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압도적 우위
그게 바로 스스로 빠진 함정이었다.
설렁설렁 치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하루에 평균 4타만 줄여도 우승은 무난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선수들의 성적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고공행진을 이어 갔다. 박일한 혼자라면 이틀간 신이 내렸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지 않은가!
예선을 두 자릿수로 통과한 선수가 무려 10명이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자신 있게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웠고.
“오빠!”
“어. 오늘 온다는 말 없더니?”
“조금 전에 왔어요. 어머니가 음식을 잔뜩 해 주셨어요. 어디서 먹을까요?”
“야외에서 먹으면 좋은데, 일단 호텔로 가자.”
모모코가 왔다.
모든 경기를 따라다닐 것 같았으나 그녀는 의외로 어제 오늘 관전하러 오지 않았다. 굳이 응원하지 않아도 잘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인 것 같지만 하필 애매한 상황에 찾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경기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언급하는 것이 괜한 부담이 될 거라 생각한 것인지, 굳건한 믿음 때문인지는 몰라도 시종일관 밝은 웃음을 보였다.
“같이 가요. 경태 형.”
“아니야. 우리가 뺏어 먹을 양은 아닌 것 같아.”
“부족하면 음식을 좀 더 시키면 되죠.”
“제수씨와 오붓한 자리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 얘네들 식사는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까 집 밥 든든하게 잘 먹어.”
실제 음식이 충분치는 않았다.
엄마는 필상과 타이거만 생각하셨지, 다른 선수들이 같이 움직이는 것은 감안하지 못하신 것 같았다.
다행히 김 프로가 성호와 일한을 데리고 먼저 떠나는 바람에 필상은 모모코, 타이거와 함께 식탁에 둘러앉았다.
“어제도 놀랐지만 오늘 난 확신이 들었어.”
“뭐가요?”
“한국 선수들 말이야. 물론 KJ나 YE 같은 좋은 선수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스윙이 아주 좋더라고.”
“그렇게 보셨습니까?”
“그동안 왜 결과를 내지 못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타이거는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여자 골프는 이미 세계 골프를 주도한다고 단언해도 무리가 없다. 그건 누구나 인정할 만한 사실이다.
그런데 동일한 방식으로 훈련한 남자 선수들의 성적은 괄목할 만하지 못하다는 것이 의문이었다. 서양인에 비해 체격이나 체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은 옛날 얘기다.
“한국의 자국 내 투어가 활성화되지 못한 것이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뿌리가 든든해야 자체 경쟁력이 생기고 그 경쟁을 이기고 올라간 선수들이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하는데 각 개인이 이방인으로 여러 투어를 떠돌다 보니 싹을 피우기도 전에 자꾸 쓴맛을 본 거죠.”
“하기야 KLPGA는 남자 투어와는 다르다고 하더군.”
“부끄러운 현실이지만 사실입니다. 개최되는 대회의 수나 상금 규모가 남자 투어를 추월한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코리안 투어 활성화에 신경을 많이 쓰는 건가?”
“어차피 저는 한국인이니까요. 아무리 여유가 많아도 전 외국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실제 한국의 기득권층은 이미 조국을 이탈하는 경향이 극심하다. 웬만한 재벌가의 후세들은 미국을 비롯한 외국 국적을 취득했고 필요한 경우에만 한국인임을 내세운다.
그들에게 조국이나 민족의 소중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 온 국민을 극심한 경쟁에 내몰고 먹고 사는 문제가 각박한 세상이 되도록 만든 당사자들은 정작 자신들의 편익만 추구하는 극단적 이기심을 보이고 있다.
축재한 부를 외국으로 빼돌리는 것은 물론 자신들이 타고 있는 배가 좌초할 것 같으면 언제든 뛰어내릴 만반의 대비를 갖춘 것이다.
그 와중에도 힘들고 어려운 생존의 삶터에 내몰린 이들에게 빨대를 꽂아 고혈을 빨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다.
건전한 양식을 갖춘 이들의 정의로운 외침이 날로 커지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자 애쓰는 노력이 빛을 발하지만, 추악한 원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들의 발악은 끊임없이 사실을 호도하고 분열을 조장하며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자네가 말했던 것들이 이젠 좀 이해가 돼.”
“아시아 시장의 중요성 말입니까?”
“PGA가 중심이 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엄청나게 몰려온 한국 골프팬들의 열정을 보고 깨달았지. 한국과 일본 투어가 충분한 시장성이 있다는 것을.”
