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57화 (157/354)

157. 하늘이 허락한 기회

-지난 이틀 동안 대부분의 선수들이 정말 멋진 경기력을 보여 줬기 때문일 겁니다. 딱히 플레이가 나빴던 것도 아닌데, 미스터 퍼펙트가 무려 공동 11위입니다.

-공 프로에게는 아주 낯선 순위죠. 하지만 본선이 시작되었으니 슬슬 시동을 걸지 않을까요?

-메이저급 대회의 예선 컷이 언더파였던 적이 없었고 각종 진기록이 우수수 쏟아지고 있습니다. 올해야말로 KPGA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첫 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 제발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네요. 하하하!

총상금액이 급격히 올라가고 타이거가 방한하면서 흥행에 파란불이 들어왔다는 예상은 이미 여러 매체에서 알렸다.

하지만 어렵기로 유명한 남서울 CC에서 첫날 언더파가 무려 50여 명이 나온 것도 진기록인데, 둘째 날은 더 심했다.

멀지도 않은 2018년 박상현 프로는 -1을 치고도 우승했는데, 본선 진출 컷 성적이 -2로 결정되면서 메이저 대회에서는 극히 드문 사태가 터졌다.

그러나 흥행에는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많은 선수들이 불꽃같은 굿 샷 쇼를 보여주며 팬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빠뜨렸기 때문이다.

-이런 진행이라면 공 프로의 연승 행진이 남서울CC에서 멈추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선두와 6타 차는 뒤집기 쉽지 않은 타수지만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스코어도 아니니까요. 여러 모로 바쁘다는 것은 알지만 오늘부터라도 집중력을 발휘해 좋은 기록을 만들기를 바랍니다.

-공 프로가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골프팬들의 주목을 받는 TPK 컴퍼니가 곧 오픈을 한다고 알려졌으니 책임자로서 할 일이 많겠지요.

-그 점은 참으로 아쉽습니다. 코리안 투어를 위해 발 벗고 나선 일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아직 투어에 2년 차에 불과한데, 일을 너무 크게 벌이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섭니다.

다들 알고 있지만 쉽게 입에 올리지 못했다.

워낙 특출한 성적을 거뒀고 세계적인 선수들과 함께 사업을 한다는 것이 아주 흥미진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한 그 와중에도 일본 투어 개막전에서 우승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투어 대선배인 최 프로는 분명한 우려를 있는 그대로 언급했다. 플레이가 나쁘지는 않지만 더 화려한 기량을 예상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어딘가 산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그 원인을 골프에 집중하지 못하는 제반 여건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 틀리지 않은 사실이다.

필상 스스로도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이 대회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고 너무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머리에 담고 끊임없이 사고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우승을 하려면 오늘 몇 타나 따라잡아야 할까?”

“일한이도 그렇고 선두권의 기세가 워낙 드세서 가능하다면 18홀 모두 버디를 기록해야지요.”

“18언더라도 치란 말이야?”

“못할 것도 없죠.”

“하하하. 나를 정말 인간으로 보질 않는구나!”

“그럼 더도 말고 10타만 줄이세요. 일한이 놈이 최저타 기록 세웠다고 얼마나 눈꼴시게 구는지, 그건 꺾어야겠습니다.”

“그건 네가 나중에 직접 해. 아마도 오늘과 내일은 주최 측에서 최악의 세팅을 할 것 같아.”

“아! 그렇기는 하겠네요. 안 그래도 공고를 했잖아요.”

흥행에는 이미 성공했다.

하지만 남서울CC가 메이저 대회를 치를 만한 코스로 적당한지 의문이 제기되었다. 평이했지만 의도적으로 쉽게 세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18홀 10언더를 친 선수가 나왔고 상위권 열 명이 두 자리 언더를 기록하며 한물 간 코스라는 인식이 생겼다.

워낙 오래된 코스라서 장타로 무장한 젊은 선수들의 기량을 감안하지 못한다는 평가까지 나왔기 때문에 진정한 승부는 오늘부터라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게다가 잠잠하던 봄바람이 코스에 찾아들면서 더 난해한 라운드가 될 징조를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아! 반갑습니다. 마사시.”

“전 미스터 퍼펙트의 팬입니다.”

“쑥스럽게 왜 이러십니까. 오늘 즐겁게 라운드를 하시죠.”

“물론입니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마사시는 아시안 투어시드로 참가한 젊은 일본 선수였다. 정확한 정보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20대 후반은 되어 보였다.

또 다른 동반자는 71년생인 중견 프로 모중경이었다.

조금 늦게 나타난 그에게 다가간 필상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본시 무뚝뚝한 성격인지 그저 악수만 나누고 말았다.

“모 프로님은 형이 좀 거슬리나 봐요.”

