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55화 (155/354)

155. 이를 악물고

-확실히 타이거와 공 프로는 친분이 두터운 것 같습니다.

-경기 내내 항상 웃으며 서로 얘기를 나누더군요.

-지금도 굳이 공 프로가 서두를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타이거를 배려하는 모습, 아주 보기 좋습니다.

-손님을 모셔 왔으니 대접을 하는 거죠, 동방예의지국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중계방송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어떨지 모르지만 TPK, 사업을 함께할 만큼 서로에 대한 신뢰가 두텁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아! 그도 그렇군요. 곧 한국에도 TPK의 간판을 단 골프클럽이 개장한다던데, 대체 어디에 생길지 저도 궁금합니다.

중계진이 TPK 광고를 해 주는 동안 필상은 에이프런에서 롱 퍼팅을 시도했다. 넣기보다는 붙이려는 의도였다.

러프에서의 퍼팅이 대체적으로 약한 경우가 많아 조금 지나쳐도 좋다는 느낌이었는데, 뒷벽을 때린 공이 쑥 들어갔다.

동시에 엄청난 환호성이 진동했음은 물론이다. 타이거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려던 것이 오히려 부담을 가중시킨 셈이다.

타이거는 엄지를 들어 보이며 축하했지만 그의 칩샷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보다 과감하게 공략하면 좋았을 샷이다.

하지만 심리적인 위축감이 작용한 듯, 피니시를 하지 못하고 쿡 찍어 버린 타구는 그린 엣지에 멈추고 말았다.

-으음……. 긴장한 걸까요?

-아닙니다. 러프에서의 샷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보통 PGA 러프는 우리보다 더 까다로운 규정에 따라 조성되지만 그린 주변은 정돈이 잘된 편입니다. 생소한 러프 잔디가 다소 질긴데 적응이 덜된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더 과감하게 공략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본인도 잘 알 텐데 묘한 압박감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천하의 타이거 우즈가 말입니까?

-하하하.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제가 볼 때 오늘 그의 샷이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공 프로도 그렇고 특히 김 프로의 정확한 공략과 보기 드문 집중력에 당황한 게 아닌지, 그럴 만도 합니다.

최경주의 지적은 정확했다.

타이거의 실전 심리가 그렇게 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을 짚어 낸 것이다. 결국 그는 3번 홀에서 1타를 잃었고 김경태는 어김없이 버디에 성공하며 -3로 저만큼 앞서 나갔다.

초반 분위기가 확 쏠리는 것 같았으나 이어진 홀에서 더 이상 타수 차를 벌리지 못하자 드디어 타이거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380m 파 4, 8번 홀이 전환점이었다.

김경태는 안전하게 264m를 공략했고 필상은 316m을 날렸지만 살짝 밀린 타구는 우측 러프로 들어갔다. 타이거도 티샷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285m을 보냈지만 그 역시 타구가 러프에 들어갔다. 하지만 98m가 남은 세컨샷에 샌드웨지를 잡은 그의 타구는 홀컵을 훌쩍 지나쳤지만 환상적인 백스핀으로 샷 이글을 만들어 냈다.

-우우! 기가 막히네요.

-러프에서의 샷은 클럽페이스와 공 사이에 풀이 끼기 때문에 저런 스핀을 먹이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본인이 누군지를 확실하게 각인시킨 시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 현역 최다승 선수이며 골프를 통해 역대 가장 많은 돈을 거머쥔 살아 있는 전설이죠!

-실제 그와 함께 경기를 해 보면 TV로 보는 것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타구가 날아가는 속도, 소리, 느낌이 모두 살벌합니다. 뭔가 특별해 보이고 같은 샷을 해도 더 위압적이죠.

-황제 프리미엄인가요? 하지만 우리 공 프로도 최근 많은 동료들로부터 그런 호평을 받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드라이브 티샷을 30, 40야드 이상 더 보내는데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하겠습니까! 저부터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갈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렇기 때문에 김경태가 더 대단한 것이다.

타이거는 데뷔 때부터 장타자로 분류가 되었고 필요할 때는 입이 쩍 벌어질 장타를 날리기도 한다. 하지만 평균 비거리 300야드에도 미치지 못하는 김 프로는 마치 아마추어가 프로와 경기를 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장타 괴물 사이에서 오히려 선두를 달리고 있으니 그가 얼마나 정교한 선수인지 짐작케 했다.

타이거의 샷 이글에 흥분을 가라앉힌 필상도 좋은 샷을 하기는 했다. 스핀이 걸린 공이 쭉 빨려 왔지만 애초에 짧았던 타구였기에 오히려 홀컵에서 멀어지며 아쉬움을 남겼다.

-용호상박이로군요!

-이 코스에서 처음 경기를 하는데도 첫날부터 언더파를 몰아치는 두 선수도 대단하지만, 저는 김경태 프로야말로 정말 대단한 선수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제 의견도 그렇습니다. 사실 타이거도 그렇지만 김 프로도 최근 결정적인 한 방이 아쉬워 전성기가 지난 선수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안방마님의 역할을 톡톡히 해 주고 있네요. 정말 든든하고 멋진 모습입니다.