“축구의 경우 유럽의 여러 리그들이 서로 경쟁하기 때문에 더 큰 시장을 형성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어차피 PGA와 EUR이 양대 축이지만 실제 경제적 여력을 갖춘 아시아 시장의 발전 가능성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아시안 투어가 있지만 사실 유명무실한 게 사실이고 보면 세계적인 핵심 투어로 성장하려면 한국과 일본으로 분산된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더군.”
필상도 생각해 본 바가 있다.
일본 투어가 아시아 최고의 무대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 골프계는 그걸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폐쇄적인 대회 유치와 배타적인 투어 운영은 스스로의 발목을 잡고 있다. 마치 외국 선수가 우승하는 것이 국부의 유출인 양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던가.
특히나 바로 옆 나라인 한국 선수들에 대한 견제는 뿌리 깊은 양국 간의 역사적 대립과 맞물려 경쟁이 아닌 전쟁처럼 묘사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 대목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투어에 진출하려는 선수가 많다는 것이다. 코리안 투어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아픔을 선수들이 짊어진 것이다.
“두 투어가 통합되는 그림은 불가능할 겁니다.”
“하하하. 양국 간의 미묘한 대립이 있다는 건 나도 알지. 그래서 더 아쉽다는 거야. 비행기만 타면 2시간 이내에 어디든 갈 수 있는 거리잖아.”
“한국이 겪은 근대사의 아픔을 짚어 보면 가장 나쁜 역할은 한 자들은 바로 미국 정치인들이었습니다.”
“어? 자네가 반미주의자라는 건 모르고 있던 사실인데?”
“반미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한일 두 나라와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제가 볼 때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 같아 그에 대한 의견을 개진해 보려고요.”
“우후! 난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타이거는 우매한 사람이 아니다.
지극히 현명한 지성을 갖췄고 사회 전반에 대한 인식도 상당히 높아 근현대사에 대해서도 무지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한일 두 나라와 얽힌 역사적 시각은 평범한 미국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한 필상은 그것에 대한 이해를 도울 필요를 느꼈다.
“미국과 전쟁을 치른 나라는 많지만 미국 영토를 직접 공격한 나라가 오로지 하나뿐인데, 아십니까?”
“아! 일본이지. 진주만을 먼저 폭격했으니까.”
“미국이 원폭 투하를 통해 항복을 받아 낸 것은 속박되었던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큰 희망이었습니다.”
“2차 대전 종료와 함께 한국이 해방되었다고 알고 있어.”
“하지만 패전국이 아닌 우리나라가 분단의 역사를 겪은 것이 미국과 소련의 패권주의 정책 때문인 것은 아십니까?”
“당시 극한 이데올로기 대립에 따른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었던가?”
바로 거기서부터 인식의 차이가 벌어졌다.
필상은 최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접근을 통해 한민족이 겪었던 분단의 역사가 어떻게 출발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한민족은 끊임없이 독립을 위한 투쟁과 노력을 경주해 왔다. 대국이라던 중국도 감히 하지 못했던 치열한 독립운동의 역사는 고금을 통틀어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단했다.
일본의 패망이 아니었어도 한민족은 스스로 얻어낼 수 있었다고 필상은 감히 자부했다. 하지만 역사는 일본을 무너뜨린 미국의 선물인 양 기술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함께 주권을 찾은 중국과는 달리 한반도는 왜 민족의 자주권을 무시한 채 미국과 소련이 자의대로 38선을 나눠 신탁통치를 결의한단 말인가?
당연히 한반도에는 하나의 독립 정부가 수립되었어야 한다. 미국과 소련의 당치 않을 신탁통치는 야욕의 산물일 뿐이다.
“당시 우리 민족은 남북으로 분열된 2개의 정부가 아닌 하나의 단독 정부를 원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요?”
“한 나라였으니까 그렇게 되도록 도왔어야지. 하지만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힘의 균형을 감안하면 미국의 도움 때문에 공산화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닌가?”
“민족자존과 생존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재는 것부터가 오류입니다. 왜 자주적인 결정권을 무시한 겁니까!”
미국은 한반도에 하나의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했다. 한민족이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능력이 없다고 봤고 반쪽으로 쪼개진 남한을 관리하기 편한 정권을 내세워 패권의 마지노선으로 삼았다.
곧 벌어질 민족상잔의 비극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이 진정으로 바란 희망을 분쇄했다. 그것도 일제에 부역한 앞잡이들을 내세워.
“반민족주의자들이 기득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도운 건 바로 미국의 비양심적인 정치인들이었습니다.”
“너무 일방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건 아닌가?”
“물론 스스로 민족의 미래를 짊어지지 못한 분열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편의와 안이한 인식이 얼마나 깊은 비극을 초래했는지 안다면 그런 말은 쉽게 하지 못할 겁니다.”