“당연히 그렇겠지. 내가 잔뜩 벼르고 있는 걸 짐작할 테니까. 속과 겉이 다른 저 무사시보다는 솔직한 게 나아.”

“무사시가 아니라 마사시라던데요?”

“아무렴 어때! 하하하.”

오늘은 온전히 경기에만 몰두하기로 했다.

동반자가 어떤 플레이를 펼치는지 신경 쓸 이유가 없다.

때문에 오히려 담담한 선배와 경기를 치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수많은 굴곡을 겪은 모 프로는 다행히 자신의 플레이를 꿋꿋하게 이어갔다.

까앙!

필상은 장타에 이어 정교한 아이언 샷으로 거침없는 공격을 가했다. 바람도 불고 핀이 아슬아슬한 위치에 꽂혔지만 타협은 없었다.

그 덕에 보기도 2개나 범했지만 이글 1개, 버디 7개로 3라운드 결산 -7을 기록했다. 한 번도 리더 보드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이 타수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팬들의 뜨거운 응원을 받으며 스코어 카드를 제출한 필상은 곧바로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성호가 따라오지 않은 이유는 최종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곧 알게 될 것이라며 말렸지만 필상보다 더 조바심을 냈다. 끝내 샤워를 마치고도 나타나지 않아 클럽하우스를 나서는 순간, 달려오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와! 진짜 미치겠네요.”

“만만치 않은 모양이구나.”

“타이거가 오늘 -8을 쳤어요. 이글을 2개나 잡았더라고요.”

“최종 성적 나왔으면 같이 가서 보자.”

리더 보드를 확인한 필상은 적잖이 놀랐다.

타이거만 선전한 것이 아니었다.

선두권의 절반은 난코스에서도 꿋꿋하게 타수를 줄였다. 타이거나 필상의 눈부신 결과와 크게 차이가 난 것도 아니었다.

-19 타이거 우즈, 박일한.

-17 김경태.

-16 공필상, 박상현.

-15 임성재, 맹동섭, 황중곤, 송영한

“챔피언 조가 아니네?”

“그러니까요. 다들 제정신이 아닌가 봐요.”

“좋네. 이 정도는 돼야 메이저 대회지. 하하하.”

솔직히 잘하면 선두로 나서거나 1타 차 정도의 2위는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쟁자들은 녹록치가 않았다.

타이거의 선전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

적응이 덜 되었지만 라운드가 지속되면 언제든 위협적인 경쟁자로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을 뛰어넘었다.

게다가 젊은 선수들도 나름 선전했다. 황중곤이나 임성재의 경우는 끝까지 선두권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고 봤는데, 너무 안이한 방심이었다.

“내일 박상현 프로와 임성재랑 맞붙는 건가?”

“네. 만만한 상대가 아니죠.”

“그래. 그러니까 더 의욕이 생기네.”

사실이었다.

그동안 우승을 너무 쉽게 쟁취했다. 그런데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오히려 흥분이 되고 의욕이 치솟았다.

타이거가 선두에 나선 소식은 대회 분위기와 함께 미국과 유럽 언론에서도 다뤘다. 필상의 소식도 전해졌는데 코리안 투어의 강한 경쟁력은 물론 엄청나게 몰려든 골프팬들의 깨끗한 매너와 열정적인 응원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게다가 기대 이상의 흥행몰이, 상금 규모 등은 한국 투어를 몰랐던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지 그랬어!”

“하하하. 약을 올리시는 겁니까?”

“약을 올리긴. 같이 치고 싶었는데 혼자만 먼저 나가니 서운해서 그러지.”

김경태가 필상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걸 보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타이거가 빙긋이 웃었다.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때려잡은 것이다.

하지만 솔직한 속내는 한쪽에서 열심히 연습 샷을 날리던 일한의 입에서 나왔다.

“경태 형.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그만하세요. 전 지금도 3타 차인 필상 형이 가장 두렵다고요.”

“저 자식이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곧바로 김경태에게 구박을 받았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사실 김 프로는 물론 타이거도 가장 견제하는 선수가 필상이다. 한 조에서 플레이를 하지 못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한 조 앞에서 먼저 불꽃 쇼를 펼치면 그게 다 보일 챔피언 조의 선수들은 필요 이상의 긴장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약을 올리며 자기 최면을 거는 중이었는데, 일한이 그 깊은 심중도 모르고 초를 친 것이다.

우승 경쟁을 할 네 선수가 함께 모여 연습을 하는 것도 보기 드문 풍경이었는지 기자들의 카메라가 쉬질 않았다.

그런데 보다 못한 타이거가 나섰다.

“개인적인 시간마저 취재하는 것은 원지 않습니다. 부탁하는데 그만 물러가시고 내일 멋진 경기 장면을 찍어 주십시오.”

위풍당당한 태도로 요구하는 타이거의 축객령에 기자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일시에 모두 사라졌다.