-두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김 프로를 응원하게 되네요. 절대 약한 선수가 아닌데, 오늘은 그의 선전이 더 돋보입니다. 하하하.

엎치락뒤치락, 이 매치 업을 성사시킨 주최 측으로서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멋진 경기력을 선보이며 세 선수는 나란히 리더 보드 윗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6 김경태, 박상현, 맹동섭.

-5 송영한, 공필상, 황중곤, 박일한.

-4 타이거 우즈, 임성재 외 6명.

하지만 라운드를 마친 뒤 확인한 리더 보드는 굵고 진했다. 절대 쉬운 코스가 아니었음에도 김경태처럼 불꽃 샷을 날린 선수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나 더블보기와 보기 1개를 기록하고도 필상과 함께 공동 4위에 자리 잡은 박일한은 성호가 잘 아는 친구였다.

“안녕하십니까?”

“제 친구입니다. 박일한이라고.”

“아! 오늘 버디를 8개나 잡았다는 그 친구로군.”

“네. 오랜만에 성호도 볼 겸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투어에서는 한참 선배인데 내가 말을 놔도 되나 몰라?”

“아이 왜 그러십니까! 전 흑돈 친구라니까요.”

박일한은 성격이 매우 좋은 친구였다. 훤칠한 키에 날렵한 몸매, 잘 다져진 근육을 보면 아직 우승이 없는 게 이상했다.

넉살이 좋아 필상과 안면을 트자 옆에서 연습하던 타이거와도 인사를 나누는데 제법 영어로 대화도 가능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골프백을 풀고 가까운 타석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덕분에 저녁도 같이 먹었다.

“말은 들었지만 한국 선수들 스윙이 아주 좋더군.”

“연습은 안 하고 구경만 했습니까?”

“거의 스윙 머신들 같더라고.”

“독하게 합숙하면서 배우니까요.”

타이거에게 한국 엘리트 교육에 대해 잠시 설명했다.

대부분 종목에서 거의 스파르타식 훈련이 어려서부터 이뤄진다는 것에 그는 상당한 관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필상은 그런 교육에 대한 폐단도 더불어 설명했다. 다른 운동은 몰라도 골프는 창조성이 요구되는 운동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강압적 교육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지만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골프를 해야만 한다.

“우리 훈련 프로그램 말이야.”

“아! 네.”

“한국식 프로그램을 잘 활용하면 좋지 않을까? 물론 부정적인 건 싹 빼고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시스템을 추가하면 좋을 것 같은데.”

“나쁘지 않죠. 사실 이번에 태국에 가서…….”

필상은 가급적 사업 이야기는 대회를 마친 뒤로 미뤘다. 자꾸 불필요한 생각을 낳을 것 같아 일부러 자제했는데 실은 타이거도 나름 자신의 역할에 대한 고심이 많았던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콘깬과 카오야이 상황에 대해 설명했고 대회가 끝나는 대로 함께 태국을 방문해 같이 보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야간 훈련 중에는 성호와 모처럼 다른 이야기도 나눴다.

“일한이처럼 너도 투어를 뛰고 싶지 않냐?”

“저 자식 어릴 때는 나보다 한참 하수였다니까요. 맨날 방청소 내기하면 내가 이겼는데!”

“그러니까 너도 이제 슬슬 준비를 시작해. 당분간 돈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

“왜 이러십니까. 서운하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잘 생각해 봐. 운동은 다 때가 있는 법이잖아. 프로 캐디가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야. 하지만 네 재능을 그냥 묵히는 게 너무 아까워서 그러지.”

“정말 제가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당연하지. 일한이도 하는데 네가 못할 이유가 있냐?”

“생각해 볼 게요.”

처음 성호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나왔다.

그 말은 곧 준비를 하겠다는 말이다. 필상으로서는 좋은 파트너를 잃는 셈이지만 이미 말한 것처럼 성호가 때를 놓치는 것이 너무 아까웠다.

어려서부터 오직 한 길, 골프로 성공하는 것만 생각하며 성인이 되었다. 필상을 처음 만났을 때도 2부 투어 자격을 얻기 위해서 도전할 때였다.

자격을 취득했지만 필상과 얽히는 바람에 중도에 방향을 수정한 것이다. 비록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만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필상으로서는 그가 포기한 것에 대해 한번쯤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만약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등을 떠밀 이유가 없다.

“파이팅 하십시오!”

“자네도.”

“정상에서 만나는 겁니다. 경태 형도요?”

“알았어. 너나 잘해.”