필상은 당시에 바로잡지 못한 역사의 오점이 어떤 파국을 만들어 냈는지 무수히 많은 사례들을 짚어 줬다. 반공을 내세워 독립 운동가들을 몰아내고 핍박했으며 4.3이나 여순 항쟁과 같은 진실을 언급할 때는 타이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니, 믿지 못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일본의 반성하지 않는 뻔뻔한 역사 인식, 그것은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몰아낸 미국의 개척 정신을 합리화하는 것과 맥이 닿아 있죠.”
“하하하. 상당히 아픈 언급이로군!”
타이거는 인종차별을 온몸으로 이겨 낸 장본인이다. 하지만 뿌리 깊은 차별이 온전히 사라졌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정복과 약탈의 역사는 승자의 논리로 왜곡되어 있다. 올바르다고 믿는 역사는 사실 기득권을 얻은 자들의 자기 합리화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진정으로 사죄하지 않는 일본, 그들의 오만함을 지탱해 주는 세력은 그들보다 더 악한 절대의 힘을 휘두르는 자들이 맞다.
“진정한 화해는 균등한 힘이 유지되거나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자들만이 취할 수 있는 권리인 셈이죠.”
“아프지만 정확한 지적이로군. 하지만 일본을 압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은데?”
“인정합니다. 하지만 스포츠는 정치가 아니라는 것에 희망을 둘 수 있다고 봅니다. 또한 상식을 지닌 대다수의 시민들은 무엇이 옳은지 모르지 않거든요.”
“터무니없는 선동과 계략이 난무하지 않아야겠지. 하하하.”
“서로를 인정하는 동등한 협력,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일단 내 몸집부터 불려야겠지요.”
“그건 가능할 것도 같군. 슈퍼스타의 존재감은 때때로 불가능한 협력과 타협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봐. 나도 자네의 숭고한 뜻에 적극 동조하겠네. 하하하.”
굳이 숭고하다는 표현까지 쓸 이유는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타이거가 실제 걸어온 인생은 약자의 입장을 이해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아마도 차별을 경험해 보지 못한 미켈슨이라면 쉽게 동조하기 힘들 것이나 그는 필상의 극적 반전을 적극 응원했다.
사실 거창하게 뭔가 이루겠다는 뜻은 없었다. 그저 한 발 한 발 앞으로 딛다 보니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의미를 자꾸 부여하게 되었을 뿐이다.
할 수 없다면 모를까, 뚜렷한 명분이 있다면 내딛는 발걸음에 더욱 힘을 가할 수 있고 보람차지 않겠는가!
그날 저녁은 뜻하지 않았던 대화로 인해 길게 이어졌고 필상은 연습장이 아닌 숙소로 일찍 복귀했다.
“오늘 나랑 자고 가.”
“정말 집에 가지 말고 오빠랑 같이 자고 가요?”
“응. 당신 냄새가 그리워.”
“치! 내가 아니라 내 냄새가 그립다고요?”
“응. 지금도 당신을 껴안고 싶어 미치겠어.”
그 말과 함께 숨결이 거칠어진 두 남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차피 배가 부른 아내와 뜨거운 사랑을 나눌 수는 없지만 격렬한 행위를 원한 것이 아니다.
그녀의 따스한 품이 그리웠던 필상은 방에 들어서는 순간, 모모코를 번쩍 안아 들고 천천히 입술부터 탐닉하기 시작했다.
길고 긴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사랑하는 아내와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었지만 요즘 부쩍 잠이 많아진 모모코는 이내 필상의 품에서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잠이 들었다.
아쉽고 어이없었지만 곤히 잠든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필상은 그녀의 고운 뺨에 입을 맞추고는 테라스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모처럼 깊은 명상에 자신을 온전히 맡겼다. 이젠 한 숨의 자연지기도 유용하게 활용할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 * *
-이렇게 KPGA의 열기가 뜨거웠던 적이 또 있었나요?
-매경오픈 유료 관중 입장 신기록이 3일차인 오늘 이미 깨졌습니다. 벌써 2만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우와! 이러다 발을 디딜 틈도 없어 찾는 갤러리들을 돌려보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건 아니겠죠?
-내일은 예약한 분만 입장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현장에 오신 분들은 미리 구매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와! 이런 말이 다 오네요. 하하하.
조용히 캐스터와 허 위원의 말을 경청만 하던 최 프로도 대회 흥행에 대해서는 한 마디 보탰다. 그는 주로 출전한 선수들의 높은 경기력에 주안점을 둔 언급을 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