허락되지 않은 취재나 사진 촬영은 거부할 권리가 있다. 아무리 대회 기간에는 공인이라지만 연습장까지 따라와 허락 없이 촬영하는 것은 초상권 침해로 역공을 당할 수 있다.

다른 선수라면 모를까, 타이거가 법적 조치를 취하면 그 배상금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카메라에 담긴 네 선수의 다정한 모습은 ‘선의의 경쟁자’라는 타이틀로 기사화되고 있었다.

“공 프로님.”

“늦은 시간에 어인 행차십니까?”

“좋은 소식이 있어서 직접 얼굴 보고 알려 드리려고 왔죠.”

“전화해도 되는데 혹시 제에게 격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메시나 호날두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면서요?”

이보영 대표였다.

화사한 봄 패션이 주변 남자들의 시선을 확 끌어당겼지만 그녀는 사뿐사뿐 걸어와 필상의 옆자리에 앉았다.

대충 감은 잡았다. 스코틀랜드 CC.

“인수 조건이 확정되었나 봅니다.”

“네. 공 프로가 말한 대로 약간의 위로금을 주기로 했어요. 대신 골프클럽의 자산 모두를 있는 그대로 넘겨주기로.”

“잘됐네요.”

“최종 사인은 내일 아침에 여기로 와서 하기로 했어요.”

“일임한다니까 뭐 그렇게까지 번거롭게…….”

“참. 도 이사 소식 들었나요?”

“입원했다면서요?”

“반신불구가 되었대요. 뇌종양 말기였다고 하더라고요.”

“말기요?”

“아픈 사람을 두고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사람은 역시 착하게 살아야 하나 봐요.”

측은하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의도한 바는 있었지만 신경교종과 같은 악성종양은 하루 이틀 사이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원한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이고 그가 생존해서 더 많은 죄악을 쌓지 않는 것이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필상은 더 이상 과거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성희 문제도 그렇고 도성주와의 악연도 이렇게 매듭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하늘이 허락한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과거의 모든 아픔과 아쉬움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향해 힘차게 달려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뻥 뚫리는 감격이 밀려왔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 보세요.”

“도성주 그 인간, 그렇게 끝이 난다면 뒤를 챙겨 줄 사람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걸 왜 필상 씨가 걱정해요.”

“글쎄요……. 그렇게 하는 것이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확인해 보고 제가 알아서 처리할 게요.”

“대표님이 제 곁에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어머! 닭살 돋게 왜 그래요!”

“사실이니까요. 그나저나 쭈글쭈글해지기 전에 좋은 남자 만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 사람이 정말!”

다음 날 아침 최 회장이 직접 남서울CC로 왔다.

자신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고 대리를 측근이랍시고 데려온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오랜만이오. 공 프로.”

“고 대리. 반가워요.”

“네. 오늘 꼭 우승하세요!”

최 회장은 자신의 인사는 본 체도 하지 않은 필상이 자신이 데려온 직원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자 인상을 확 구겼다.

행여나 해코지를 할까 염려된 필상은 그녀에게 필요한 단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 회장님. 짐은 다 빼셨습니까?”

“사인하고 입금을 하고 난 뒤에나 그런 소릴 하시오.”

“그런가요?”

필상은 이 대표가 꺼내 놓은 서류에 사인을 했고 이 대표는 최 회장이 보는 앞에서 곧바로 입금을 지시했다.

1분도 지나지 않아 그의 스마트폰에 입금을 알리는 메시지가 뜨는 순간, 필상은 속 시원하게 참았던 말을 꺼냈다.

“고 대리. 이제 클럽의 대표는 저입니다.”

“네. 공 회장님.”

“하하하. 저는 회장 같은 후진 명칭은 싫고요. 운영진은 우리 이 대표님이 곧 전문가를 보낼 겁니다.”

“그럼 프로님은 우리 클럽에 안 오시나요?”

“갈 겁니다. 지금의 회장실을 대대적으로 개조해 저는 3평짜리 작은 사무실 하나만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직함은요?”

“뭐가 좋을까요?”

어차피 골프장 운영에는 개입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TPK K1 골프클럽’으로 개명될 그 코스는 필상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 연습할 공간으로 삼을 생각이다.

인천공항이 가깝고 여주 집과도 그리 멀지는 않아 주둔지로 삼기에 그보다 최적의 장소는 없다고 판단했다.

필상이 머뭇거리자 이 대표가 한 마디 보탰다.

“최고 경영자잖아요. CEO(Chief Executive Officer)죠. 다른 명칭이 뭐가 필요해요.”

“하하하. 아닙니다. 명함은 Mr. Perfect라고 써 주세요. CEO는 저와 너무 어울리지 않습니다.”

“네. 공 프로님. 제가 얼른 직원들과 상의해서 사무실부터 개조할게요.”

“역시 우리 고 대리! 하하하!”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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