첫 라운드 한 조에서 플레이한 것이 인연이 되어 김 프로도 연습 스케줄을 함께 소화했다. 뒤늦게 합류한 박일한도 김 프로와 동향이라서 우르르 함께 몰려다녔다.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를 받는 것이 마냥 즐거워 보였으나 연습할 때는 일한이 가장 독한 모습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젊고 누구보다 좋은 성적이 간절한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이거와 김 프로가 먼저 시합하러 떠난 뒤, 필상은 일한의 샷을 유심히 관찰했다.

“스윙은 흠 잡을 데가 없네.”

“고맙습니다.”

“근데 퍼팅이 아주 엉망이라던데, 가자.”

“제 퍼팅 봐주시려고요?”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좀 보려고.”

일한에 대한 자료를 확인하던 필상은 너무 극단적으로 퍼팅 수가 많다는 것을 확인했다.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면 이렇게 능력이 편중될 수가 없다.

그래서 직접 연습 그린에 가서 일한의 퍼팅 스트로크를 점검했다. 그런데 별다른 문제점이 보이지 않았다.

“뭐지?”

“왜요? 뭐가 이상합니까?”

“아니. 전혀 아무런 이상이 없어. 그런데 어떻게 지표가 그렇게 나올 수가 있지?”

“제가 그린에만 올라가면 울렁증이 있나 봐요. 연습할 때는 이상이 없는데 실전 퍼팅만 하면 자꾸 흔들리더라고요.”

그동안 그를 가르친 많은 코치들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밝혔듯 심리적인 문제라고밖에는 볼 수 없었다.

92년생이면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기에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더 집중하라는 말밖에 할 수 없어 답답했지만 필상은 나름의 묘책을 제안했다.

“이를 악물고 퍼팅을 해.”

“이를 꽉 악물라고요?”

“응. 라인을 확정하면 이를 악물고 그냥 과감하게 굴리라고. 어차피 더 망가질 것도 없잖아.”

“네. 오늘은 이를 악물고 한 번 해 볼 게요.”

상징적인 의미였다.

퍼팅은 스스로 불안해지는 순간, 좋은 스트로크가 나올 수 없다. 성공한다는 확신이 가장 중요한데 그런 심리적 안정감을 부여할 근거가 필요했다.

미신 같은 자신만의 징크스라도 그게 마음의 안정을 보장한다면 무엇이든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모티브를 준 것이다.

“나 먼저 간다.”

“네. 파이팅 하십시오.”

“그래. 너도 좋은 성적 내.”

필상은 낯선 호주 선수 1명과 인사할 때도 뭔가 불만이 가득 찬 것 같은 한국 선수 1명과 함께 2라운드를 시작했다.

어제 결정적인 나이스 샷이 적었기 때문에 오늘은 거리보다는 정확성에 초점을 맞춘 공략에 중점을 뒀다.

결과는 크게 나쁘지 않아 -4를 기록했지만 어제보다는 스윙 감각이 좋았다. 다만 퍼팅 수가 좀 많았는데 일한의 특이한 기록을 본 것이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

“원 퍼팅이 딱 3개밖에 없었어요.”

“쓰리퍼팅이 없었던 게 다행인 건가? 그래도 파 5홀 4개 중에서 2온을 3번이나 성공한 게 다행이네.”

“그러니까요. 오늘 형은 완전히 일한이 퍼팅을 하는 것 같더라고요.”

“일한이 퍼팅?”

“자신감 없이 그냥 멍한 상태로 미는 것 같았다고요.”

“이를 악물었어야 하는 건 나였나?”

유난히 집중력이 떨어졌던 건 사실이다.

오후 티오프인데 너무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하루가 유난히 길다고 느껴졌다. 잡다한 생각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고.

그런 것에 비하면 -4를 기록한 것도 다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샤워를 하며 자신이 이번 대회에 임하는 자세가 너무 느슨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

“어? 이제 끝나고 들어오는 거야?”

“네. 제가 오늘 어땠는지 아십니까?”

“잘 쳤나 보네.”

일한이다. 샤워를 마치고 나서는데 라커룸까지 달려온 그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굉장히 좋은 성적을 기록했음을.

아마 필상의 조언을 이행한 결과 오늘 퍼팅이 꽤 잘된 것 같은데, 필상에게 가장 먼저 알리고 싶었던 것 같았다.

“제가요. 오늘 대회 18홀 베스트 스코어를 갱신했습니다. -10을 쳤거든요. 하하하. 이게 다 형님 덕분입니다.”

“우와! 정말 대단했나 보네.”

일단 진심으로 축하해 줬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안한 예감은 왜 그리도 정확히 들어맞는지 2라운드를 마친 선두권의 성적을 확인한 필상은 전율이 돋았다.

-15 박일한

-12 김경태, 박상현

-11 타이거 우즈, 맹동섭, 황중곤

-10 임성재, 송영한, 이상희, 마사시 니시무라

-9 공필상 외 5명

“공동 11위네요. 예선 성적이 톱 10에 들지 못한 건 처음인 것 같아요.”

“그러네. 최근 5년 동안 두 자릿수 언더가 없지 않았나?”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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