들어온다면…….”

성호가 봐도 상당히 높은 탄도와 무시무시한 힘이 실렸다.

다만 타구가 너무 우측으로 치우쳤는데 원했던 훅이 걸리지 않아 미스 샷으로 귀결될 것 같았다.

하지만 돌아 들어오면 가능하다고 말하려던 성호는 급기야 멋진 훅 커브를 그리기 시작한 궤적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 홀의 전장을 야드로 환산하면 423야드다.

핀이 좌측 중앙에 꽂혔기 때문에 그린에 오르면 무조건 오버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380야드 정도에 떨어져 그린에 튀어 오르는 것이 적절할 것 같았다.

“380야드는 원래 보낼 수 있는 거리잖아요.”

“그러니까 쳤지.”

거의 그린 앞에 떨어진 것 같았지만 실제 타구의 캐리는 371야드였다. 필상이 노렸던 380야드에 조금 못 미쳤다.

하지만 크게 튄 공은 그린 바로 앞 러프에 떨어졌고 다시는 튈 것 같지 않던 공이 작게 튀더니 러프 사이를 굴러 그린에 올라가는 장면이 보였다.

힘은 충분하지 못했는지 에이프런과 그린의 경계에 멈췄다. 티샷의 최종 비거리가 409야드, 즉 374m가 나온 것이다.

-참. 할 말이 없네요!

-드라이브 티샷 비거리가 400야드를 넘겼습니다.

-신기록 아닌가요?

-이 대회 신기록일 수는 있으나 일전에 413야드를 날린 적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내리막 경사라도 있었는데 오늘은 오르막이었습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온 걸까요?

질문을 던진 허 위원의 시선은 최 프로에게 닿아 있었다. 현역 투어프로인 그의 고견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대답 대신 다른 언급을 했다.

-적어도 이젠 동양 선수들이 파워가 부족하다는 불편한 말은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350야드를 펑펑 날리며 정확성을 고집하는 선수들을 비웃던 서양 선수들이 과연 어떤 입장을 표명할지 정말 듣고 싶습니다.

지금도 당당한 체구지만 전성기 때 최 프로의 몸은 바위처럼 탄탄하고 균형 잡힌 스윙을 때리기로 유명했다.

그런데도 늘 장타자와 겨루면 30야드 이상 차이가 났다. 왜 비거리를 늘리려고 시도하지 않았겠는가.

수없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비거리를 늘렸다. 하지만 정확성을 잃으면 아무리 멀리 보내도 소용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샷을 해야만 했고 어느덧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요즘 젊은 선수들은 그나마 비거리의 향상을 보였으나 여전히 장타 수위권에 들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 모두를 압도할 괴물이 탄생했으니 대리만족이라도 한 것 같았다.

“14.6야드입니다.”

“오케이.”

동반자들이 세컨샷을 하는 동안 필상은 이미 그린 옆에 와 있었다. 정확한 거리를 파악했고 자신의 차례가 오자 라이를 꼼꼼하게 살폈다.

파 4홀 1온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결코 쉬운 퍼팅은 아니었다. 그러나 붙여서 버디에 만족할 것 같으면 굳이 1온을 하려고 노력할 이유가 없었다.

평소보다 더 긴 시간을 들여 라인을 확정한 필상은 이를 악물고 과감하게 밀었다.

성호는 너무 강하지 않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지만 필상이 그렇게 강한 스트로크를 한 이유가 있었다.

‘맞바람!’

라이를 살피던 필상은 그린 표면 위에 의외로 강한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힘차게 구르던 공의 속도가 모두가 예상하던 것보다 빠르게 줄었다. 그래도 여전히 강했지만 홀컵을 향해 정확히 파고든 공은 뒷벽을 강하게 때리며 튀었다.

‘어?’

튀어나올 것만 같던 공이 홀컵 엣지를 맞고 스르르 돌더니 다시 아래로 뚝 떨어졌다.

“와아아아! 이글!”

“퍼펙트!”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아름답다, 그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1온을 노린 것도 대단하지만 과감한 이글 퍼팅,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냥 한 큐에 2타를 줄이는군요. 저런 과감한 샷을 성공하기 때문에 더 많은 팬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것 같습니다.

-세컨샷 준비하는 챔피언 조 선수들의 표정을 좀 보세요.

이글 퍼팅을 성공하고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어퍼컷 세리모니를 하던 필상을 비추던 카메라가 대기 중인 선두권 선수들의 표정을 연이어 담았다.

타이거는 담담했다. 김경태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고 박일한은 하필 이를 꽉 악무는 장면이 잡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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